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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놈
1화
1. 추적은 이별을 남긴다(1)
12월 10일. 시간은 잘도 간다. 스물아홉살의 겨울은 피곤과 푸석한 피부와 퀭한 눈, 그리고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선경에게 폭격을 가했다. 그래도 꺾인 20대에 다행히 남자 인간 애인이 있다는 건 행운일까. 아니면 이런 몰골에도 애인이 붙어 있다는 것이 다행인 걸까.
연말의 방송국은 말하지 않아도 미친 듯이 바쁘다. 그냥 있어도 바쁜데 불난 집에 석유를 확 뿌린 것처럼 그 바쁜 것이 활활 타오른다. 방송국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가 되면 한 달 내내 다들 좀비같이 죽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다들 입으로는 피곤으로 곧 죽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느 순간 방송국 구석구석에 틀어박혀 자신들의 일을 밤을 새고 또 새서 하고 있었다. 제길, 또 이렇게 피부가 나이를 먹는구나. 꿈에 그리던 나의 모습은 드라마에서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 프로듀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정말 잔인하리만큼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삼 일 밤낮을 새고 집에 들어와 실신하기 바로 직전 휴대폰이 울렸다. 선경이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뜬 채 미확인 메시지를 확인하는 찰나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이 미친 인간이 이 대낮에 지금 어디 있는 거야?
한두 달 전부터인가 애인의 이상한 행동이 관찰되었었다. 여자의 직감은 신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최고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의 행동에선 절대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는 강렬한 인상이 풍겼다. 간만에 만나서 하는 데이트가 영화 추적자를 찍듯이 추적 본능을 일으켰다. 직장에서도 시사 범죄나 사회적 문제 같은 것을 다루는 파트였기 때문에 추적이라하면 자신 있었던 선경 아니었던가.
몰래 GPS를 달면 범죄이기 때문에 선경은 그와 있는 내내 꼬리를 잡을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이 나라에서 불법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것. 스마트폰 위치 추적 어플을 깔고 이걸 숨기자라고 결론이 나면서 남자의 휴대폰을 한 5분 정도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까짓 거 식은 죽 먹기지. 선경의 표정에선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 배터리가 없어서 그런데 자기 휴대폰 좀 빌려 줘. 김 선배한테 전화 좀 해야 해. 내 일을 김 선배가 가져가서 진행 상황을 좀 알아야 하거든.”
선경은 능글맞게 새 배터리를 빼고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로 갈아 끼운 뒤 깜박거리는 배터리 량을 보여 주었다. 영수는 아무 의심 없이 선경에게 휴대폰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선경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거는 척하며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끊고 위치 추적 어플을 설치했다. 모든 절차를 마친 후 어플 숨기기 기능으로 철저하게 흔적을 지워 버렸다. 남자의 휴대폰을 뒤져 보고 싶었지만 바람피우는 것들이 흔적을 남길 리가 있을까. 머리 좋은 놈들이 바람도 피운다는데.
생각보다 이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선경은 여유 있게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다시 김 선배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척하며 다시 영수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선경은 아니길 기도했었다.
역시 안 좋은 느낌은 틀린 적 없다 했나. 선경은 피곤이고 잠이고 뭐고 외투와 가방을 챙겨서 문자에 적힌 장소로 서둘러 운전했다. 서울 외곽 쪽에 있는 조용한 곳에 별장처럼 생긴 모텔 앞 공터에 차를 세웠다. 송장 모텔이라고 크게 쓰인 간판은 낮인데도 불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거참, 이름 잘 지었군. 송장 치를 준비나 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선경은 이를 갈며 차에서 내렸다. 모텔 주차장 쪽으로 살짝 가 보니 그의 차량이 없었다. 주도면밀하게 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온 것일까. 하여간 별 잔머리는 다 쓴다니까. 선경은 기가 찼다. 다시 차로 돌아온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가짜였으면 했다. 어플이 미쳐서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준 것이라고. 너무 피곤해서 이런 그지 같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말이다.
