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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과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은 채, 그가 일리안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의 미소를 무시하며 일리안은 다 만들어진 끈을 품에 넣은 채, 자리를 잡고는 누웠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일리안의 태도에 클로젤이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자고, 내일 이야기해요.”
더 수다 떨고 싶다는 바스티니를 억지로 눕게 하며 크라젤 또한 자리에 누웠다. 일행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잠을 잘 때도 일리안은 자리에 누운 채 여전히 혼이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맑게 갠 하늘. 한적한 오후에 일리안은 감았던 눈을 떴다. 따뜻한 햇볕 속에서 모처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그의 표정은 한결 편해 보였다.
“잘 쉬었어요?”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흑비단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곱게 내린 여인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고 맑은 눈에 빛이 가득했지만 또래 여인들에 비해 건강이 좋지 않은 듯 유난히 피부는 창백했다.
그녀를 본 일리안의 심장이 제멋대로 떨렸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녀.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를 향한 마음은 깊었다.
“숄을 왜 내려놓았어? 몸 좀 더 따뜻하게 하지.”
일리안이 올려 주는 숄을 받은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모처럼 바람이 따뜻했어요. 바람 쐬러 나오자고 해 놓고선 당신 혼자 자 버리게 할 정도로 말이죠.”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자 버렸네.”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일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평민의 신분으로 미르드에 인정을 받고, 황궁을 오고 간 지도 2년이 흘렀다. 순수하게 눈앞의 여인을 보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루어 낸 성과였다.
“당신이 자는 사이에 누가 올까 봐 얼마 걱정한지 알아요? 귀족이나 시종들이 봤으면 뭐라고 한 소리 단단히 들었을 거예요. 황궁에서 낮잠을 자다니……. 후훗.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런 무서운 일을 하겠어요?”
“크흠흠. 난 예의범절 모르는 평민이야. 흠흠”
여인의 핀잔에 일리안은 가슴을 당당히 펴며 이야기했고, 그런 일리안의 반응에 여인은 결국 읽던 책을 덮으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둘의 뒤로 젊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는 괘씸한 평민을 신하로 삼으신 거 같네.”
“우아악! 황태자 전하!”
여자와 수다를 떨고 있던 일리안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 뒤까지 내려오는 에메랄드 머리에 하늘색 눈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버스테 미르드 블라지미르.
미르드의 제1 황자이자 앞으로 황제가 될 청년이었다.
“이러고 농땡이나 부리고 있으니까 부단장이 나보고 자네 좀 찾아 달라고 아우성이지. 황제 직속부대 단장이 여기서 낮잠이나 자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지?”
“헤헤.”
일리안과 동갑인 실버스테는 아첨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황궁 속에서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다. 작위를 주겠다는 황제의 제안에도 그저 웃으며 황궁에 오갈 수 있는 권리만 달라고 했던 일리안과 권력을 얻기 위해 몰려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답답해하는 실버스테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들어가셔서 차라도 하시겠습니까? 전하. 이젠 정말로 이러고 서 있으면 안 되겠군요.”
현장을 들켜 버린 터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일리안을 바라보던 여인이 실버스테에게 말했다.
“이런, 비스이미렌. 너무 저 녀석 편만 들지 말라고. 자네가 항상 편을 들어 주니까 황제 직속부대 대장님이 일은 안 하고 매일 도망만 간단 말이야. 황태자인 난 이 녀석 쫓아다니느라 정신없고.”
황태자의 투정 아닌 투정에 비스이미렌은 미소를 지었다. 일리안과 실버스테의 중간에 선 비스이미렌이 미소로 둘에게 말했다.
“전하야말로 이 사람 찾으러 가야 한다고 하고선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는 다 다른 분께 넘기고 오신 거잖아요. 호홋. 어서 들어가요.”
일리안과 실버스테의 손을 잡으며 비스이미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리안! 아침이에요! 일어나요!”
이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앞에는 클로젤이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가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더니 곧 자리를 옮겼다.
꿈이었던가.
일리안은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 만났던 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봉인에서 깨자마자 그때의 꿈이라니, 일리안은 조소하였다. 꿈이었지만 너무나도 생생했다.
끔찍한 기억. 꿈을 꾸었을 뿐이었건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곧 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안이 클로젤을 향해 다가갔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클로젤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일리안이 식사를 준비하는 일행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일을 도와주려는 건가?’
그가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클로젤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때, 일리안을 보고 있던 바스티니가 그를 향해 무언가를 휙 던졌다. 바스티니가 던진 물건을 일리안은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잡았다.
바스티니가 일리안에게 준 것은 검집에 잘 싸여져 있는 숏소드였다.
