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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개 클로이(3화)
2. 바보개의 어느 평화로운 일상


일상 part 1. 동거.

우유색의 커다란 세라믹 욕조에 따뜻한 물이 가득 차올랐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에서는 라벤더 향이 난다. 살랑살랑 흔들던 꼬리 끝을 폭, 물속에 담가 보았다.
“흐아아아—!”
갸르릉거리는 숨소리가 턱밑까지 차올랐다. 목욕이라니! 목욕이라니~! 이렇게 청결한 욕조에 몸을 담그다니!
사소한 감동에 이어 발가락을 담근 다음 발을 적신 후, 다리를 넣고 풍덩 앉아 버렸다. 금세 부피가 불어난 물이 담뿍 넘쳐나 욕실 바닥에 차올랐다.
“흥흥흥~ 흥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한참을 물속에서 손을 젓거나 얼굴을 묻고,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도록 누워 빈둥거렸다. 이런 게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일까요? 흐흐흥~! 라라라~!
그러다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서 휙 고개를 돌리자, 열린 욕실 문 사이로 조이가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언제까지 씻을 셈이냐?”
“샌시는 원래 물을 좋아해.”
“내버려 뒀다가는 그 안에서 잠들어 버리겠군. 씻겨 줄까?”
“좋아. 씻겨.”
말 떨어지기 무섭게 팔을 둘둘 걷어붙인 그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라벤더 향이 나는 샴푸를 두 손에 가득 짜 내 머리카락에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이 인간, 능숙하잖아? 아무리 봐도 남자 혼자 사는 건조하고 개성 없는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동거인이 있다거나, 남 돌봐 주길 좋아하는 성격이라거나? 아니면 개를 씻기며 힐링하는 스타일?
거품을 푸 푸 입으로 불며 장난을 치자 볼을 꼬집혔다.
“아파!”
“거품이 날리잖아.”
“재밌는걸”!
“도통 얌전히 있지를 못하는군.”
샤워기로 따뜻한 물을 뿌리는 그 녀석의 태도가 잔디에 물이라도 주고 있는 양 여유로웠다. 머리카락에 엉겨 붙어 있던 핏덩어리도 모두 씻겨 나가고, 나는 다시 꽃냄새를 풍기며 뽀얗게 익었다.
욕조의 물을 빼 버리는 그를 못마땅하게 째려보든 말든— 그는 나를 묵묵히 씻기고, 닦이고, 커다란 타월로 둘둘 말아 ‘영차!’ 들어 올려 욕실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깥 공기에 추워져서 놈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이 심술궂은 사내놈의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더니 이윽고 크게 입을 벌려 내 볼을 깨물어 버렸다.
놀랐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개를 물다니!”
“뭐 어때? 딱 깨물고 싶게 잘 익었는데.”
그의 목소리에 호의가 가득해서 이참에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나를 키울 거야?”
“글쎄— 넌 유지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 거 같아서 솔직히 까놓고 말해, 내 형편에는 무리야.”
“그럼 팔 거야?”
“머리가 나쁘네. 겨우 몇 시간 전에 채용된 걸 잊은 거야?”
“아, 맞다.”
“갈 곳이 없다면 당분간은 여기서 출퇴근하게 해 주지. 원한다면 기숙사를 알아봐 줄게.”
친절하고 상냥하고 좋은 인간이다. 제 집에서 긴장을 풀고 있는 조이는 나름 근사했다. 우울한 건, 내가 근사하다고 느낀 인간들은 대체로 금세 죽어 버린다는 징크스?
꼬리가 아래로 축 쳐졌다.
“넌 죽지 마. 너무 금방 죽어 버리면 싫어.”
“무슨 개소리야?”
그건 욕이야, 핀잔이야? 나 개 맞는데.
여하간 우울해하는 내 뺨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 준 그는 곧 내가 입을 옷가지들을 펼쳐 놓았다. 크기가 크다. 이 건장한 젊은 인간 남자가 평소에 입던 것이 틀림없다.
“주문해 뒀으니 내일은 새 옷이 배달 올 거야. 일단은 이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걸 입어.”
후드 티에 머리를 꿰고 팔을 집어넣자 품이 넉넉한 원피스가 되었다.
“호오!”
좋은 촉감이다. 마음에 들어서 팔에 얼굴을 비볐다.
“비싼 건 알아 가지고.”
조이가 중얼거리는 건 못 들은 체했다. 조이가 침대에 털썩 누워서 팔목에 머리를 베고는 물끄러미 이쪽을 보았다. 나는 생긋 웃어 주었다.
그가 물었다.
“네 전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지?”
“부자에다 상냥하고 나를 좋아했어.”
“그런데 넌 왜 거기에 있게 된 거야?”
“좋은 사람이었는데 머리가 나빠서, 빚잔치가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나를 팔게 되었거든.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팔지 않으려고 버텼으니까 틀림없이 마음에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좋아했나?”
“그랬으니까 순순히 팔린 거지.”
“착한 개네. 이리 와.”
그가 한쪽 팔을 벌리고 침대를 탁탁 쳤다. 나는 그 팔 사이에 파고들어 조이의 옆구리에 매달리듯 누웠다. 그의 가슴에 코끝을 걸치고 흠뻑 냄새를 들이마셨다. 빳빳한 섬유 냄새와 희미한 잉크 냄새, 그리고 화약 냄새가 난다. 침대 한쪽을 내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조이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내 애교에 녀석이 쿡, 웃음 지었다.
“분명히 새로운 곳이 마음에 들 거야.”
나직하고 듣기 좋은 저음이 정수리 끝에 맴돌다가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처음 만난 인간의 집, 새로운 침대 위에서 잠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안락함이었다.

