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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개 클로이(1화)
1. 개?
“클로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강아지’에서 ‘지랄 맞은 개새끼’가 되기까지는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좋은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며 배나 긁으며 살던 나날들이 엊그제 같건만, 눈 깜빡할 사이에 순 날강도, 협잡꾼, 주정뱅이, 깡패들 소굴에 떨어져 버렸다.
형제들과 헤어져 홀로 이 어둡고 냄새나는 천박한 곳에 팔려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매일매일 우울함은 깊어져만 가고, 최근 들어서는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정확하게는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원인일지도.
“클로이, 이것 좀 먹어 봐.”
눈앞에 흔드는 저 빈약한 식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기농, 천연, 자연식이 아닌 것은 싫다. 스스로도 좀 작작 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식습관은 까다로운 편이다. 덕분에 뒤바뀐 생활에 지대한 불편함을 초례하고 있지만— 어쩌겠어? 먹기 싫다고! 팽 고개를 돌렸더니
“빌어먹을 개새끼.”
하고 양아치 새끼가 대번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근래 들어 부쩍 빈번히 듣는 호칭이다.
일일이 대응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말 섞는 게 가장 귀찮아서 나는 그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가진 것이라고는 더러운 손버릇밖에 없는 소매치기 놈이 단번에 닥쳤다.
그래, 냄새나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고.
“비켜 봐. 하여간 까탈스런 개새끼라니까. 이 비싼 고급사료를 왜 안 처먹고 지랄이냐고.”
소매치기 자식을 밀어낸 약쟁이가 본차이나 접시에 신선한 등심 한 근을 척 올려 내민다. 선연한 피 냄새가 공기 중에 훅 하고 퍼졌다. 절로 코끝이 찡그려진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지그시 그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스러운 색깔에— 이 향긋한 피 내음이라니. 틀림없이 어제 오늘 도축된 가장 신선한 상등품! 씹는 순간 배어 나올 육즙을 상상만 해도 입 안에 군침이 고였다.
“처먹어.”
나는 적당히 서둘러서, 그러나 결코 천박하지는 않게 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온통 무도회의 연주곡이 흘러넘쳤다. 이 순간만큼은 이곳이 얼마나 더럽고 불유쾌한 곳이건 간에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단 말이지.
“헐. 입도 고급이네.”
소매치기 자식이 억울하다는 듯 째려보기에 고기 한 덩이가 남은 접시를 녀석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그들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았다.
예전엔 이런 신선한 고기 정도는 매일 먹었다고. 새 후견인은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모양인지 제대로 된 식사를 내놓질 못한다. 예상컨대— 나를 돌보라고 시켜 놓은 저 덜떨어진 것들이 중간에서 내 식사비를 가로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저 거렁뱅이는 무려 내 밥그릇을 탐내기까지 하잖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불쾌하다. 발목 가죽 벨트에 매달린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최대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대체 저런 말도 안 듣는 개새끼를 왜 기르는지!”
“낸들 알겠냐?”
“자기 밥 주는 놈도 구별 못하는 멍청인데.”
나는 그들의 대화에 코웃음을 쳤다. 밥 준다고 꼬리를 흔들면— 그게 똥개지, 이 몸이 절조도 모르는 잡종으로 보이냐?
게다가 보스라는 놈을 포함해 여기 와서 본 전원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없다. 이 몸의 밝게 빛나는 미래를 위해 몸소 영업을 해 볼까 싶어도 좀처럼 그럴 만한 대상이 없는데 내가 뭐 하러 잘 보이려는 시늉이라도 하겠어?
끼익, 무거운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덩치가 산만 한 흑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위협하듯 소매치기 녀석에게 물었다.
“식사는 마쳤나?”
소매치기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덩치가 이쪽을 보았다. 나는 냉큼 입가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닦고는 깔끔을 떨었다. 빈 접시를 본 그가 말했다.
“먹였으면 데리고 와.”
“직접 데려가. 내 말은 죽어도 안 듣거든.”
쯧쯧 혀를 찬 덩치가 다가왔다. 워낙에 위압감 넘치는 크기라 나는 별 반항심 없이 그저 그를 올려다보았다. 덩치는 땅에 고정된 쇠막대기의 자물쇠를 열어 묶여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클로이.”
그가 사슬을 쥐고 끌어당기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가 이끄는 대로 뒤를 따랐다. 평범한 산책일 리는 없다. 주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싫은 놈이 부른 게지.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복도를 따라 걸으니 텅 빈 로비에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할 일 없는 놈들이 보였다. 나는 시큰둥하니 미간을 찌푸렸다.
“클로이.”
악취가 풍기는 목소리. 덩치가 이끄는 대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사뿐사뿐 걸었다. 사슬의 끝이 그놈에게로 건네졌다. 하는 수 없이 곁에 다가가 서자, 악취놈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주제도 모르고!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리고는 흥 고개를 돌려 버렸다.
