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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떠지지 않을 것 같은 사내의 눈이 떠지자 그의 몸에서 나오는 한기가 일행을 삼켰다. 얼음기둥과 화염이 사라지면서 나오는 수증기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온몸을 감싸는 피로에 클로젤은 마력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
일리안을 얼음기둥에서 꺼내는 일은 성공했다. 이제는 아델리아로 데리고 가기면 하면 되었다.
물론 그 전에 일리안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스티니, 크라젤.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
크라젤과 바스티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안의 주변에 서서 검을 들고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남아 있는 수증기를 로브로 쫓아내며 클로젤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이 떨렸다. 그저 데려가야 되는 평민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클로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 보는 사내임에도 심장이 떨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기분이 클로젤을 감쌌다.
눈을 감고 있는 일리안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매만졌다. 그것도 잠시, 손에서 묻어 나오는 피를 놀란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에 클로젤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시선을 막는 손수건에 일리안은 클로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바다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에서 흘리는 피는 붉었지만 그의 눈은 바다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파랗고 맑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그의 눈에 클로젤은 지금까지 준비해 왔던 모든 말을 잊어버렸다.
클로젤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든 그가 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빙석(氷石)을 없앴습니까?”
10년 동안 얼음의 기둥에 갇혀 있던 사내의 목소리였다.

* * *

동굴을 나왔을 땐 이른 새벽이었다.
날이 밝은 다음에나 움직여야 할 듯했기에 일행들은 적당한 곳에서 노숙을 준비하였다.
마법으로 만든 불을 쬐며 크라젤이 조심스럽게 일리안을 쳐다봤다.
빙석을 없앴느냐는 말 이후로는 그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연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눈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10년을 얼음 속에서 갇혀 지냈기 때문이었을까?
나와 있는 정보로만 봤을 때 그는 27살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봤을 때는 많이 잡아야 20대 초반의 클로젤과 동갑으로 보였다.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그의 행동. 그와는 정반대로 클로젤이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클로젤의 전혀 다른 모습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드모리쉬는 그렇다 쳐도, 그녀의 지금 모습은 크라젤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마이네 후작 가문의 클로젤이라고 하면 사교계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었다. 뛰어난 가문에 그녀 또한 아델리아의 보물이라는 별칭을 황제에게 하사받을 정도로 총명한 여인이었다.
그런 클로젤이었기에 관심을 갖는 귀족 남성들이 많았으나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는 자신의 누나였다. 그를 최대한 안전하게 데리고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었지만…… 크라젤이 보는 클로젤의 모습은 황제의 명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10년 만에 맛보는 세상 공기가 어때요?”
“…….”
말하기가 싫은 건가? 무시하는 거 같은 기분에 화가 날 법하지만 클로젤은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감언이설로 달콤한 말만 지껄이는 다른 남자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평민이라 그런 것일까? 확실히 자신만을 목을 빼고 바라보던 다른 귀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눈앞의 사내에게는 존재했다.
“죄송하지만…… 빙석이 있었을 때도 제 눈이 이런 상태였습니까?”
이런 상태라니? 무슨 상태지?
일리안의 질문에 클로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10년 만에 나와 얼이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얼음감옥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일행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지기까지 그는 계속 갸웃거리며 자신의 눈을 만지고 있었다.
“눈은 아까부터 그대로였어.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나이도 많은 사람이 눈깔에 무슨 이상 생겼어? 왜 그렇게 멍해?”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던 바스티니가 어깨에 사냥한 동물을 진 채 툴툴댔다.
“바스티니!”
“아. 클로젤 누나. 무섭게 노려보지 말라고. 솔직히 저 사람 감옥에서 나올 때부터 눈만 만지작거렸을 뿐이잖아. 꼭 정신 나간 것처럼 앉아 있는 거 짜증 난다고.”
클로젤의 일갈에 바스티니는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10년 전의 소드마스터라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대륙 간의 무기한 평화조약으로 직접적인 나라 간의 전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실제로는 그만한 실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10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라 간의 전쟁은 물론,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곳의 유목 민족들이 서로 간의 세력을 위해 무자비로 전쟁을 하던 때였다. 이기지 않으면 영토는 존재하지 않았고, 패해서 돌아오면 바로 목이 잘려 나가던 때였다.
그 격전의 시대의 소드마스터라면 그야말로 실력으로 그 지위를 얻은 사람이었다. 오는 내내 일리안의 자료를 읽고 또 읽으며 얼음감옥에서 나오는 즉시 그 실력을 보고 싶어 했던 바스티니였다.
그런데 저렇게 얼이 빠진 표정이라니, 자신의 정보가 실은 엉망이었다는 확신만 들게 하는 상황이었다.
“단검…… 가지고 계시면 빌려 주시겠습니까?”
