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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생채기 1화

프롤로그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옅은 모노톤의 건물 ‘판’.
언제나 그렇듯 저녁 시간은 늘 분주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직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몰려들 손님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소위 잘나가는 식당의 흔한 풍경이다.
뛰어난 태국 요리와 흔하게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쇼로 유명한 곳. 몇 번 방송에 소개된 후 많은 블로거가 다녀가면서 ‘판’은 순식간에 강남의 명소가 되었다. 일반인들은 물론 얼굴깨나 알려진 연예인들도 심심찮게 찾아들었다. 따로 광고를 내보내지 않아도 홍보는 저절로 되었고 모든 행사 예약은 일주일 전에 끝이 났다. 그 어떤 마케팅보다도 사람들의 입소문이 무섭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곳이 그곳 ‘판’이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숙련된 현지 요리사를 고용해 전통 태국 음식을 접해 볼 수 있도록 매장을 만들 때부터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서연이었다. 한 달 넘게 태국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곳에서 최고의 요리사들을 스카우트해 왔다. 다들 그녀의 고집에 두 손을 들 정도로 서연은 열정적이고 집요한 사람이었다.
지글지글 기름 달궈지는 소리와 각종 향신료 냄새로 가득한 주방으로 들어서는 매니저를 향해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있던 수석 주방장이 고개를 숙였다. 틀어 올린 머리와 까만 정장은 늘 변함없이 단정했다. 예쁘장한 외모와 여리여리한 몸매를 가진 서연이었지만 일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틈이 없었다. 서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방 곳곳을 예리하게 살폈다. 그녀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즉시 지적이 되었고 하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 그녀가 내건 슬로건이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요리사들의 복장까지 일일이 확인을 한 후,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주방을 빠져나온 서연은 철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단체 손님 예약이 잡힌 여러 개의 룸을 체크하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쓸었다.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는 청결함에 그녀의 입술이 슬쩍 휘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꽤 손끝이 야무지다. 반질반질한 테이블도, 예쁘게 각을 맞추어 접어진 냅킨도 하나같이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서연은 자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켰다. 매장에 내려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힐끗 벽시계를 보니 하은이 집에 돌아왔을 시간이다. 책상 위에 놓아둔 하은의 사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엄마!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따뜻한 아이의 음성에 서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하은, 잘 다녀왔어요?”
-응, 다녀왔쪄요.
“우리 하은이 뭐해?”
-이모랑 밥 머거.
이제 겨우 말문이 트인 세 살. 요즘 들어 점점 수다스러워지는 딸이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책상 위에 놓아둔 장부를 끌어당겼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해 늦지 않도록 고객에게 확인을 시켜 줘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모 말 잘 듣고 있어. 엄마가 갈 때 하은이 좋아하는 케이크 사 갈게.”
-애 걱정은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언제 바꿨는지 진숙이 웃으며 타박했다.
“끝나는 대로 바로 들어갈게요.”
-누가 그러라고 등이라도 떠밀어? 뒤따라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신경 쓰지 말고 잡혀 주기도 하고 그래. 무슨 젊은 여자가 눈치가 그렇게 없어.
“피, 누가 애 딸린 아줌마를 따라와 주기나 한데요?”
-내가 보니까 전 사장이 따라오던데?
“사장님은 그냥 친구예요.”
-요즘 친구들은 침도 흘리나 보지?
“봤어요? 그 남자 생긴 거랑 다르게 턱이 좀 새거든요.”
-어지간하면 잘 좀 해 보지 그래? 난 그 남자 은근히 마음에 들더고만.
“그 말 잊지 않고 사장님께 꼭 전해 줄게요.”
-뭐? 내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정말 내가 미쳐.
진숙의 반응에 웃으며 통화를 마친 서연은 저녁 예약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이미 지난주에 예약을 마친 사람들이다. 수십 개의 이름을 죽 눈으로 훑어 내려가던 서연의 표정이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굳어졌다.