“녀석 참.”
노골적인 거부에도 악취는 그저 웃는다. 도도한 것이 혈통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놈이다. 허영심은 또 어떻고? 유지할 능력도 안 되면서 나 정도의 개를 키우겠다 마음먹다니. 민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가?
그가 냄새를 풍기며 씨익 웃어 보인다.
“예쁘게 단장시켜 주마. 좋지? 내일은 정기 집회가 있는 날이니 내 곁에서 체면 좀 세워 주려무나.”
악취 씨는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하며 사슬을 바로 옆 기둥에 메어 놓고 나를 자기 발치에 앉혔다. ‘옆에서 까닥이는 기분 나쁜 발을 물어뜯어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저런 걸 입에 넣고 싶진 않아 그만둬 버렸다.
아아— 정말 싫다. 눈앞에 보이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없다. 미의식이고 센스고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 이 냄새나는 놈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어째서 내 인생은 이렇게 추락해 버린 걸까?
한탄에 비탄, 우울과 울화가 끓어오르지만 별수 없다. 극심한 우울증 상태라서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해 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앉아서 늙어 죽게 될 때까지 그냥 ‘싫다, 싫다.’ 하고 우울을 곱씹기만 하겠지.
‘그건 싫은데.’
이런 생각도 이제 와선 그냥 일상. 죄다 꼴 보기 싫어져서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무슨 부작용처럼 졸음이 몰려들었다. 틀림없이 우울증일 거야.
눈을 감자 엄마, 아빠, 형제들과 함께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예쁜 막내, 사랑스러운 내 새끼, 클로이— 우리 아가, 폐하. 나를 둘러싼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운 추억이다. 이제 와선 그저 추억일 뿐이라니. 양털 러그에 몸을 묻고 햇볕을 쬐던 과거가 그리웠다. 팔자 뒤바뀌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구나. 나는 철골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한층 더 서러워져서 그만 잠들어 버렸다.
* * *
으, 시끄러워. 소란스럽기도 하지.
아침부터 씻기고 빗기고 하는 놈들의 성화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게다가 이 소음은 또 뭔가? 밤새 쿵쾅거리더니 오늘은 오전 내내 업자들이 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빠 보였다.
그 난리통 속에 부지런히 꽃단장을 당했다. 스텐바이 대기 중인 배우라도 된 기분이다. 몸에 손을 대는 건 딱 질색이지만 시중받는 건 좋다. 개와 인간의 권력 구도가 뒤바뀌어 버리는 상황이 한껏 즐거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악취놈이 어제도 말했듯이, 오늘은 그놈에게 꽤나 중요한 날인 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부두 창고 밀집가인 이 거리로 고급 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창문 너머로 구경하자니, 연이어 잘 빼입은 남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내 목줄을 흑인 덩치의 손에 맡기고는 멍하니 그 행렬을 구경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고, 농담하고 빈정거리고 견제했다. 인간도 사실은 개와 다를 것이 없다. 무리에서 서로의 서열을 정리하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 사뭇 흥미롭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장난삼아 저들의 서열을 정리해 보았다. 강하고 약하고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육체의 아름다움, 피복의 종류와 재질, 그리고 태도. 인간관계는 개의 것보다는 좀 더 섬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어디 보자. 예를 들면 방금 들어온 저 남자는 제법 위로군.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나폴리 쿠튀르 라인 클래식 수트와 브랜드는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봐도 명품이 분명한 캐시미어 코트를 빼입은 남자가 단연 무리 중에서도 돋보였다. 수트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법한 미친 옷빨이다.
그는 경호원 단둘을 데리고 들어왔지만 등장한 순간부터 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곧 시선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은연중에 모두들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법 위협적인 사내가 아닌가? 살찌지 않은 건장한 체구, 젊은 나이, 그러면서도 저 여유로운 태도는 위세 등등한 초원의 맹수를 보는 듯했다. 그는 저를 주목하는 시선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연자약한 얼굴로 신사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들 일찍도 모이셨군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힐끔 벽장 시계를 보았다. 어디서 빌려 오기라도 했는지 영 주위 가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이 고급스럽기만 한 시계가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여기 협잡꾼 놈들에게 조금쯤은 미의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하간 시계의 시침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가 늦었단 생각은 하지 못하나?”
“만찬 시간은 세 시간 후로 알고 있는데요?”
“애송이 자식!”
모여든 사람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사나운 시선으로 그를 뜯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내는 시중드는 이에게 코트를 벗어 넘긴다. 코트를 벗자 완벽하게 고급 정장을 소화해 내는 아름답고도 단단한 육체가 드러났다. 그 탄탄한 체격에 나는 다시 한 번 묘한 감흥이 일었다.
