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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취향(19금 개정판)
1화
1. 우연은 운명을 만든다
어두운 방 안. 군데군데 아롱거리며 흔들리는 불빛으로 빛과 그림자를 같이 만들어 내는 향초가 어둠을 밝히고, 달콤한 과일 향까지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넓은 검붉은색 책상 위의 큼지막한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으로 밝음이 더해졌고, 그 앞에는 굵은 웨이브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숨도 쉬지 않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맺어지는 연인의 아름다운 베드신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과 떨림으로 서로를 탐하는 모습에 여자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 아!
볼륨을 최대한 줄인 스피커에서 격정적인 신음 소리가 나오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아무도 없는 방 안을 살폈다. 큼지막한 뿔테 안경을 쓴 여자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서 돌려 봤다. 그녀의 손에는 연필이 들려 있었고 그 밑에는 노트가 깔려 있었지만 써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는 모니터 속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그제야 노트와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엇인가 열심히 적는 듯했지만 이내 마음에 안 드는지 크게 엑스 표를 하고서는 화면을 다시 재생시켰다.
― 오! 에린!
남자의 타는 듯한 애절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목 전체가 울렁거릴 정도로 침을 삼켰다.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 그녀는 얼마나 집중했던지 눈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저런 감정선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거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뽀로통해진 그녀는 연필을 툭 공책 위로 던져 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한쪽으로 치며 어두움에 가려진 산을 쳐다봤다. 새벽에 보는 풍경은 절경에 가까웠지만 어둠 속에 가려진 풍경은 그저 어둠뿐이었다.
“에효…….”
길게 한숨을 내쉬던 여자는 다시 책상 의자에 앉아 정지되어 있는 화면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여자의 몸과 하나가 된 듯 남자의 몸이 위로 겹쳐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 사랑해서 관계를 가지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를 보던 그녀는 예전에 만났었던 몇 안 되는 남자들의 표정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자신을 바라볼 때 저런 애틋한 표정을 지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땐 너무 어렸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니 하품이 늘어지게 터져 나왔다.
그녀 나이 이제 서른 살. 아직 많이 먹었다고는 하기 애매한 나이였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봤던 때로부터 4년이나 지나 버렸고, 마지막 소개팅이자 연애 감정이라는 것을 잠깐이라도 느꼈던 것은 3년 전이었다.
3년 전 소개팅 남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4년 동안 솔로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남녀 간의 감정에 대해 무뎌져 갔다.
그녀의 이름 한지수, 이런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로맨스 작가였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취미 삼아 솔로들의 로망을 쓴 그녀의 작품이 운 좋게 출판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요 근래 심각하게 고민되는 것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베드신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기 힘들었다. 현실감도 현실감이지만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연애하고 싶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외로웠다.
솔로 2년 차까지는 소개팅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다들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되는 소개팅의 실패로 ‘사랑은 운명인 거야’를 외치게 된 그녀는 나머지 2년을 운명론자로 살아 왔다. 인연이 되려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도 애인이 생길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늘도 포기한 듯 영화를 꺼 버린 지수는 무심하게 턱을 괴며 인터넷 서점의 홈페이지를 띄웠다.
광고 배너에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그녀의 꽃’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과 아름다운 베드신으로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며 연신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래? 라는 막연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읽어 볼까……?
오늘따라 눈에 찍어 내듯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수는 뭐에 홀린 듯 순식간에 결제까지 마치고 나서 두 팔을 번쩍 들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이모, 택배 왔습니다요.”
지수와 같이 살고 있는 6살 난 조카 하나가 상자를 들고 방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지수는 글 쓰느라 또 밤을 샜는지 시커먼 커튼으로 햇빛을 막고 실크 잠옷을 벗지도 않은 채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하나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지수의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놓은 뒤 조용히 뒤꿈치를 들고 걸어 나왔다. 살며시 닫는다고 조심하는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난 문소리에 지수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어두운 방 안에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책상 위 택배 상자 위로 빛이 쏟아져 내리자 지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머물렀다. 한참을 멍하게 쳐다보던 지수는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지수는 밝은 빛에 지레 겁먹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커튼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눈을 슬며시 가렸다. 밝음에 점차 적응한 지수는 가렸던 손을 내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 초록이 우거진 산을 쳐다봤다.
벌써 여름인가.
