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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개 클로이(2화)


“정말 아름답군요. 무슨 종이죠?”
누군가가 악취놈에게 묻자, 자길 칭찬한 것도 아닌데도 그는 들뜬 얼굴로 떠들어 댔다.
“골든 쥬빌리. 생긴 것관 다르게 사나운 혈통이지.”
나는 내심 어이가 없어져서 실소를 터뜨렸다.
골든 쥬빌리라니?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종이다. 설마 저 악취놈은 여태껏 나를 골든 쥬빌리로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아무리 바보라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싶었는데……. 게다가 골든 쥬빌리들은 하나같이 순해 빠진 바보들인데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바보, 바보놈.
“오! 순혈인가?”
“물론! 진짜도 아닌 걸 내가 기를 리 없지 않나?”
다른 배불뚝이의 감탄에 악취놈은 콧대가 더 높아졌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안 나왔다. 그런 내 목 뒤를 니콜라이의 손가락이 슬슬 매만졌다. 까칠한 손끝의 감촉에 나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어졌다.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니콜라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 나를 구경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결론적으로는 그냥 깡패다. 덕분에 상대에 대한 흥미는 바닥을 밑돌았다.
그사이에 누군가 손을 뻗어 나를 만져 보려 했지만 슬쩍 피해 버렸다. 그러나 그 버릇없는 손은 제법 집요했다. 하는 수 없이 늙은 흑사자를 불렀다.
“니콜라이.”
귀가 밝은 노인은 낮게 웃더니 모여든 자들에게 말했다.
“구경하는 건 좋지만 만지지는 말아. 손가락이 잘릴 테니까.”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흠칫 멈춘 손은 냉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그럼. 그래야지. 만약 허락도 없이 손끝이 내 다리에라도 닿았다간 사납게 물어뜯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개 조심. 동서고금 불변의 명언이지. 이 늙은 인간은 오래 살며 쌓아 온 지혜 덕분인지 뭐든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니콜라이의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그러자 니콜라이가 말했다.
“과연 듣던 대로 흘러내릴 것 같은 벌꿀 블론드로군.”
골든 쥬빌리의 외향적인 특징이라면 역시— 한낮의 태양빛 같은 플래티넘 블론드다. 하지만 내 털은 먹고 싶을 정도로 달콤해 보이는 허니 블론드였다. 고작 털 색깔로 종을 구별하는 수준인 데다,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한심했다. 그래서 뭐라고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는 알지? 하는 눈으로 늙은이를 올려다보자 니콜라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웃어 보인다.
개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이 깡패놈들은 정작 골든 쥬빌리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상냥한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쥬빌리들이 이 이야길 들었다면 쇼크로 울어 버렸을 것이다. 하필이면 샌시와 착각을 당하다니. 녀석들의 충격에 빠진 얼굴을 상상했더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재밌네요.”
음? 절로 털이 곤두서는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나직하고 듣기 좋지만 어딘가 살기등등한 목소리다. 방금 나와 술병 다툼을 벌였던 그 사내였다.
사람들이 쳐다보자 그는 싱글거리며 니콜라이 앞에 다가섰다. 더없이 친절하고 예의바른 청년의 얼굴이지만, 그 아래 감춰진 섬뜩한 살의가 느껴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뭐지?
“보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쁘기 한량없군요.”
“넌?”
“조이입니다. 조셉의 아들이요.”
“조셉. 그래, 뉴욕 평의회의 꼬마군.”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네가 세례 받을 때 참석했었지.”
늙은이는 회한으로 가득 찬 날숨을 깊이 내뱉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나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몸은 언제라도 총을 빼 들 것처럼 긴장으로 부풀어 있었다. 옅은 땀 냄새로 인해 그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
“이 개는 주인보단 보스를 더 따르는 것 같군요? 하긴— 그도 그렇겠습니다.”
그 내용에 담긴 빈정거림에 악취놈의 표정이 변했다.
“뭐야?!”
사내는 짐짓 순진한 얼굴로 미하일과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문제라도?”
