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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동화는 없다
짙은 어둠이 숲을 감쌌다. 변덕스럽지만 아름다운, 잔인하지만 매력적인 밤의 여신이 숲을 정성스레 어루만져 주고 있었고, 여신의 보호를 받고 있던 숲 속의 모든 생명체들은 그 손길을 각인시키려는 듯,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있었다.
대륙에 위치한 두개의 제국 중 하나인 미르드는 풍족한 자원을 가진 아델리아와는 다르게 척박하고 험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르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실키산은 아름답다고 하던 예전과는 달리 10년 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늘어 버린 변종 몬스터로 인해 저주의 산이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두 종류 이상의 몬스터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이 새로운 종류는 일반 몬스터보다도 강하고 그 능력 또한 월등했다. 그런 변종 몬스터가 대량으로 서식하는 실키산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황금산이자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풍문을 가진 저주의 산이 되었다.
부스럭, 부스럭.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숲 안에서 4개의 인영이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허리까지 자란 풀을 밀어내며 한참을 걷던 인영 중 하나가 무언가를 거칠게 내던지며 소리쳤다.
“제길. 가도 가도 끝이 없잖아!!”
희미한 달빛에 비치는 인영은 많이 잡아 봤자 10대 중후반의 어린 소년이었다. 마치 나무의 잎사귀 같은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짧은 머리카락이 흔들흔들 휘날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남색의 눈은 보는 것만으로도 물어뜯을 듯 날카로웠다.
“그만해, 잡초머리. 네놈 때문에 시끄러워서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겠다.”
녹색 머리카락의 소년의 뒤로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히 잘린 금발 머리, 새파란 눈은 고생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귀공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금발 머리의 소년의 말에 신경질을 부리던 녹색 머리의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망할 크라젤! 누가 잡초머리라는 거야!”
“누구긴 손질도 안 한 녹색 머리를 제멋대로 휘날리고 있는 네 녀석이지.”
“나에게는 바스티니 카르리뮤라는 이름이 있단 말이다!”
금발의 소년, 크라젤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럼 티니라고 불러 주지.”
“크라젤!”
녹색 머리, 아니 바스티니가 크라젤을 향해 고함을 쳤다. 바스티니의 고함에 크라젤이 왜 그러냐는 듯, 시끄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투닥대는 둘의 뒤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 둘 다 그만하렴. 우리는 그를 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 거지 산책을 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니?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렇게 싸우다가는 그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걸.”
연갈색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어깨를 덮는 웨이브 머리와 유난히 붉은 입술은 숲 속에서 도시를 떠올리게 할 만큼 화사했다.
“클로젤 누나. 그게 아니라 크라젤이 먼저…….”
“망할 잡초머리! 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던 여인, 클로젤은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좀처럼 말싸움이 끝나지 않는 둘을 보고 있던 클로젤이 말없이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행동에 무안해진 바스티니와 크라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이 얌전해지자 클로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시 출발하자.”
“클로젤. 너무 닦달하지는 마. 어차피 그는 10년이나 이 산에 감금되어 있었어. 설마 다 죽어 가는 죄인이 도망을 가겠어?”
바스티니. 크라젤, 클로젤의 뒤로 젊은 남자가 건들 걸음으로 여유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의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남자의 모습은 거만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금발과 어울리는 하늘색 눈과 뽀얀 피부는 그가 상당한 미남자임을 보여 주었다.
남색의 여행 복장 위를 덮는 얇은 가죽갑옷을 입은 그는 검을 들고 있는 바스티니와 크라젤과는 달리 순금으로 만든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능글능글한 드모리쉬의 미소에 클로젤이 미간을 찡그렸다.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드모리쉬의 말투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녀였다.
“드모리쉬.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출발해요. 바스티니, 크라젤 어서 출발하자.”
바스티니와 크라젤을 대할 때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의 클로젤이 먼저 앞장을 섰다.
잠시 동안의 대화 후, 일행은 다시 험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끝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를 상대해 가며 산을 올라가던 중, 조용한 것을 싫어하니 바스티니가 클로젤에게 물었다.
