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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귀신님(2화)


“자주 온다, 너?”
역시나 귀신님은 귀신같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귀신님다웠다.
“그…… 그게…….”
오늘따라 귀신님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빠르게 준비해 온 초코푸딩을 건넸다. 플라스틱 스푼도 함께 드리는 섬세함을 잊지 않았다.
“또 소원?”
초코푸딩을 받아든 귀신님은 익숙하게 푸딩을 까서 드시기 시작했다. 푸딩의 역사와 제조법을 읊어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도윤 말고도 푸딩을 바친 학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그럼 왜 자꾸 와”
“…….”
귀신님 강규태 전학 보내려면 성적이 얼마나 떨어지나 궁금해서 왔어요. 몇 등이나 떨어져요? 100등? 200등? 전교 꼴등까지 떨어지나요? 저 답안지 다 밀려 쓰게 되나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딱 반에서 5등만 떨어지는 수준으로는 강규태한테 해코지할 수 있는 건 뭐 뭐가 있나요? 아니면 제가 전학 가는 데는 성적이 얼마나 떨어져야 하나요? 제가 전학 간 곳에도 강규태 같은 놈이 있을 수 있는 거겠죠?
아무 말도 못 하고 귀신님이 야무지게 마지막 푸딩까지 싹싹 긁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도윤은 애가 탔다. 분명 제물로 바친 푸딩을 다 드시면 귀신님은 다시 쉬러 나무로 올라가실 게 분명하다.
“할 말 있으면 해.”
푸딩을 다 먹고 플라스틱 스푼과 푸딩 통을 바닥에 대충 던진 귀신님은 달짝지근한 입 안을 다시며 도윤에게 물어왔다. 도윤은 귀신님이 깔아 준 이 귀중한 대화의 장을 과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해도 사후에 처벌받지 않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느라 쉽게 말을 열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귀신님은 너무 단 입 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이거 다 피울 때까지만 기다려 준다.”
오늘 제물로 바친 초코푸딩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인자함을 베풀어 주는 귀신님의 넓은 아량에 도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적절한 질문 딱 한 개만 하자. 너무 세속 되어 보이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상황을 적절하게 해소해 줄, 귀신님이 보기에 내가 충분히 불쌍해 보이면서도 강규태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 수 있을 법한 그런 현명한 질문이어야만 한다. 도윤은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부터 유대인의 지혜까지 모두 끄집어내 고민했지만, 귀신님 손끝에 물린 담배는 빠르게 줄어 갔다. 꼭 도윤의 마음속처럼 타들어 가는 담배의 빨간 점이 귀신님의 입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이 정리되기는커녕 점점 실타래처럼 엉켜 도윤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쭈욱 빨던 귀신님은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담배꽁초를 근처에 던지고 발로 비벼 껐다.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버리다니, 도윤은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귀신님 발끝에서 꺼지는 담배 불씨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간다.”
“도와주세요!!”
애가 탄 도윤은 감히 귀신님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놀라 ‘히익-’ 소리를 내며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잡힌 옷자락 끄트머리를 가볍게 털어 낸 귀신님이 다시 몸을 돌려 도윤을 보았다.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아 도윤은 안심했다. 일단 다시 잡았다. 다시, 다시 말을 꺼내야 한다. 도와 달라니, 일단 내뱉었는데 무어라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뭘 도와줘.”
귀신님은 그렇게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03.


도윤은 다음 날 1교시가 시작되기 전, 강규태의 교실로 갔다. 투명한 필름 파일에 깜지 숙제가 구겨지지 않도록 넣었다. 강규태는 험악한 인상과 다르게 이런 것들을 아주 싫어했다. 구겨진 연습장, 샤프로 쓴 수학 숙제가 손에 묻은 땀 때문에 번지는 것 따위를 말이다. 깜지도 잉크 펜이 번지는 걸 싫어해서 항상 깨끗하게 말리면서 써야 했다. 볼펜으로 쓰면 볼펜 똥 때문에 중간중간 글자가 굵어지는데 그게 또 보기 싫단다. 참으로 병신 같은 놈이다.