벌게진 눈을 잘 깜박이지도 않고 차 안에 앉아 모텔 입구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집중해서 쳐다보았는지 눈이 뻐근하고 눈물이 나왔다. 자신의 신세가 좀 처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한심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살짝 후회 아닌 후회를 하려는 찰나, 한 쌍의 낯익은 남녀가 서로 팔짱을 끼고 하하 호호 하며 모텔 밖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살짝 후회했던 마음에 용암이 흘러내려 그 마음을 싹 태우고 오로지 분노에 휩싸인 선경은 차에서 내려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재미 좋았나 보네. 둘.”
선경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남녀는 길에 우뚝 섰다. 남자는 서둘러 여자의 팔을 빼내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역겨운 비누 냄새.
“아. 싸구려 비누 냄새.”
선경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그 둘을 쏘아보았다.
“자……자기야. 오해야. 오해!”
오해는 무슨! 지랄 옆차기하고 자빠졌네!
쌍욕이 목구멍 안에서 쳐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별할 때 하더라도 미친년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왜. 둘이 다정하게 나오는 걸 차 블랙박스가 찍었어. 성인 남녀가 모텔에서 샤워만 하고 나왔나 그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선경이 아닌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의 손을 소중하듯이 잡았다. 마치 고양이 앞에 쥐마냥 벌벌 떨고 있는 년. 대학 때 절친한 후배였다.
아아. 저 인간 옆에 붙어 있으니 생각난다. 자긴 의사와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했나?
“그래서 넌 의사와 결혼하는 게 꿈이어서 남의 남자랑 잤니?”
화가 나면 정말 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선경의 성격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후배 영지. 영지는 고개만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최영수, 너도 아무 생각 없이 애랑 자지 않았을 거 아냐. 단지 성적 욕구를 풀려고 만난 거야? 하긴 바람피우는 유부남들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곧 헤어져 이혼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라는 말이라더라.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애인이 있는 몸이니 너도 쟤한테 그랬냐?”
영수는 얼굴이 벌게졌다. 돌직구 아닌 돌직구였다. 선경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약속은 해 놓고 몸은 안 주니까 당연히 바람피워도 좋다고 생각했냐? 그럼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그랬어? 네 몸 좀 달라고. 발정날 것 같아서 아무나하고 붙어먹게 생겼다고!”
“언니, 그렇다고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나라니요?”
선경의 말을 듣고 있던 영지는 발끈하며 소리를 쳤다.
영지의 발끈한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이 선경은 비웃으며 말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럼 임자 있는 남자한테 몸 주는 년이 아무나가 아니고 뭐야. 뭐, 설령 네가 진짜 쟤를 사랑했다고 치자. 그건 너한테만 로맨스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바람이고.”
선경은 보이지 않는 칼을 영지의 몸에 휘둘렀다. 더 지독하고 악한 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라는 칼로 베기만 했지 난도질하진 않았다.
“임선경! 그만해. 애초부터 혼전순결이라는 말 할 때부터 너랑 만나면 안 되었던 거였어. 그때는 너 정말 사랑해서 그 약속 지켜줄 수 있을 줄알았다. 근데 남자란 동물이 갈증이 해소가 안 되니 눈이 다른 곳으로 향하더라. 마음만 하는 사랑 글쎄, 난 그런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 이렇게 너한테 걸리기 전에 어차피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 사랑하게 됐다고. 그게 네 후배 김영지라고! 나 영지 사랑한다. 속궁합도 잘 맞고 너보다 더 여자답고 사랑스러워. 내가 왜 널 만나 2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구구절절 말하고 있는 영수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 그냥 남자다울 순 없는 거냐. 비겁한 자식.
“야. 어차피 너희가 나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다 핑계로 밖에 안 들려. 쿨하게 헤어지고 싶었지만 이미 지저분해졌고 속궁합 잘 맞는 최영수와 김영지. 죽을 때까지도 그 마음 변하지 마라.”
선경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자신한테 미안하다 말 한 마디 없던 그들. 끝까지 잡고 있던 손. 자신이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문제 덩어리였나 싶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차올라 선경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망할 것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선경은 참고 또 참으며 그들 옆에 차를 세우고는 창문을 열어 영수가 준 반지를 빼 그들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듯.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아니 5병 깔아 줘요!”