순수하게 이 ‘인간을 가장한 돼지’들 사이에서 육체로 투쟁하자면, 저 젊은 인간 사내는 경호원 따위는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 아주 훌륭하게 단련된 인간의 몸이다. 아름다웠다.
그렇게 조금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에게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악취놈이 등장했다. 이번 집회의 호스트인 만큼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놈은 평소와 달리 멀끔하게 차려입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외쳤다.
“모두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어이, 미하일. 신수가 훤한데?”
“오! 양문, 아직 안 죽었나?”
“죽긴, 네놈보단 오래 살아야지.”
악취놈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고 있었다. 저 양문이라는 배불뚝이와는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아버지께선 한 시간 후 도착하신다니, 그때까지 다들 편히 즐기길.”
호스트 노릇을 하는 악취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차려진 음료의 향긋한 내음에 나는 옆을 지키고 있는 흑인 덩치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눈치채고 마주 보는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전시된 술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까만 덩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코올은 안 돼.”
킁, 재촉하듯 발목을 흔들었다. 그러자 감싸고 있던 가죽 구속구가 흔들리면서 철그렁 철그렁 사슬 소리를 냈다. 나는 거만하게 눈으로 그에게 명령했다.
“안 된다니까.”
안 되긴 뭐가 안 돼? 모처럼 발견한 좋은 술인데, 못 마시게 하면 말썽 피울 거야. 그런 얼굴로 이를 드러내자 곧 체념한 듯 흑인은 사슬을 의자에 묶고는 술을 가져왔다. 나는 활짝 미소 지었다.
의자 따위에 사슬을 매어 놓는 건 그저 형식적인 일일 뿐이란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어쨌든 딱히 도망칠 생각은 아니어서 나는 얌전히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오목한 술잔에 코를 박자 짙은 베리 향이 흠뻑 차올랐다. 어릴 적 저택의 숲속을 형제들과 실컷 달리며 수풀에 자라난 딸기를 입가가 함박 붉게 물들도록 먹어 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잔을 기울여 혀끝에 술이 닿자 알싸하게 저려 오는 감각에 휘익 눈이 접혔다.
좋군, 좋아. 아주 좋은 술이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낯선 그림자가 내 위를 덮었다. 시선만 들어 올려다보니 좀 전까지 내가 감상하던 그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그 남자는 눈으로 내 와인병을 가리키더니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 병은 내가 찍어 둔 건데.”
흥, 나는 암체어에 몸을 깊이 묻고 다리를 접어 올린 채 몸을 틀었다. 이 좋은 술을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있다면 흑인 덩치가 손에 들고 있던 병이다. 이 불온한 시중꾼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병을 고스란히 내어 주려 했다. 그걸 보고 쌍심지가 확 치켜 올라갔다.
“안 돼, 전부 내 거니까!”
하고 나는 번개같이 그 병을 가로챘다. 그러나 바로 직후 남자가 손을 뻗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 손에 들어온 병을 빼 갔다. 설마 중간에 낚아챌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지라 깜짝 놀라 버렸다.
“앗!”
“오늘 집회에 이런 꼬마가 초대 받았단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그러자 곁에 있던 흑인 덩치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미하일 님의 개입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 커진다 싶더니 보기 좋은 입술을 뒤틀어 쿡, 웃음 지었다.
“개인 건 보면 알아. 헌데— 미하일의 것이라고?”
나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빤히 마주 보아 주었다.
“존경심과 충성심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데?”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악취 씨를 향한 충성심이라! 얼마나 비위가 좋아야 가능한 거야, 그건? 비대한 상상력인데 그래?
“제멋대로인 녀석이라서요.”
“훈련도 시키지 않은 건가?”
흑인 덩치는 고개를 한 번 저었을 뿐이지만 나는 심드렁해졌다.
훈련은 물론 받았다. 이래 봬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 혈통견 중의 혈통견.
옛날 주인은 우리 형제 모두가 고등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자람 없이 후원해 주었다. 부모님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영혼에 각인이 되도록 알려 주었고. 스스로에게 기술, 재능, 기량, 노력, 정신적인 부분, 어느 하나 모자라는 부분이 있을 거란 의심은 먼지 한 올만큼도 해 본 적 없다.
난 모자라지 않다. 다만 악취놈은 내 주인이 아닐 뿐이다. 내 소유권을 갖고 있을망정 내 충성의 대상은 아니었다. 뭐, 이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그건 내가 마셔야겠으니까.”
남자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두 눈매를 진득하게 접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병을 기울여서 내 잔을 채워 주었다. 찬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운 몸놀림이다. 과연 육체가 아름다우면 그 몸놀림에서도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는군.
그가 말했다.