일상 part 2. 첫 출근.

눈을 뜨자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유리벽 너머 부엌에는 벌써 출근 준비를 마친 제복 차림의 조이가 있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잠깐 눈을 깜박이다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일어났으면 씻고 거기 둔 옷, 입어.”
조이는 솜씨 좋게 프라이팬을 다루며, 이쪽은 보지도 않고 한쪽을 손가락질해 가리켰다. 곱게 접어 둔 옷가지가 보였다. 누가 봐도 지금 조이가 입고 있는 제복과 같은 디자인이다.
아침은 직접 해 먹는 초식계 남자, 조이가 물었다.
“아침은?”
메뉴를 말하는 건가?
“고기?”
“무리야. 나는 아침엔 달걀과 크루아상, 사과 하나, 커피 한 잔으로 정해져 있거든.”
진짜 엄청나게 초식할 것 같은 스타일이잖아?! 그 외모에, 그 덩치에 육식남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니! 어딘가 기대치를 배신당한 기분이다.
“그럼 달걀 많이.”
초식 인간남자와 육식견의 동거란 이러한 법이다.
적당히 눈에 붙은 눈곱만 떼고 비비적비비적 제복을 걸치고 있자니 꽤나 껄끄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힐끗 돌아보니 사내의 잔뜩 가늘어진 눈초리가 매섭다. 그가 말했다.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밥은 주지 않을 거야.”
“너무해!”
횡포다! 공연히 시무룩해졌지만 어쩔 수 없지. 욕실로 쫓겨나 물을 틀었다. 막상 손에 물이 닿고 나서는 첨벙첨벙 거의 상의가 다 젖을 정도로 신나게 놀아 버렸다. 물놀이에 가까운 씻기 활동에 매진하다가, 벌컥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온 조이의 아연해진 얼굴을 보고서야 아침 씻기 활동은 끝이 났다.
2인용 테이블에 마주앉자 조이가 씹어 먹을 듯 말했다.
“다시는 씻기 전에 착복하지 마라.”
그 말엔 공감. 축축해진 옷을 입은 채 스크램블을 입에 구겨 넣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 * *

