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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금의 상황에서 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일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앞의 편지를 바라봤다.
편지의 앞면에 찍혀 있는 직인. 미르드의 황족, 그것도 황제의 직계 후손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직인이었다.
10년 전이었다면 무릎을 꿇고서 정중하게 받아 든 다음 서둘러 펴 보았겠지만 그런 예를 갖춘 행동들은 지금의 일리안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황제 폐하의 생은 얼마 남지 않으셨고, 황태자 전하는 제국의 전부를 잡고 계신다. 네가 죄인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의 전하이시라면 너에게 예전의, 아니 그 이상의 권력을 주실 거다. 미르드로 돌아가자, 일리안.”
“…….”
“잠시만요! 이럴 수 없어요! 일리안은 우리가 구했다고요!”
“나서지 마라, 아델리아의 귀족아. 네 일행을 살려 준 건 너희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리안과 정상적인 상태에서 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쫘악쫘악.
클로젤과 중년 사내의 대화의 사이에 무언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와 주위의 모든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하였다.
“일리안!!”
놀람과 분노에 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리안의 행동은 그치지 않았다.
황태자의 서신을 잘게 찢은 일리안이 불어오는 바람에 그 조각들을 날렸다.
그 바람에 흘려 버리듯 일리안은 흐느끼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일리안!”
하얗게 질린 중년 사내가 일리안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의 눈빛에 아랑곳없이 그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있었다. 덤덤하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세상엔 왜 이렇게 미운 것만 눈에 보이는 건지……. 시간이 흘러도 밝게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10년 전에 모두 체념했던 것이 왜 이제 와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사지로 몰았던 스승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철저히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원수로부터 굴러 들어온 싸구려 자비 때문일까?
점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분노가 일리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푸른색이었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였고, 하얀 피부에 서리가 맺혔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건 감옥에서 느꼈던 붉은 살기가 일리안의 몸에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을 유지하고 있던 자객들도, 클로젤 일행도, 심지어 중년 사내마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네만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일리안이 반역죄로 빙석에 봉인되고, 그의 흔적이 미르드에서 완전히 소멸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국의 세 명밖에 없는 공작을 위해 황제가 하사한 탑의 꼭대기 층에서 마네의 주인은 평소처럼 흔들의자에 앉은 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쐬고 있었다.
그녀는 본래 몰락한 자작가의 딸로 부유한 귀족의 첩으로 팔려갔을 운명이었지만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천재적인 마법의 재능으로 인해 그녀는 유일하게 여인의 몸으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마네. 이번에 기사 시험을 보았다며?”
뒤에 서 있던 마네가 그녀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공작이 무릎담요를 걷은 후, 천천히 마네에게 다가왔다. 그런 공작의 행동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네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네 앞으로 다가온 공작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비스이미렌 아가씨. 공작의 몸으로 시종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 마네는 꼭 붙을 거야. 내가 마네를 적극 추천했으니까. 마네, 합격하게 되면 곧바로 그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가게 될 거야. 그를 감시할 인원을 뽑기 위한 시험이었으니까.”
“…….”
“난 그의 눈을 빼앗았고, 그의 사지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만들었어. 이 잘난 제국을 위해서 말이야.”
“아가씨, 그런…….”
그녀가 모시는 공작 비스이미렌을 마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모두가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는 일리안을 비스이미렌은 아직도 홀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 뛰어나도 엉망이 된 사람의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 하지만 난 여전히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 그가 날 만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그를 만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래서 제국의 멍청이들 몰래 그를 빙석에 가두기 전에 수룡의 심장을 그에게 이식시켰어.”
비스이미렌의 말에 놀란 마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겁에 질린 마네를 바라보는 비스이미렌의 얼굴에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미소가 생겨났다.
황후나 황태자비와 같은 황족의 가족을 제외하고, 여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화려하기를 거부하는 여인, 가장 축복받았음에도 원하는 것을 단 하나도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여인.