“마저 지껄여 보시지?”
남자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빙글거리며 웃는다.
“왜 그러시죠? 정작 화를 내야 될 건 이 개인데.”
악취놈이 나를 보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니콜라이도 나를 보고, 마지막으로 사내도 나를 보았다. 나는 물고 있던 고기를 꿀꺽 씹어 삼켰다. 어쩌라고?
빈정거리는 어조가 제법 일품인 그 남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내 앞에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애는 골든 쥬빌리가 아니에요. 몰랐습니까?”
나는 활짝 웃었다.
“뭣?!”
“이 아이와 꼭 닮은 개를 본 적이 있거든. 핀란드에서였죠.”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릴?! 업자에게 180만 달러나 주고 사들였단 말이다!”
악취놈의 말에 정작 놀란 것은 주위에 있던 다른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헛숨을 들이마시며 웅성거렸다. 세상에, 고작 개에게 180만 달러나 썼단 말이야?
“잘 샀네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나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리고 말했다.
“어리지 않아.”
내 반응에 남자는 더욱더 진득하게 웃었다.
“그래? 몇 살인데?”
“열여섯이다.”
“뭐야, 성견이었나? 그런 것치곤 작은데?”
“작지 않아.”
“아니야, 작아. 핀란드의 샌시는 열다섯인데도 너보다 한 뼘은 더 컸다고.”
그 말에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뭐야? 진짜 알고 있었나, 내가 뭔지?
사내가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전까지의 날이 숨겨진 가식적인 웃음과는 달리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환한 미소여서 조금 의아해졌다.
악취놈이 사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네놈이 착각한 거다. 내 개는 골든 쥬빌리가 맞아. 봐라, 이 훌륭한 벌꿀 블론드를!”
“보스께서는 알고 계실걸요?”
그렇게 늙은이에게 동의를 구하자 니콜라이는 흥미 없단 얼굴로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헝클어뜨렸다.
“차라리 내게 팔지 그래요? 이 아이가 뭘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이 건방진 애송이가!”
남자가 웃으며 두 손을 들고 물러섰다.
“농담이에요. 열 내지 말라고요.”
악취놈은 본래가 뜨겁고 빠르고 쉬운 성격이어서 금방 화를 낸다. 게다가 흉포하기까지 해서 아랫사람의 실수를 용납하는 법이 없었다. 잔인하게 부하들을 벌주고, 고문하고, 때에 따라서는 죽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1년 가까이 지켜봐 왔다. 때문에 나는 씩씩거리기만 할 뿐 딱히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악취놈의 모습이 낯설었다.
러시아의 흑사자라는 늙은이 앞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 젊은 놈이 만만찮은 상대이기 때문인 걸까?
어쨌거나 모처럼의 연회는 즐거웠다. 살얼음판처럼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주 멀리서 더 흥미로운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가늘게 찢어지는 파공음들은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왜 그러지?”
니콜라이가 먼저 내 상태를 알아채고 물어왔지만, 나는 들썩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홀의 입구를 보았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람들도 내가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불과 몇 초 후, 웅성거리는 소란이 확실히 가까워져 있었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알아챌 만큼. 이윽고 쾅! 거칠게 문이 열렸다. 검은 옷의 남자 몇 명이 급하게 홀로 들어섰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자가 사색이 되어 말했다.
“보스, 밖에, 트, 특경들이!”
악취놈이 얼굴이 확, 일그러져서는 외쳤다.
“똑바로 말 못해?!”
울상이 된 남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말을 이었다.
“특경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보스.”
“무슨 소리야?! 그 새끼들이 여긴 왜 와?”
“24번 부두는 벌써 끝났다고요!”
“뭐?!”
배불뚝이가 나서서 물었다.
“얼마나 되기에?”
“기동단 전체가 뜬 것 같습니다. 끝이 안 보여요.”
악취놈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다.
“이 씹새끼들이 왜 하필 오늘이야?! 그동안 처먹인 돈이 얼만데?!”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지.”