시간 참 빨랐다. 바쁘게 글을 쓰다 보니 계절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도 잘 느끼지 못했던 그녀는 한숨을 폭 하니 내쉬었다. 이렇게 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은 지수는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몸을 돌린 지수는 습관처럼 장식장 앞에 섰다.
“아구구구― 내 새끼들 잘 잤어용?”
장식장 안에는 수많은 자동차 모형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흡사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중 칸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자동차 모형 앞에 시선이 머무른 지수는 눈에 하트를 그리며 미소를 크게 그려 넣었다.
“알팔아, 이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널 꼭 데려올게.”
자신의 드림카 모형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지수는 장식장 앞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다 아쉬운 듯 몸을 돌렸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녀는 차 모형을 쳐다봤을 때와는 다른 무심한 시선으로 상자를 쳐다봤다.
어디 읽어 볼까?
겉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지수는 조심스럽게 칼로 봉해진 테이프를 갈라내고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드디어 질투 아닌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책이 손에 들어오자 기분이 묘했다.
‘그녀의 꽃’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꽃잎이 흐드러지듯이 날리는 책 표지 디자인이 정갈하게 예뻤다. 그것이 지수에게는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19금 책 표지는 어딘가 모르게 자극적이었기에 이 책은 빨간 딱지를 붙이고 있음에도 순결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피곤한 몸을 움직여 의자에 앉은 지수는 그 책장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응? 꽃향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에 놀란 지수는 살며시 숨을 들이쉬어 향기를 맡았다. 여자의 기분을 설레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책 읽기 전 좋은 향기가 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내가」
그다음 장으로 넘겼다.
「너를」
그리고 또 다음 장.
「갖는 방법」
「그녀의 흐트러진 숨결이 가슴속을 파고들어 내 속에 감춰 두었던 욕망에 젖은 나를 일깨웠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차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내 본성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촉촉해진 그녀의 눈빛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내 눈빛에 흔들렸고, 두려움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런 그녀가 왜 더 아찔하게 보이는 것일까.」
우와, 내가 더 아찔하다.
이 책을 왜 이제야 읽은 것일까, 묘한 여운이 남아도는 것이 막 꿈에서 깬 느낌이었다. 책에 찍힌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두 주인공의 감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도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베드신 장면에서는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과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장면이 마음속 깊이 남아 맴돌았다.
이거 보니 더 연애하고 싶다.
지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했다. 이렇게 좋을 나이에 연애 한 번 못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러고 있다니.
“아이고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뻐근해진 허리를 쭉 펴며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갈증을 느낀 지수는 여전히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으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먹을 것 좀 있냐?”
“아! 깜짝이야.”
설거지를 하던 동생 지아는 놀란 눈으로 지수를 쳐다봤다.
“놀라기는. 우리 하나 어디 갔어?”
“유치원 갔지. 오늘 늦게 일어나서 늦게 갔어.”
“아항.”
식탁에 다리 한쪽을 올리고 앉아 밀폐된 그릇에 담겨 있는 과자를 꺼내 입에 베어 물었다.
“밥 먹어. 과자 나부랭이 먹지 말고.”
“그럼 주든가.”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지수를 쏘아보던 지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려.”
“박 서방은?”
“출장 갔어. 일주일.”
“요새 하는 일은 잘 되냐?”
“응. 잘 되나 봐. 내년에는 분가하자고 하더라. 언니한테 미안하대.”
설거지를 끝내고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으며 지아는 지수를 쳐다봤다.
“미안하긴. 어려울 때 다 돕고 사는 거지. 나도 하나 있으니까 웃으면서 스트레스 풀고 살지. 니들만 들어온다 했으면 다 쫓아냈어. 이 우울한 것들아.”
실없는 듯 꺼내는 농담에 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하나 나한테 줘라. 내가 키울란다.”
“웃겨. 남자나 만들어. 내년에 언니 서른하나야. 더 늙기 전에 서두르지?”
지아의 말에 지수는 과자를 입에 넣다 말고 그녀를 쏘아봤다. 누구는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엄마 금식 기도 들어간 거 몰라? 언니 올해 안에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더 부담스러운 것은 나이 서른이 되면서부터 엄마 영희의 압박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이렇게 부담 주냐?”
“우리가 언제?”
식탁 앞에 수저와 반찬들을 내놓으며 웃음을 띤 채 말하는 지아가 왜 이렇게 얄밉게 보이는 것인지 그녀를 쳐다보는 지수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난 그냥 이대로 살아도 족해.”
