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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생채기 2화
“진짜 예쁘지 않냐?”
턱을 괴고 앉아 건너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여자를 황홀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는 민욱의 중얼거림에 주간지를 읽고 있던 은석이 슬쩍 반응을 보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벌써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민욱은 모르는 모양이다. 펼쳐 들었던 잡지를 덮으며 은석이 핀잔을 주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래.”
모처럼의 휴일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차가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탔을 때 목적지가 어디인지 짐작을 했어야 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었던 이름 이서연. 민욱은 그녀를 만나러 온 거였다.
“나, 저 자식 졸업하고 나면 청혼할 거다.”
청혼?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는 고백에 미간을 찡그린 은석이 서연을 돌아봤다.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여자. 아이보리색의 니트 아래로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아무리 봐도 고작 스물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대학 졸업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고, 제임스 딘을 좋아하는 여자.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금붕어를 좋아하는 여자. 머릿속에 떠오른 여자에 관한 것들에 은석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서연이란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 민욱 덕분에 그녀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짓궂게 구는 손님들의 물음에 여자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말갛다라…….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그의 턱이 살짝 굳었다. 누군가의 미소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눈길이 쏠리는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면 지금처럼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계속 웃고 있다. 아무에게나 다정하게 웃어 주는 여자의 태도가 별로 맘에 안 든다. 눈에 가득 담긴 살가움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웃음이 헤픈 여자는 딱 질색이야.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은석은 쏠리는 신경을 잘라 내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무뚝뚝한 은석의 질문에 민욱이 소리를 내어 낄낄거렸다. 누굴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을까. 딱 꼬집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너한테 오래 붙어 있는 여자가 없는 거다. 그냥 좋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민욱의 확신 어린 대답에 다시 한 번 서연을 훑어본 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라. 여자 하나 보겠다고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놈에게 무슨 대답을 바라겠는가. 그러면서도 은석의 눈동자는 잡지 너머로 보이는 여자에게서 한참이나 멈춰졌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머리 위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좋아하는 여자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던 민욱과 달리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던 은석은 슬쩍 찌푸린 얼굴로 서연을 올려다봤다. 니트 위로 목걸이에 달린 달 모양의 펜던트가 반짝거렸다.
“오빠 이거.”
서연이 불쑥 쇼핑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엄마가 번번이 미안하다고 입막음이라도 하고 싶으시다네.”
“부르지 그랬어. 가뜩이나 접시 들고 왔다 갔다 하느라고 힘든데 뭐하러 들고 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뭐.”
“이야, 어머니 덕분에 일주일 내내 포식하겠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따로 있다니까.”
쇼핑 봉투 안엔 각종 밑반찬과 간식거리가 차곡차곡 담아져 있었다. 팔불출처럼 나서는 민욱을 바라보는 은석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나 혼자 올라가도 된다니까……. 번번이 귀찮게 해서 미안해, 오빠.”
“미안하긴. 어차피 집에 오는 길인데.”
은석은 민욱의 거짓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뻔뻔한 놈. 제 집엔 들르지도 않았으면서……. 은석의 언짢은 심사를 알아챈 민욱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용서를 구해 왔다. 서연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애원했다.
“지금은 좀 참아 줘. 나중에, 응?”
“미친놈.”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친구의 긴 짝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은석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좋아야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은 서연도 따라 나섰다.
“민욱아, 번번이 미안해. 우리 서연이 좀 잘 부탁해.”
서연의 어머니가 민욱에게 인사를 건네자 민욱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어휴,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 뭘. 다음번에 내려올 때 어머니가 회국수나 다시 비벼 주세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어 봐도 어머니 손맛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 알았어. 민욱이 먹이려면 물 좋은 놈으로 잡아 놓을게.”
“감사합니다!”
“엄마,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서훈이 허튼짓 안 하고 있나 잘 살펴보고.”
어려서부터 아래윗집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그러더니 누가 보기에도 서로 대하는 태도에 허물이 없어 보였다. 민욱이 운전석에 오르며 은석을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뒷자리로 가 달라는 뜻이다.
“망할 자식.”
은석이 낮게 투덜거리며 뒷자리에 앉자 헤벌쭉 벌어지는 민욱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뒤에 앉아도 되는데…….”
이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사히, 그리고 빨리 서울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에 들른 세 사람은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왔다.
“아차차, 서연이 좋아하는 커피를 잊어버렸네. 아메리카노, 시럽 듬뿍 넣어서 금방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뛰어가는 민욱의 뒷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던 서연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은석과 시선이 부딪혔다. 그의 표정은 냉랭했다. 웃음이 그대로 어색해졌다. 설마 날 보고 있었던 걸까?
“…….”
괜히 무안해진 서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차에 올랐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벌렁거린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 일을 거드느라 사람들 시선을 받는 일엔 익숙해진 그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은석이란 남자가 바라보는 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민욱을 따라 가게로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 탓이었을까. 분명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민욱을 기다리느라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서연은 곁눈질로 힐끗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요동쳤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서연은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정말 근사하게 생겼구나…….
민욱이 친한 친구라며 그를 소개하던 순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숱이 많은 눈썹 아래로 깊고 짙은 눈동자와 반듯한 콧날,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전체적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그에게서 흐르고 있다. 어떻게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무엇. 이지적인 분위기랄까.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쳤어도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럴 때 눈이라도 호강하는 수밖에.