선경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집에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같은 성격의 그녀이기에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서 집으로 향했지만 절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선경은 샤워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최대한 예쁘게 꾸몄다.
요 근래 정말 힘들게 일했더니 체중이 3킬로나 빠져 버린 선경은 풍만한 가슴 아래로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더 볼륨 있어 보이는 몸매가 되었다. 방송국의 베이글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만큼 선경은 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동그랗고 큰 눈과 작은 입술로 본인의 나이보다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꾸미니 얼마나 예쁘겠는가. 바람피운 그놈 최영수도 선경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녔었다.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만나줬더니 몸 안 줬다고 바람피워? 그것도 친한 후배랑?
생각하면 할수록 선경은 화가 났다. 예쁘게 꾸미고 나와 낮부터 혼자 술 마시는 이 기분이란 정말 더러웠다.
“임 피디, 애인한테 바람 맞았어? 예쁘게 하고 와서 왜 혼자 술이야?”
아무런 의도 없이 툭 던지듯 말하는 식당 이모가 맞춰도 어쩜 저리 잘 맞추실까? 선경은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에 소주를 채우며 식당 이모를 향해 웃었다.
“이모. 자리 깔아도 되겠네. 되겠어. 어쩜 그렇게 잘 맞춰? 애인 새끼가 몸뚱이 안 준다고 바람 났다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선경을 보고 식당 이모는 혀를 찼다.
“이런 염병할 새끼. 이렇게 예쁜 애인을 두고 바람이 나? 남자 놈의 새끼들은 뒈질 때까지도 하고 죽는다고 하는 말이 맞아. 임 피디. 오늘 술은 내가 쏠 테니까 마음껏 마셔! 내가 그깟 술 하나 못 사 주겠어?”
“역시! 이모밖에 없네! 고마워요.”
사회 초년생부터 시작된 식당 이모와의 인연은 걸출한 입담으로 쌍두마차를 달릴 만큼 선경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자신이 딸과 나이가 같다던 식당 이모는 선경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속상할는지 말 안 해도 알지 싶었다.
“이모. 그 잡놈년들이 대낮부터 모텔에 들어가서 나한테 딱 걸렸는데 미안하다는 말! 그 말 한 마디도 없이 지네들 잘났다고 떠들어 대더라고요. 그리고 그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그 개놈의 자식은 그 염병할 년 손을 꼭 잡고 놓질 않아요. 그게 바로 제 앞에서 할 행동이에요?”
선경은 이렇게라도 마음에 담지 않고 쏟아 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엄마보다 이럴 땐 더 엄마 같으신 분. 선경은 감사했다.
윙- 윙-
선경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발신자 표시를 보니 후배 엄 작가였다.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엄 작가가 웬일이래?
“응. 엄 작가. 나? 지금 잘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러는 너는 왜 안 자고?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여기 쌍두이모네야. 응. 빨리 와.”
선경은 별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었다. 고맙게도 같이 술 마셔 줄 사람이 오니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아주 나한테 계속 씹혀 봐. 오래도록 만수무강하며 살게 해 줄 테니까.
선경은 분노의 칼날을 갈며 술을 따랐다.
2. 동병상련(1)
“언니! 글쎄 이 미친놈이!!”
문을 거의 발로 차는 수준으로 열고 들어오는 선경의 후배 엄지은. 얼마나 빨리 달려왔으면 숨이 가쁘고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선경은 지은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꽤나 신경을 쓴 듯한 복장에 왠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상태임을 직감했다.
“애 엄지야. 언니 술 드시다 놀라 자빠지겠다. 진정하고 일단 앉아.”
“엄 작가 왔나?”
“아이고, 이모님 간만에 봬요.”
“우리 엄 작가도 오늘 엄청 예쁘게 하고 왔네.”
식당 이모도 선경처럼 지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지은은 자신을 너무 대놓고 스캔하는 두 여인을 보자니 살포시 웃음이 났다.
“아놔! 진짜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언니!”
“그래. 그 미친놈이 뭐? 바람났냐?”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선경은 큼지막한 골뱅이를 씹으며 지은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진짜 대박. 진짜야. 바람났는데 나 차였어. 저번 달에 클럽에서 만난 년이 어리고 나보다 밤일을 더 잘한대. 그래서 헤어지재.”