반어법이었다. 외롭고 연애하고 싶지만 가족들이 부담 주는 것에 대한 괜한 허세랄까.
“언니의 로맨스를 상상한 걸 글로 풀면서 사는 게 좋냐? 진짜를 만나서 연애를 해야 글도 잘 풀리지. 언니 요새 밤마다 뭐 해?”
“궁금해하지 마. 언니 아주 죽겠다. 요새.”
숟가락을 들며 미역국을 떠 입에 넣은 지수는 아주 맛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가 차려 준 밥과 반찬을 먹기 시작했다.
“밤마다 야동 보지?”
순간 지수는 입에서 밥알이 쏟아져 나올 뻔했다. 급하게 입을 막고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마시고는 지수는 정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아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지수를 한번 쳐다보고 웃더니 식탁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의 전원을 켰다.
“아, 진짜 웃겨. 언니 안 되겠다. 빨리 남자를 만나야지.”
“그런 거 아니거든.”
꾸역꾸역 밥을 먹는 지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지아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언니가 남자가 없기로서니 야동을 보다니, 야동 보고 도대체 혼자 뭘 하는 것일까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너 자꾸 나를 그런 눈으로 볼래?”
“내가 뭘?”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도록 식탁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는 손을 내밀었다. 지아는 머그잔에 가득 커피를 따라 지수에게 건넸다. 머그잔을 받아 든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을 빠져나갔다.
우―웅.
침대 위에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리자 한창 원고를 쓰고 있던 지수는 흐름이 끊겼는지 미간을 좁히며 애써 무시했다. 잠시 후 진동 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시 집중하려고 했으나 이내 다시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코를 찡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 작가님, 안녕하세요. 정 실장이에요.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있는 출판사의 담당자였다.
“네, 안녕하세요?”
― 작가님, 죄송한데요. 지금 잠깐만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나오기 힘드시면 제가 댁으로 찾아뵐게요.
“무슨 일이신데요?”
― 저번에 말씀드렸던 판권 계약 때문에요. 작가님 작품 중에 ‘너에게 나를’이라는 작품 있잖아요. 그 작품의 판권을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간만에 좋은 소식에 지수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렸다. 평소 급하게 약속 잡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그런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급하게 보는 것도 기분 전환 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나가지요.”
― 아!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우리 만날 만나는 곳이요. 두 시간 후에 봐요.”
지수는 자신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몸을 빠르게 씻었다. 조금이라도 화장을 하고 가려면 서두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서둘러 씻고 나온 지수는 큰 화장대 앞에 앉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한숨을 폭 하고 내쉬고는 익숙한 손길로 화장을 시작했다. 과하거나 진하지도 않고 너무 연하지도 않은 화장을 한 지수는 머리 손질까지 끝낸 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fresh 향수로 마무리했다. 편한 흰색 티셔츠에 발목까지 오는 스키니진을 입고 오버사이즈의 선글라스까지 쓴 채 방에서 나왔다.
“이모, 어디 갑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지아와 뒹굴거리며 놀고 있던 하나가 나가려는 지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하나야, 이모 돈 벌어 올게. 올 때 우리 하나 맛있는 거 사다 줄까?”
“네! 하나 초콜릿이 먹고 싶습니다요.”
“알았어.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꺄, 신나서 소리 지른 하나는 다시 거실로 뛰어갔다. 흐뭇한 엄마 미소로 바라보던 지수는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지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제야 사람 같네.”
“나갔다 올게.”
걱정스런 말투로 말하는 지아를 뒤로한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키가 167cm인 그녀는 하이힐보다는 단화를 선호했다. 오늘도 스니커즈를 꺼내 신고 신발장에 붙은 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고는 꽤 만족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주차장으로 내려간 지수는 자신의 애마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다. 얼마 전에 마련한 SUV 차량이었다. 비록 중고차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사랑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남자의 몸매를 감상하듯 한 바퀴 둘러본 지수는 운전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올라타 부드럽게 시동을 걸었다. 휘발유가 아닌 디젤 차량이어서 그런지 시동 소리가 거칠게 들리자 눈살을 찌푸리던 지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돈을 모아서 드림카를 어서 사…… 아이고, 아니야. 내 말 못 들은 걸로 해.”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자신의 차에게 혼잣말을 하던 지수는 차를 부드럽게 몰아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1화
1. 우연은 운명을 만든다
어두운 방 안. 군데군데 아롱거리며 흔들리는 불빛으로 빛과 그림자를 같이 만들어 내는 향초가 어둠을 밝히고, 달콤한 과일 향까지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넓은 검붉은색 책상 위의 큼지막한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으로 밝음이 더해졌고, 그 앞에는 굵은 웨이브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숨도 쉬지 않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는 오랜 기다림 끝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맺어지는 연인의 아름다운 베드신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과 떨림으로 서로를 탐하는 모습에 여자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 아!