[장은석]
타이핑이 된 이름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빼낼 수도, 그렇다고 삼킬 수도 없는 가시 같은 이름. 대한민국에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한 명뿐은 아닐 텐데 아주 드물게 같은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정신 차려, 이서연. 그 사람은 여기 없어. 여기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컵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 냈다. 가슴에서 시작해 목구멍을 타고 치달아 오르던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한심해.
고작 이름 하나에 아직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한심한 동시에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얼마나 더 지나야 아무렇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걷혀진 블라인드 사이로 까맣게 물들어 가는 도시가 보였다.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벌써 수백 번의 밤이 지나 있었다. 그 수백 일 전의 어느 날, 한 남자를 가졌었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어제처럼 생생한 건 단 한 번이어서는 아닐까. 아니다. 혹여 기억이 흐려질까 싶어 거의 매일 기억을 더듬고 있는 자신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바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창밖이 환해졌다. 타이머가 맞춰진 간판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 나는 음악 소리가 벽을 타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녁 쇼 타임이다.
머릿속에 너울거리는 기억을 지워 낸 서연은 하던 일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복도로 나섰다. 건너편 복도에서 홀을 내려다보고 있던 승원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에 호응하듯 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분위기 좋은데?”
“항상 그렇죠, 뭐.”
오만하게 턱을 추켜세우며 서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승원이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스럽게 박수를 쳐 주었다.
“아무튼 지배인 자부심은 못 당한다니까.”
난간 아래로 보이는 무대 위엔 태국 전통 무용을 선보이는 여자들이 올라와 있었다. 이국적인 여자들과 흥겨운 음악 소리. 황금색 옷 아래 가느다란 허리를 빠르게 흔들어 댈수록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커졌다.
모든 것은 어제와 똑같았고 오늘도 역시 모든 것은 완벽했다.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스르륵 부드럽게 멈춰 선 검정 세단에서 두 남녀가 내렸다.
180 정도의 키에 옷맵시가 뛰어난 남자는 주차 요원에게 귀찮은 표정으로 키를 건네고는 건물 입구로 향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는 당당했고 거침이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는 그런 그가 못마땅한지 잠시 입술을 삐죽이더니 종종 걸음을 쳐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여자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활짝 웃어 보였다.
“화났어요?”
“…….”
“에이, 진짜 화났구나?”
며칠 전 친구들과 유럽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었다. 약혼자인 그에겐 친한 친구 셋과 간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일행이 더 있었다. 그중엔 그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던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워낙 자신의 일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모를 줄 알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돌아온 이후 내내 그는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들통이 나 버린 것이다.
진영은 샐쭉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계속 사람을 무시할 거 같으면 차라리 화를 내든가. 얼음장 같은 태도에 아주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미 열흘 전에 예약을 해 두었던 이 식사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오늘도 약혼자의 얼굴을 구경조차 해 보지도 못했을 판국이다.
“잘못했어요, 네?”
남들, 특히나 남자들은 사족을 못 쓰는 콧소리를 내며 은석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진영을 힐끗 돌아보며 은석은 귀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빠. 얼른 먹고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해.”
은석의 반응에 진영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비죽였다.
“정말 너무하네.”
벌써 저만치로 걸어가 버린 그의 너른 등을 쏘아보며 진영은 우아한 나비처럼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트집을 잡거나 미친 듯이 화를 내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랬더라면 아버지 귀에 들어갔을 테고 그 뒷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심플한 간판이 붙은 멋스러운 입구를 지나 호리병 모양의 등이 일렬로 늘어선 내부로 들어가자 미소를 띤 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안내받은 자리로 간 두 사람은 쇼가 한눈에 보이는 VIP석에 앉았다.
