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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들의 움직임이 멈추자 일리안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밑에 쓰러져 있던 자객의 옷을 찢어 자신의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 모습에 바스티니는 대검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수라나 다름없이 보이는데도, 본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산책을 갔다 온 뒤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 것처럼…….
“싸울 의지를 잃으셨다면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일리안의 물음에 살아남은 자객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하면 죽는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일행이 있는 쪽에는 몇 명이나 있는 겁니까?”
일리안의 말에 바스티니는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지금은 그의 실력에 기분 나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 두 명을 죽이기 위해 20명이나 되는 자객들이 공격해 왔다. 클로젤이 있는 쪽이 안전할 리가 없었다.
“이쪽에 20명, 그쪽에 30명 정도 배치되어 있소.”
자객의 말에 바스티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클로젤과 드모리쉬가 있다면 그 정도 인원은 순식간에 제거할 수 있다. 더군다나 공주님이라고 놀리고 있긴 하지만 크라젤의 단검과 롱소드의 조화에는 내심 감탄하고 있던 바스티니였다.
하지만 바스티니와는 다르게 일리안의 표정은 어두웠다.
눈앞의 자객을 바라보며 일리안은 품속에 넣어 놓았던 것을 꺼내었다.
검은색의 주머니. 그 안에는 주머니 색과는 달리 새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일리안이 주머니에 있는 걸 꺼내 들자 자객들의 표정이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새하얗게 변하였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한 자객이 저에게 던지려고 했던 겁니다. 파이어 볼을 잡아 내는 모습에서 제가 마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
“난……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이 대륙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것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저일 겁니다.”
멍한 표정의 일리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전투 중에도 변하지 않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바뀌었다.
“이건 일시적으로 마법력을 사라지게 하는 가루죠. 무한의 마력이라는, 마법사로서는 최고의 권능을 가졌지만, 그 때문에 온몸의 기가 뒤틀린 그 사람을 치료할 때 사용하기 위해 제가 만든 겁니다.”
차가운 표정의 일리안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가 공주님을 만나서 마왕을 없애고 서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 따윈 현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평민의 신분을 가진 남자는 피를 토하는 고통으로 기사까지 되었어도, 몸이 약한 공주님을 구하기는커녕 공주에 의해 목숨을 구걸받는 현실을 만났을 뿐이었다.
“이건…… 약일 뿐 절대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
일리안의 말이 계속될 때마다 자객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바스티니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일리안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걸 무기로 썼다면 아무리 높은 클래스의 마법사라고 해도 최소 하루는 마법을 전혀 못 쓰겠지요. 그 둘이 마법을 못 쓰게 된다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의 일행이라도 쉽게 제압했을 겁니다.”
일리안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손에 들고 있던 가루를 살아 있는 자객들에게 뿌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있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짐승의 눈.
자객의 우두머리와 똑같은 눈으로 일리안은 자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안내하십시오. 그게 그나마 당신들이 오래 사는 길이 될 겁니다.”
일리안의 말에 자객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젤은 자객들에게 둘러싸인 채 앉아 있었다. 일행에게서 반항할 의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대화 이후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클로젤은 현재 자객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 명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로잡은 인질임에도 불구하고, 자객들은 그들을 감시하기보다는 일행과 함께 주변에 뿌려 놓았던 하얀 가루의 흔적을 제거하고 있었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불을 피워 놓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 자객이 고개를 숙였고, 그의 말을 확인하듯 사내가 다시 물었다.
“백루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것이겠지?”
“이곳에 있는 흔적은 확실히 지웠습니다. 그가 있던 곳으로 갔던 자객들에게는 절대 백루를 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으니 그가 백루에 대해 아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하얀 가루의 이름이 ‘백루’인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자객들은 클로젤 일행을 감시하는 것보다도 그 백루라는 가루의 흔적을 지우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자객들에게 잡혀 있는 상황임에도 궁금한 건 절대로 못 참는 크라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자객에게 물었다.
“왜 그 백루라는 걸 숨기는 것입니까?”
크라젤의 돌발 행동에 클로젤이 한숨을 쉬는 동시에 그를 감시하고 있던 자객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였다. 잡혀 있는 주제에 질문이나 해 대다니 간이 부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는 닥치라고 했겠지만 그들은 절대로 앞의 귀족에게 손대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후였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클로젤의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자객의 입에서 물음의 답이 튀어나왔다.
“백루를 보게 되면 일리안은 충격을 받는 수준을 떠나 분노할 테니까요.”
“부대장님!”
“괜찮아요. 이 정도는.”
부대장이라 불리는 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라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다시 드는 의문에 크라젤이 물었다.
“왜 화를 낸다는 거죠? 그냥 가루일 뿐이지 않습니까?”
크라젤의 물음에 부대장이라는 여자가 말없이 그를 보았다. 고뇌하는 눈빛으로 크라젤을 보던 부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백루만큼은 일리안에게 보이면 안 됩니다.”
그녀의 말에 이번엔 클로젤이 반응하였다.
“도대체 왜……?”
다시금 부대장이 입을 열려는 찰나 눈앞의 풀이 움직이며 5명 정도 되는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백루라고 이름을 붙인 그 가루는 제가 몸이 약한 약혼녀를 위해 만들어 낸 ‘약’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절대로 무기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백루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자객들과 나타난 일리안이 클로젤 일행을 바라봤다. 생포하고 있던 자객들을 발로 걷어차 버린 바스티니가 일리안의 뒤에 섰다.
일리안이 클로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누를 끼쳐 정말로 죄송합니다. 마력은 하루만 지나면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의 말에 클로젤과 드모리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마법력이 사라진 일에 둘 다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일리안의 목소리는 클로젤 일행에게는 안도를, 자객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20명 전후의 자객들이 일리안의 주위를 포위했고, 앉아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중년 사내를 보고 있던 일리안이 바스티니에게 말했다.
“아가씨 곁에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바스티니가 클로젤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객들과 클로젤 일행, 그리고 일리안이 홀로 서 있는 가운데 일리안의 시선이 부대장이라 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마네.”
일리안의 말에 그 여자가 복면을 벗었다. 깔끔한 외모의 젊은 여자가 일리안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마네의 얼굴을 보자 주마등처럼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일리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촉촉해진 눈을 손으로 가리며 일리안이 그녀에게 물었다.
“잘……잘 지내지?”
일리안의 말에 마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쳐서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험한 일을 당해 놓고는 그는 여전했다. 그렇기에 마네는 이 상황에서도 그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잘 지내냐는 질문. 그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깊었던 두 사람을 보아 왔던 그녀였다.
“다행이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잠시 후, 눈빛이 바뀐 일리안이 마네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 마네를 죽일 순 없어.”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일리안을 노려보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일리안의 눈이 금세 차가워졌다.
일리안의 시선에 중년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 얼굴을 보니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 거냐?”
“…….”
“한심한 것. 거기서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린 것이냐? 그것도 아델리아 귀족들의 도움을 받고서? 천하의 일리안도 쓰레기가 다 되었군.”
중년 사내의 말에 클로젤의 시선이 일리안을 향했다.
분명 일리안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얼음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중년 사내는 일리안이 혼자의 힘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클로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리안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나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것이냐!”
일리안을 향해 호통을 친 중년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황금 봉투에 용이 그려진 인장. 얼음감옥에 갇히기 전에 질리도록 보아 온 것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너라. 일리안.”
“…….”
“황태자 전하의 명이시다. 황궁으로 돌아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