볼륨을 최대한 줄인 스피커에서 격정적인 신음 소리가 나오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아무도 없는 방 안을 살폈다. 큼지막한 뿔테 안경을 쓴 여자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서 돌려 봤다. 그녀의 손에는 연필이 들려 있었고 그 밑에는 노트가 깔려 있었지만 써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자는 모니터 속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그제야 노트와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엇인가 열심히 적는 듯했지만 이내 마음에 안 드는지 크게 엑스 표를 하고서는 화면을 다시 재생시켰다.
― 오! 에린!
남자의 타는 듯한 애절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목 전체가 울렁거릴 정도로 침을 삼켰다.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 그녀는 얼마나 집중했던지 눈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저런 감정선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거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뽀로통해진 그녀는 연필을 툭 공책 위로 던져 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한쪽으로 치며 어두움에 가려진 산을 쳐다봤다. 새벽에 보는 풍경은 절경에 가까웠지만 어둠 속에 가려진 풍경은 그저 어둠뿐이었다.
“에효…….”
길게 한숨을 내쉬던 여자는 다시 책상 의자에 앉아 정지되어 있는 화면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여자의 몸과 하나가 된 듯 남자의 몸이 위로 겹쳐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 사랑해서 관계를 가지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를 보던 그녀는 예전에 만났었던 몇 안 되는 남자들의 표정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자신을 바라볼 때 저런 애틋한 표정을 지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땐 너무 어렸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니 하품이 늘어지게 터져 나왔다.
그녀 나이 이제 서른 살. 아직 많이 먹었다고는 하기 애매한 나이였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봤던 때로부터 4년이나 지나 버렸고, 마지막 소개팅이자 연애 감정이라는 것을 잠깐이라도 느꼈던 것은 3년 전이었다.
3년 전 소개팅 남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4년 동안 솔로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남녀 간의 감정에 대해 무뎌져 갔다.
그녀의 이름 한지수, 이런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로맨스 작가였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취미 삼아 솔로들의 로망을 쓴 그녀의 작품이 운 좋게 출판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요 근래 심각하게 고민되는 것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베드신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기 힘들었다. 현실감도 현실감이지만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연애하고 싶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외로웠다.
솔로 2년 차까지는 소개팅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다들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되는 소개팅의 실패로 ‘사랑은 운명인 거야’를 외치게 된 그녀는 나머지 2년을 운명론자로 살아 왔다. 인연이 되려면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도 애인이 생길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늘도 포기한 듯 영화를 꺼 버린 지수는 무심하게 턱을 괴며 인터넷 서점의 홈페이지를 띄웠다.
광고 배너에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그녀의 꽃’이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과 아름다운 베드신으로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며 연신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래? 라는 막연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읽어 볼까……?
오늘따라 눈에 찍어 내듯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수는 뭐에 홀린 듯 순식간에 결제까지 마치고 나서 두 팔을 번쩍 들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이모, 택배 왔습니다요.”
지수와 같이 살고 있는 6살 난 조카 하나가 상자를 들고 방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지수는 글 쓰느라 또 밤을 샜는지 시커먼 커튼으로 햇빛을 막고 실크 잠옷을 벗지도 않은 채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하나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지수의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놓은 뒤 조용히 뒤꿈치를 들고 걸어 나왔다. 살며시 닫는다고 조심하는 모양새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난 문소리에 지수가 놀란 듯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어두운 방 안에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책상 위 택배 상자 위로 빛이 쏟아져 내리자 지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머물렀다. 한참을 멍하게 쳐다보던 지수는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지수는 밝은 빛에 지레 겁먹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커튼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눈을 슬며시 가렸다. 밝음에 점차 적응한 지수는 가렸던 손을 내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 초록이 우거진 산을 쳐다봤다.
벌써 여름인가.
시간 참 빨랐다. 바쁘게 글을 쓰다 보니 계절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도 잘 느끼지 못했던 그녀는 한숨을 폭 하니 내쉬었다. 이렇게 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은 지수는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몸을 돌린 지수는 습관처럼 장식장 앞에 섰다.