악취놈의 바로 옆에 있던 배불뚝이는 의외로 침착하게 자신의 경호원들을 불렀다. 다른 사람들도 순식간에 입구에 모아 둔 자신의 무기를 되찾아 전투태세를 갖췄다. 단번에 분위기가 반전되어 템포가 빨라졌다. 태생부터가 깡패인지라 모두들 이런 사태에는 이골이 난 것 같았다. 딱히 놀라는 인간도 없었다.
악취놈도 모처럼의 모임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해 파랗게 질렸을 뿐,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놈이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며 사납게 이를 갈아 붙였다.
그리고 나는 신이 났다.
발을 흔들며 쇠사슬을 쩔그렁거리자 악취놈이 돌아봤다.
“아버지, 잠시 자리를 옮기시죠? 식장이 소란스러워질 것 같으니까요.”
“괜찮으니 내버려 둬. 지금 이 나를 보고 꽁무니를 빼라는 말이냐?”
“아버지에게까지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시끄럽기만 할 거예요. 처먹을 대로 처먹어 놓고 뒤통수나 치는 이 씹새끼들……. 아무도 살아서 못 나갑니다.”
배불뚝이도 말했다.
“모처럼 신년 행사니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지요.”
그러자 어딘지 맹수 같은 냄새를 풍기는 그 사내가 싱긋 웃으며 다시 나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마시던 와인이나 마저 비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 좋은 생각이다. 반색하는 나를 보며 사내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빈티지는 세계에서도 몇 병 남지 않은 귀한 물건인데 아깝잖아요.”
악취놈이 노려보거나 말거나 그는 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병부터 챙겼다. 아주 올바른 태도다. 늙은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소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와인병을 챙겨 든 사내가 자신과 동석한 덩치들에게 손가락질했다.
“너희들은 여기 남아서 문을 지켜. 누구든 들어오면 모조리 쏴 죽여 버리라고.”
상황과 동떨어진 가벼운 음색이었다. 하지만 나만은 그가 여기 있는 누구보다 긴장해 있단 것을, 공기 중에 떠도는 그의 체취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당최 알 수 없는 놈일세.
그리고 늙은 보스를 호위하던 덩치들이 니콜라이의 주변을 에워쌌다. 속내 모를 사내놈은 내게 눈짓했다. 따라오란 뜻이다. 나는 냉큼 그의 뒤에 따라 붙었다. 그놈의 손에 들린 와인병 때문이다. 기가 막힌 놈. 그 와중에 제일 좋은 걸 챙겼다. 아닌 게 아니라 저걸 맛보지 못하고 죽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못 본 것도 아니고 막상 본 이상 무조건 저걸 맛봐야겠다.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무도 안 쥐고 있던 탓에 바닥에 끌린 사슬이 철그렁 철그렁 하는 소음을 냈다. 그걸 본 악취놈이 손짓하자 흑인 덩치 시중꾼이 사슬 끝을 잡고는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뒷문을 통해 비밀 통로로 들어섰다. 땅굴로 이어진 통로는 어둡고 습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횃불의 움직임에 따라 기다란 사람 그림자가 유령처럼 흔들거렸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오래된 와인에 오래된 피난처라.”
“저도 제법 운치를 알거든요.”
조이는 그 소란통에도 챙길 건 다 챙겼는지 멋들어진 크리스탈잔을 니콜라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소믈리에라도 되는 양 병을 기울여 흑사자의 잔을 채운다. 나는 애가 닳아 잔의 붉은 액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내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입을 벌리렴, 꼬마.”
나는 냉큼 얼굴을 쳐들고 입을 열었다. 쪼르르— 피같이 붉은 액체가 입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키는 작은 주제에 술은 꽤나 밝히는군. 핀란드에서 본 꼬마는 술이라곤 입에 안 댔는데 말이지.”
그는 내 입가로 흘러내리는 붉은 방울을 검지로 슥 닦아 올리며 웃음 지었다.
“작지 않아.”
