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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목을 조르는 듯한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다.
사장의 시선이 다시 서류로 돌아가고 사인의 마지막 방점까지 찍힌 결재판이 덮여 옆으로 밀려났다. 다음 결재판을 펼친 손이 기안서 표지를 넘기고 숫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표 자료를 뒤적인다.
“……덧붙일 말은 없어?”
그녀가 초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다.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불호령이 떨어지지도, 온몸이 난자당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쏘아보지도 않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결혼할 계획입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라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입술이 달싹였는데 ‘결혼’이라고 한 것 같다. 단어의 의미를 곱씹는 것처럼, 혹은 다른 뜻이 있는지 되짚어 보듯이.
부욱, 서류에 붉은 선이 칼자국처럼 그어지고 사인 대신 ‘재작성’이라고 휘갈겨졌다. 밑도 끝도 없이 부결된 그 보고서를 돌려받은 누군가는 사장이 부재중인 앞으로의 일주일을 머리 쥐어뜯으며 보내게 될 것이다.
마지막 결재판을 덮은 문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슬슬 출발해야 한다.
책상 너머 홍 비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직서 봉투 속의 A4 용지를 꺼내 특별할 것 없는 그것을 대충 훑고 던져 놓았다. 일률적으로 인쇄된 내용에 직접 써 넣은 글자라곤 ‘개인적인 사정’과 말미에 ‘홍연지’뿐이다.
그는 장시간 회의로 단내 나는 입에 껌 두 알을 털어 넣고 어금니로 으드득 깨며 회전의자에 몸을 기댔다.
“업무량이 많다는 항의를 이런 식으로 하나?”
“아닙니다. 정말 결혼하려는 겁니다.”
“미래개발은 결혼하면 그만둬야 하는 회사가 아니니 결혼이 사직의 이유가 될 순 없어.”
“제 업무 특성상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을 병행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문후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시도 때도 없는 업무 지시에 홍 비서는 항시 대기 상태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중에도 할 짓은 다 하고 있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는 줄 몰랐네. 데이트할 시간도 없이 바쁜 홍 비서를 더는 참아 줄 수 없대? 그래서 회사 그만두고 결혼하기로 한 거야?”
“만나는 남자 없습니다. 맞선을 보는 중입니다.”
껌을 질겅거리던 입이 벌어진 채로 멈췄다. 곧 되지도 않는 소리를 더 들어 줄 시간이 없다 결론 내리고 책상 밑에서 가방을 꺼내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담는다.
“나 지금 공항으로 출발해야 해. 시간 없으니까 원하는 걸 말해. 출장 다녀와서 연봉 협상 다시 할까? 아니면 휴가가 필요해?”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혼하려는 겁니다. 사표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쏘아본 문후는 출장 자료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홍 비서가 다가와 거들자 일정에 맞춰 업체별로 분류된 자료들이 각각의 파일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는 서랍에서 필요한 잡동사니를 꺼냈다.
“갑자기 결혼해야겠다 결심하고, 결혼할 남자를 만나기 위해 맞선을 보고,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져?”
“사표는 인수인계할 시간이 필요해 먼저 낸 겁니다. 인수인계를 하려면 비서실 직원인 경우 2개월, 신입인 경우 3개월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후임 비서를 비서실 직원 중에서 뽑으실지 신규 채용하실지 말씀해 주시면 인사과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순식간에 출장 가방이 꾸려졌다.
무엇이든 홍 비서의 손이 닿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 단순한 문서 작성부터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계약 건까지 그녀는 주어진 업무를 빠르고 완벽하게 해내곤 했다.
자연스레 크고 작은 일들이 홍 비서에게 집중되었고, 그녀의 업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금도 늘어나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홍 비서는 미래개발의 공식적인 급여 테이블을 한참 뛰어넘는 연봉을 받고 있다. 그동안 불평 한마디 없기에 만족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표를 던진다.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남자도 없다면서. ……장난하나.
“결혼이 왜 하고 싶어졌는데?”
“제 꿈이 현모양처입니다.”
