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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1권
영웅들의 세계로



H.I.D 1권(1화)
작가 서문


얼마만의 책인지……. 정말 쓰고 싶었던 책을 2년 만에 쓰고, 또 출판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제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사랑을 받아 출판까지 하게 되니 보통 감격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전에도 그랬지만, 책 표지가 나왔을 때의 이 기쁨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네요.
2008년, 군 입대 전에 쓰던 책을 부랴부랴 마무리를 하고 마치 쫓기듯이 들어갔는데,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군대 밖에 나와서 이렇게 책의 말머리에 들어갈 글을 쓰고 있자니, 정말 시간이란 것이 돌이켜 보면 금방 지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합니다.
그동안 다른 종류의 글도 써 보려고 노력하고, 읽지 않았던 분야의 책도 읽으면서 좀 더 폭넓은 시야로 다른 장르에도 도전해 보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역시 가장 큰 기쁨과 흥미를 느끼는 것은 변함없이 이 게임 판타지라는 장르네요.
더군다나 이번에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좋아해 오던 삼국지와 조화를 이루자는 큰 명제에 도전하다 보니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면서도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제갈현이라는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고는 합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무척이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게 읽었을 삼국지와 내 글을 접목시킬 수 있을까.
제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은 삼국지연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원작을 엉망으로 훼손시켜서 읽는 분들로 하여금 최악의 소설로 낙인찍히지나 않을까.
하지만 쓰다 보니 저 스스로가 너무나도 재밌게 쓰고 있었기에, 다른 분들의 평가는 잠시 접어놓기로 하고서는 정신없이 몰두해서 썼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출판까지 하게 됐네요.
이 글이 모든 분들에게 재밌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의 오만이겠지요. 하지만 조아라에 글을 올릴 때 재밌다고 해 주시는 여러 독자분들 때문에 제가 큰 힘을 얻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글 여기저기에 많은 결점이 있을 것이고, 모든 분들이 공감하지 못할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 편안히 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군 제대 뒤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학교도 휴학한 채 글 타령만 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 준 가족의 이름을 쓰지 않으면 또 서운해 하겠지요? 그리고 내 친구들. 딱히 누구라 정확하게 지명은 하지 않겠지만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 누군지는 보는 자신이 알 것이니, 이름 석 자 써 주지 않았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기를…….
그럼 H.I.D를 재밌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년 7월 24일, 어제 미국에서 돌아와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의 김태진 올림.


프롤로그(1)


두두두.
넓디넓은 평원 한복판에서, 일견해도 수천의 기마병들이 각자의 병장기들을 움켜쥔 채 미친 듯이 질주해 가고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감탄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수천 기마대의 표적이 되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은 죽을 맛이리라.
얼마나 격하게 말을 몰아붙인 것인지, 말의 입가에는 허연 침이 말라붙어 있었고, 몸 전체에 잔구슬 같은 땀방울이 솟아나 있었지만 주인의 채찍질에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수천 기마대의 추격을 받으며 저 멀리서 황급히 도망가던 일단의 무리가 비교하기 창피할 정도로 작은 먼지구름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다른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위로 솟아 있는 거구에, 붉은색 옷에 호랑이 수염, 그리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날의 창을 움켜쥔 사내가 앞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형님, 조금만 더 간다면 장판교가 나온다니 군사의 말대로 먼저 가도록 하슈! 이 아우가 시간을 벌 테니.”
생긴 것처럼 흡사 우레가 치는 듯한 목소리로 장한이 한 말에 귓불이 유난히 다른 사람보다 큰 데다가 인자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가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두를 구하러 자룡이 사라진 것도 가슴 아픈 일이거늘…… 너까지 간다면 난 어떡하란 말이냐.”
탄식하듯 중얼거린 사내의 말을 들은 거구의 장한이 클클거리며 천둥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귀 큰 사내 유비에게 크게 소리쳤다.
“도원의 결의! 어찌 잊을 수 있겠수. 나만 믿으슈 형님. 작은 형님이 곧 올 것이니 버텨야만 하오! 끼랴!”
두두두두―!
고작 한 필의 말이 무리에서 빠져나왔을 뿐이지만 워낙에 큰 덩치를 자랑하던 사내였기에 한순간 허전해 보였다.
“내가 부덕한 탓이로다…… 내가…… 아아, 장비야.”
유비의 볼에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입에서는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히 한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빠져나간 장한의 뒷모습이라도 보려는 듯, 유비가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마차 앞에서 무모하게 두 팔을 곧추세우고 싸우려는 사마귀처럼, 외로운 거구의 장한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내 천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패기와 투기로 가득 찬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놈들! 내가 바로 연인 장비이니라!”