숙제를 가져다주러 간 교실에서 강규태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올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강규태는 도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쓰며 교실 뒷문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도윤은 저 표정을 잘 알고 있다.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주먹질할 때의 표정이다.
처음 강규태를 알게 된 날이 기억난다. 원래 셔틀은 초반에 잘 잡아 놔야 한다며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입 안이 터지게 맞았었지. 설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때리지는 않겠지? 강규태 왼쪽 발목에 깁스가 보였다. 강규태가 넘어진 일이 자신의 저주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사람이 많은 교실에서라도 맞을 수 있다.
치아가 굳게 다물리지 못하고 덜덜덜 떨려 미세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강규태가 가까이 다가오자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꾹 감았다. 이를 꽉 다물었다. 어금니 나가면 안 되는데, 어제 귀신님한테 강규태한테 맞지 않게 해 달라고 소원 빌걸! 도윤은 뒤늦은 후회를 해 보았다.
“한도윤, 숙제 대신해 줘서 고맙다.”
제 품에 있던 투명한 필름 파일을 쑥 빼간 강규태는 흡사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나운 목소리로 고맙다 말했다. 무언가 억누르듯 이를 사리문 채로 하는 말이라 발음이 이상했지만 분명 고맙다는 말이었다. 도윤이 용기를 내서 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강규태가 숙제를 돌려받고 제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꺼지라는 듯 도윤을 쳐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도윤은 가도 좋다는 신호를 받고 망설임 없이 곧장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귀신님 만세! 은혜로운 귀신님은 이렇게 도윤의 소원을 또 들어주었다. 도윤은 실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화장실 구석진 칸으로 들어가 뱃가죽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통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아들, 좋은 일 있나 보네?”
저녁밥을 먹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도윤의 엄마가 물었다.
“엄마는 미신을 믿어?”
도윤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되물었다. 여전히 입가는 웃고 있다. 오늘 종일 이러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학원이랑 과외 때문에 오늘은 귀신님을 만나 뵈러 가지 못했다. 내일 맛있는 거 많이 사 가야지. 엄마한테 용돈을 달랠 참이다.
“미신? 왜?”
“나는 믿어. 한국은 역시 민속 신앙이지.”
채널을 적당히 돌리던 도윤은 ‘그러니까 나 용돈 좀.’이라며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도출했지만, 엄마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들에게 만 원짜리 두 장을 쥐여 주었다.
지난번에도 밝을 때 나오셨으니까 이번에도 밝을 때 나오실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엄마가 준 이만 원에 용돈을 조금 더 보태 초코케이크를 사 왔다. 일부러 덜어 먹을 종이컵과 일회용 포크도 챙겨 왔다. 자신은 섬세한 남자니까. 도윤은 이런 디테일에 강한 타입이었다. 초코케이크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구관 뒤뜰로 향했다. 부를 필요도 없이 미리 나온 귀신님이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왜 안 왔어.”
발치에 두세 개의 담배꽁초가 있다. 귀신님은 막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면서 사납게 이야기했다. 어제 감사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아 귀신님이 노하신 모양이다.
“어…… 어제는 학원 때문에…….”
“소원 들어줬더니 쌩까냐?”
“그래서 오늘 케이크 사 왔는데…….”
여태까지 바쳤던 제물에 비하면 이 초코케이크가 어마어마한 수준인 걸 모르는지, 귀신님은 가져온 케이크를 보고도 영 탐탁지 않아 했다. 역시 감사 인사는 바로바로 해야 했는데,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며 바닥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죄송하다고 꾸벅 귀신님을 향해 인사했다.
“…….”
노한 귀신님은 역시 대답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도윤의 잘못이니까. 가져온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가운데에 초코케이크를 꺼냈다. 귀신님께 앉으라는 듯 눈짓하자 귀신님이 신문 위에 앉는다. 아무리 귀신이라도 딱 한 벌밖에 없는 옷이 더러워지길 원하진 않겠지. 저 옷을 앞으로 또 20년은 입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거 초코케이크인데요.”
“알아, 나도.”