지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선경과 같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단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소주의 톡 하고 쓴맛에 정신이 드는지 테이블 아래로 정렬해서 세워져 있는 일곱 개의 소주병을 보았다.
“언니, 무슨 일인데 언니도 낮부터 이모네 와서 술이야? 혼자 7병이나 마신거야?”
“헤어졌어. 난 현장 잡았다.”
“대박”
지은은 자신의 잔보다는 선경을 잔을 먼저 채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 앞에 있는 선경이 오늘 참 예쁘게 하고 나왔다. 아마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았다.
“언니는 그래도 그 새끼랑 안 했잖아. 난 하루가 멀다 하고 했어. 그 짓 할 때 내가 최고라느니 최고 맛있다는 둥 별 거지 같은 말 다 해 놓고 이제 어린 년 만나니까 나보고 헤어지재. 남자들 도대체 왜 그래?”
“글쎄다. 이모님이 남자들은 뒈질 때까지 그 짓 하다 죽는단다. 하하하하.”
선경이 호탕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헤어진 놈 때문에 더 이상 감정 소비 하는 건 좋은 일 같지 않았다. 완전히 흔적을 지울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헤어진 마당에 이게 무슨 청승인가. 그것도 같은 처지인 여자 둘이서.
“야. 나 너 오기 전까지 너 오면 신나게 미친 듯이 물고 뜯고 씹어서 그 인간들 만수무강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헤어진 마당에 청승 떨지 말고 불타는 금요일. 즐기러 가자.”
지은은 좋다며 술잔을 부딪쳤다. 선경과 지은은 방송국의 대표 미인이었다. 이 둘을 두고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들과 술 마시다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얼굴은 청순하고 순진하게 생겨서 말술을 마시는 그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밤 10시쯤 되니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식당 이모는 벌써 소주 한 박스를 마셨다면서 그만 마시라고 성화였다. 아무리 말술을 마시는 그녀들이라도 식당 이모 입장에서는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탈 날까 싶었다.
“임 피디랑 엄 작가 우리 집에서 내가 사 주는 술 마시고 술병 났다고 소문나면 다시는 술 안 사 줄 테니 그리 알아! 어서 가서 청춘을 불태우든지 해.”
선경과 지은은 식당 이모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즐기러 갈 준비를 했다. 오늘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즐기리라. 그 둘은 의기투합해서 클럽으로 향했다.
“웨이터 오빠야. 오늘 우리 기분이 좀 그래. 그러니까 물 좋은 애들로 데리고 와.”
지은은 웨이터 주머니에 팁을 찔러 주며 소곤거렸다. 팁을 받고 기분 좋아진 웨이터는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룸을 나갔다.
“오늘 나, 혼전순결이고 뭐고 나발이고 삐뚤어질 거야!”
“그래서 오늘 역사적인 날로 만들게? 잘 모르는 애랑?”
지은은 놀리듯 말했다.
“아! 몰라, 몰라! 아무튼 편하게 즐길 거야.”
풀로 세팅되어 있는 술과 안주를 바라보며 군침 흘리듯 말했다. 지은은 그런 선경을 보며 자신보다 두 살이 많지만 참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지랄 맞을 때는 참 지랄 맞은데 저럴 때 보면 순진해 보이는 것 같았다.
“언니, 이런 곳에 부킹 들어오는 남자 애들 만만한 애들 아니니까 조심해. 알았지.”
지은이의 말에 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선술집 같은 곳에서 마시기만 했지 클럽은 처음인 그녀. 더군다나 룸을 잡고 이렇게 럭셔리하게 부킹남을 기다릴 줄 몰랐다. 시련당한 여자치고는 참 청승맞지 않아서 좋다. 선경은 입 끝에 미소를 지으며 양주를 글라스 잔에 담았다.