지난번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진영이 주문을 하는 동안 은석의 시선은 무대를 향해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쇼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뒤섞여 흥겨웠다.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무희들의 움직임은 점점 격렬해졌다. 태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와 현지 무희들의 쇼. 만만찮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만석을 기록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독창적인 인테리어와 쇼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은 늘 그러하듯이 어느새 이곳이 창출해 낼 이익을 계산하고 있다. 이런 지점을 대도시에 하나씩 두면 웬만한 기업체보다도 많은 수익을 거둬들일 것 같았다.
“여기 장사 정말 잘돼요.”
“그럴 것 같군.”
“여기 사장이 젊은 남자인데 소문에 듣자 하니 매니저인가 하는 여자하고 이걸 기획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마땅히 할 것도 없는데 나도 아버지한테 이거나 하나 차려 달라고 그럴까 봐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속닥이는 진영에게서 빠르게 홀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이 옮겨 간 것은 그저 우연이었었다. 이어폰을 끼고 무언가 지시를 하며 도자기가 놓인 벽 너머로 사라져 버린 여자. 눈 깜짝할 사이 시야에 머물다간 것에 불과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착각…… 이었을까? 여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은석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주문하신 얌탈레 먼저 나왔습니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테이블 위에 라임 소스가 들어간 해산물 샐러드를 놓아 주었다.
“입맛을 돋워 주는 음식으로는 최고인 것 같아요. 지난번에 친구들이랑 와서 먹었는데…….”
요리를 접시에 덜어 은석의 앞에 놓아 주며 진영이 수다를 늘어놓는 동안 마침내 여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색의 조명이 그녀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환하게 웃으며 길을 터 주는 그녀의 얼굴이 완전하게 보이자 은석의 숨소리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
진영은 집요한 눈길로 무언가를 좇고 있는 은석을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돌렸다.
‘판’의 매니저.
점점 표정이 굳어 가는 은석의 눈길이 그 여자에게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한 진영은 기분이 묘했다. 은석에게 저런 살아 있는 표정이 숨어 있었던가. 놀라움과 반가움. 손에 잡힐 듯 선명한 표정의 변화에 진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오빠가 저 여자를 알고 있어요?”
은석은 대답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현관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낯익은 여자를 향해 느리게 움직였다.
“…….”
힐을 신은 매끈한 다리에서부터 시선이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여전히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 까만 재킷과 하얀 블라우스에 감싸인 가슴 언저리에서 시선이 한 번 주춤거렸다. 허연 목덜미를 지나 기억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턱 선을 눈에 담은 은석은 마침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서연.”
그가 이름을 불렀다.
“우리, 오랜만이지?”
시끄러웠던 음악 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딱딱하게 굳어 가는 여자의 얼굴. 당황한 듯 흔들리는 시선. 그녀에게로만 그의 온 신경이 쏠렸다.
“……네.”
분주한 움직임 속에 정지한 채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살다 보니 이렇게 만날 일도 생기는구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잘 지냈어?”
은석의 잘 지냈냐는 물음에 서연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숨기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팀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다. 대체 얼마 만일까. 아마 3년쯤…… 되었지?



1.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방파제 위로 넘실거리는 높은 파도와 거친 바람소리. 그 흔한 갈매기조차 날아오르지 않던 날이었다. 이런 날은 가녀린 날갯짓으로 날아올라 봤자 고꾸라지기 십상이었다. 날씨는 날아오르는 본능조차도 억누르게 할 만큼 엉망이었다.
주말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라고는 고작 세 테이블이 전부다. 하루 전에 지나간 태풍의 여파로 관광객들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늘어선 상가 중 몇 집은 아예 장사를 포기하고 들어가 버린 곳도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 입구에 달아 놓은 종이 울렸다. 춥다는 소리를 연발하며 남자 두 명이 찬바람을 몰고 들어서는 게 보였다.
“다들 썰렁하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안쪽 자리가 따듯한데 그쪽으로 모실게요.”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벌써 두 잔째 커피를 홀짝이는 민욱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