여전히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귀신님은 달콤한 케이크 앞에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도윤은 야무진 손끝으로 케이크를 반듯하게 잘라 종이컵 안에 넣고 그 위를 포크로 찍어 귀신님께 양손으로 공손하게 드렸다.
“맛있어요. 그리고 강규태 일은 진짜 감사합니다.”
새삼 이틀 전의 쾌감을 떠올리며 귀신님께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실 주절주절 강규태가 자신한테 숙제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며 떠들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친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귀신님은 여전히 화나 계셨으므로 도윤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고마우면 일찍 일찍 오던가.”
고작 하루 늦은 것인데 귀신님은 많이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도윤은 귀신님이 먼저 초코케이크를 먹는 걸 본 다음 자신의 몫을 종이컵에 덜어 먹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섬세함이다. 도윤은 이런 사소한 배려에 스스로 감탄하며 달콤한 초코케이크를 맛보았다.
“그동안 귀신님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고작 두 개의 소원이었는데 자신이 여간 귀찮게 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귀신님도 나름대로 스케줄도 있고 다른 귀신 친구들도 있을 텐데, 자신 말고 다른 사람들 소원을 들어주느라 바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바쁜 귀신님을 자신 혼자 독점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귀신님 스케줄이 꼬여서 이렇게 화가 나게 해 버렸다. 아주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사합니다.”
도윤은 앞으로 강규태가 또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면 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무리해서 케이크를 사 온 것도 마지막으로 귀신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귀신님과 친해지면 좋겠지만, 한편으로 귀신님이랑 너무 친해져서 귀신님이 나도 귀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막…… 그러면 어떡한단 말인가. 저는 산 사람인 것을.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귀신은 귀신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야 안 오려고?”
역시나 귀신같이 속마음을 알아챈 귀신님이 케이크를 먹다 말고 날카롭게 노려본다. 역시 귀신이 틀림없다. 도윤은 입 안에 말랑거리는 케이크를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귀신님 귀찮으시니까…….”
“안 귀찮은데.”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안 오겠다고 하면 귀신님의 피의 복수가 시작될 수도 있는 일이다. 역시 산 자가 죽은 자와 얽혀서 좋을 일은 없다. 역시 이 세상에 뒤끝 없는 깨끗한 복수 따위는 없다고 깨달았다.
“그럼…….”
“매일 와.”
귀신님은 케이크 한 조각을 금세 다 먹어 치우고 스스로 케이크를 덜어서 먹기 시작했다. 역시 귀신님도 도윤처럼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 학원…… 가야 하는데.”
“점심때 와.”
“점심때는 낮인데…….”
지금도 밝지만, 점심시간은 너무 밝은 대낮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래도 귀신인데 막 정오에 나오고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도윤이 갸우뚱하자 알 만하다는 듯 귀신님이 대답해 주었다.
“나는 낮에도 막 나와.”
역시 우리 귀신님은 대단하다. 사실 강규태 그렇게 만든 거 보고 보통 귀신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밤에만 나오는 그저 그런 흔한 귀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도윤은 귀신님의 신기에 새삼 놀라면서도 귀신님과 척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스타일이다, 이 귀신님은.
“낮에 막 나오셔도 되는 거예요? 태양 안 뜨거워요?”
두 번째 조각을 막 해치운 귀신님은 세 번째 조각을 종이컵에 덜어 담으면서 도윤을 힐끔 쳐다봤다. 사실 지금도 썩 어둡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시간이지만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있는 시간이다. 지금과 차원이 다르다.
“좀 덥긴 해. 그리고 나는 귀신이지 드라큘라가 아니거든.”
아, 맞다. 도윤은 순간 무지한 제 머리를 탓했다. 태양이 뜨거운 것은 드라큘라하고 박쥐이지 귀신은 아니다. 좀비, 그래 좀비도 태양을 뜨거워한다. 귀신은 태양을 안 무서워하는 모양이다. 도윤은 아직 우리나라 민속 신앙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부족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귀신은 태양을 안 무서워함. 그럼 장화·홍련은 왜 밤에만 사또를 찾은 거지?
“그렇구나.”
도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둘은 말없이 케이크를 먹었다.



04.


“왜 이제 와.”