특별경찰청은 이스턴시티의 중심지, 행정밀집 지구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20세기 초 건설된 8층짜리 건물과, 21세기 초 건설된 42층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다. 꼬박 1백 년 간격으로 지어진 이 두 건물은 지금이야 나이 들어 겉모습은 왜소해졌지만 품위는 넘치는 아버지, 그리고 아직까지 힘이 넘치는 중년의 아들 같은 모양새로 나란히 서 있었다.
조이의 차는 아버지 건물 앞에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차가 멈춰 선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다가 조이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얼을 빼놓고 있다간 개장수들한테 납치될걸?”
“내가?”
“명색이 특경청 소속이면서 그런 불명예를 안았다간 혼날 줄 알아.”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떻게 혼낼 건데?”
“저녁도 달걀로 때우게 해 주지.”
바로 정색하며 이 똑똑한 인간 놈의 사악한 지능에 경의를 표했다. 조이를 따라 차에서 내려 그의 곁에 다가섰다. 개의 세계처럼 인간의 세계에도 서열은 중요하다. 나는 조이의 왼쪽 가슴에 장착된 다이아몬드 배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근사해 보였다. 참고로 내 가슴에는 아직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오늘부터 일할 곳이야.”
조이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 건물을 가리켰다. 그전에 살았던 저택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품위 있는 건물이다. 새 직장이 근사하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제복 인간들이 조이를 보더니 경례했다. 그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져서 배시시 웃어 주자 흠칫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해치지 않아, 겁낼 것 없어.”
“뭐하는 거야? 인사는 나중에 하고 어서 와.”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은 아버지 건물은 어느 한곳 빼놓지 않고 반들반들 길이 잘 들어 있었다.
때앵—! 벨소리가 울리고 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복도 맞은편에 특수경찰 기동단 명패가 걸린 문이 보였다. 놀랍도록 모든 것이 옛날식이다. 나무 명패라니, 믿어져? 요즘엔 죄다 홀로그램 간판이라고.
“여기가 우리 아지트. 130년째 기동단이 점거 중이지.”
조이는 쾌활한 걸음걸이로 기세 좋게 그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노골적인 시선들이 와 박혔다. 제일 먼저 어제의 커트머리 여자가 싱긋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단장! 좀 늦으셨네요? 혹시 지금 서 안이 온통 뉴 페이스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하단 건 알고 있어요?”
조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임시고,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뉴 페이스지.”
“기동단에도 드디어 첫 ……유전자변이인간이 들어오는 거잖아요. 당연히 모두들 궁금해할 수밖에.”
나는 그 정식 명칭에 풋, 웃음 짓고 말았다. 어제는 개라고 했으면서. 눈치 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지칭에 웃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세상에는 그렇게까지 곧이곧대로 호칭하는 사람도 없고. 그저 ‘개’면 족하다.
조이는 가장 안쪽 자기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예비 경찰견. 제대로 된 건 아니지만, 확실히 우리 과에는 처음이지.”
그는 나를 빙글 돌려 세우더니 5층 전체를 쓰고 있는 기동단 근무 특경들에게 보였다.
“이름은 클로이. 오늘 오후— 시험을 통과하면 내일부터 정식으로 우리 기동단 일원이 될 예정이다. 점수가 나빠 특경이 되지 못하면, 뭐— 마스코트라도 되겠지?”
마지막 말은 자존심을 긁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모두를 향해 방긋 웃음 지었다. 그리고 장차 동료가 될 이들을 향해 경쾌한 어조로 인사했다.
“클로이야. 마스코트로도 부족함 없을 정도로, 보이는 대로 몹시 아름답지.”
나는 내 능력과 품성, 재능과 식성, 열정은 물론이고 생김새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일류 개니까. 일제히 멍청한 얼굴이 된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화사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일상 part 3. 입사시험.

어디에서나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은 ‘개’의 세계에 있어서는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는 특기다. 개는 대체로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편이고, 게다가 굉장히 희귀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좋아했다.
물론 본질적인 혐오감에 치를 떠는 잘나 빠진 순혈 우월주의자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 이 나를 보면 시선을 떼지 못한다고. 더군다나 이 몸은 한낱 관상용 개 따위가 아니니 더 우월하지.
커트머리 여자를 따라 입사 시험장으로 향하는 동안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음껏 즐겼다.
내 굽이치며 윤기 나는 금발은 벌꿀처럼 달콤한 색이고, 태생이 북유럽계인 덕분에 창백하도록 맑은 우유색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끈하며 우아하다. 인간과 달리 몸이 망가질 걱정 따윈 평생 없을 정도로 날씬한 데다가 완벽한 비율의 신체를 가졌다.
이런 나를 동경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혈통 귀족의 정점, 보석의 임금님, 무려 다이아몬드의 이름을 가진 나는 샌시라고. 생김새로만 보면 샌시가 골든 쥬빌리에게 살짝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 가계(家系)에서도 막내인 내가 가장 아름답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나야말로 샌시의 순혈 중에 순혈로, 샌시의 모든 특성을 타고 태어났댔으니까.
전 주인은 그래서 나를 항상 품에 끼고 다녔고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껏 등을 펴고 나를 자랑했더랬다. 그 덕인지 주인이 파산했을 때는 이리저리 사람들 손을 돌고 돌아 결국 돈만 많은 깡패 협잡꾼 놈팽이 손에 떨어지고 말았지만.
“신입이 자의식 과잉인 것 같아요.”
음? 앞을 보자 어느샌가 커트머리의 여자가 어느 제복남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다만 이 몸의 청각은 1킬로미터 밖의 속삭임도 정확히 알아들을 정도로 완벽하단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어.
순진한 눈망울로 깜박깜박 속눈썹을 깜박이며 제복남을 바라보자 그는 푸핫, 웃음을 터뜨리곤 손을 내밀었다.
“안녕, 네가 그 뉴 페이스로구나. 난 인사부 감독관 잭 프로비셔. 오늘은 너의 채점을 담당하고 있지.”
“클로이야.”
그 손을 마주 잡고 방긋 웃었다.
“아아~! 녹네, 녹아! 귀여운 녀석! 가산점이다! 그렇지, 무릇 민중의 지팡이라면 웃는 얼굴이 생명이지!”
몸살 난다는 듯 몸을 비비꼬는 덩치 제복남을 보며 부지런히 영업하는 와중에도, 나는 커트머리 여자를 한 번 홱 째려보았다.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클로이. 시험이 끝나면 데리러 올게.”
나는 냉큼 내 취직을 결정할 감독관의 옆에 붙어 섰다.
“그러시든지.”
그런 나를 보며 커트머리는 흘러가는 투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우리 집 일류 스테이크 레스토랑이라구.”
아닛?! 그런 중요한 정보는 좀 더 빨리 말하라굿! 이 유용한 사람아!
자동반사적으로 활짝 웃는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요, 선배.”
머릿속에서 타다다탕! 순위 급상승! 커트머리의 서열이 조이와 동급으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더불어 훗날 이 커트머리 여자는 특경청 내에서 바보개 조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 * *