***

팟!
갑자기, 마치 모든 것이 허상이라도 된 것처럼 전구에 퓨즈가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까만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귓가에서 맴도는 듯한 장비의 마지막 일갈과 거친 기수들의 숨결, 그리고 불어오는 매캐한 먼지 냄새는 어디로 간 것인지 일단의 공간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어 버렸고, 그 격전의 현장이 벌어진 것이라 추측되는 공간 안에 남자 한 명이 다리를 꼬고서는 느긋한 자세로 흡사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아작!
아니, 정말로 영화를 관람하고 있었던 듯, 남자의 입에서 팝콘을 씹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남자의 목소리라고 추정되는 미성이 암흑의 공간 안에 울려 퍼졌다.
“적벽도망전. 화용도.”

[시행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직한 미성과 함께, 암흑 속에 앉아 있는 사내의 시력을 걱정해 주기라도 하는 듯, 몇 초 후 작은 소음과 함께 공간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희미한 영상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끼럇!
희미하던 영상이 뚜렷해지면서 암흑에 침식됐던 공간은 순식간에 장소가 옮겨지기라도 한양, 어느 한 길을 비춰 주고 있었다.

비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습기 차고 진흙으로 범벅이 된 길을 말을 탄 일단의 무리들이 다급히 질주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릉이다! 힘 내라!”
한 4, 50세는 됐을까. 중년이 지나가고 있는 듯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인하면서도 매섭게 생긴 남자가 멋들어지게 장식된 검을 휘두르며 뒤따르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꽤나 낭패를 당한 듯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질의 갑옷과 의복은 이미 그 단정함을 잃어버렸으며, 검에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는 것이,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난 후인 것 같았다.
“각하! 땅이 너무 질어 속도가 나지를 않습니다!”
약간 뒤에서 말을 몰던 사내가 중년의 사내를 향해 말했지만, 사내는 길게 한탄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뒤에는 장비, 옆에는 조운이니 이 길밖에 없지 않은가, 유엽. 배는 모두 불타 버렸고 그나마 물보다는 뭍에 익숙한 병사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여기밖에 없어. 허어…….”
“저…… 적이다!”
한탄하듯 내뱉은 중년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열이 혼란스러워지더니 병사 하나가 크게 외쳤다.
“앞에도 적이 있었던가…… 유비! 제갈공명!”
거의 자포자기한 듯, 중년의 사내는 허공을 바라보고서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고 동시에 중후하면서도 굵은 음성이 무리가 달려가고 있던 방향에서 퍼져 나왔다.
“조 승상은 그 자리에 멈추시오!”
“운장…….”
족히 190은 넘어 보이는 장대한 체구에, 탐스러운 수염을 아랫배까지 드리우고, 대춧빛처럼 붉은 얼굴빛을 지닌 사내가 자신의 얼굴처럼 붉디붉은 적토마 위에 앉아 사람 머리통 두 개는 붙여 놓은 듯한 크기의 언월도를 빗겨 들고서는 위엄 가득한 얼굴로 조 승상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린 조 승상, 아니 조조의 눈에 순간 절망의 기색이 드리워졌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관우가 누구던가.
파죽지세로 몰아쳐 내려오던 원소군의 맹장 안량과 문추를 일거에 물리쳐 승기를 조조군 쪽으로 몰아줬을 뿐더러 천하무적이라 불리우던 여포와도 호각지세를 이루었던 신장 관우.
하지만 조조 자신은 이들을 지휘하는, 아니 광활한 중국 대륙의 반을 통치하는 지배자이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마냥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관우와 맞설 만한 장수라고는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적으로 관우를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조조를 비롯한 조조군의 패잔병들은 암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조조의 옆에 있던 유엽이 조조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승상. 관우는 정과 의리에 약하니 승상께 입은 은혜를 들어 강요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그리고 조조 정도의 권력과 능력이 있는 사내라면 자존심이나 자신의 명예 때문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짓일지도 몰랐지만, 자존심을 앞세워 대적하기에는 조조의 못다 이룬 야망이, 그의 패도가 너무 컸고, 관우란 벽이 너무 높았다.
그렇게 관우와 조조가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었을까.
관우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가득 떠오르더니 이내 적토마를 옆으로 물렸다.
“이것으로 조공과 나와의 은원은 모두 끝났소이다.”