“죽은 지 얼마 안 된 수룡의 심장을 5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그의 눈과 사지에 넣어 줬어. 빙석이라는 게 본디 수룡의 힘의 여파로 생겨난 돌이니 수룡의 심장이 가진 재생력과 빙석의 힘이라면 엉망이 된 그의 몸도 원래대로 회복될 거야.”
“아가씨.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아니 어째서 저에게 그걸 알려 주시는 겁니까?”
“난 마네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았어. 하지만 수룡은 본디 격한 감정에 충실한 생명체지. 수룡의 심장과 동화된 일리안은,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분노나 증오를 느끼게 되면 수룡의 감정 그대로 행동하게 될 거야.”
비스이미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온몸을 감싸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스이미렌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기에 마네는 하염없이 앞의 주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는 것인가? 분노나 증오라는 감정에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런 선택을 해 버렸다.
마네의 시선에 비스이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를 그렇게 만든 걸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미쳐 버린 그에 의해 마네가 죽는 걸 원하진 않아. 그러니 마네, 그가 붉은 눈으로 변하게 되면 도망가. 수룡의 감정을 느끼게 된 일리안은…….”
조용히 이어지던 말이 한 번 끊기고, 마네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죽이기 전까진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벌써부터 이런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다니! 마네는 이곳에 오기 전에 비스이미렌에게 받았던 물건을 품속에서 꺼내었다.
1회용 마법 스크롤. 무슨 마법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리안이 폭주했을 때 빨리 사용하라며 비스이미렌이 준 것이었다.
클로젤 일행의 앞에 선 마네는 중년 사내를 보며 소리쳤다.
“대장. 우선은 피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상태가 이상해진 일리안을 당황한 눈으로 보고 있던 중년 사내는 마네의 말에 어림없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여기 있으면 모두 죽어요!”
“난 황태자 전하에게 저 녀석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걸 어찌…….”
중년 사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을 꿰뚫은 검을 보며 일리안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리안이 들고 있는 검에 생긴 하얀 막이었다.
순백의 광채. 소드마스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검기가 일리안이 쥐고 있는 검을 감싸 빛을 내고 있었다.
광채를 띤 검 위로 중년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졌다.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위험했다.
“어서 일리안에게서 물러나. 그리고 당신들도 어서 피해!”
푸욱.
마네가 황급히 클로젤 일행에게 외치는 사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 사내의 몸이 움찔거리며 쓰러지자 일리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더 사내의 몸을 찔렀다. 사내의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검을 찌르고 있던 일리안은 이윽고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키킥.”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밖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가 일리안의 정신을 점점 더 황폐화시켰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 그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던 전과는 달리 거침없이 진한 살기를 드러내며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일리안이 자객 쪽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중년 사내의 피로 흥건해진 바닥 위에 서 있는 일리안의 모습은 온몸을 떨게 만들 정도로 공포스러웠지만 동시에 시선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공포와 아름다움에 몸이 굳어진 채,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자객들에게 내려진 건 일리안의 검이었다. 본인이 깨닫기도 전에 지나간 검에 의해 자객들은 흥건히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운이 좋게 그 검을 피했다고 해도 검 주변에 만들어져 있는 순백의 검기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며 쓰러졌다.
지금의 상황에 마네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중년 사내를 난도질하는 동안 비스이미렌이 주었던 스크롤을 찢었지만 아무런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객의 시체 위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일리안이 결국 마네와 클로젤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리안이 마네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마네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나머지 자객들이 모두 명을 달리하였다. 뭐라고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이건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광전사가 일으키는 살육일 뿐.
‘아가씨. 이 사람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서라도 살리고 싶으셨던 겁니까?’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일리안의 검이 마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일리안은 멍한 표정으로 앞의 편지를 바라봤다.
편지의 앞면에 찍혀 있는 직인. 미르드의 황족, 그것도 황제의 직계 후손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직인이었다.