“마시려무나. 곧 벌어질 이벤트는 좀 취기가 오른 후에 보면 더 흥겨울 테니.”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잔에 차오르는 음료에 정신이 팔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악취놈에게는 전혀 안 닮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어디서 주워 온 거 아냐? 아니면 입양되었다든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게 어떻게? 돌연변이인가?
여하튼 놀랐다. 미하일의 아버지는 근사했다. 품격 있게 늙은 인간의 전형 같은 모습이다.
아들놈이 똥개라면, 아버지는 사자. 세대가 바뀌기 전에는 실제로 ‘러시아의 흑사자’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그런 이름값치곤 꽤나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 인상적이다.
축 처진 눈매와 자글자글한 주름은 호인 같은 인상을 따라 깊이 패여 있었다. 언뜻 보면 은퇴한 노신사라든가 동네 꽃집 할아버지로밖에 안 보였다. 그 점이 오싹하다.
입맛이 절로 다셔졌다. 역시 그에게선 피 냄새가 풍겼다. 씻어도 씻어도 씻겨져 나가지 않는 비릿한 피비린내였다. 저 호인 같은 얼굴로 원한 서린 피를 얼마나 손에 적셔 왔기에 이토록 진득한 냄새가 다 날까?
문득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늑대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호인의 탈을 뒤집어쓴 러시아의 흑사자가 입을 열었다.
“네 개냐?”
그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악취놈이었다.
“네, 아버지.”
“보고 싶군. 데려와라.”
‘아버지’는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악취는 우쭐해져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조금 비켜섰다. 사람들에게 나를 내보일 의도였다. 노인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친절한 노인처럼 웃었다.
“나는 니콜라이다. 이 패밀리의 아버지지.”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에 코를 들이 밀었다. 악취가 깜짝 놀라 사슬을 끌어당겼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주름진 그 손에 얼굴을 박았다. 담배 냄새와 늙은 인간의 냄새, 화약 냄새 그리고 역시나 군침 도는 피 냄새가 났다.
“착하구나.”
니콜라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다. 사기, 강도, 방화, 살인, 매춘, 마약, 전쟁으로 수만 명의 동족을 죽였다는 살아 있는 악귀인 그가 신기했다. 안락한 암체어에 몸을 묻고 앉아 있는 늙은이는— 그런 피비린내 나는 악행들과는 거리가 먼, 완전히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매만졌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음습한 노인의 삶이 잠깐이나마 들여다보였다. 나는 움찔 놀라 그의 손안에서 콜록 기침을 해 버렸다.
노인이 악취놈에게 말했다.
“잘 길러라. 좋은 개다.”
“네, 아버지.”
살아 있는 악귀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 그는 얼마 안 가 수명이 다할 것이다. 늙고 노쇠해진 인간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잔인한 지혜가 깃든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악취놈을 어떻게 여기는지 정도는 그 역시 이미 눈치챈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음이 머지않은 이 노인은 남은 것들에게 애착을 주거나 집착하기보다는 그저 장난감 보듯 구경하기만 하는 것이 더 취향인 듯했다.
나는 이 늙은 인간이 마음에 들었다. 기왕이면 그의 아들놈이 아니라 니콜라이가 내 소유권을 샀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겠지.
환심을 사서 이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라도 옆에 있도록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는 곧바로 니콜라이의 발치에 앉아 버렸다. 사람들이 놀라는 기색을 무시하고 편안하게 암체어 다리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니콜라이의 주름진 손이 머리 위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 주인도 종종 나를 자기 품에 올려놓고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었다. 막내인 덕분에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었지. 조금 응석부리는 마음이 들어 머리를 흑사자의 다리에 기대 누웠다. 악취놈이 한 발짝 다가서는데 노인이 말렸다.
“내버려 두거라.”
힐끔 보니 악취놈이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자리를 잘 잡았다. 니콜라이는 친절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 미식 취향을 이해했고 또 인색하지 않았다. 먹고 싶다고 했더니 정말로 방금 도축한 듯, 따끈한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고기 덩어리를 가져오게 했다.
얼굴을 접시에 처박고 입 안에 고기 덩어리를 넣은 채 질겅거렸다. 턱 아래로 핏물이 뚝뚝 흘러 떨어지자 시중꾼인 흑인 덩치가 아래 깔린 페르시아 카펫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통째로 들어 올리더니 그 아래에 타월을 깔아 주었다.
니콜라이가 반쯤 마시고 남은 와인을 내려 주었다. 나는 냉큼 그걸 받아 꿀꺽꿀꺽 삼켰다. 맛이 좋아서 그의 취향에 마음껏 찬사를 보냈다. 니콜라이는 맛에 있어 천박함이라곤 몰랐다. 아주 지혜로운 노인이었다.
다만 이 황홀한 미식 탐닉의 시간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그의 아들이다.
1. 개?
