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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동글납작한 커피 스푼에 오목하게 혹은 볼록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무료하게 들여다보던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곤 딸각,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제법 큰 커피숍을 둘러본다. 둘 혹은 셋씩 앉은 테이블이 대부분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는 그 혼자뿐이다. 여자가 자신의 테이블로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옷깃을 여미며 일어났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홍연지라고 합니다.”
여자의 상큼한 미소는 넓은 호텔 커피숍의 밋밋한 공기를 밀어내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 같았다.
“박진우입니다. 어서…… 앉으시죠.”
남자는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묻는 그녀에게 ‘제가 좀 일찍 도착했습니다’ 대답하며 의자에 등을 바짝 붙여 앉았다. 단정한 투피스 정장에 빈틈없이 틀어 올린 머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게 할 만큼 깔끔한 이미지의 여자를 마주하자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결혼 상대를 골라야 하는 맞선 자리에선 보는 눈이 더 까다로워진다. 평생에 딱 한 번 해야 하는 선택을 앞두고 서로의 조건을 저울질하느라 바쁘기에 연애할 때와는 마음 자세부터 다르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로 나간 맞선 자리는 세 번, 네 번 횟수만 거듭되었다. 설렘과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하고 지루한 만남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끝낼 수 있을까 고민만 반복하게 했다.
맞선이 삼세번으로 결정 나지 않으면 서른 번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예언 같아 불길했는데, 남자는 다섯 번째인 이번은 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불금이라 차가 많이 막히죠?”
주문받은 웨이트리스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묻자 여자의 크고 까만 눈동자가 예쁘게 접히며 웃는다.
“먼저 나와 계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더 죄송해지네요.”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기분 좋은 목소리다.
총명해 보이는 눈빛 때문인지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임에도 똑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래개발’ 비서실에 근무한다더니 역시 비서 같은 이미지다. 프로필을 보지 않았다면 복장 규율이 엄격하다는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녹차 잔을 감싸 쥔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은 짧게 잘려 투명 매니큐어만 바른 상태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화려한 네일아트만 봐 왔던 그의 눈엔 젊은 여자의 핑크빛 속살을 내보이는 손톱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옷차림도 그렇고 생략된 것이 많은 액세서리와 화장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보수적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연애 상대로는 답답하겠지만 결혼할 여자라면 그런 성격이 더 좋을 수도.
“회사에서 바로 오신 모양이죠?”
“예. 여기서 20분 정도 거리에 회사가 있습니다. 물론 차가 안 막힐 때 얘기고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미래개발이라고 중견 건설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미래개발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제 직업이 회계사인데요. 하하하!”
그동안 머리 터지도록 공부한 이유가 예쁘고 조건 좋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상기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레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미래개발은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동종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알짜 건설 회사다. 여자의 직업이 앞서 맞선을 봤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비해 레벨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미래개발 사장 비서실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기에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가 상상하던 비서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아름다우시다는 뜻입니다. 아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는 말끝마다 웃는다.
그도 여비서라면 예쁘게 꾸미고 자리를 지키다가 차 심부름이나 하는 줄 아는 대부분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몇 차례 맞선 상대에게 비서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 능력을 요구받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다 지쳐 버린 연지는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녹차를 마셨다. 지금 마주 앉은 그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연봉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기에.
저 혼자 떠드는 것에 머쓱했는지 남자가 들떴던 표정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한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뭐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업무 특성상 주말은 물론이고 밤낮없이 전화가 옵니다.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무조건 받아야 하고요. 야근도 잦고 새벽에 출근해야 할 때도 있어요. 오늘도 다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금요일 밤, 데이트 중에 남자가 가장 듣기 싫어할 말이다.
“호출이 오면 언제든 달려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생활에 제약이 많습니다. 이런 제 상황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연지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실 수 있다면, 그때 제가 박진우 씨께 궁금한 점을 묻겠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조건.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관계 발전은 없다는 뜻이었다.
1. 결혼의 이유
사장의 잦은 출장으로 임원 회의가 두 달 만에야 소집되었다. 점심도 거른 채 살벌하게 이어지던 회의는 오후 늦게서야 끝이 났는데, 회의실에서 흐느적 걸음으로 나오는 간부들은 마치 대패한 전장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패잔병들 같았다.