10년 전이었다면 무릎을 꿇고서 정중하게 받아 든 다음 서둘러 펴 보았겠지만 그런 예를 갖춘 행동들은 지금의 일리안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황제 폐하의 생은 얼마 남지 않으셨고, 황태자 전하는 제국의 전부를 잡고 계신다. 네가 죄인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의 전하이시라면 너에게 예전의, 아니 그 이상의 권력을 주실 거다. 미르드로 돌아가자, 일리안.”
“…….”
“잠시만요! 이럴 수 없어요! 일리안은 우리가 구했다고요!”
“나서지 마라, 아델리아의 귀족아. 네 일행을 살려 준 건 너희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리안과 정상적인 상태에서 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쫘악쫘악.
클로젤과 중년 사내의 대화의 사이에 무언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와 주위의 모든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하였다.
“일리안!!”
놀람과 분노에 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리안의 행동은 그치지 않았다.
황태자의 서신을 잘게 찢은 일리안이 불어오는 바람에 그 조각들을 날렸다.
그 바람에 흘려 버리듯 일리안은 흐느끼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일리안!”
하얗게 질린 중년 사내가 일리안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의 눈빛에 아랑곳없이 그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있었다. 덤덤하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세상엔 왜 이렇게 미운 것만 눈에 보이는 건지……. 시간이 흘러도 밝게 보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10년 전에 모두 체념했던 것이 왜 이제 와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사지로 몰았던 스승 중 하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철저히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원수로부터 굴러 들어온 싸구려 자비 때문일까?
점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분노가 일리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푸른색이었던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였고, 하얀 피부에 서리가 맺혔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건 감옥에서 느꼈던 붉은 살기가 일리안의 몸에 다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을 유지하고 있던 자객들도, 클로젤 일행도, 심지어 중년 사내마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마네만이 무언가를 눈치챈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일리안이 반역죄로 빙석에 봉인되고, 그의 흔적이 미르드에서 완전히 소멸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제국의 세 명밖에 없는 공작을 위해 황제가 하사한 탑의 꼭대기 층에서 마네의 주인은 평소처럼 흔들의자에 앉은 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쐬고 있었다.
그녀는 본래 몰락한 자작가의 딸로 부유한 귀족의 첩으로 팔려갔을 운명이었지만 무한에 가까운 마력과 천재적인 마법의 재능으로 인해 그녀는 유일하게 여인의 몸으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마네. 이번에 기사 시험을 보았다며?”
뒤에 서 있던 마네가 그녀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공작이 무릎담요를 걷은 후, 천천히 마네에게 다가왔다. 그런 공작의 행동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네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네 앞으로 다가온 공작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비스이미렌 아가씨. 공작의 몸으로 시종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 마네는 꼭 붙을 거야. 내가 마네를 적극 추천했으니까. 마네, 합격하게 되면 곧바로 그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가게 될 거야. 그를 감시할 인원을 뽑기 위한 시험이었으니까.”
“…….”
“난 그의 눈을 빼앗았고, 그의 사지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만들었어. 이 잘난 제국을 위해서 말이야.”
“아가씨, 그런…….”
그녀가 모시는 공작 비스이미렌을 마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모두가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는 일리안을 비스이미렌은 아직도 홀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이 뛰어나도 엉망이 된 사람의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어. 하지만 난 여전히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 그가 날 만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그를 만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래서 제국의 멍청이들 몰래 그를 빙석에 가두기 전에 수룡의 심장을 그에게 이식시켰어.”
비스이미렌의 말에 놀란 마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겁에 질린 마네를 바라보는 비스이미렌의 얼굴에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미소가 생겨났다.
황후나 황태자비와 같은 황족의 가족을 제외하고, 여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화려하기를 거부하는 여인, 가장 축복받았음에도 원하는 것을 단 하나도 얻을 수 없었던 불쌍한 여인.