중국어로 제작된 명함을 가방 앞주머니에 밀어 넣던 문후의 입에서 ‘하!’ 헛기침 같은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으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입사 지원서에도 그렇게 썼었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최고의 학벌을 가진 21세기 여성의 꿈이 ‘현모양처’라니. 자신의 오른팔이라 믿고 부리던 홍 비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문후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그녀가 펼쳐 든 옷에 팔을 꿰었다. 차콜 그레이 슈트가 넓은 어깨에 착 맞아떨어졌다.
“꿈을 이루고 싶은 홍 비서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결혼은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옷깃을 당겨 단추를 잠그며 거울을 통해 등 뒤에 선 홍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상황이 아무리 복잡해도 상하 앞뒤 구분할 줄 알고, 업무적으로 재난에 가까운 사고가 펑펑 터져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당황해서 허둥대거나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그가 홍 비서를 높이 평가하고 신뢰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바르게 매만지고 돌아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퇴근 시간과 맞물릴 것 같아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굽어보는 시선에 오금이 저릴 법도 한데 홍 비서는 자신의 결심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꼿꼿하기만 하다.
한 번만 노려봐도 알아듣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욕을 바가지로 해야 정신을 차리는 직원이 있다.
홍 비서를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에 속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싶으면 지금처럼 눈을 내리깔며 절대 맞서거나 대들지 않는다. 상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직원이 바로 그녀다. 일만 잘하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진즉에 기를 꺾어 놓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후회된다.
뚜벅, 다가서는 걸음에 홍 비서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머리 꼭대기의 새까만 포니테일을 노려보자 몰아쉬는 콧김에 그녀의 앞 머리카락들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의 숨이 평소보다 거칠어져 있음을 홍 비서도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열 마디 호통보다 더 효과적인 잠깐의 침묵. 뒤를 이어 바닥을 긁듯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 그래?”
홍 비서의 눈이 반짝 올려 떠졌다. 약간 놀란, 경계의 빛이 어리는 눈동자를 잡아챈 그가 느릇하게 웃는다.
“그러면 TV를 켜. 홍 비서가 평생 만날 일 없는 근사하고 멋진 남자 배우가 데이트하는 프로를 보며 대리 만족할 수 있을 거야. 결혼하고 싶다고? 그때도 TV를 켜. 홍 비서보다 훨씬 어리고 예쁜 연예인이 대신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해서 살아 줄 거거든. 애도 낳아 키우고 싶어? TV를 켜라니까. 애새끼 셋씩 넷씩 낳아 키우는 난장판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회사 창립 멤버로 20년 가까이 근속했던 임원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갑자기 사표를 던졌을 때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젠 쉬실 때도 되었다, 손주들 재롱 보면서 노년을 즐기시라 박수치며 등 떠밀었는데…….
시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에 비행기를 또 놓치게 생겼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하물며 먹고 싶은 것까지 TV가 대신 먹어 주는 세상인데 도대체 뭐가 더 아쉬워서 그 빌어먹을 결혼을 하겠다는 거냐고!”
버럭 지르고 나서 아차 싶어 눈을 감았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직원을 사표 수리가 아니라 해고하고 싶었지만, 구상 중인 사업 계획이 전광석화처럼 휙휙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중국 허난성에서 추진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리조트 사업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앞으론 더 바빠질 일만 남았는데 그 모든 스케줄을 차질 없이 진행하려면 홍 비서가 있어야 한다.
취업난이 심각하다지만 오너도 마냥 속 편한 세상은 아니다. 마음에 쏙 드는 직원을 참모로 두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때로는 자신의 머릿속을 투시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의중을 잘 파악해 지시하는 일을 척척 해내는 그녀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홍 비서…….”
문후는 심호흡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동안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인내심을 다시 한 번 긁어모았다.
“우리 같은 워커홀릭에겐 말이지…… 결혼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일 안 하면 우울증 걸려.”
묵직한 출장 가방을 내민 홍 비서가 싱긋 웃는다.
“불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표 수리해 주십시오.”