“클로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강아지’에서 ‘지랄 맞은 개새끼’가 되기까지는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좋은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며 배나 긁으며 살던 나날들이 엊그제 같건만, 눈 깜빡할 사이에 순 날강도, 협잡꾼, 주정뱅이, 깡패들 소굴에 떨어져 버렸다.
형제들과 헤어져 홀로 이 어둡고 냄새나는 천박한 곳에 팔려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매일매일 우울함은 깊어져만 가고, 최근 들어서는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정확하게는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제일 큰 원인일지도.
“클로이, 이것 좀 먹어 봐.”
눈앞에 흔드는 저 빈약한 식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기농, 천연, 자연식이 아닌 것은 싫다. 스스로도 좀 작작 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식습관은 까다로운 편이다. 덕분에 뒤바뀐 생활에 지대한 불편함을 초례하고 있지만— 어쩌겠어? 먹기 싫다고! 팽 고개를 돌렸더니
“빌어먹을 개새끼.”
하고 양아치 새끼가 대번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근래 들어 부쩍 빈번히 듣는 호칭이다.
일일이 대응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말 섞는 게 가장 귀찮아서 나는 그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가진 것이라고는 더러운 손버릇밖에 없는 소매치기 놈이 단번에 닥쳤다.
그래, 냄새나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고.
“비켜 봐. 하여간 까탈스런 개새끼라니까. 이 비싼 고급사료를 왜 안 처먹고 지랄이냐고.”
소매치기 자식을 밀어낸 약쟁이가 본차이나 접시에 신선한 등심 한 근을 척 올려 내민다. 선연한 피 냄새가 공기 중에 훅 하고 퍼졌다. 절로 코끝이 찡그려진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지그시 그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스러운 색깔에— 이 향긋한 피 내음이라니. 틀림없이 어제 오늘 도축된 가장 신선한 상등품! 씹는 순간 배어 나올 육즙을 상상만 해도 입 안에 군침이 고였다.
“처먹어.”
나는 적당히 서둘러서, 그러나 결코 천박하지는 않게 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온통 무도회의 연주곡이 흘러넘쳤다. 이 순간만큼은 이곳이 얼마나 더럽고 불유쾌한 곳이건 간에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단 말이지.
“헐. 입도 고급이네.”
소매치기 자식이 억울하다는 듯 째려보기에 고기 한 덩이가 남은 접시를 녀석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그들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았다.
예전엔 이런 신선한 고기 정도는 매일 먹었다고. 새 후견인은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모양인지 제대로 된 식사를 내놓질 못한다. 예상컨대— 나를 돌보라고 시켜 놓은 저 덜떨어진 것들이 중간에서 내 식사비를 가로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저 거렁뱅이는 무려 내 밥그릇을 탐내기까지 하잖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불쾌하다. 발목 가죽 벨트에 매달린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최대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대체 저런 말도 안 듣는 개새끼를 왜 기르는지!”
“낸들 알겠냐?”
“자기 밥 주는 놈도 구별 못하는 멍청인데.”
나는 그들의 대화에 코웃음을 쳤다. 밥 준다고 꼬리를 흔들면— 그게 똥개지, 이 몸이 절조도 모르는 잡종으로 보이냐?
게다가 보스라는 놈을 포함해 여기 와서 본 전원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없다. 이 몸의 밝게 빛나는 미래를 위해 몸소 영업을 해 볼까 싶어도 좀처럼 그럴 만한 대상이 없는데 내가 뭐 하러 잘 보이려는 시늉이라도 하겠어?
끼익, 무거운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덩치가 산만 한 흑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위협하듯 소매치기 녀석에게 물었다.
“식사는 마쳤나?”
소매치기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덩치가 이쪽을 보았다. 나는 냉큼 입가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닦고는 깔끔을 떨었다. 빈 접시를 본 그가 말했다.
“먹였으면 데리고 와.”
“직접 데려가. 내 말은 죽어도 안 듣거든.”
쯧쯧 혀를 찬 덩치가 다가왔다. 워낙에 위압감 넘치는 크기라 나는 별 반항심 없이 그저 그를 올려다보았다. 덩치는 땅에 고정된 쇠막대기의 자물쇠를 열어 묶여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클로이.”
그가 사슬을 쥐고 끌어당기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가 이끄는 대로 뒤를 따랐다. 평범한 산책일 리는 없다. 주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싫은 놈이 부른 게지.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복도를 따라 걸으니 텅 빈 로비에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할 일 없는 놈들이 보였다. 나는 시큰둥하니 미간을 찌푸렸다.
“클로이.”
악취가 풍기는 목소리. 덩치가 이끄는 대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사뿐사뿐 걸었다. 사슬의 끝이 그놈에게로 건네졌다. 하는 수 없이 곁에 다가가 서자, 악취놈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주제도 모르고!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리고는 흥 고개를 돌려 버렸다.
“녀석 참.”