더 먹고 싶어서 ‘저 병을 빼앗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차에 젊고 늙은 두 사내가 대화를 시작했다.
“조이라고 했던가?”
“네, 보스.”
“올해로 몇 살이지?”
“서른두 살입니다.”
“그래, 어리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인걸요? 서른이면 본전은 찾은 셈이죠.”
“조셉이 죽은 지도 벌써 십여 년은 흘렀지.”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잔에 술을 좀 더 채웠다. 병에 남은 와인이 점차 줄어 가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가 병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더 마시고 싶은 거지?”
물론이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병을 꼭 휘두를 것처럼 주둥이 부분을 거꾸로 쥐었다. 으악! 뭐 하는 짓이야? 여긴 사방이 돌로 된 벽이라서 잘못 다뤘다가는 깨진다고!
“말을 잘 들으면 나머지는 다 먹게 해 주마.”
“좋아.”
냉큼 대답하자 남자가 다른 손으로 검지를 세운다.
“첫 번째 질문, 미하일은 네 주인인가?”
“아니!”
“잘됐군.”
그 말과 동시에 그의 검지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컷이 분할되는 것처럼, 다음 순간 니콜라이는 뒤로 튕겨져 나가 쓰러졌다. 화약 냄새가 확 하고 퍼졌다. 함께 있던 경호원들이 경악으로 눈을 치뜨는 사이 조이가 말했다.
“두 번째, 나 빼고 여기 있는 놈들— 다 죽여.”
지금껏 사내의 온몸에 응축되어 있던 긴장이 카타르시스로 변한 게 느껴졌다. 나는 병에 남아 있는 와인을 위해 튀어 올랐다.


총알이 흑인 덩치의 미간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시중꾼 녀석의 뒤통수는 수박이 깨지는 것처럼 퍽, 하고 터져 나갔다. 어두운 터널 속에 번개가 내려치듯 번쩍번쩍 빛이 번쩍인다. 그리고 한 번 빛이 번쩍일 때마다 정확히 한 명씩 피를 쏟고 쓰러졌다. 사방이 뜨거운 피 냄새로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내 발 아래 꾹 눌려 있던 남자의 머리통이 퍽, 하고 터져 나가자 살아 숨 쉬는 것이라곤 조이라는 안 어울리는 이름의 남자와 나, 그리고 굴의 주인인 생쥐들뿐이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느긋하게 권총을 허리춤에 찔러 넣은 그는 와인병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뜨거움 숨을 천천히 평소처럼 되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그 고급 천조각은 금세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그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 왔다.
“죽이랬잖아?”
“안 돼.”
나는 손을 뻗어 남자가 들고 있는 병을 잡았다. 그는 순순히 와인을 내가 가져갈 수 있게 내버려 두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이빨로 뽑았다.
“인간은 못 죽여. 샌시라고는 해도 일단은 개라고.”
“훈련 받았나?”
“물론.”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물이라도 마시듯 꿀꺽꿀꺽 삼켰다. 오랜만에 피범벅이 되었더니 갈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뜨거운 날것들은 인간의 것이지만— 어쨌든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숨이 차도록 와인을 마신 나는 머리카락에 묻은 살점을 털어 냈다. 그리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는 너는 뭐냐?”
내 물음에 남자가 싱긋 웃었다. 어느샌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졌던, 그의 안을 가득 달구고 있었던 긴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조직의 배신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증오에,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러시아의 흑사자를 망설이지도 않고 쏴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리고 그는 역으로 내게 물었다.
“핀란드의 샌시를 알아?”
알고 있다. 우리 종은 개체 수가 양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니까 가족을 제외하면 북유럽에 1가, 러시아에 1가, 총합해서 세 가문밖에 없는걸. 핀란드에 있는 열다섯 살짜리라면 나도 들은 적이 있지. 적성을 살려 군견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오호라!
남자가 허리를 숙여 니콜라이가 차고 있던 권총을 챙겼다. 니콜라이, 늙은이. 가만히 내버려 둬도 한 해도 채 못 살았을 텐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좋은 술맛은 보고 갈 수 있어서 복 받은 늙은이다.