제일 많이 깨진 관리이사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머리를 북북 긁어 넘기고,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회계부장은 혈압이 치솟는 뒷목을 잡으며 아이고, 앓는 소리를 냈다. 뭘 잘못했는지 경영지원부장이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뒤를 따른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비서실장이 누렇게 뜬 얼굴로 연지에게 눈짓한다.
프린터기 앞에서 동동거리던 그녀가 다 되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바쁜 때에 하필 토너가 떨어져 출력물을 다시 뽑는 중이다. 당장에라도 벌컥 열릴 것 같은 사장 집무실과 인터폰을 번갈아 보다가 느리게 기어 나오는 마지막 A4 용지를 잡아 빼 잽싸게 훑어보곤 결재판에 꽂았다.
수북이 쌓인 결재판들과 다이어리까지 한꺼번에 안아 들고 집무실 앞에 가서야 노크할 손이 없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려 열려 있는 회의실로 향한다.
열댓 명의 임원들이 종일 갇혀 진땀 뺐던 회의실은 후텁지근한 공기로 가득했다. 날 선 질책과 무시무시한 눈초리, 숨죽인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빠르게 회의실을 가로질러 연결된 집무실로 들어가자 미래개발 차문후 사장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체격이 커서인지 앞에 놓인 노트북이 유난히 작아 보인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가 고개도 들지 않고 어서 가져오라 손을 까닥거리자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연지가 결재판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밤 10시 비행기로 예약했습니다.”
어제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사장은 오늘 오후에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오전 임원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부득이 일정을 미뤄야 했다.
급하게 예약을 변경하고 중국 현지 업체들과의 스케줄을 다시 조율하느라 연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후 내내 전화기와 씨름했더니 왼쪽 귓속에서 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사장은 새로 작성된 출장 계획서와 각종 예약 상황, 변경된 미팅 일정을 체크해 나갔다. 조금 전 초주검이 되어 몰려 나가던 임원들의 기를 혼자 다 빨아먹기라도 했는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산뜻한 얼굴이다.
노트북 화면과 보고서를 번갈아 오가던 시선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확인하곤 짜증이 스친다.
“……나야.”
휴대폰을 받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책상 건너편에 선 연지에게까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진 짐작된다.
김이영. 스물세 살의 모델 겸 신인 영화배우로 사장이 요즘 만나고 있는 여자인데 그의 잦은 출장으로 투정을 부리는 것 같다.
연지는 결재가 끝나면 건네주려던 선물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방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사장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미래개발 비서실 4년 차, 그중 3년을 사장의 업무비서로 근무했지만 아직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긴장된다.
통화에 방해되지 않게 메모를 써 선물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김이영 씨의 생일. 선물은 다이아 브로치. (기울이기)/
사장의 눈이 메모를 훑었음에도 굳은 표정에는 변화가 없고, 휴대폰에선 앙알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얼굴이 어느 순간 싸늘하게 식는다.
“……시팔. 뭐, 사랑? 주제 파악을 하면서 징징거려. 밥 사 주고 섹스하고, 쇼핑시켜 주고 섹스하고, 놀아 주고 섹스하고……. 너한텐 그게 사랑이니? 앞으로 남자 만날 땐 달고 다니는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해.”
휴대폰을 팽개치듯 내려놓은 손이 선물 상자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이니셜까지 새겨 주문 제작한 고가의 브로치가 쓰레기 처리되는 순간이다.
3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만남이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 날 개관식 축사 초안을 검토 중인 사장의 머릿속에서 김이영이라는 여자는 이미 깨끗하게 지워졌을 것이다.
그의 앞에 탑처럼 쌓였던 결재판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다이어리를 쥐고 있는 연지의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밴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지금이 적당한 때가 아닌 줄은 알지만, 오늘 출장을 떠나면 사장은 일주일 후에나 귀국한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라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다이어리 갈피에서 빼낸 하얀 봉투를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사인을 휘갈기던 눈이 ‘사직서’를 발견했다.