***
초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가을 단풍처럼 짙붉어진 하늘이 초록색 지붕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자 여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투덕거리신다.
“휴가를 이 시골구석에서 다 보낼 거여? 내일은 올라가.”
“놔둬요. 올라갈 때 되면 저가 알아서 가겠지.”
연지는 먹다 남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마당 구석에 묶여 있는 검둥이의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탐이 많은 녀석인데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새끼를 밴 후로는 뭐든 먹어 치울 기세다. 지금도 밥그릇에 밥이 다 담기기도 전에 주둥이를 들이밀더니 폭풍 흡입 중이다. 영양이 부족한가. 달걀이라도 깨서 넣어 줘야겠다.
“……몇 년 만의 휴가인데 늙은이들이랑만 있으니까 그렇재. 한창 좋을 나이에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오죽 많겠어.”
평상에 널어놓았던 고추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쓸어 담던 할머니가 결국엔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고, 저 양반이 손녀 왔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오랜만에 내려와서 쉬는 애한테 뭔 잔소리를 하루도 안 빼먹고 하는지 모르겄네. 당신 말마따나 어린애도 아닌데 친구를 만나든 말든 저가 알아서 하겠지!”
“예. 내일 올라갈 거예요.”
달걀을 가져와 개밥에 넣어 준 연지가 손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투덕거리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평생 함께 사셔서 눈빛까지 똑같이 닮아 버린 얼굴로 돌아보신다.
“……내일 올라갈 게야?”
지난 일주일 동안 날마다 저녁 인사처럼 ‘내일은 올라가라’ 말씀하시던 할아버지가 오히려 더 아쉬워하는 눈치시다. 실은 ‘내일도 있을 거지?’라는 뜻이었다는 걸 연지도 알고 있다.
“저 양반이 오랜만에 내려온 손녀 기어이 쫓는구먼.”
“아니에요. 휴가가 이틀 남았으니까 이젠 올라가서 밀린 빨래랑 청소 좀 해야지요.”
“그럴래? 그러믄 일찍 들어가 쉬어. 오늘 종일 고추 닦느라 고생했잖어. 것도 일이라고 안 하다 하면 힘들어, 언능.”
연지는 어서 들어가라 손짓하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닫힌 방문 밖에서 할아버지를 향한 할머니의 핀잔이 몇 마디 더 들린다.
앉은뱅이 자개 화장대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오늘도 스팸 문자 두 개뿐, 회사에서 온 문자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사장이 출장을 떠나면서 강제로 열흘간의 휴가를 줬다.
그동안 휴가는커녕 반차도 제대로 쓴 적 없었다. 가끔 심한 몸살에 걸렸을 때도 병원에서 링거 맞는 두세 시간조차 마음 편하게 누워 있질 못했다.
전화하지 않겠다던 사장의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휴대폰이 지난 일주일 동안은 죽은 듯이 늘어져만 있다. 덕분에 배터리가 떨어졌나, 전원은 켜져 있나 수시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사장의 출장 중엔 회사 업무에 출장지 관련한 지시까지 더해져 평소보다 일이 더 많아지는데 다들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사장의 귀국 날이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들과의 미팅은 잘 끝났으려나.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다시 흔들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미닫이 유리문이 덜덜덜 열리며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방 불 올렸는데 따수어지냐?”
시골은 겨울이 더 빨리 찾아오는지 엊그제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밤에는 불을 때야 할 정도로 추워졌다. 방바닥 여기저기를 더듬어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할머니가 엉덩이를 밀며 연지 앞으로 다가와 앉으신다.
“더 있다 가도 괜찮어. 늬 할아버지 원래 그러시잖어.”
온종일 고추를 뒤적이며 말린 할머니에게서 매운 내가 난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올라가려고 했어요.”
늘어진 눈꺼풀 밑의 짠한 눈동자가 해쓱하니 핏기 하나 없는 손녀딸의 얼굴을 살핀다.
시골 살림이라는 것이 눈 닿는 곳마다 잔일이라 이것저것 거들려 할 때마다 못 하게 말렸다. 가만히 앉혀만 놓고 닭도 잡아 먹이고 쇠고기도 구워 먹였다. 바깥양반은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 요즘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주전부리를 사다 날랐다.