미성의 목소리. 솔직히 평민이기보다는 잘 키워진 여귀족의 노리개라고 하면 딱 맞을 목소리였다. 선이 가는 미남자. 그 어디에도 최강자라 하는 소드마스터의 모습은 없었다.
‘사람을 잘못 찾은 건가?’
바스티니의 말 없는 불평에 크라젤이 말없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소드마스터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한 정보나 사진으로 봤을 때 분명히 앞에 있는 이는 그들이 찾는 일리안이었다.
일리안의 부탁에 크라젤이 품 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숙인 채, 단검을 받아 든 일리안이 자신의 긴 백발 머리를 단번에 잘라 냈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것입니까?!”
놀란 클로젤의 말문이 막힌 가운데 크라젤이 당황한 얼굴로 일리안에게 달려들었다. 크라젤의 비명에 단발머리가 된 일리안은 그를 보는 듯하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에게 무시를 당한 크라젤이 다시 소리치려 했으나 먼저 그의 입을 막은 사람이 있었다.
“잡초머리! 이게 무슨 짓이야!”
“나 귀 안 먹었어. 기다려 봐!”
바스티니가 무슨 생각인지 일리안 옆에 자리를 잡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가죽 병. 안에는 고급스럽지만 독한 술이 담겨 있었다.
“형. 마실래?”
평민은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바스티니였지만 검은 든 자로서 자신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신분을 떠나 존중을 해 왔다. 지금으로서는 확신을 가질 순 없지만 모든 자료에 적혀 있듯이 그는 거의 몇 안 되는 대륙의 소드마스터라고 하였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검을 뽑으라고 하고선 그대로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하니 우선은 기회를 잡아 저 막혀 있는 말문이나 트게 해 볼 생각이었다.
바스티니가 내민 술병을 보고 있던 일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끈을 만들려는 거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이래봬도 저쪽에 있는 공주님 크라젤과는 달리 난 용병들하고 몇 번 놀러 다닌 적이 있단 말이야. 더럽기는 했지만 그들이 하는 짓거리는 꽤 신선했거든. 그때 어느 용병이 일부러 머리카락을 길러 끈을 만드는 것을 보았어.”
바스티니의 말에 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른 머리카락을 몇 개로 나누었다.
“내가 미친놈이라고 했더니 그 용병이 웃으면서 이야기하더라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끈은 이상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 어느 끈보다도 단단하다고 말이야. 살상력도 대단하고, 무엇보다도…….”
“…….”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끈은 여자의 긴 머리를 묶을 땐 그야말로 최고의 액세서리가 된다고 하더군. 몰랐는데 귀족 여자들이 머리를 올릴 때 카르라는 끈을 쓰는데 그 끈의 주재료가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며? 그래서 돈이 필요한 용병들은 머리카락을 길러 끈으로 만든다고 하더군. 하얀색 머리카락이라…… 돈이 꽤 나오겠는데?”
바스티니의 말에 일리안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웃었어?’
놀란 클로젤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주변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일리안이 처음으로 바스티니에게 관심을 보였다. 생각 외의 진전이었다.
“아델리아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기회를 봐서 조심스럽게 꺼내려고 했던 말이었다. 성급하게 일을 추진시켰다가는 일리안이 거부를 할 수도 있었기에 산에서 내려간 다음에나 이야기를 꺼내 볼까 했었다.
하지만 바스티니의 말 때문이었을까? 일리안이 먼저 일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고급술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눈치가 빠른 편이야?”
클로젤이 나서기보다는 우선은 바스티니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듯하였다. 그녀는 크라젤의 옆에 앉으며 일리안과 바스티니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으로 끈을 만들며 일리안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제가 알던 분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도 예전에 한 번 뵌 듯싶군요. 상당히 어렸을 적이라 당신은 기억을 못 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혹시 아버님의 성함이 세르기 카르리뮤 아닙니까?”
“당신…… 내 아버지 알아?”
“미르드의 일을 하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 것을 보니 당신 아버지와 당신 성격이 매우 닮았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분도 당신처럼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관심을 끌어내던 분이셨죠.”
“난 그 영감이랑 닮지 않았어! 내가 훨씬 잘났단 말이야.”
“세르기 님의 백분의 일도 못 닮은 녀석이 하는 소리가 가관이구나, 잡초머리!”
일리안의 손은 생각보다 상당히 빨랐다. 바스티니와 대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머리카락의 끝 부분을 고정하던 그였는데 대화가 거의 끝난 지금 끈의 마지막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술기운이 좀 들어가기 시작한 바스티니는 싱글벙글하며 일리안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킥킥. 크라젤 넌 뭐를 해도 공주님이라고. 그나저나 형 소드마스터라며? 진짜야? 지금으로 봐서는 솔직히 그 정보는 믿기 어렵다. 드모리쉬? 마력으로 이 형 진짜 소드마스터인지 한번 확인해 봐.”
바스티니의 웃음소리에 일리안은 시선을 반대쪽의 드모리쉬에게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