“아구구구― 내 새끼들 잘 잤어용?”
장식장 안에는 수많은 자동차 모형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흡사 자동차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중 칸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자동차 모형 앞에 시선이 머무른 지수는 눈에 하트를 그리며 미소를 크게 그려 넣었다.
“알팔아, 이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널 꼭 데려올게.”
자신의 드림카 모형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지수는 장식장 앞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다 아쉬운 듯 몸을 돌렸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녀는 차 모형을 쳐다봤을 때와는 다른 무심한 시선으로 상자를 쳐다봤다.
어디 읽어 볼까?
겉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지수는 조심스럽게 칼로 봉해진 테이프를 갈라내고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드디어 질투 아닌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책이 손에 들어오자 기분이 묘했다.
‘그녀의 꽃’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꽃잎이 흐드러지듯이 날리는 책 표지 디자인이 정갈하게 예뻤다. 그것이 지수에게는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19금 책 표지는 어딘가 모르게 자극적이었기에 이 책은 빨간 딱지를 붙이고 있음에도 순결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피곤한 몸을 움직여 의자에 앉은 지수는 그 책장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응? 꽃향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는 꽃향기에 놀란 지수는 살며시 숨을 들이쉬어 향기를 맡았다. 여자의 기분을 설레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책 읽기 전 좋은 향기가 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내가」
그다음 장으로 넘겼다.
「너를」
그리고 또 다음 장.
「갖는 방법」
「그녀의 흐트러진 숨결이 가슴속을 파고들어 내 속에 감춰 두었던 욕망에 젖은 나를 일깨웠다.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차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한 내 본성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촉촉해진 그녀의 눈빛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내 눈빛에 흔들렸고, 두려움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런 그녀가 왜 더 아찔하게 보이는 것일까.」
우와, 내가 더 아찔하다.
이 책을 왜 이제야 읽은 것일까, 묘한 여운이 남아도는 것이 막 꿈에서 깬 느낌이었다. 책에 찍힌 글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며 두 주인공의 감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도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베드신 장면에서는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과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장면이 마음속 깊이 남아 맴돌았다.
이거 보니 더 연애하고 싶다.
지수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했다. 이렇게 좋을 나이에 연애 한 번 못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러고 있다니.
“아이고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었던 탓에 뻐근해진 허리를 쭉 펴며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갈증을 느낀 지수는 여전히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으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먹을 것 좀 있냐?”
“아! 깜짝이야.”
설거지를 하던 동생 지아는 놀란 눈으로 지수를 쳐다봤다.
“놀라기는. 우리 하나 어디 갔어?”
“유치원 갔지. 오늘 늦게 일어나서 늦게 갔어.”
“아항.”
식탁에 다리 한쪽을 올리고 앉아 밀폐된 그릇에 담겨 있는 과자를 꺼내 입에 베어 물었다.
“밥 먹어. 과자 나부랭이 먹지 말고.”
“그럼 주든가.”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지수를 쏘아보던 지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려.”
“박 서방은?”
“출장 갔어. 일주일.”
“요새 하는 일은 잘 되냐?”
“응. 잘 되나 봐. 내년에는 분가하자고 하더라. 언니한테 미안하대.”
설거지를 끝내고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으며 지아는 지수를 쳐다봤다.
“미안하긴. 어려울 때 다 돕고 사는 거지. 나도 하나 있으니까 웃으면서 스트레스 풀고 살지. 니들만 들어온다 했으면 다 쫓아냈어. 이 우울한 것들아.”
실없는 듯 꺼내는 농담에 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하나 나한테 줘라. 내가 키울란다.”
“웃겨. 남자나 만들어. 내년에 언니 서른하나야. 더 늙기 전에 서두르지?”
지아의 말에 지수는 과자를 입에 넣다 말고 그녀를 쏘아봤다. 누구는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엄마 금식 기도 들어간 거 몰라? 언니 올해 안에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더 부담스러운 것은 나이 서른이 되면서부터 엄마 영희의 압박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이렇게 부담 주냐?”
“우리가 언제?”
식탁 앞에 수저와 반찬들을 내놓으며 웃음을 띤 채 말하는 지아가 왜 이렇게 얄밉게 보이는 것인지 그녀를 쳐다보는 지수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난 그냥 이대로 살아도 족해.”