“클로젤 누나. 왜 미르드의 죄인 따위를 황제 폐하께서 찾는 거야? 엄연히 우리는 황제 폐하의 직속 기사단이잖아? 귀족인 우리가 겨우 적국의 죄인을 도둑처럼 데리고 가야 하다니 난 진짜 이해 안 된다고!”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의 바스티니를 보며 클로젤이 미소를 지었다. 실력은 있으나 호전적인 성격의 바스티니였기에 적국의 죄인을 찾아오라는 이번 임무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음. 질문에 답을 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전에 간단한 테스트나 해 볼까? 바스티니, 네가 말하는 그 죄인에 대해 조사해 봤니?”
클로젤의 질문에 바스티니가 턱을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평민임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황제의 직속 기사 중 하나가 된 사람. 북방 유목 민족과의 전쟁에서 대승, 미르드의 영토를 확 바꿔 놓았고, 이후 황제 직속에서 황태자의 보좌로 들어감. 아무 배경도 없는 황태자를 제1 권력의 소유자로 만든 사람이잖아. 그 이후에 3대 마법사 중 하나라고 하는 타네시아 공작과 약혼.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역죄로 처형. 뭐 실제로는 처형이 아니라 이 산에 감금이 되었지만 말이야.”
투덜대는 성격과는 달리 꽤나 꼼꼼히 자료를 준비한 바스티니를 보며 클로젤은 기특하다는 미소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크라젤의 경우, 클로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바보. 하나 빼먹었군.”
“뭐가 말이냐, 크라젤!”
바스티니의 으르렁거림에 크라젤은 이겼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폈다.
“대륙에 열 명 정도밖에 없다는 소드마스터. 그때는 세 명밖에 없었다고 했어. 그중 하나가 일리안이었고 말이지.”
질 수 없다는 듯 말하는 크라젤의 머리를 클로젤이 어루만졌다.
“너희 둘 다 맞아. 그는 남들은 30년을 해도 못 할 일을 3년 만에 해낸 유능한 사람이지. 실제로 미르드가 이만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 사람이 있어서라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신 거야. 예전보다는 약해진 황권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말이지.”
“황제 폐하는 그 사람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거야?”
바스티니의 물음에 클로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젤의 말을 여러 번 곱씹고 있던 바스티니가 이해가 안 되는지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죄인, 그러니까 일리안이라는 사람이 우리 말을 순순히 따라 줄까?”
연이은 바스티니의 물음에 클로젤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한 번 틈을 보이면 바스티니는 깔끔하게 답이 나올 때까지 매섭게 파고들었다.
“일리안이 처형을 당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건 황태자에게 돌아갔지. 일리안이 만들어 놓았던 세력, 그가 세워 놓은 기틀. 무엇보다도 처형이 끝나자마자 거행된 타네시아 공작과 황태자의 약혼식. 심증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일리안은 반란이 아니라 누명에 의해 제거된 것일지도 몰라.”
클로젤의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크라젤이 말을 보탰다.
“누나의 말을 들어 보면 결국 일리안이라는 사람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는 건데……. 그러면 황제 폐하는 그의 증오심을 이용해서 아델리아에 귀속시킬 생각이시라는 거야?”
“그럴 생각이니까 그 천한 평민을 찾기 위해 네 누나와 형부인 내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이 아니냐! 아하하.”
클로젤이 대답하려는 찰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드모리쉬가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클로젤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클로젤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고, 그건 바스티니와 크라젤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 따위 내 매형으로 인정할 리 없잖아!”
드모리쉬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크라젤이 중얼거렸고 공감한다는 듯, 바스티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모리쉬 카베인.
클로젤이나 바스티니의 가문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진 집안의 맏아들이었으나 그가 하는 짓은 방탕아 그 자체였다.
물론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탁월한 그였다. 외모 또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생겼다. 겉으로의 조건은 최고인 자였으나 문제는 그 생활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귀족가의 여자만 수십 명, 그 수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여자들과 안 좋은 소문을 가지고 있는 드모리쉬였다. 그렇기에 클로젤에게 있어서 드모리쉬는 약혼이라는 주제만 아니면 평생 모르면서 지내고 싶은 이였다.
바스티니와 크라젤의 표정을 보고 있던 클로젤이 조심스럽게 어깨에 있는 드모리쉬의 손을 떼어 냈다.
“거의 다 왔어요. 서두르죠.”
그녀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둘이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클로젤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드모리쉬 또한 별말 없이 그녀의 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