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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인공적인 터가 있었다. 터만 보았을 때는 안락하고 편안해 보일 수 있었으나 그 주변을 가득 메운 것은 한기가 흐르는 얼음이었다. 떠다니는 한기가 네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동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저 얼음이 막고 있는 동굴일 뿐임에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포, 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얼음의 가장 깊은 곳에, 그가 있었다.
감금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처형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양팔과 다리에 마력이 느껴지는 사슬이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다시 한 번 잡아매듯 몇 겹의 얼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갇혀 있는 얼음의 표면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살기가 살아 움직였다.
얼음이 만들어 낸 절정의 조각품.
“살아…… 있는 거지?”
크라젤의 말에 바스티니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일행들이었지만 지금 일리안을 감싸고 있는 얼음에서 느껴지는 붉은 살기는 그들의 호흡을 방해할 정도로 강렬했다.
“무서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바스티니가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시선을 빼앗기듯 얼음을 보고 있던 클로젤이 숨을 삼켰다.
이대로라면 살기에 얽매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최대한 마력을 끌어모은 클로젤이 있는 힘을 다해 일행들에게 정신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에게서 나온 하얀 막이 일행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뒤로 벗어나!”
날카로운 클로젤의 비명에 정신을 차린 드모리쉬가 다시 정신마법을 시전하였고, 두 마법사의 마법으로 정신을 차린 모두가 재빨리 살기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죽는 줄 알았어.”
바스티니의 말에 크라젤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흉한 모습을 보일 뻔했다. 정신마법을 맨 처음 시전한 클로젤도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살기만으로 사람을 자살에 몰아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건가? 일리안이라는 평민이?’
“과연. 소드마스터라고 하더니만 별별 능력을 가진 평민이군. 생각 외로 데려가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
어지러운 머리를 흔든 드모리쉬가 눈을 좁히며 일리안이 갇혀 있는 얼음을 보았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평민이었다. 얼음을 보고 있던 드모리쉬가 눈을 굴려 옆에 있는 클로젤을 보았다. 귀족이 평민을 데리고 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건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클로젤의 반응이었다.
도대체 저 평민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오는 내내 클로젤은 긴장하고 떨려 했다. 그게 드모리쉬의 신경을 건드렸다.
얼음을 보며 걱정하는 클로젤에게 드모리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라리 어쩔 수 없었다고 보고하고 포기하는 게 어때?”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리는 그를 반드시 데려가야 합니다.”
단호한 클로젤의 말에 드모리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드모리쉬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젤의 시선은 일리안이 갇혀 있는 얼음에 고정되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얼음을 감싸고 있는 붉은 살기는 더욱더 진해졌고, 움직임도 더 활발해졌다.
도저히…… 얼음 안으로 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이씨! 풀리는 건 하나도 없는데 여긴 왜 이렇게 물이 많은 거야? 엄청 거슬리네!”
바스티니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을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의 투덜거림에 무언가가 생각난 듯 클로젤이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동굴의 중반까지는 습기는커녕, 건조했지만 여기는 벽이나 바닥에 흥건히 물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한기는 동굴 안의 흥건한 물을 얼리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것처럼 물과 한기는 동굴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점은 흐르는 물 주변에는 주위를 압박하는 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형편없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결심을 한 클로젤이 일리안을 향해 걸어갔다. 놀란 크라젤과 바스티니가 그녀를 불렀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렸던 야수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클로젤을 향해 살기가 움직였다.
짙붉은 살기가 클로젤의 몸에 닿기 직전 그녀가 자신의 몸에 마법을 시전하였다.
흰색의 마력이 빛을 뿜으며 물로 바뀌고, 물의 양은 점점 늘어나 분수처럼 클로젤의 온몸을 적셨다. 동시에 붉은 살기가 클로젤을 감쌌다.
“누나!”
“클로젤!”
각기 다른 호칭이 동굴을 울리고, 크라젤이 검을 뽑은 채, 클로젤을 덮친 살기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런 크라젤을 바스티니가 온 힘을 다해 막았다
“이 자식아! 죽고 싶어!”