반어법이었다. 외롭고 연애하고 싶지만 가족들이 부담 주는 것에 대한 괜한 허세랄까.
“언니의 로맨스를 상상한 걸 글로 풀면서 사는 게 좋냐? 진짜를 만나서 연애를 해야 글도 잘 풀리지. 언니 요새 밤마다 뭐 해?”
“궁금해하지 마. 언니 아주 죽겠다. 요새.”
숟가락을 들며 미역국을 떠 입에 넣은 지수는 아주 맛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가 차려 준 밥과 반찬을 먹기 시작했다.
“밤마다 야동 보지?”
순간 지수는 입에서 밥알이 쏟아져 나올 뻔했다. 급하게 입을 막고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마시고는 지수는 정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야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아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지수를 한번 쳐다보고 웃더니 식탁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의 전원을 켰다.
“아, 진짜 웃겨. 언니 안 되겠다. 빨리 남자를 만나야지.”
“그런 거 아니거든.”
꾸역꾸역 밥을 먹는 지수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지아는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언니가 남자가 없기로서니 야동을 보다니, 야동 보고 도대체 혼자 뭘 하는 것일까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너 자꾸 나를 그런 눈으로 볼래?”
“내가 뭘?”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소리가 나도록 식탁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는 손을 내밀었다. 지아는 머그잔에 가득 커피를 따라 지수에게 건넸다. 머그잔을 받아 든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을 빠져나갔다.
우―웅.
침대 위에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리자 한창 원고를 쓰고 있던 지수는 흐름이 끊겼는지 미간을 좁히며 애써 무시했다. 잠시 후 진동 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시 집중하려고 했으나 이내 다시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코를 찡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 작가님, 안녕하세요. 정 실장이에요.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있는 출판사의 담당자였다.
“네, 안녕하세요?”
― 작가님, 죄송한데요. 지금 잠깐만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나오기 힘드시면 제가 댁으로 찾아뵐게요.
“무슨 일이신데요?”
― 저번에 말씀드렸던 판권 계약 때문에요. 작가님 작품 중에 ‘너에게 나를’이라는 작품 있잖아요. 그 작품의 판권을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간만에 좋은 소식에 지수의 입꼬리에는 미소가 걸렸다. 평소 급하게 약속 잡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그런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급하게 보는 것도 기분 전환 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나가지요.”
― 아!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우리 만날 만나는 곳이요. 두 시간 후에 봐요.”
지수는 자신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몸을 빠르게 씻었다. 조금이라도 화장을 하고 가려면 서두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서둘러 씻고 나온 지수는 큰 화장대 앞에 앉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한숨을 폭 하고 내쉬고는 익숙한 손길로 화장을 시작했다. 과하거나 진하지도 않고 너무 연하지도 않은 화장을 한 지수는 머리 손질까지 끝낸 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fresh 향수로 마무리했다. 편한 흰색 티셔츠에 발목까지 오는 스키니진을 입고 오버사이즈의 선글라스까지 쓴 채 방에서 나왔다.
“이모, 어디 갑니까요?”
유치원에서 돌아와 거실에서 지아와 뒹굴거리며 놀고 있던 하나가 나가려는 지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하나야, 이모 돈 벌어 올게. 올 때 우리 하나 맛있는 거 사다 줄까?”
“네! 하나 초콜릿이 먹고 싶습니다요.”
“알았어.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꺄, 신나서 소리 지른 하나는 다시 거실로 뛰어갔다. 흐뭇한 엄마 미소로 바라보던 지수는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지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제야 사람 같네.”
“나갔다 올게.”
걱정스런 말투로 말하는 지아를 뒤로한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키가 167cm인 그녀는 하이힐보다는 단화를 선호했다. 오늘도 스니커즈를 꺼내 신고 신발장에 붙은 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고는 꽤 만족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주차장으로 내려간 지수는 자신의 애마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다. 얼마 전에 마련한 SUV 차량이었다. 비록 중고차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사랑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남자의 몸매를 감상하듯 한 바퀴 둘러본 지수는 운전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올라타 부드럽게 시동을 걸었다. 휘발유가 아닌 디젤 차량이어서 그런지 시동 소리가 거칠게 들리자 눈살을 찌푸리던 지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돈을 모아서 드림카를 어서 사…… 아이고, 아니야. 내 말 못 들은 걸로 해.”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 자신의 차에게 혼잣말을 하던 지수는 차를 부드럽게 몰아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