착해 빠진 손녀딸은 올챙이처럼 배가 불뚝 일어날 때까지 그것들을 다 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턱주가리가 뾰족하다. 아무래도 일주일 만에 살이 오르긴 힘들지.
“갑자기 내려와서 깜짝 놀랐잖어.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일은. 그동안 못 쓴 휴가 한꺼번에 낸 것뿐이에요.”
연지는 솜사탕처럼 새하얀 할머니의 파마머리에 붙어 있던 고추씨를 떼어 냈다.
“할아버지 지난번 뵀을 때보다 더 마르신 것 같던데 괜찮으신 거예요?”
올해 85세이신 할아버지는 1년 전에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살 만큼 살았다 입원 치료를 거부하시고 두 분이 고향으로 내려오신 지 8개월째다. 소일거리로 집 앞 텃밭을 가꾸시며 마을 경로당에 나가 10원짜리 화투를 치곤 하신다.
“너도 봤잖어. 암시롱 안 해. 여기 내려온 다음부턴 더 펄펄해진 것 같어. 그눔의 의사들 돈 벌어먹으려고 거짓뿌렁한 것 같다니까.”
“그래도 정기적으로 병원 다니고 약도 잘 챙겨 드셔야죠.”
“말도 말어. 벌써 다 나은 것 같다고 병원 안 가려고 해서 만날 싸워.”
“그러시면 안 되는데. 할아버지 갑자기 건강 나빠지시면 전 식장에 누구 손 붙잡고 들어가라고요.”
“……식장? 혹시…… 결혼식장 말하는 거냐?”
연지가 말없이 빙그레 웃자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 할머니가 더 바짝 다가앉는다.
목을 조르는 듯한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다.
사장의 시선이 다시 서류로 돌아가고 사인의 마지막 방점까지 찍힌 결재판이 덮여 옆으로 밀려났다. 다음 결재판을 펼친 손이 기안서 표지를 넘기고 숫자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표 자료를 뒤적인다.
“……덧붙일 말은 없어?”
그녀가 초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다. 집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불호령이 떨어지지도, 온몸이 난자당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쏘아보지도 않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결혼할 계획입니다.”
서류를 들여다보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라 중얼거리는 사람처럼 입술이 달싹였는데 ‘결혼’이라고 한 것 같다. 단어의 의미를 곱씹는 것처럼, 혹은 다른 뜻이 있는지 되짚어 보듯이.
부욱, 서류에 붉은 선이 칼자국처럼 그어지고 사인 대신 ‘재작성’이라고 휘갈겨졌다. 밑도 끝도 없이 부결된 그 보고서를 돌려받은 누군가는 사장이 부재중인 앞으로의 일주일을 머리 쥐어뜯으며 보내게 될 것이다.
마지막 결재판을 덮은 문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슬슬 출발해야 한다.
책상 너머 홍 비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직서 봉투 속의 A4 용지를 꺼내 특별할 것 없는 그것을 대충 훑고 던져 놓았다. 일률적으로 인쇄된 내용에 직접 써 넣은 글자라곤 ‘개인적인 사정’과 말미에 ‘홍연지’뿐이다.
그는 장시간 회의로 단내 나는 입에 껌 두 알을 털어 넣고 어금니로 으드득 깨며 회전의자에 몸을 기댔다.
“업무량이 많다는 항의를 이런 식으로 하나?”
“아닙니다. 정말 결혼하려는 겁니다.”
“미래개발은 결혼하면 그만둬야 하는 회사가 아니니 결혼이 사직의 이유가 될 순 없어.”
“제 업무 특성상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을 병행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문후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시도 때도 없는 업무 지시에 홍 비서는 항시 대기 상태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중에도 할 짓은 다 하고 있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는 줄 몰랐네. 데이트할 시간도 없이 바쁜 홍 비서를 더는 참아 줄 수 없대? 그래서 회사 그만두고 결혼하기로 한 거야?”