노골적인 거부에도 악취는 그저 웃는다. 도도한 것이 혈통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놈이다. 허영심은 또 어떻고? 유지할 능력도 안 되면서 나 정도의 개를 키우겠다 마음먹다니. 민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건가?
그가 냄새를 풍기며 씨익 웃어 보인다.
“예쁘게 단장시켜 주마. 좋지? 내일은 정기 집회가 있는 날이니 내 곁에서 체면 좀 세워 주려무나.”
악취 씨는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를 하며 사슬을 바로 옆 기둥에 메어 놓고 나를 자기 발치에 앉혔다. ‘옆에서 까닥이는 기분 나쁜 발을 물어뜯어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저런 걸 입에 넣고 싶진 않아 그만둬 버렸다.
아아— 정말 싫다. 눈앞에 보이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없다. 미의식이고 센스고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 이 냄새나는 놈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어째서 내 인생은 이렇게 추락해 버린 걸까?
한탄에 비탄, 우울과 울화가 끓어오르지만 별수 없다. 극심한 우울증 상태라서 좀처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해 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앉아서 늙어 죽게 될 때까지 그냥 ‘싫다, 싫다.’ 하고 우울을 곱씹기만 하겠지.
‘그건 싫은데.’
이런 생각도 이제 와선 그냥 일상. 죄다 꼴 보기 싫어져서 두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무슨 부작용처럼 졸음이 몰려들었다. 틀림없이 우울증일 거야.
눈을 감자 엄마, 아빠, 형제들과 함께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예쁜 막내, 사랑스러운 내 새끼, 클로이— 우리 아가, 폐하. 나를 둘러싼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환청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운 추억이다. 이제 와선 그저 추억일 뿐이라니. 양털 러그에 몸을 묻고 햇볕을 쬐던 과거가 그리웠다. 팔자 뒤바뀌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구나. 나는 철골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한층 더 서러워져서 그만 잠들어 버렸다.
* * *
으, 시끄러워. 소란스럽기도 하지.
아침부터 씻기고 빗기고 하는 놈들의 성화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게다가 이 소음은 또 뭔가? 밤새 쿵쾅거리더니 오늘은 오전 내내 업자들이 물자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빠 보였다.
그 난리통 속에 부지런히 꽃단장을 당했다. 스텐바이 대기 중인 배우라도 된 기분이다. 몸에 손을 대는 건 딱 질색이지만 시중받는 건 좋다. 개와 인간의 권력 구도가 뒤바뀌어 버리는 상황이 한껏 즐거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악취놈이 어제도 말했듯이, 오늘은 그놈에게 꽤나 중요한 날인 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부두 창고 밀집가인 이 거리로 고급 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창문 너머로 구경하자니, 연이어 잘 빼입은 남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내 목줄을 흑인 덩치의 손에 맡기고는 멍하니 그 행렬을 구경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고, 농담하고 빈정거리고 견제했다. 인간도 사실은 개와 다를 것이 없다. 무리에서 서로의 서열을 정리하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것이 사뭇 흥미롭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장난삼아 저들의 서열을 정리해 보았다. 강하고 약하고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육체의 아름다움, 피복의 종류와 재질, 그리고 태도. 인간관계는 개의 것보다는 좀 더 섬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다지 다를 것도 없었다.
어디 보자. 예를 들면 방금 들어온 저 남자는 제법 위로군.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나폴리 쿠튀르 라인 클래식 수트와 브랜드는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봐도 명품이 분명한 캐시미어 코트를 빼입은 남자가 단연 무리 중에서도 돋보였다. 수트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법한 미친 옷빨이다.
그는 경호원 단둘을 데리고 들어왔지만 등장한 순간부터 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곧 시선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은연중에 모두들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제법 위협적인 사내가 아닌가? 살찌지 않은 건장한 체구, 젊은 나이, 그러면서도 저 여유로운 태도는 위세 등등한 초원의 맹수를 보는 듯했다. 그는 저를 주목하는 시선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연자약한 얼굴로 신사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들 일찍도 모이셨군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힐끔 벽장 시계를 보았다. 어디서 빌려 오기라도 했는지 영 주위 가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쓸데없이 고급스럽기만 한 시계가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여기 협잡꾼 놈들에게 조금쯤은 미의식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하간 시계의 시침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가 늦었단 생각은 하지 못하나?”
“만찬 시간은 세 시간 후로 알고 있는데요?”
“애송이 자식!”
모여든 사람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사나운 시선으로 그를 뜯어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내는 시중드는 이에게 코트를 벗어 넘긴다. 코트를 벗자 완벽하게 고급 정장을 소화해 내는 아름답고도 단단한 육체가 드러났다. 그 탄탄한 체격에 나는 다시 한 번 묘한 감흥이 일었다.