1화
1. 추적은 이별을 남긴다(1)
12월 10일. 시간은 잘도 간다. 스물아홉살의 겨울은 피곤과 푸석한 피부와 퀭한 눈, 그리고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이 종합 선물 세트처럼 선경에게 폭격을 가했다. 그래도 꺾인 20대에 다행히 남자 인간 애인이 있다는 건 행운일까. 아니면 이런 몰골에도 애인이 붙어 있다는 것이 다행인 걸까.
연말의 방송국은 말하지 않아도 미친 듯이 바쁘다. 그냥 있어도 바쁜데 불난 집에 석유를 확 뿌린 것처럼 그 바쁜 것이 활활 타오른다. 방송국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가 되면 한 달 내내 다들 좀비같이 죽지 않는 사람들 같았다. 다들 입으로는 피곤으로 곧 죽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니며,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느 순간 방송국 구석구석에 틀어박혀 자신들의 일을 밤을 새고 또 새서 하고 있었다. 제길, 또 이렇게 피부가 나이를 먹는구나. 꿈에 그리던 나의 모습은 드라마에서처럼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 프로듀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정말 잔인하리만큼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삼 일 밤낮을 새고 집에 들어와 실신하기 바로 직전 휴대폰이 울렸다. 선경이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뜬 채 미확인 메시지를 확인하는 찰나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났다.
이 미친 인간이 이 대낮에 지금 어디 있는 거야?
한두 달 전부터인가 애인의 이상한 행동이 관찰되었었다. 여자의 직감은 신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최고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의 행동에선 절대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는 강렬한 인상이 풍겼다. 간만에 만나서 하는 데이트가 영화 추적자를 찍듯이 추적 본능을 일으켰다. 직장에서도 시사 범죄나 사회적 문제 같은 것을 다루는 파트였기 때문에 추적이라하면 자신 있었던 선경 아니었던가.
몰래 GPS를 달면 범죄이기 때문에 선경은 그와 있는 내내 꼬리를 잡을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이 나라에서 불법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것. 스마트폰 위치 추적 어플을 깔고 이걸 숨기자라고 결론이 나면서 남자의 휴대폰을 한 5분 정도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까짓 거 식은 죽 먹기지. 선경의 표정에선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나 배터리가 없어서 그런데 자기 휴대폰 좀 빌려 줘. 김 선배한테 전화 좀 해야 해. 내 일을 김 선배가 가져가서 진행 상황을 좀 알아야 하거든.”
선경은 능글맞게 새 배터리를 빼고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로 갈아 끼운 뒤 깜박거리는 배터리 량을 보여 주었다. 영수는 아무 의심 없이 선경에게 휴대폰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선경은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거는 척하며 여자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전화를 끊고 위치 추적 어플을 설치했다. 모든 절차를 마친 후 어플 숨기기 기능으로 철저하게 흔적을 지워 버렸다. 남자의 휴대폰을 뒤져 보고 싶었지만 바람피우는 것들이 흔적을 남길 리가 있을까. 머리 좋은 놈들이 바람도 피운다는데.
생각보다 이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선경은 여유 있게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다시 김 선배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척하며 다시 영수가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왔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선경은 아니길 기도했었다.
역시 안 좋은 느낌은 틀린 적 없다 했나. 선경은 피곤이고 잠이고 뭐고 외투와 가방을 챙겨서 문자에 적힌 장소로 서둘러 운전했다. 서울 외곽 쪽에 있는 조용한 곳에 별장처럼 생긴 모텔 앞 공터에 차를 세웠다. 송장 모텔이라고 크게 쓰인 간판은 낮인데도 불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거참, 이름 잘 지었군. 송장 치를 준비나 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선경은 이를 갈며 차에서 내렸다. 모텔 주차장 쪽으로 살짝 가 보니 그의 차량이 없었다. 주도면밀하게 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온 것일까. 하여간 별 잔머리는 다 쓴다니까. 선경은 기가 찼다. 다시 차로 돌아온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가짜였으면 했다. 어플이 미쳐서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준 것이라고. 너무 피곤해서 이런 그지 같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말이다.