특경청 신체검사장.

신체의 효용성. 뼈와 근육이 빚어내는 물리학적 결과. 내 몸에 쓸모없는 기관이란 없다. 솜털 하나까지 제어할 수 있다면, 세포와 혈관, 몸의 수축과 확장, 혈액의 흐름까지 제어할 수 있다면— 목적에 최적합한 움직임을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육신의 자유에 가슴이 뻥 뚫린 듯 상쾌한 쾌감이 정수리를 꿰뚫었다. 이것은 무한한 즐거움이다. 건강한 육체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황홀한 기쁨이다.
손에 쥔 가루를 털어 버리며 나는 깊게 들숨을 배 아래까지 끌어 당겨 마셨다가 눈을 감으며 날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쉽지만 다시 스스로의 신체에 차례차례 족쇄를 걸었다. 민감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은 얌전한 아가씨처럼 정숙하게 가다듬고, 팽배해져 있던 긴장한 근육들도 원래의 부피를 되찾는다. 그리하여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 시험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거친 숨소리를 다듬으며 말했다.
“어때, 프로비셔? 이 정도면 합격이야?”
꿀꺽 침을 삼킨 그는 주섬주섬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느라 잠시 타이핑을 멈추었던 그의 두 손은 다시 나비처럼 춤을 추며 움직인다.
“인간을 죽인 적은?”
“없어.”
“다치게 한 적은?”
대답 대신 나는 그저 입술을 말아 올렸다. 눈이 마주친 감독관은 흠칫 시선을 피하고서 다음 질문을 했다.
“다른 유전자변이 생물체를 살해한 적은 있나?”
“있어.”
“무슨 이유로?”
“내 주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살해였나?”
“물론.”
“다른 생물은?”
“나는 사냥개다. 쫓고 죽이기 위해 태어났지.”
“……오싹하군.”
그와의 문답은 굳이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특경이 되면, 사람을 죽이게 될 수도 있다. 가능한가?”
“글쎄.”
사나운 개를 훈련시킬 때는 절대적으로 해선 안 되는 것의 교육이 필히 동반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에게 있어 절대적인 금기는 ‘순혈 인간의 목숨을 해하지 말 것’이다. 이 금기가 어떤 식으로 내 행동에 제재를 가하게 될지는 그 순간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합격.”
잭 프로비셔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련의 기록이 담겨 있을 디스크를 보여 주었다.
“합격이다. 너와 관련된 정보는 전부 수집했어. 네 훈련소 기록도 봤고— 아주 우수하던걸? 최근 1년간의 기록 외에는 별달리 수상한 점도 없었고. 취직 축하해. 아, 그렇다고는 해도 필수 훈련 과정은 이후 반년 내에 꼭 수료해야 돼. 네 수준에선 그냥 교양수업이나 마찬가지지. 기동단에서 알아서 할 거야.”
“그렇군—”
“취직은 축하하지만— 이 건물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 문화유산이니까 더 이상 훼손하는 건 참아 주라.”
걱정으로 가득한 그 음성에 나는 손바닥을 슥, 허벅지에 문질러 닦았다.
“걱정 마. 그 역시 훈련받은 사항이니까. 허락받지 않는 이상 나는 꽤 얌전하다고.”
여기저기 움푹 파이고 또 뜯어내져, 보기 흉하게 가루가 되어 버린 시험장은 처음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한바탕 날뛰고 나면 제아무리 철근 콘크리트라도 무사하지 못하다. 그래도 덕분에 십 년 묶은 체증이 가신 것처럼 속은 시원했지만!
전쟁터 같은 시험장의 한가운데 서서 나는 모처럼 만에 후련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