팟!
전번처럼, 관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우의 모습과 조조의 모습이 사라지고는 사방팔방이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변해 버렸고, 그 어둠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조의 패인은 자신과 자기 세력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부른 방심이지만, 위기를 빠져나왔으니 그 누가 이겼다고도 할 수 없겠구나! 제갈공명……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영악하다고 해야 하나…….”
제갈공명의 지략은 모두 완벽했지만, 관우가 의리와 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옛날 은혜를 입었던 조조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요지에 보냈다는 것은 제갈공명이 조조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조조에 대한 미련을 끊어 놓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관우와 제갈공명의 세력 다툼에서 제갈공명 자신이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일까.
그렇게 자신이 관람한 것의 여운을 즐기기라도 하려는 듯, 미동도 없이 조용히 있던 남자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난세…… 말 그대로 사내라면 응당 꿈꿔 봐야 할, 판타지가 아닌가!”
남자의 독백 뒤로, 짙은 어둠은 대답 없이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

“으아! 삭신이 쑤시는구나!”
헤드셋을 옆에 벗어 놓은 사내, 아니 아직 사내라고 부르기에는 치기가 보이는 청년이 기지개를 쭉 펴면서 중얼거렸다.
“신형이라 그런지 확실히 가볍고 좋긴 하네. 머리가 눌려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꽤나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인지, 눌린 머리를 만지면서 잠시 투덜거린 청년은 침대에서 내려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였다.
얼굴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놓은 듯 입가의 미소가 전체적으로 유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이지적인 뿔테 안경과 위로 뻗쳐 있는 머리는 그 부드러움을 적절히 중화시키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청년의 이름은 제갈현.
드물디 드문,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제갈씨의 한 명인 청년은 올해로 23살의 사지 건강한 청년이었다.
180에 가까운 키였지만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한 탓에 더욱더 길어 보이는 제갈현은 습관처럼 책상에 놓인 책을 집어 들면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는 책을 펼쳐 들었다.
2,222년, 23세기에 접어든 시기라 종이로 된 책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아니,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종이로 된 아날로그 책보다는 디지털화된 전자책이 대세였다.
하지만 제갈현의 방에 꽂혀 있는 여러 책들은 거의 다 종이로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과학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바야흐로 인간이 우주에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지도 10년이나 지났다. 이런 현실에서 아날로그적인 물품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드문데도 불구하고 이 제갈현이란 청년은 조금의 위화감이나 부자연스러움 없이, 혼자만 21세기 초에 사는 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창 유행을 탈 20대의 피 끓는 청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의 웬만한 모든 일들은 말 그대로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었고, 손가락 한 번의 까닥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자 현실이었다.
많은 것이 아날로그적인 제갈현의 방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침대 위에 자그마한 헤드셋이 고글과 함께 놓여져 있었다. 헤드셋의 이음새 부분에는 작은 영문 표기로 V.R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물건을 다음과 같이 불렀다.
가상현실 기기.
말 그대로 가상의 현실로 들어가게 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 이 기기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책장을 넘기며 금세 책에 빠져든 제갈현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허공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에 살짝 경련이 일더니 책을 내팽개치고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장에 홀로그램 형식으로 투영된 듯, 숫자가 입체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11:4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늦었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