프롤로그
동글납작한 커피 스푼에 오목하게 혹은 볼록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무료하게 들여다보던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곤 딸각,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제법 큰 커피숍을 둘러본다. 둘 혹은 셋씩 앉은 테이블이 대부분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는 그 혼자뿐이다. 여자가 자신의 테이블로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옷깃을 여미며 일어났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홍연지라고 합니다.”
여자의 상큼한 미소는 넓은 호텔 커피숍의 밋밋한 공기를 밀어내는 한줄기 청량한 바람 같았다.
“박진우입니다. 어서…… 앉으시죠.”
남자는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묻는 그녀에게 ‘제가 좀 일찍 도착했습니다’ 대답하며 의자에 등을 바짝 붙여 앉았다. 단정한 투피스 정장에 빈틈없이 틀어 올린 머리.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게 할 만큼 깔끔한 이미지의 여자를 마주하자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결혼 상대를 골라야 하는 맞선 자리에선 보는 눈이 더 까다로워진다. 평생에 딱 한 번 해야 하는 선택을 앞두고 서로의 조건을 저울질하느라 바쁘기에 연애할 때와는 마음 자세부터 다르다.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로 나간 맞선 자리는 세 번, 네 번 횟수만 거듭되었다. 설렘과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하고 지루한 만남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끝낼 수 있을까 고민만 반복하게 했다.
맞선이 삼세번으로 결정 나지 않으면 서른 번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예언 같아 불길했는데, 남자는 다섯 번째인 이번은 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불금이라 차가 많이 막히죠?”
주문받은 웨이트리스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묻자 여자의 크고 까만 눈동자가 예쁘게 접히며 웃는다.
“먼저 나와 계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더 죄송해지네요.”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기분 좋은 목소리다.
총명해 보이는 눈빛 때문인지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임에도 똑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래개발’ 비서실에 근무한다더니 역시 비서 같은 이미지다. 프로필을 보지 않았다면 복장 규율이 엄격하다는 스튜어디스나 아나운서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녹차 잔을 감싸 쥔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은 짧게 잘려 투명 매니큐어만 바른 상태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화려한 네일아트만 봐 왔던 그의 눈엔 젊은 여자의 핑크빛 속살을 내보이는 손톱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옷차림도 그렇고 생략된 것이 많은 액세서리와 화장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보수적일 것이라 짐작되었다. 연애 상대로는 답답하겠지만 결혼할 여자라면 그런 성격이 더 좋을 수도.
“회사에서 바로 오신 모양이죠?”
“예. 여기서 20분 정도 거리에 회사가 있습니다. 물론 차가 안 막힐 때 얘기고요. 아실지 모르겠는데 미래개발이라고 중견 건설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미래개발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제 직업이 회계사인데요. 하하하!”
그동안 머리 터지도록 공부한 이유가 예쁘고 조건 좋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상기한 그는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레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미래개발은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동종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알짜 건설 회사다. 여자의 직업이 앞서 맞선을 봤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종에 비해 레벨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미래개발 사장 비서실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 그녀가 마음에 들었기에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가 상상하던 비서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아름다우시다는 뜻입니다. 아하하하!”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는 말끝마다 웃는다.
그도 여비서라면 예쁘게 꾸미고 자리를 지키다가 차 심부름이나 하는 줄 아는 대부분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몇 차례 맞선 상대에게 비서라는 직업이 얼마나 많은 능력을 요구받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다 지쳐 버린 연지는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녹차를 마셨다. 지금 마주 앉은 그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연봉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기에.
저 혼자 떠드는 것에 머쓱했는지 남자가 들떴던 표정을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한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은 없습니까?”
뭐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작정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업무 특성상 주말은 물론이고 밤낮없이 전화가 옵니다.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무조건 받아야 하고요. 야근도 잦고 새벽에 출근해야 할 때도 있어요. 오늘도 다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금요일 밤, 데이트 중에 남자가 가장 듣기 싫어할 말이다.
“호출이 오면 언제든 달려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예.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사생활에 제약이 많습니다. 이런 제 상황을…….”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연지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실 수 있다면, 그때 제가 박진우 씨께 궁금한 점을 묻겠습니다.”
양보할 수 없는 조건.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관계 발전은 없다는 뜻이었다.