“만나는 남자 없습니다. 맞선을 보는 중입니다.”
껌을 질겅거리던 입이 벌어진 채로 멈췄다. 곧 되지도 않는 소리를 더 들어 줄 시간이 없다 결론 내리고 책상 밑에서 가방을 꺼내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담는다.
“나 지금 공항으로 출발해야 해. 시간 없으니까 원하는 걸 말해. 출장 다녀와서 연봉 협상 다시 할까? 아니면 휴가가 필요해?”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혼하려는 겁니다. 사표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쏘아본 문후는 출장 자료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홍 비서가 다가와 거들자 일정에 맞춰 업체별로 분류된 자료들이 각각의 파일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난 그는 서랍에서 필요한 잡동사니를 꺼냈다.
“갑자기 결혼해야겠다 결심하고, 결혼할 남자를 만나기 위해 맞선을 보고,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져?”
“사표는 인수인계할 시간이 필요해 먼저 낸 겁니다. 인수인계를 하려면 비서실 직원인 경우 2개월, 신입인 경우 3개월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후임 비서를 비서실 직원 중에서 뽑으실지 신규 채용하실지 말씀해 주시면 인사과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순식간에 출장 가방이 꾸려졌다.
무엇이든 홍 비서의 손이 닿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 단순한 문서 작성부터 기밀을 요하는 중요한 계약 건까지 그녀는 주어진 업무를 빠르고 완벽하게 해내곤 했다.
자연스레 크고 작은 일들이 홍 비서에게 집중되었고, 그녀의 업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금도 늘어나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홍 비서는 미래개발의 공식적인 급여 테이블을 한참 뛰어넘는 연봉을 받고 있다. 그동안 불평 한마디 없기에 만족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표를 던진다. 뜬금없이 결혼이라니…… 남자도 없다면서. ……장난하나.
“결혼이 왜 하고 싶어졌는데?”
“제 꿈이 현모양처입니다.”
중국어로 제작된 명함을 가방 앞주머니에 밀어 넣던 문후의 입에서 ‘하!’ 헛기침 같은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으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입사 지원서에도 그렇게 썼었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거짓말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최고의 학벌을 가진 21세기 여성의 꿈이 ‘현모양처’라니. 자신의 오른팔이라 믿고 부리던 홍 비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문후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그녀가 펼쳐 든 옷에 팔을 꿰었다. 차콜 그레이 슈트가 넓은 어깨에 착 맞아떨어졌다.
“꿈을 이루고 싶은 홍 비서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결혼은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옷깃을 당겨 단추를 잠그며 거울을 통해 등 뒤에 선 홍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상황이 아무리 복잡해도 상하 앞뒤 구분할 줄 알고, 업무적으로 재난에 가까운 사고가 펑펑 터져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당황해서 허둥대거나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 없었다. 그가 홍 비서를 높이 평가하고 신뢰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바르게 매만지고 돌아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이 퇴근 시간과 맞물릴 것 같아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굽어보는 시선에 오금이 저릴 법도 한데 홍 비서는 자신의 결심을 굽힐 생각이 없는지 꼿꼿하기만 하다.
한 번만 노려봐도 알아듣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욕을 바가지로 해야 정신을 차리는 직원이 있다.
홍 비서를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에 속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싶으면 지금처럼 눈을 내리깔며 절대 맞서거나 대들지 않는다. 상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직원이 바로 그녀다. 일만 잘하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진즉에 기를 꺾어 놓았어야 했는데 이제야 후회된다.
뚜벅, 다가서는 걸음에 홍 비서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머리 꼭대기의 새까만 포니테일을 노려보자 몰아쉬는 콧김에 그녀의 앞 머리카락들이 조금씩 흔들린다. 그의 숨이 평소보다 거칠어져 있음을 홍 비서도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열 마디 호통보다 더 효과적인 잠깐의 침묵. 뒤를 이어 바닥을 긁듯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 그래?”
홍 비서의 눈이 반짝 올려 떠졌다. 약간 놀란, 경계의 빛이 어리는 눈동자를 잡아챈 그가 느릇하게 웃는다.