“죽은 지 얼마 안 된 수룡의 심장을 5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그의 눈과 사지에 넣어 줬어. 빙석이라는 게 본디 수룡의 힘의 여파로 생겨난 돌이니 수룡의 심장이 가진 재생력과 빙석의 힘이라면 엉망이 된 그의 몸도 원래대로 회복될 거야.”
“아가씨.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아니 어째서 저에게 그걸 알려 주시는 겁니까?”
“난 마네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
“……?”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존재하지 않았어. 하지만 수룡은 본디 격한 감정에 충실한 생명체지. 수룡의 심장과 동화된 일리안은, 평소에는 별 차이가 없겠지만 분노나 증오를 느끼게 되면 수룡의 감정 그대로 행동하게 될 거야.”
비스이미렌의 말이 이어질수록 온몸을 감싸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스이미렌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기에 마네는 하염없이 앞의 주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그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는 것인가? 분노나 증오라는 감정에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런 선택을 해 버렸다.
마네의 시선에 비스이미렌이 고개를 저었다.
“난 그를 그렇게 만든 걸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미쳐 버린 그에 의해 마네가 죽는 걸 원하진 않아. 그러니 마네, 그가 붉은 눈으로 변하게 되면 도망가. 수룡의 감정을 느끼게 된 일리안은…….”
조용히 이어지던 말이 한 번 끊기고, 마네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죽이기 전까진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벌써부터 이런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다니! 마네는 이곳에 오기 전에 비스이미렌에게 받았던 물건을 품속에서 꺼내었다.
1회용 마법 스크롤. 무슨 마법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리안이 폭주했을 때 빨리 사용하라며 비스이미렌이 준 것이었다.
클로젤 일행의 앞에 선 마네는 중년 사내를 보며 소리쳤다.
“대장. 우선은 피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상태가 이상해진 일리안을 당황한 눈으로 보고 있던 중년 사내는 마네의 말에 어림없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여기 있으면 모두 죽어요!”
“난 황태자 전하에게 저 녀석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걸 어찌…….”
중년 사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을 꿰뚫은 검을 보며 일리안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가장 눈에 띄는 건 일리안이 들고 있는 검에 생긴 하얀 막이었다.
순백의 광채. 소드마스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검기가 일리안이 쥐고 있는 검을 감싸 빛을 내고 있었다.
광채를 띤 검 위로 중년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졌다.
미쳐 버린 소드마스터는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위험했다.
“어서 일리안에게서 물러나. 그리고 당신들도 어서 피해!”
푸욱.
마네가 황급히 클로젤 일행에게 외치는 사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 사내의 몸이 움찔거리며 쓰러지자 일리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더 사내의 몸을 찔렀다. 사내의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검을 찌르고 있던 일리안은 이윽고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키킥.”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밖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가 일리안의 정신을 점점 더 황폐화시켰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 그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던 전과는 달리 거침없이 진한 살기를 드러내며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일리안이 자객 쪽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중년 사내의 피로 흥건해진 바닥 위에 서 있는 일리안의 모습은 온몸을 떨게 만들 정도로 공포스러웠지만 동시에 시선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공포와 아름다움에 몸이 굳어진 채,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자객들에게 내려진 건 일리안의 검이었다. 본인이 깨닫기도 전에 지나간 검에 의해 자객들은 흥건히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운이 좋게 그 검을 피했다고 해도 검 주변에 만들어져 있는 순백의 검기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며 쓰러졌다.
지금의 상황에 마네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중년 사내를 난도질하는 동안 비스이미렌이 주었던 스크롤을 찢었지만 아무런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도망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객의 시체 위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던 일리안이 결국 마네와 클로젤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리안이 마네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마네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나머지 자객들이 모두 명을 달리하였다. 뭐라고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이건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광전사가 일으키는 살육일 뿐.
‘아가씨. 이 사람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서라도 살리고 싶으셨던 겁니까?’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일리안의 검이 마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