벌게진 눈을 잘 깜박이지도 않고 차 안에 앉아 모텔 입구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집중해서 쳐다보았는지 눈이 뻐근하고 눈물이 나왔다. 자신의 신세가 좀 처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한심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살짝 후회 아닌 후회를 하려는 찰나, 한 쌍의 낯익은 남녀가 서로 팔짱을 끼고 하하 호호 하며 모텔 밖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살짝 후회했던 마음에 용암이 흘러내려 그 마음을 싹 태우고 오로지 분노에 휩싸인 선경은 차에서 내려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재미 좋았나 보네. 둘.”
선경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남녀는 길에 우뚝 섰다. 남자는 서둘러 여자의 팔을 빼내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람에 실려 오는 역겨운 비누 냄새.
“아. 싸구려 비누 냄새.”
선경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그 둘을 쏘아보았다.
“자……자기야. 오해야. 오해!”
오해는 무슨! 지랄 옆차기하고 자빠졌네!
쌍욕이 목구멍 안에서 쳐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별할 때 하더라도 미친년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왜. 둘이 다정하게 나오는 걸 차 블랙박스가 찍었어. 성인 남녀가 모텔에서 샤워만 하고 나왔나 그럼?”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선경이 아닌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의 손을 소중하듯이 잡았다. 마치 고양이 앞에 쥐마냥 벌벌 떨고 있는 년. 대학 때 절친한 후배였다.
아아. 저 인간 옆에 붙어 있으니 생각난다. 자긴 의사와 결혼하는 게 꿈이라고 했나?
“그래서 넌 의사와 결혼하는 게 꿈이어서 남의 남자랑 잤니?”
화가 나면 정말 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선경의 성격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후배 영지. 영지는 고개만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최영수, 너도 아무 생각 없이 애랑 자지 않았을 거 아냐. 단지 성적 욕구를 풀려고 만난 거야? 하긴 바람피우는 유부남들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곧 헤어져 이혼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라는 말이라더라.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애인이 있는 몸이니 너도 쟤한테 그랬냐?”
영수는 얼굴이 벌게졌다. 돌직구 아닌 돌직구였다. 선경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약속은 해 놓고 몸은 안 주니까 당연히 바람피워도 좋다고 생각했냐? 그럼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그랬어? 네 몸 좀 달라고. 발정날 것 같아서 아무나하고 붙어먹게 생겼다고!”
“언니, 그렇다고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나라니요?”
선경의 말을 듣고 있던 영지는 발끈하며 소리를 쳤다.
영지의 발끈한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이 선경은 비웃으며 말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럼 임자 있는 남자한테 몸 주는 년이 아무나가 아니고 뭐야. 뭐, 설령 네가 진짜 쟤를 사랑했다고 치자. 그건 너한테만 로맨스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바람이고.”
선경은 보이지 않는 칼을 영지의 몸에 휘둘렀다. 더 지독하고 악한 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래도 한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말이라는 칼로 베기만 했지 난도질하진 않았다.
“임선경! 그만해. 애초부터 혼전순결이라는 말 할 때부터 너랑 만나면 안 되었던 거였어. 그때는 너 정말 사랑해서 그 약속 지켜줄 수 있을 줄알았다. 근데 남자란 동물이 갈증이 해소가 안 되니 눈이 다른 곳으로 향하더라. 마음만 하는 사랑 글쎄, 난 그런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 이렇게 너한테 걸리기 전에 어차피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 사랑하게 됐다고. 그게 네 후배 김영지라고! 나 영지 사랑한다. 속궁합도 잘 맞고 너보다 더 여자답고 사랑스러워. 내가 왜 널 만나 2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구구절절 말하고 있는 영수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 그냥 남자다울 순 없는 거냐. 비겁한 자식.
“야. 어차피 너희가 나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다 핑계로 밖에 안 들려. 쿨하게 헤어지고 싶었지만 이미 지저분해졌고 속궁합 잘 맞는 최영수와 김영지. 죽을 때까지도 그 마음 변하지 마라.”
선경은 끓어오르는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자신한테 미안하다 말 한 마디 없던 그들. 끝까지 잡고 있던 손. 자신이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방해한 문제 덩어리였나 싶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차올라 선경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망할 것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선경은 참고 또 참으며 그들 옆에 차를 세우고는 창문을 열어 영수가 준 반지를 빼 그들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듯.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아니 5병 깔아 줘요!”