“형 할 거 없으면 나랑 사냥이나 가자. 올라오면서 보니까 여기는 먹을 만한 동물이 제법 있더라고. 혼자 다니기 힘드니까 나랑 같이 가자. 괜찮지, 누님?”
“이 잡초머리! 넌 나랑 장작 준비해야 되잖아!”
은근히 사냥으로 빠져나가려는 바스티니를 보며 크라젤이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에 바스티니가 코웃음을 내며 말했다.
“사냥감하고 같이 해 가지고서 오면 되잖아! 난 공주님인 너랑은 달리 장작보다는 사냥이 더 편하다고! 넌 여기서 누님이나 도와드려! 자! 그럼 가자!”
일리안의 팔을 잡은 채, 바스티니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언제나 도망가는 바스티니의 행동에 크라젤이 고개를 저었다. 장작을 가지러 가기 직전, 크라젤은 자신의 누나인 클로젤을 바라보았다. 절반 정도 임무에 성공했다는 생각 덕분인지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아니 그 이상으로 밝아져 있었다.
‘왜 그러지?’
일리안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 클로젤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있는 드모리쉬의 생각도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기분 탓인가?’
일리안과 대화를 하게 되면 클로젤은 평소보다도 환한 미소로 그를 대했다. 마치 오래된 연인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일리안과 눈을 마주치고 그의 말 한마디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드모리쉬는 말 없는 적의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만 친절할 뿐, 그 이외의 인간들에게는 너무하다 할 정도로 오만하고 거칠게 대하는 것이 드모리쉬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누군가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고민을 하던 크라젤이 별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연이은 노숙에 지쳐서 자신이 잘못 보는 것일 수 있었다.
장작을 주우러 가면서 크라젤이 머릿속에 있던 고민을 지웠다.

* * *

일리안은 10년이나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숲 속에서 노련하게 행동했다. 나무나 풀의 위치나 흔적을 통해 동물과 몬스터를 구별해 내었고, 그가 선택한 길로 가면 100% 사냥감을 발견하였다. 그 덕분에 바스티니는 혼자 나설 때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동물을 사냥했다.
“산에 대해 되게 잘 아네? 전에 숲 속에서 살았던 거야, 형?”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되었건만 바스티니는 일리안을 오랫동안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일리안도 그런 바스티니가 싫지 않은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적에 방랑하시는 부모님의 손에서 키워졌습니다. 많은 산을 돌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배웠죠. 좀 더 잡아야 합니까?”
나이가 10살은 어린 바스티니에게도 일리안은 정중히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귀족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신용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자신과는 다르게 거리를 두는 일리안의 행동에 바스티니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보지 못해 불만은 있었지만 의외로 일리안으로부터 배우는 게 상당하였기에 어느새 호감을 가지게 된 바스티니였다.
신분의 차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지식의 차는 스스로에 의해 바뀔 수 있다.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자신의 아버지였지만 그 점만큼은 대단하다고 여기는 바스티니였다. 바스티니의 가문은 무인의 집안이기도 했지만 또한 배우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어찌 되었든 자신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일리안에게 소드마스터를 떠나 호감을 느낀 바스티니로서는 그의 행동에 기분이 퍽 상해 눈을 찡그렸다.
“형! 나 좀 봐!”
한쪽에 사냥감을 내려놓고는 두 손을 허리에 놓으며 바스티니는 일리안을 불렀다. 그의 반응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리안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 27살. 내가 16살. 11살 차이지. 그런데 왜 존대를 하는 거야?”
흥분한 바스티니를 보며 일리안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르리뮤는 후작이었지만 일리안은 평민일 뿐이었다. 존대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후작님의 자제 되시는 분께 평민이 어떻게 말을 낮출 수 있겠습니까?”
“바보 같으니. 나라면 나이도 어린 것이 건방지다고 한 대 쥐어박았겠다. 그냥 편하게 말해.”
“이제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된 분께 어찌 그렇게 행동하겠습니까?”
잠깐 동안의 정적이 둘을 감쌌다.
무표정한 상태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일리안을 바스티니는 말없이 바라봤다.
“진정한 벗은 시간이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다.”
바스티니의 짧은 말에 일리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반응에 바스티니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망할 영감이 나한테 항상 중얼거린 말이지. 난 형의 구체적인 사정 따윈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더군다나 그 영감이 날 여기로 보내면서 했던 말이 한번 내 식대로 판단해 보고 결정하라고 했지. 난 형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형도 날 동생처럼 대해. 존대는 불편하단 말이야!”
바스티니의 말에 일리안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빙석에서 깰 때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묘하게 예전의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귀족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다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생각했었다.
정말로…… 모든 게 말이다.
“죄송합니다. 저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나큰 호의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