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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시작



그날의 밤은 유난히 어두웠다.
달 하나, 작은 별 하나조차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깊은 밤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불꽃들이 하나의 공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넓은 공간의 맨 위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그들의 아래 한 명의 젊은 사내가 화려하게 치장된 자리에서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화려한 차림의 여러 귀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몸에 남아 있는 고문의 흔적들, 갈라지고 터진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흐르는 피와 먼지에 엉켜 있는 백발 머리카락,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사내는 거의 쓰러질 듯 꿇어앉아 있었다.
“꼴좋구나.”
상석에 있는 중년 남자의 경멸 어린 말에 백발의 사내는 힘겹게 고개를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깊은 상처, 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처가 심한 곳은 사내의 눈이었다.
고문 중의 하나였던 것인지, 불에 녹아내린 듯 사내의 눈은 처참히 뭉그러져 있었다.
“내 네 재능을 귀히 여겨 평민인데도 불구하고 널 총애하였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바로 짐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이었단 말이냐!”
중년 남자, 아니 황제의 호령에 백발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호령에 숙였다기보다는 오랜 고문으로 인한 체력 고갈로 자신도 모르게 쓰러진 것이었다.
“쯧쯧. 몹쓸 것!”
백발 사내의 엉망인 모습에 황제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차라리 억울하다고 소리를 치거나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 것이었건만 반역자로 잡혀 온 백발의 사내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괘씸함에 황제는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베어 성벽 밖에 효수하라 명했다. 하지만 형이 집행되기 직전, 사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였기에 깊은 밤 나라의 대신과 황제 내위가 형장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사내의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고, 그 모습에 황제는 또 한 번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사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바로 아래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에메랄드 머리카락에 백옥의 피부를 가진 황태자는 황제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발의 사내에게 눈을 고정하였다.
아무런 감정의 상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 하지만 황태자의 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굳게 쥐어져 있었다.
힘겹게 황태자를 부른 사내는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사내의 눈에서 피가 한 방울 톡 떨어졌다.
“당신의…… 당신의 미래에…… 전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내의 말에 황태자는 굳게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눈앞의 사내에게서 돌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린 채, 정갈한 자세의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황태자만큼이나 표정이 없는 얼굴, 하지만 그 안에선 지금의 상황을 부정하는 외침이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라는 걸 황태자는 의심하지 않았다.
수백 번, 수만 번, 여인은 황태자인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고 있을 것이다. 표정 없는 모습이었으나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사내를 살리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것이었다.
여인과 백발의 사내를 보고 있던 황태자가 소리 없이 실소하였다.
어차피 시작된 저주. 누군가는 그 끝을 봐야 했다.
“없었다.”
“…….”
“반역이나 저지른 평민의 미래까지 내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나? 웃기는구나. 평민이면 평민답게 스스로의 자리에서 꿈을 꾸었어야지. 어찌 감히 너 따위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을 했단 말이냐. 한심하다. 아니 더럽구나, 일리안.”
황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백발 사내의 심장을 찌르고 마음을 헤집었다. 간신히 몸을 세우고 있던 사내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비수가 되어 사내를 유지해 오던 작은 힘조차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백발 사내, 아니 일리안은 부르트고 갈라진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조차 메마른 뭉개진 눈 속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잔인하게 변한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죽어 버릴까? 이대로 포기해 버릴까?
이 잔인한 곳에서 더 이상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절벽에 마지막 발을 내디디려 할수록 더욱더 명확하게 떠오르는 한 사람의 온기.
일리안은 몸을 들어 어느 한 곳을 쳐다봤다. 뭉개진 눈이라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을 터였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향한 곳은 황태자의 옆으로, 젊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조용히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타네시아 공작! 뭐 하고 있는 건가!”
뜻밖의 사태에 황제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건 비단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일리안에게 다가갈수록 황태자와 주변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여인은 일리안에게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공작을 막아라!”
당황한 표정의 황제가 그녀 주변에 서 있던 경비병에게 명령하였고, 그들은 황제의 호통에 서둘러 일리안의 주위와 그녀의 주위를 둘러쌌다.
“지금 내 앞을 막는 자들은 모두 불덩이가 되고 싶어 그리하는 것이냐!”
가늘고 여린 목소리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호통에 길을 막았던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일리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일리안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여인의 손길에 일리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그것도 잠시, 기침과 함께 토해 낸 핏덩이로 그의 주변은 엉망이 되었다.
일리안을 어루만지고 있던 여인이 소리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요한 눈가가 촉촉이 적셔 들었지만 여인은 참아 냈다.
“우린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어요.”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잡음 사이로 여인의 낮은 소리가 형장에 울렸다.
“우린…… 정말로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어요.”
일리안에게 말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같이 여인은 같은 말을 반복하였다.
그런 여인의 말에 일리안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여인을 위로하듯,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흔들림 없이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
“경비병은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저 둘을 떼어 놓지 않고!”
황제의 호통이 다시금 이어지고, 그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서둘러 일리안을 거칠게 끌어냈다. 경비병들의 손에 닿는 상처가 고통스러운지 크윽 하는 소리와 함께 일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듯 일리안이 여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한 번도 그 순간을 후회한 적은 없었어! 단 한 번도.”
그의 입을 막으려는 듯 경비병들이 사정없이 그를 구타하였다. 그들의 행동에 몸이 엉망이 되면서도 일리안은 여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계속 같은 말을 힘겹게 반복하였다.
그 모습에 여자는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사람.
그날 당신이 나에게 손을 내밀지만 않았어도,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 텐데.
구해 줘야지. 내 작은 왕자님.
이젠 내가 구해 줘야지.
여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상석의 황제와 황태자를 바라봤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날아갈 듯이 여리고 가는 체형. 하지만 여자는 이 거대한 나라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에 세 명밖에 없다는 7서클의 마법사, 전 원소계의 마법과 이치를 깨달은 대륙의 유일한 초현자. 제국의 보석이자 제국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그녀였다.
그런 휘황찬란한 명예와 권력이 있음에도…… 여인은 일리안을 예전처럼 돌려놓을 방법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바보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게 묶어 놓는 일뿐이었다.
“황제 폐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