선경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집에 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같은 성격의 그녀이기에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서 집으로 향했지만 절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선경은 샤워실로 들어가 씻고 나와 최대한 예쁘게 꾸몄다.
요 근래 정말 힘들게 일했더니 체중이 3킬로나 빠져 버린 선경은 풍만한 가슴 아래로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더 볼륨 있어 보이는 몸매가 되었다. 방송국의 베이글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만큼 선경은 하얀 피부에 작은 얼굴, 동그랗고 큰 눈과 작은 입술로 본인의 나이보다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그녀가 작정하고 꾸미니 얼마나 예쁘겠는가. 바람피운 그놈 최영수도 선경의 외모에 반해 그녀를 쫓아다녔었다.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만나줬더니 몸 안 줬다고 바람피워? 그것도 친한 후배랑?
생각하면 할수록 선경은 화가 났다. 예쁘게 꾸미고 나와 낮부터 혼자 술 마시는 이 기분이란 정말 더러웠다.
“임 피디, 애인한테 바람 맞았어? 예쁘게 하고 와서 왜 혼자 술이야?”
아무런 의도 없이 툭 던지듯 말하는 식당 이모가 맞춰도 어쩜 저리 잘 맞추실까? 선경은 소주잔이 아닌 맥주잔에 소주를 채우며 식당 이모를 향해 웃었다.
“이모. 자리 깔아도 되겠네. 되겠어. 어쩜 그렇게 잘 맞춰? 애인 새끼가 몸뚱이 안 준다고 바람 났다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선경을 보고 식당 이모는 혀를 찼다.
“이런 염병할 새끼. 이렇게 예쁜 애인을 두고 바람이 나? 남자 놈의 새끼들은 뒈질 때까지도 하고 죽는다고 하는 말이 맞아. 임 피디. 오늘 술은 내가 쏠 테니까 마음껏 마셔! 내가 그깟 술 하나 못 사 주겠어?”
“역시! 이모밖에 없네! 고마워요.”
사회 초년생부터 시작된 식당 이모와의 인연은 걸출한 입담으로 쌍두마차를 달릴 만큼 선경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자신이 딸과 나이가 같다던 식당 이모는 선경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속상할는지 말 안 해도 알지 싶었다.
“이모. 그 잡놈년들이 대낮부터 모텔에 들어가서 나한테 딱 걸렸는데 미안하다는 말! 그 말 한 마디도 없이 지네들 잘났다고 떠들어 대더라고요. 그리고 그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그 개놈의 자식은 그 염병할 년 손을 꼭 잡고 놓질 않아요. 그게 바로 제 앞에서 할 행동이에요?”
선경은 이렇게라도 마음에 담지 않고 쏟아 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엄마보다 이럴 땐 더 엄마 같으신 분. 선경은 감사했다.
윙- 윙-
선경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려왔다. 발신자 표시를 보니 후배 엄 작가였다.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엄 작가가 웬일이래?
“응. 엄 작가. 나? 지금 잘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러는 너는 왜 안 자고?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여기 쌍두이모네야. 응. 빨리 와.”
선경은 별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었다. 고맙게도 같이 술 마셔 줄 사람이 오니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아주 나한테 계속 씹혀 봐. 오래도록 만수무강하며 살게 해 줄 테니까.
선경은 분노의 칼날을 갈며 술을 따랐다.
2. 동병상련(1)
“언니! 글쎄 이 미친놈이!!”
문을 거의 발로 차는 수준으로 열고 들어오는 선경의 후배 엄지은. 얼마나 빨리 달려왔으면 숨이 가쁘고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선경은 지은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꽤나 신경을 쓴 듯한 복장에 왠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상태임을 직감했다.
“애 엄지야. 언니 술 드시다 놀라 자빠지겠다. 진정하고 일단 앉아.”
“엄 작가 왔나?”
“아이고, 이모님 간만에 봬요.”
“우리 엄 작가도 오늘 엄청 예쁘게 하고 왔네.”
식당 이모도 선경처럼 지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지은은 자신을 너무 대놓고 스캔하는 두 여인을 보자니 살포시 웃음이 났다.
