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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평일 오후,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많아 간신히 약속 장소에 도착한 지수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속 시간에서 5분쯤 넘어간 시간이었지만 아직 정 실장이 없는 걸 보니 그쪽도 차가 많이 밀리는 듯했다.
지수는 먼저 커피를 시킬까 하다 이내 조금만 더 기다려 볼 모양인 듯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어떤 자리든 그녀에게는 노트북이 필수였다.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지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좋은 문장이 떠오를 때도 있었기에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그래서 커피숍 어딜 가든 구석 자리를 선호했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제 글을 보는 것이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헐레벌떡 뛰어온 모습에 호흡을 고르며 자신을 쳐다보는 정 실장과 시선을 맞춘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왔어요. 차 많이 밀리죠?”
“아니요. 작가님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밀린 차들도 금방 빠지던데요?”
너스레를 떨며 정 실장이 자리에 앉자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커피 주문하러요.”
“사 주시게요? 그럼 전 화이트 모카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정 실장과 눈이 마주친 지수는 미소를 지으며 주문대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탓으로 한참을 기다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테이블로 향했다.
“노트북이요.”
지수의 말에 정 실장은 노트북을 덮고 한쪽으로 치웠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따뜻한 커피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 가져왔어요?”
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 실장은 서류 봉투에서 두툼한 하얀 서류를 꺼내 들어 지수에게 내밀었다. 지수는 조용히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나쁘지 않네요.”
“더 추가할 내용 없으시죠?”
“남자 주연배우 캐스팅할 때 구경 가도 된다는 조항 넣을까요?”
“네?”
지수의 농담에 정 실장은 잠시 놀라 하다가 자신도 같이 가게 해 달라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다 마신 정 실장이 슬쩍 지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저 먼저 가 보아도 될까요?”
“데이트?”
지수의 물음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자 지수는 ‘빨리 냉큼 어서 꺼져’라는 짓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가님, 기획사에서 연락 오는 대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계약서는 이대로 준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상기된 표정으로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는 정 실장의 모습을 보자 지수는 연애 초반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좋을 때다. 나도 연애…….
갑자기 몰려오는 우울과 외로움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하얀색 작은 간판에 필기체로 쓰인 ‘flower’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참, 간결한 간판이네.
자연스럽게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건장한 남자가 테이블 위의 한 가지 꽃을 올려놓고 고민이라도 하는 듯 팔짱을 낀 채 시선을 그 꽃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남자가 꽃집 주인이라고 생각한 지수는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던 남자가 얼굴을 들자 지수의 동공이 커졌다.
저건 CG일 거야……. 꽃보다 예쁘다니…….
지수는 꽃집 주인이 꽃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그것도 남자가 말이다. 눈을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말을 지수는 강화유리 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자를 보며 실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자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친 지수는 당황했다. 왠지 머쓱해진 지수는 그냥 가 버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한 듯하여 평소 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화분이라도 사서 나올 요량으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손님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노트북 가방을 꽃이 놓여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팔짱을 꼈다.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리자 미간이 좁아진 남자는 말없이 지수의 앞으로 다가와 그 가방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죄송하지만 이 테이블은 작업 테이블입니다만.”
남자의 말에 당황한 지수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서 화분을 사 들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물었다.
“키우기 쉬운 화분 하나 주세요.”
지수의 말에 남자는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의 웃음소리에 지수는 기분이 상했다.
꽃집에서 화분 달라고 하는 말이 웃긴 건가?
“이봐요. 왜 웃어요? 내가 못 할 말 했나요?”
그녀가 정색하며 말하자 남자는 주먹을 쥐고 입을 가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지수를 쳐다봤다.
웃으니 꽃이네. 잘생겨서 봐줬다.
남자의 미소에 상한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자 지수의 정색했던 표정이 슬며시 풀어졌다.
“여기 꽃집 아닌데요.”
“네?”
“음, 뭔가 오해하신 거 같은데, 여긴 꽃집이 아니에요.”
여기가 꽃집이 아니면 뭐람?
지수는 다시 기분이 상해서 팔짱을 꼈다. 주변을 서서히 둘러보니 꽃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분들, 꽃 냉장고, 심지어 장미꽃조차 없었다. 점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지수는 다시 남자를 쳐다봤다.
“그, 그럼 뭐예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어디 가서 주눅 드는 성격은 아닌데 이상하게 잘생긴 사람, 그것도 남자 앞에 있으니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여기는 제 작업실이에요. 작업실이라는 글씨가 구석에 쓰여 있어서 그런지 간판만 보고 꽃집으로 착각하고 들어오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아…….”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무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본 남자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창피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한 지수는 빨리 그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넋 놓고 보고 있다 이런 일이 생기니 정말 창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했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지수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진짜 쪽팔려.
두 주먹을 꽉 쥐고 나가려고 발걸음을 떼려 하자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지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꽃 좋아하세요?”
2. 꽃의 유혹, 그리고 오해의 시작
남자의 음성은 분명 자신의 발목에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듯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나가야 하는데 지수는 어느새 몸을 돌려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면 찾으시는 꽃이 있으신가요? 아…… 아까 화분이라고 하셨나?”
“꽃집 아니라면서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지수는 남자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꽃집은 아닌데 꽃이 급하게 필요하시면 드릴 순 있어서요.”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종류의 꽃을 쳐다봤다. 그것을 본 지수는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기분 전환 좀 할까 싶어서 화분 하나 사려고 했어요. 좋아하지는 않지만 보고 있으면 안 풀리는 문제가 풀릴 것 같기도 해서요. 음…… 괜히 작업하시는데 실례가 많았네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내일 시간 있으세요?”