“그러면 TV를 켜. 홍 비서가 평생 만날 일 없는 근사하고 멋진 남자 배우가 데이트하는 프로를 보며 대리 만족할 수 있을 거야. 결혼하고 싶다고? 그때도 TV를 켜. 홍 비서보다 훨씬 어리고 예쁜 연예인이 대신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해서 살아 줄 거거든. 애도 낳아 키우고 싶어? TV를 켜라니까. 애새끼 셋씩 넷씩 낳아 키우는 난장판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회사 창립 멤버로 20년 가까이 근속했던 임원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갑자기 사표를 던졌을 때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젠 쉬실 때도 되었다, 손주들 재롱 보면서 노년을 즐기시라 박수치며 등 떠밀었는데…….
시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논쟁에 비행기를 또 놓치게 생겼다.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하물며 먹고 싶은 것까지 TV가 대신 먹어 주는 세상인데 도대체 뭐가 더 아쉬워서 그 빌어먹을 결혼을 하겠다는 거냐고!”
버럭 지르고 나서 아차 싶어 눈을 감았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직원을 사표 수리가 아니라 해고하고 싶었지만, 구상 중인 사업 계획이 전광석화처럼 휙휙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중국 허난성에서 추진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리조트 사업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앞으론 더 바빠질 일만 남았는데 그 모든 스케줄을 차질 없이 진행하려면 홍 비서가 있어야 한다.
취업난이 심각하다지만 오너도 마냥 속 편한 세상은 아니다. 마음에 쏙 드는 직원을 참모로 두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때로는 자신의 머릿속을 투시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의 의중을 잘 파악해 지시하는 일을 척척 해내는 그녀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홍 비서…….”
문후는 심호흡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동안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았던 인내심을 다시 한 번 긁어모았다.
“우리 같은 워커홀릭에겐 말이지…… 결혼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일 안 하면 우울증 걸려.”
묵직한 출장 가방을 내민 홍 비서가 싱긋 웃는다.
“불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표 수리해 주십시오.”
***
초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가을 단풍처럼 짙붉어진 하늘이 초록색 지붕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자 여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투덕거리신다.
“휴가를 이 시골구석에서 다 보낼 거여? 내일은 올라가.”
“놔둬요. 올라갈 때 되면 저가 알아서 가겠지.”
연지는 먹다 남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마당 구석에 묶여 있는 검둥이의 밥그릇에 부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식탐이 많은 녀석인데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새끼를 밴 후로는 뭐든 먹어 치울 기세다. 지금도 밥그릇에 밥이 다 담기기도 전에 주둥이를 들이밀더니 폭풍 흡입 중이다. 영양이 부족한가. 달걀이라도 깨서 넣어 줘야겠다.
“……몇 년 만의 휴가인데 늙은이들이랑만 있으니까 그렇재. 한창 좋을 나이에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할 일이 오죽 많겠어.”
평상에 널어놓았던 고추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쓸어 담던 할머니가 결국엔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고, 저 양반이 손녀 왔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오랜만에 내려와서 쉬는 애한테 뭔 잔소리를 하루도 안 빼먹고 하는지 모르겄네. 당신 말마따나 어린애도 아닌데 친구를 만나든 말든 저가 알아서 하겠지!”
“예. 내일 올라갈 거예요.”
달걀을 가져와 개밥에 넣어 준 연지가 손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투덕거리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평생 함께 사셔서 눈빛까지 똑같이 닮아 버린 얼굴로 돌아보신다.
“……내일 올라갈 게야?”
지난 일주일 동안 날마다 저녁 인사처럼 ‘내일은 올라가라’ 말씀하시던 할아버지가 오히려 더 아쉬워하는 눈치시다. 실은 ‘내일도 있을 거지?’라는 뜻이었다는 걸 연지도 알고 있다.
“저 양반이 오랜만에 내려온 손녀 기어이 쫓는구먼.”
“아니에요. 휴가가 이틀 남았으니까 이젠 올라가서 밀린 빨래랑 청소 좀 해야지요.”