“아놔! 진짜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언니!”
“그래. 그 미친놈이 뭐? 바람났냐?”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선경은 큼지막한 골뱅이를 씹으며 지은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진짜 대박. 진짜야. 바람났는데 나 차였어. 저번 달에 클럽에서 만난 년이 어리고 나보다 밤일을 더 잘한대. 그래서 헤어지재.”
지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선경과 같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단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소주의 톡 하고 쓴맛에 정신이 드는지 테이블 아래로 정렬해서 세워져 있는 일곱 개의 소주병을 보았다.
“언니, 무슨 일인데 언니도 낮부터 이모네 와서 술이야? 혼자 7병이나 마신거야?”
“헤어졌어. 난 현장 잡았다.”
“대박”
지은은 자신의 잔보다는 선경을 잔을 먼저 채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 앞에 있는 선경이 오늘 참 예쁘게 하고 나왔다. 아마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았다.
“언니는 그래도 그 새끼랑 안 했잖아. 난 하루가 멀다 하고 했어. 그 짓 할 때 내가 최고라느니 최고 맛있다는 둥 별 거지 같은 말 다 해 놓고 이제 어린 년 만나니까 나보고 헤어지재. 남자들 도대체 왜 그래?”
“글쎄다. 이모님이 남자들은 뒈질 때까지 그 짓 하다 죽는단다. 하하하하.”
선경이 호탕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헤어진 놈 때문에 더 이상 감정 소비 하는 건 좋은 일 같지 않았다. 완전히 흔적을 지울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헤어진 마당에 이게 무슨 청승인가. 그것도 같은 처지인 여자 둘이서.
“야. 나 너 오기 전까지 너 오면 신나게 미친 듯이 물고 뜯고 씹어서 그 인간들 만수무강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헤어진 마당에 청승 떨지 말고 불타는 금요일. 즐기러 가자.”
지은은 좋다며 술잔을 부딪쳤다. 선경과 지은은 방송국의 대표 미인이었다. 이 둘을 두고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들과 술 마시다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얼굴은 청순하고 순진하게 생겨서 말술을 마시는 그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밤 10시쯤 되니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식당 이모는 벌써 소주 한 박스를 마셨다면서 그만 마시라고 성화였다. 아무리 말술을 마시는 그녀들이라도 식당 이모 입장에서는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탈 날까 싶었다.
“임 피디랑 엄 작가 우리 집에서 내가 사 주는 술 마시고 술병 났다고 소문나면 다시는 술 안 사 줄 테니 그리 알아! 어서 가서 청춘을 불태우든지 해.”
선경과 지은은 식당 이모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즐기러 갈 준비를 했다. 오늘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즐기리라. 그 둘은 의기투합해서 클럽으로 향했다.
“웨이터 오빠야. 오늘 우리 기분이 좀 그래. 그러니까 물 좋은 애들로 데리고 와.”
지은은 웨이터 주머니에 팁을 찔러 주며 소곤거렸다. 팁을 받고 기분 좋아진 웨이터는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룸을 나갔다.
“오늘 나, 혼전순결이고 뭐고 나발이고 삐뚤어질 거야!”
“그래서 오늘 역사적인 날로 만들게? 잘 모르는 애랑?”
지은은 놀리듯 말했다.
“아! 몰라, 몰라! 아무튼 편하게 즐길 거야.”
풀로 세팅되어 있는 술과 안주를 바라보며 군침 흘리듯 말했다. 지은은 그런 선경을 보며 자신보다 두 살이 많지만 참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지랄 맞을 때는 참 지랄 맞은데 저럴 때 보면 순진해 보이는 것 같았다.
“언니, 이런 곳에 부킹 들어오는 남자 애들 만만한 애들 아니니까 조심해. 알았지.”
지은이의 말에 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선술집 같은 곳에서 마시기만 했지 클럽은 처음인 그녀. 더군다나 룸을 잡고 이렇게 럭셔리하게 부킹남을 기다릴 줄 몰랐다. 시련당한 여자치고는 참 청승맞지 않아서 좋다. 선경은 입 끝에 미소를 지으며 양주를 글라스 잔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