도윤은 헉헉거리며 구관 건물로 뛰어 왔지만 벌써 귀신님이 나타나 있었다. 급하게 급식을 먹은 데다 바로 구관으로 달려오느라 체할 것 같았지만, 감히 신성한 귀신님께 그러한 인간의 위장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죄송해요.”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도윤은 주머니에서 초코우유를 꺼내 귀신님께 드렸다. 어느덧 귀신님을 만나러 올 때면 이렇게 먹을 것을 드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일종의 제물이다. 익숙하게 초코우유를 받은 귀신님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도윤에게 옆에 앉으라는 듯 손짓한다. 도윤은 옆에 나란히 앉아서 멍하니 반대편 벽돌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괴롭히는 사람 없냐?”
매일 점심시간마다 귀신님을 만난 지 열흘쯤 되었다. 처음엔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신님은 담배를 피웠다. 신기하게도 담배는 실제여서 제 몸에 담배 냄새가 밸 것 같아 멀찌감치 떨어졌다.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 도윤이 오기 전에 피우는 것인지 꽁초만 떨어져 있었다. 도윤의 앞에선 피우지 않았다.
“네.”
“강규태는?”
“숙제 안 시켜요.”
매일 비슷하게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난 다음에는 늘 그렇듯 침묵만이 이어졌다. 이럴 때 자신이 조잘조잘 떠들면서 귀신님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신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몰라 항상 눈치만 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귀신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집착했던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러니까 처녀 귀신이나 총각 귀신은 이성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돈 때문에 죽은 귀신은 돈 이야기를 좋아하고, 성적 때문에 죽은 귀신은 분명 성적에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할 것이다. 학생 귀신이니까 학교 이야기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학교에 미련이 남아 이렇게 떠나지 못하고 학교 구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귀신님은 학교 다닐 때 재밌었어요?”
“별로.”
“저도 별로 재미없는데…….”
“왜 괴롭히는 사람 없다며.”
“…….”
도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괴롭히는 사람만 없어지면 장밋빛 학교생활이 펼쳐질 것이라 믿었다. 재밌게 신나게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고등학교 때 생긴 친구는 평생 가는 친구고, 영원히 잊지 못하는 추억들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강규태만 제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그 모두가 제 것이 될 거라 믿었다.
“친구도 없으니까.”
괴롭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친구도 없다. 강규태 때문에 제 옆에 사람들이 멀어진 줄 알았다. 하지만 강규태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도 친구는 없었다. 제가 먼저 나서서 ‘나랑 놀아 줄래?’ 할 성격도 못 되었다. 머뭇거리며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괜찮아. 학생이 뭔데. 공부하는 사람이잖아. 놀려고 학교 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다독였다. 성적이 제일 중요하지, 친구가 중요한가?
귀신님은 말이 없었다. 대화하고 싶었을 뿐인데 도윤은 이런 부분에 소질이 없는 듯했다. 친구랑 신나게 떠들어 본 기억이 까마득하니 대화 스킬도 퇴화하는 게 틀림없다. 귀신님도 이런 자신에게 질렸을 테지. 심심해서 데려다 놨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신세타령이라니. 내일부터는 점심시간에 이곳에 와도 귀신님은 없을 것이다.
“흑…….”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한심하다. 이제 강규태 때문에 성적이 떨어질 것이다. 이제 성적도 안 남고, 친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한심한 고등학생이 되겠지. 그 순간, 어깨에 무언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귀신님의 팔이었다. 귀신님의 손이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 주었다. 목덜미에 습한 체온이 느껴졌다. 체온……?
“귀…… 귀신님…… 손이….”
원래 귀신도 체온이 있는 건가? 도윤은 순간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렸다. 도윤은 뚝뚝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자신 옆에 앉은 귀신을 보았다. 귀신님은 약간 한심하다는 듯 도윤을 쳐다보고 있었다.귀신님의 다른 손이 도윤의 볼을 감싸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따뜻했다. 부드럽게 볼을 스치는 살결에는 체온이 있었다. 도윤은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귀신님의 얼굴이 조금씩 도윤에게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귀신님이 제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