“자, 가자. 클로이.”
니콜라이를 보던 시선을 돌리자 횃불을 높이 들며 손짓하는 그가 보였다.
“어서 빠져나가야 해. 곧 철수할 시간이니까. 10분도 남지 않았다고.”
흐음— 잠깐 망설이는 사이 그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통로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냉큼 병의 주둥이에 코르크 마개를 끼워 넣고는 그 뒤를 따랐다.
통로를 따라 걷길 십여 분, 나와 그는 창고 밀집가 북쪽의 야트막한 개울가로 나왔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두운 색의 제복을 입은 남녀 수십여 명이 밀집해 있었다. 조이가 먼저 그들 앞에 나섰다.
“여어— 사상자는 없겠지?”
남자를 발견한 커트머리의 여자가 어둠 속에서도 으스스한 눈빛을 빛내며 경례했다.
“전무합니다. 흑사자는 어떻게?”
남자는 차고 있던 니콜라이의 권총을 그녀에게 넘겼다.
“죽었다. 신속히 철수할 것.”
나는 품에 와인병 하나를 안고 슬그머니 통로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제복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몰렸다. 슬쩍 둘러보니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인다. 야밤에 다들 무슨 좋은 일로 이리 행차신가? 남자가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눈치 보지 말고.”
“눈치 보는 거 아냐.”
타박타박 걸어 다가가자 조이의 옆에 서 있던 커트머리의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본다. 조이가 박수를 짝, 치더니 외쳤다.
“동작 봐라! 철수! 다들 퇴근 안 할 생각인가?”
그제야 사람들은 드문드문 흩어졌지만, 어쩐지 자꾸만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영 자리를 뜨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도 커트머리 여자는 가만히 서서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뭡니까, 이 화려한…… 개?”
겨우 뭔가 말하는 듯싶더니 얼빠진 대사네. 나는 사슬을 짤그락거리며 비죽 튀어나와 있는 날렵한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남자가 말했다.
“주웠지.”
“어디서요?”
“연회장에서.”
“주인 있는 개 아니에요?”
“아니야, 주인 없댔어.”
주인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치?”
내게 되묻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먹여 줄 이도, 재워 줄 이도 없었으니까.
대답에 만족한 듯 씨익 웃은 그가 말했다.
“그렇담 취직하지 않을래?”
응? 고개를 들고 녀석과 눈을 맞추자 녀석은 보험 외판원 같은 스마일로 말을 이었다.
“연금 빵빵하고, 연봉도 평균 이상, 위험수당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나오거든. 제법 먹보인 거 같은데 당장 돈이 떨어지면 곤란한 거 아니냐? 아니면 다시 그 소굴로 돌아갈 예정?”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고개를 팽팽 휘저었다. 사내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샌시 자존심에 고작 골든 쥬빌리로 착각받으면서 애완용으로 길러지는 건 말도 안 되지.”
“얼마나 주는데?”
“글쎄. 매일 신선한 고기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거야.”
어디 보자. 신선한 고기와 직업견으로서의 삶.
“할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할게.
그렇게 나는 그날로 특경청의 경찰견이 되었다. 대귀족의 사냥개에서 깡패 소굴의 관상용 애완견, 그러다가 경찰견으로 스카웃이라니. 생각도 못한 진로였지만— 뭐 어때? 굶지 않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내 미래를 덜컥 고기와 맞바꾸어 제시한 이 사내의 풀네임은 장 카를로스 조이스로, 특경청 경무관인 동시에 기동단장의 직책을 가진 사내였다. 특경청 안에서는 악명이 자자할 정도로 마피아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과격한 성향을 가진 전투 경찰이란다. 더불어 이제는 내 직속상관 되는 인간이기도 했다.

흐음, 돌이켜 보니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군. 경찰견이라.
그렇다고 이 선택에 후회란 없었다. 결국엔 내 꿈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