순수하게 이 ‘인간을 가장한 돼지’들 사이에서 육체로 투쟁하자면, 저 젊은 인간 사내는 경호원 따위는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 아주 훌륭하게 단련된 인간의 몸이다. 아름다웠다.
그렇게 조금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에게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악취놈이 등장했다. 이번 집회의 호스트인 만큼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놈은 평소와 달리 멀끔하게 차려입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외쳤다.
“모두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어이, 미하일. 신수가 훤한데?”
“오! 양문, 아직 안 죽었나?”
“죽긴, 네놈보단 오래 살아야지.”
악취놈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고 있었다. 저 양문이라는 배불뚝이와는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아버지께선 한 시간 후 도착하신다니, 그때까지 다들 편히 즐기길.”
호스트 노릇을 하는 악취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차려진 음료의 향긋한 내음에 나는 옆을 지키고 있는 흑인 덩치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눈치채고 마주 보는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전시된 술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까만 덩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코올은 안 돼.”
킁, 재촉하듯 발목을 흔들었다. 그러자 감싸고 있던 가죽 구속구가 흔들리면서 철그렁 철그렁 사슬 소리를 냈다. 나는 거만하게 눈으로 그에게 명령했다.
“안 된다니까.”
안 되긴 뭐가 안 돼? 모처럼 발견한 좋은 술인데, 못 마시게 하면 말썽 피울 거야. 그런 얼굴로 이를 드러내자 곧 체념한 듯 흑인은 사슬을 의자에 묶고는 술을 가져왔다. 나는 활짝 미소 지었다.
의자 따위에 사슬을 매어 놓는 건 그저 형식적인 일일 뿐이란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어쨌든 딱히 도망칠 생각은 아니어서 나는 얌전히 그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오목한 술잔에 코를 박자 짙은 베리 향이 흠뻑 차올랐다. 어릴 적 저택의 숲속을 형제들과 실컷 달리며 수풀에 자라난 딸기를 입가가 함박 붉게 물들도록 먹어 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잔을 기울여 혀끝에 술이 닿자 알싸하게 저려 오는 감각에 휘익 눈이 접혔다.
좋군, 좋아. 아주 좋은 술이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낯선 그림자가 내 위를 덮었다. 시선만 들어 올려다보니 좀 전까지 내가 감상하던 그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그 남자는 눈으로 내 와인병을 가리키더니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 병은 내가 찍어 둔 건데.”
흥, 나는 암체어에 몸을 깊이 묻고 다리를 접어 올린 채 몸을 틀었다. 이 좋은 술을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있다면 흑인 덩치가 손에 들고 있던 병이다. 이 불온한 시중꾼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병을 고스란히 내어 주려 했다. 그걸 보고 쌍심지가 확 치켜 올라갔다.
“안 돼, 전부 내 거니까!”
하고 나는 번개같이 그 병을 가로챘다. 그러나 바로 직후 남자가 손을 뻗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 손에 들어온 병을 빼 갔다. 설마 중간에 낚아챌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지라 깜짝 놀라 버렸다.
“앗!”
“오늘 집회에 이런 꼬마가 초대 받았단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그러자 곁에 있던 흑인 덩치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미하일 님의 개입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 커진다 싶더니 보기 좋은 입술을 뒤틀어 쿡, 웃음 지었다.
“개인 건 보면 알아. 헌데— 미하일의 것이라고?”
나는 아무려면 어떤가 싶어 빤히 마주 보아 주었다.
“존경심과 충성심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데?”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악취 씨를 향한 충성심이라! 얼마나 비위가 좋아야 가능한 거야, 그건? 비대한 상상력인데 그래?
“제멋대로인 녀석이라서요.”
“훈련도 시키지 않은 건가?”
흑인 덩치는 고개를 한 번 저었을 뿐이지만 나는 심드렁해졌다.
훈련은 물론 받았다. 이래 봬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 혈통견 중의 혈통견.
옛날 주인은 우리 형제 모두가 고등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자람 없이 후원해 주었다. 부모님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영혼에 각인이 되도록 알려 주었고. 스스로에게 기술, 재능, 기량, 노력, 정신적인 부분, 어느 하나 모자라는 부분이 있을 거란 의심은 먼지 한 올만큼도 해 본 적 없다.
난 모자라지 않다. 다만 악취놈은 내 주인이 아닐 뿐이다. 내 소유권을 갖고 있을망정 내 충성의 대상은 아니었다. 뭐, 이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거만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그건 내가 마셔야겠으니까.”
남자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두 눈매를 진득하게 접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병을 기울여서 내 잔을 채워 주었다. 찬사가 나올 만큼 아름다운 몸놀림이다. 과연 육체가 아름다우면 그 몸놀림에서도 아름다움이 흘러넘치는군.
그가 말했다.