“이거 놓으란 말이야! 누나!”
크라젤이 발버둥을 치는 가운에 드모리쉬가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클로젤을 삼킨 살기가 그녀를 옭아매었다.
긴박한 상황……. 하지만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드모리쉬가 마력을 최대로 모은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마법을 시전했다.
그때였다.
“드모리쉬. 난 괜찮아요.”
클로젤의 작은 목소리가 일행들에게 들려오자 바스티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크라젤이 놀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녀를 옭아맸던 살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누나!”
하얗게 질린 크라젤이 단숨에 클로젤에게 달려왔다. 창백하게 질린 동생의 얼굴을 손으로 쓸며 클로젤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 말도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려서”
“맞아! 늙었으면 생각 좀 하라고! 놀래서 죽을 뻔했단 말이야!”
바스티니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몸을 풀며 다가왔고 모아 놓았던 마력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드모리쉬가 궁금한 얼굴로 클로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드모리쉬의 질문에 클로젤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까 바스티니가 동굴에 물에 많다고 했죠? 아닌 게 아니라 동굴의 안쪽으로 갈수록 습기가 많아지더군요. 더군다나 물 주변에는 살기와 한기가 가까이 가지 않고요. 무모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물에 젖어 있으면 살기가 건들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해 봤는데 역시나 마치 물을 무서워하듯 살기가 다가오지 못하더라고요.”
클로젤의 말에 바스티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누나답다. 빨리 물 뒤집어쓰고 저 녀석이나 꺼내자! 난 이 생고생시킨 그 평민 녀석 얼굴을 좀 보고 싶다고!”
바스티니의 말에 클로젤이 마력으로 물을 만들어 내었다. 곧 온몸에 물을 뒤집어쓴 일행이 얼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지가 묶여 있는 일리안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기분이 일행을 사로잡았다.
답답함. 울분. 증오.
일리안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인 것일까?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무거운 감정에 다가가는 이들이 말을 잃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흐릿했던 그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보였다.
어느 정도 걸어간 일행이 앞에 보이는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만지기만 해도 손이 얼 것 같은 차가운 얼음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일리안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머리카락이 갇혀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처럼 얼음 속에서 넘실대었다.
사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가는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몸 주변에 있는 자잘한 상처를 빼면 제법 균형이 잡혀 있는 체형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나 하얀 피부가 미남형이었지만 감겨 있는 눈에서 흐르는 피가 남자의 분위기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리에 왠지 엄청난 거구의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누나! 정말로 이 사람이 일리안이야?”
“…….”
“클로젤 누나!”
바스티니의 외침에 클로젤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반응에 바스티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이 평민한테 한눈에 반한 거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물론 평민치고 좋은 얼굴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바스티니!”
눈을 흘 기며 바스티니를 책망하였지만 그의 말이 완전히 거짓인 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라는 소리에 거구의 검사를 떠올렸던 그녀였다. 실제로도 현재 대륙에서 유명한 소드마스터들은 주로 일반인보다는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음기둥 속의 일리안은 다른 남자들보다는 왜소했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럼에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누나?”
크라젤의 물음에 클로젤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일행의 목표는 일리안를 아델리아의 황제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클로젤이 대기하고 있는 드모리쉬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들고 온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그가 꺼낸 것은 어른 주먹만 한 붉은 돌이었다. 그가 돌을 꺼내자 클로젤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기를 10분이 지나고 이윽고 얼음기둥 주위에 붉은 돌이 놓였다.
“얼음을 녹이려면 불을 이용해야 한다면서 스승님이 주신 건데 과연 이걸로 가능할까?”
그의 물음에 클로젤은 해 봐야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 들썩였다. 드모리쉬와 클로젤의 마력이 배치해 놓은 화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력을 받기 시작한 돌은 점점 형태를 벗어나 거대한 화염으로 바뀌어, 얼음기둥을 녹이기 시작하였다.
화염으로 화(化)하였던 돌은 어느새 얼음기둥을 삼킬 듯 매섭게 몰아치는 화마(火魔)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크라젤은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