1. 결혼의 이유
사장의 잦은 출장으로 임원 회의가 두 달 만에야 소집되었다. 점심도 거른 채 살벌하게 이어지던 회의는 오후 늦게서야 끝이 났는데, 회의실에서 흐느적 걸음으로 나오는 간부들은 마치 대패한 전장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진 패잔병들 같았다.
제일 많이 깨진 관리이사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머리를 북북 긁어 넘기고,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회계부장은 혈압이 치솟는 뒷목을 잡으며 아이고, 앓는 소리를 냈다. 뭘 잘못했는지 경영지원부장이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뒤를 따른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비서실장이 누렇게 뜬 얼굴로 연지에게 눈짓한다.
프린터기 앞에서 동동거리던 그녀가 다 되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바쁜 때에 하필 토너가 떨어져 출력물을 다시 뽑는 중이다. 당장에라도 벌컥 열릴 것 같은 사장 집무실과 인터폰을 번갈아 보다가 느리게 기어 나오는 마지막 A4 용지를 잡아 빼 잽싸게 훑어보곤 결재판에 꽂았다.
수북이 쌓인 결재판들과 다이어리까지 한꺼번에 안아 들고 집무실 앞에 가서야 노크할 손이 없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려 열려 있는 회의실로 향한다.
열댓 명의 임원들이 종일 갇혀 진땀 뺐던 회의실은 후텁지근한 공기로 가득했다. 날 선 질책과 무시무시한 눈초리, 숨죽인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빠르게 회의실을 가로질러 연결된 집무실로 들어가자 미래개발 차문후 사장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체격이 커서인지 앞에 놓인 노트북이 유난히 작아 보인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가 고개도 들지 않고 어서 가져오라 손을 까닥거리자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연지가 결재판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밤 10시 비행기로 예약했습니다.”
어제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사장은 오늘 오후에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오전 임원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부득이 일정을 미뤄야 했다.
급하게 예약을 변경하고 중국 현지 업체들과의 스케줄을 다시 조율하느라 연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후 내내 전화기와 씨름했더니 왼쪽 귓속에서 벌이 붕붕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사장은 새로 작성된 출장 계획서와 각종 예약 상황, 변경된 미팅 일정을 체크해 나갔다. 조금 전 초주검이 되어 몰려 나가던 임원들의 기를 혼자 다 빨아먹기라도 했는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산뜻한 얼굴이다.
노트북 화면과 보고서를 번갈아 오가던 시선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확인하곤 짜증이 스친다.
“……나야.”
휴대폰을 받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는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책상 건너편에 선 연지에게까지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진 짐작된다.
김이영. 스물세 살의 모델 겸 신인 영화배우로 사장이 요즘 만나고 있는 여자인데 그의 잦은 출장으로 투정을 부리는 것 같다.
연지는 결재가 끝나면 건네주려던 선물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방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사장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미래개발 비서실 4년 차, 그중 3년을 사장의 업무비서로 근무했지만 아직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긴장된다.
통화에 방해되지 않게 메모를 써 선물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김이영 씨의 생일. 선물은 다이아 브로치. (기울이기)/
사장의 눈이 메모를 훑었음에도 굳은 표정에는 변화가 없고, 휴대폰에선 앙알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얼굴이 어느 순간 싸늘하게 식는다.
“……시팔. 뭐, 사랑? 주제 파악을 하면서 징징거려. 밥 사 주고 섹스하고, 쇼핑시켜 주고 섹스하고, 놀아 주고 섹스하고……. 너한텐 그게 사랑이니? 앞으로 남자 만날 땐 달고 다니는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해.”
휴대폰을 팽개치듯 내려놓은 손이 선물 상자도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이니셜까지 새겨 주문 제작한 고가의 브로치가 쓰레기 처리되는 순간이다.
3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만남이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 날 개관식 축사 초안을 검토 중인 사장의 머릿속에서 김이영이라는 여자는 이미 깨끗하게 지워졌을 것이다.
그의 앞에 탑처럼 쌓였던 결재판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다이어리를 쥐고 있는 연지의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밴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지금이 적당한 때가 아닌 줄은 알지만, 오늘 출장을 떠나면 사장은 일주일 후에나 귀국한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라 더는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며 다이어리 갈피에서 빼낸 하얀 봉투를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사인을 휘갈기던 눈이 ‘사직서’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