“네?”
남자의 갑작스러운 말에 지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꽃 같은 남자가 지금 자신에게 시간 있냐고 물어본 것인가? 이건 무슨 의미일까.
“기분 전환할 만한 걸 추천해 드리려고 하는데 시간 있으세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꽃이 만개한 듯 눈이 부셨다. 지수의 심장이 서서히 빠르게 뛰고 아찔할 정도로 마음이 일렁였다.
남자는 잠시 다른 테이블로 향하더니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고급스러운 봉투 하나를 가져와 지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티켓이요. 강연회 티켓.”
“강연회요?”
“저거요.”
남자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벽에 붙여진 커다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플로리스트 강재준의 영감 토크 박스. 꽃과 사랑 Oh, love!]
지수는 혹시나, 설마 하고 기대했던 것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왔다. 혼자 김칫국을 마셨다는 실망감에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머리에 얹었던 선글라스를 내려 다시 제대로 낀 지수는 서둘러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기분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아무리 외로워도 그렇지 얼굴에 혹해서는…….
“저기요, 잠시만요.”
그곳에서 나와 다섯 발자국 정도 떼었을 때 남자는 지수를 불러 세웠다. 남자의 목소리에 또다시 멈칫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가 버리려는 찰나, 남자가 자신 앞에 서며 손에 티켓을 쥐여 주었다.
“오시면 후회 안 하실 거예요.”
그러고는 꽃같이 싱그럽게 웃으며 다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깜짝이야.”
지수는 순간 남자의 온기가 제 손에 닿자 심장이 간만에 운동이라는 것을 하는 듯 두근거리는 움직임을 느꼈다.
자신의 손에 쥐여 준 티켓을 꺼내 볼까 하다 지수는 다시 몸을 돌려 작업실 앞으로 향했다. 흰 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은 남자의 모습은 제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잘생기긴 정말 잘생겼다.
지수는 감탄사를 한번 읊조리고는 다시 주차장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어, 자기. 바로 작업실 앞이야. 끊어…….”
“아!”
그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한 남자와 팔이 부딪힌 지수는 인상을 썼다. 남자는 전화 통화를 급하게 끊고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지수를 쳐다봤다.
“미안합니다. 어디 다치셨어요?”
부드러운 음성과 귀여운 인상이 상당히 매력 있는 남자였다. 오늘따라 눈이 호강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곧바로 사과하는 남자에게 ‘괜찮아요’라는 눈빛과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지수의 표정을 본 남자는 정중하게 다시 사과를 한 후 몸을 돌려 자신이 들어갔었던 꽃 같은 남자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다시 작업실 테이블 앞에 선 재준은 그 위를 쳐다보며 싱그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의 일이나 감정에 참견하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꽃집이 아니라고 했을 때, 당황하던 그녀의 표정이 왜 이렇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강연회에 초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자 바로 행동을 해 버렸다. 깊게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그랬다.
“재준, 뭐 해?”
등 뒤에서 더운 바람이 느껴지며 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생각에 빠져 있던 재준은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왔어?”
“응. 밥은 먹었어?”
강이 재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준이 뒤돌아서 있자 그의 뒤에 선 남자는 그의 어깨에 자신의 턱을 대고 뭘 하고 있는지 넘어다봤다. 누군가가 본다면 남자가 재준을 뒤에서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좀 떨어지자.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다.”
“웃긴다, 너. 언제는 여자 떨어트리는 데 좋다며?”
그의 말에 재준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서류 가방을 집어 들고 밖으로 향하려다 아까 여자가 놔 두고 간 노트북 가방이 눈에 띄었다. 서둘러 시선을 밖으로 향하자,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재준은 그 가방을 들고 나가려 했지만 그 여자는 재빨리 뒤돌아 뛰어가 버렸다.
이런.
재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수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애마에게 향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차 안으로 올라탄 지수는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이성으로 호감을 느꼈고, 그가 티켓까지 손에 쥐여 주니 설레는 마음까지 들었는데 그런 그 남자가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착잡한 기분이 들어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왜 그래.
울고 싶어졌다. 그런데 왜 그 남자는 굳이 쫓아와서까지 티켓을 쥐여 주고 갔을까. 날카로운 생각이 머릿속을 뚫고 나갈 지경이었다.
“후―”
한숨을 내쉰 지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어차피 자기 것도 될 수 없는데 이런 감정으로 에너지 소비를 할 필요 없다고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빨리 집에 가자.
갑자기 찾아온 피곤함에 지수는 시동을 걸고 서둘러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재준은 유명한 플로리스트다. 남자지만 여자 못지않은 섬세한 감성으로 작품을 표현하여 보는 이들의 감성을 건들며 많은 공감을 형성한다는 평과 함께 많은 여성 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큰 키에 작은 얼굴. 그 작은 얼굴 안에 짙은 눈썹과 속 쌍꺼풀이 있는 긴 눈, 오뚝한 콧날과 살짝 두툼한 입술, 날렵한 턱 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관리를 잘한 듯 군살이 없는 탄탄한 몸매에 넓은 어깨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이미지를 풍겼다.
매시간 바쁜 그였다. 클래스에서 강의도 하고, 초청도 받고 작품전도 일 년에 한두 번씩 여는 그는 늘 치열한 하루를 살고 있는 남자였다. 그만큼 여유가 없는 일상에 위안을 얻는 것이 있다면 신께서 주신 꽃이라는 생명체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가지고 있는 꽃말보다 하나의 작품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신께서 가장 사랑하심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꽃이란 매개체로 위안과 평안을 주는 일. 그것이 플로리스트인 자신이 하는 일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