“마시려무나. 곧 벌어질 이벤트는 좀 취기가 오른 후에 보면 더 흥겨울 테니.”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잔에 차오르는 음료에 정신이 팔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악취놈에게는 전혀 안 닮은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어디서 주워 온 거 아냐? 아니면 입양되었다든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게 어떻게? 돌연변이인가?
여하튼 놀랐다. 미하일의 아버지는 근사했다. 품격 있게 늙은 인간의 전형 같은 모습이다.
아들놈이 똥개라면, 아버지는 사자. 세대가 바뀌기 전에는 실제로 ‘러시아의 흑사자’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그런 이름값치곤 꽤나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 인상적이다.
축 처진 눈매와 자글자글한 주름은 호인 같은 인상을 따라 깊이 패여 있었다. 언뜻 보면 은퇴한 노신사라든가 동네 꽃집 할아버지로밖에 안 보였다. 그 점이 오싹하다.
입맛이 절로 다셔졌다. 역시 그에게선 피 냄새가 풍겼다. 씻어도 씻어도 씻겨져 나가지 않는 비릿한 피비린내였다. 저 호인 같은 얼굴로 원한 서린 피를 얼마나 손에 적셔 왔기에 이토록 진득한 냄새가 다 날까?
문득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늑대 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호인의 탈을 뒤집어쓴 러시아의 흑사자가 입을 열었다.
“네 개냐?”
그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은 악취놈이었다.
“네, 아버지.”
“보고 싶군. 데려와라.”
‘아버지’는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악취는 우쭐해져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조금 비켜섰다. 사람들에게 나를 내보일 의도였다. 노인은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친절한 노인처럼 웃었다.
“나는 니콜라이다. 이 패밀리의 아버지지.”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에 코를 들이 밀었다. 악취가 깜짝 놀라 사슬을 끌어당겼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주름진 그 손에 얼굴을 박았다. 담배 냄새와 늙은 인간의 냄새, 화약 냄새 그리고 역시나 군침 도는 피 냄새가 났다.
“착하구나.”
니콜라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다. 사기, 강도, 방화, 살인, 매춘, 마약, 전쟁으로 수만 명의 동족을 죽였다는 살아 있는 악귀인 그가 신기했다. 안락한 암체어에 몸을 묻고 앉아 있는 늙은이는— 그런 피비린내 나는 악행들과는 거리가 먼, 완전히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매만졌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음습한 노인의 삶이 잠깐이나마 들여다보였다. 나는 움찔 놀라 그의 손안에서 콜록 기침을 해 버렸다.
노인이 악취놈에게 말했다.
“잘 길러라. 좋은 개다.”
“네, 아버지.”
살아 있는 악귀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마 그는 얼마 안 가 수명이 다할 것이다. 늙고 노쇠해진 인간이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잔인한 지혜가 깃든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악취놈을 어떻게 여기는지 정도는 그 역시 이미 눈치챈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음이 머지않은 이 노인은 남은 것들에게 애착을 주거나 집착하기보다는 그저 장난감 보듯 구경하기만 하는 것이 더 취향인 듯했다.
나는 이 늙은 인간이 마음에 들었다. 기왕이면 그의 아들놈이 아니라 니콜라이가 내 소유권을 샀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았겠지.
환심을 사서 이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라도 옆에 있도록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는 곧바로 니콜라이의 발치에 앉아 버렸다. 사람들이 놀라는 기색을 무시하고 편안하게 암체어 다리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니콜라이의 주름진 손이 머리 위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 주인도 종종 나를 자기 품에 올려놓고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었다. 막내인 덕분에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었지. 조금 응석부리는 마음이 들어 머리를 흑사자의 다리에 기대 누웠다. 악취놈이 한 발짝 다가서는데 노인이 말렸다.
“내버려 두거라.”
힐끔 보니 악취놈이 뒤통수라도 맞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자리를 잘 잡았다. 니콜라이는 친절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 미식 취향을 이해했고 또 인색하지 않았다. 먹고 싶다고 했더니 정말로 방금 도축한 듯, 따끈한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고기 덩어리를 가져오게 했다.
얼굴을 접시에 처박고 입 안에 고기 덩어리를 넣은 채 질겅거렸다. 턱 아래로 핏물이 뚝뚝 흘러 떨어지자 시중꾼인 흑인 덩치가 아래 깔린 페르시아 카펫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통째로 들어 올리더니 그 아래에 타월을 깔아 주었다.
니콜라이가 반쯤 마시고 남은 와인을 내려 주었다. 나는 냉큼 그걸 받아 꿀꺽꿀꺽 삼켰다. 맛이 좋아서 그의 취향에 마음껏 찬사를 보냈다. 니콜라이는 맛에 있어 천박함이라곤 몰랐다. 아주 지혜로운 노인이었다.
다만 이 황홀한 미식 탐닉의 시간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