“그럴래? 그러믄 일찍 들어가 쉬어. 오늘 종일 고추 닦느라 고생했잖어. 것도 일이라고 안 하다 하면 힘들어, 언능.”
연지는 어서 들어가라 손짓하는 할머니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닫힌 방문 밖에서 할아버지를 향한 할머니의 핀잔이 몇 마디 더 들린다.
앉은뱅이 자개 화장대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오늘도 스팸 문자 두 개뿐, 회사에서 온 문자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사장이 출장을 떠나면서 강제로 열흘간의 휴가를 줬다.
그동안 휴가는커녕 반차도 제대로 쓴 적 없었다. 가끔 심한 몸살에 걸렸을 때도 병원에서 링거 맞는 두세 시간조차 마음 편하게 누워 있질 못했다.
전화하지 않겠다던 사장의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휴대폰이 지난 일주일 동안은 죽은 듯이 늘어져만 있다. 덕분에 배터리가 떨어졌나, 전원은 켜져 있나 수시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사장의 출장 중엔 회사 업무에 출장지 관련한 지시까지 더해져 평소보다 일이 더 많아지는데 다들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사장의 귀국 날이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들과의 미팅은 잘 끝났으려나.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다시 흔들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미닫이 유리문이 덜덜덜 열리며 할머니가 들어오신다.
“방 불 올렸는데 따수어지냐?”
시골은 겨울이 더 빨리 찾아오는지 엊그제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밤에는 불을 때야 할 정도로 추워졌다. 방바닥 여기저기를 더듬어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할머니가 엉덩이를 밀며 연지 앞으로 다가와 앉으신다.
“더 있다 가도 괜찮어. 늬 할아버지 원래 그러시잖어.”
온종일 고추를 뒤적이며 말린 할머니에게서 매운 내가 난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올라가려고 했어요.”
늘어진 눈꺼풀 밑의 짠한 눈동자가 해쓱하니 핏기 하나 없는 손녀딸의 얼굴을 살핀다.
시골 살림이라는 것이 눈 닿는 곳마다 잔일이라 이것저것 거들려 할 때마다 못 하게 말렸다. 가만히 앉혀만 놓고 닭도 잡아 먹이고 쇠고기도 구워 먹였다. 바깥양반은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 요즘 젊은 애들이 좋아하는 주전부리를 사다 날랐다.
착해 빠진 손녀딸은 올챙이처럼 배가 불뚝 일어날 때까지 그것들을 다 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턱주가리가 뾰족하다. 아무래도 일주일 만에 살이 오르긴 힘들지.
“갑자기 내려와서 깜짝 놀랐잖어. 뭔 일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일은. 그동안 못 쓴 휴가 한꺼번에 낸 것뿐이에요.”
연지는 솜사탕처럼 새하얀 할머니의 파마머리에 붙어 있던 고추씨를 떼어 냈다.
“할아버지 지난번 뵀을 때보다 더 마르신 것 같던데 괜찮으신 거예요?”
올해 85세이신 할아버지는 1년 전에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살 만큼 살았다 입원 치료를 거부하시고 두 분이 고향으로 내려오신 지 8개월째다. 소일거리로 집 앞 텃밭을 가꾸시며 마을 경로당에 나가 10원짜리 화투를 치곤 하신다.
“너도 봤잖어. 암시롱 안 해. 여기 내려온 다음부턴 더 펄펄해진 것 같어. 그눔의 의사들 돈 벌어먹으려고 거짓뿌렁한 것 같다니까.”
“그래도 정기적으로 병원 다니고 약도 잘 챙겨 드셔야죠.”
“말도 말어. 벌써 다 나은 것 같다고 병원 안 가려고 해서 만날 싸워.”
“그러시면 안 되는데. 할아버지 갑자기 건강 나빠지시면 전 식장에 누구 손 붙잡고 들어가라고요.”
“……식장? 혹시…… 결혼식장 말하는 거냐?”
연지가 말없이 빙그레 웃자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돈 할머니가 더 바짝 다가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