함께 서울로 가는 동안 느낀 거지만 서연은 민욱과 은석이 친구라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 할 줄 아는 민욱과 반대로 은석은 말수가 적었다. 하는 쪽보다는 주로 들어 주는 쪽이 맞을 것이다. 민욱의 물음에 마지못해 대답을 할 때마다 근사한 목소리가 귓가를 나직이 울렸다. 목소리가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는 거구나. 서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눈을 부칠 생각에 서연은 가방을 뒤적여 MP3를 꺼내 이어폰을 한쪽 귀에 끼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허스키한 음성의 나른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남자의 모습과 노래가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자 친구가 있을까? 문득 드는 궁금증에 서연은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일요일 오후.
터미널 근처 카페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붐볐다. 같은 건물에 자리한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남아 있던 자리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채우고 나자 늦게 들어온 손님들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문이 열릴 때마다 출입구 쪽을 바라보던 서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0분. 진즉에 왔어야 할 민욱은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작정 기다리라고 해 놓고 나타나지 않는 그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쯤인지 전화라도 해 볼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앞자리에 털썩 누군가가 앉았다.
“……!”
마주 앉은 상대가 은석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볼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더니 심장은 미친 듯이 달음질을 쳤다. 이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을까.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민욱이 부탁으로 온 거니까.”
은석은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서연을 향해 무뚝뚝하게 뱉어 냈다.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은석은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민욱이 이 새끼, 별걸 다 시키고 있어. 은석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심부름이나 시키는 민욱이가 원망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시킨다고 여기에 앉아 있는 스스로의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다면 오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게 생겼어. 서연이 기다릴 텐데 네가 좀 가져다주라.
젠장!
부탁받은 선물 꾸러미를 탁자 위로 툭 던지다시피 올려놨다.
“이거 전해 달래더군.”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차나 한 잔 사든가.”
“그럴게요.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진하게.”
찻잔을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시간이 졸음에 빠진 느림보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딱히 나눌 대화도 마땅치 않아 그저 할 일없이 뜨거운 찻잔만 어루만지며 홀짝였다.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은석이 손목시계를 힐끗했다.
“시간 다 됐으면 일어나지.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민욱이한테 부탁받은 거라니까.”
성큼성큼 카페를 빠져나가는 은석의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서연은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반했음을 깨달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말인 줄만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그런 일이 불가능할 줄 알았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어제 헤어진 이후로 불쑥불쑥 그가 생각이 났다. 어떤 남자일까. 그는 뭘 좋아할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까. 그가 사용하는 시원하면서도 아릿한 짙은 블루 향은 어떤 향수일까. 사소한 궁금증들이 서연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탔다. 쇼핑몰이 함께 있는 탓에 매 층마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탔다.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 떠밀려 구석으로 몰린 서연이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 약한 신음을 토했을 때였다. 공간이 조금 넓어지나 싶더니 그가 앞을 막아섰다. 사각의 구석진 자리. 양쪽으로 팔을 뻗어 그가 경계를 친 덕분에 누군가의 몸이 부딪혀 오지는 않았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반말이 싫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랬구나. 친구의 동생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서연의 눈앞에 그의 가슴께가 보였다. 짙은 남색의 셔츠로 감싸인 가슴과 약간 거뭇하게 수염이 솟아나는 턱의 경계에 시선을 둔 서연은 점심으로 먹었던 순두부찌개가 괜히 신경 쓰여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어쩌면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너무도 가까운 거리. 이마에 와 닿는 따듯한 숨결. 머릿속이, 마음이 어지럽다. 이 남자 때문에……. 나 정말 미쳤나 봐…….
터미널로 들어섰을 때 타야 하는 버스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만 천천히 들어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버스를 바라보던 서연은 가방끈을 힘껏 움켜쥐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를 책망하듯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안녕히 가세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도망치듯 버스에 오른 서연이 자리에 앉아 앞쪽을 두리번거렸지만 은석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 버린 걸까.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연은 바보처럼 보였을 자신이 한심해 울고 싶어졌다.
“바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지…….”
서운한 마음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떠나고 들어오는 차량들로 복잡한 터미널이 꼭 제 마음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고작해야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지. 어쩌면 그 두 번이 전부일지도 모를 사람이잖아. 한심해, 이서연.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선율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애달픈 목소리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원래 이렇게 슬픈 노래였던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목이 메었다.
운전 기사가 올라타고 차가 막 출발을 하려던 때였다.
“잠깐만요.”
갑자기 뛰어 올라온 은석이 숨을 몰아쉬며 두툼한 머플러를 서연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목 내놓고 다니지 마. 보는 사람이 더 추워.”
그는 머플러 하나를 던지듯 쥐어 준 채 사라졌고 차는 출발했다. 멍한 상태로 바깥을 내다보는 서연의 눈에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그가 보였다. 누군가를 배웅하거나 마중 나온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유독 그 사람만 도드라져 보였다. 그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손에 잡히는 머플러의 부드러운 감촉을 꽉 그러쥔 채 서연은 이미 멀어져 버린 터미널을 오랫동안 돌아보았다. 설명하기 힘든 뭉근한 열기가 가슴으로 몰려들었다. 그건 분명 난생처음 겪는 생경한 느낌이었다.
“진짜 예쁘지 않냐?”
턱을 괴고 앉아 건너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는 여자를 황홀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는 민욱의 중얼거림에 주간지를 읽고 있던 은석이 슬쩍 반응을 보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벌써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민욱은 모르는 모양이다. 펼쳐 들었던 잡지를 덮으며 은석이 핀잔을 주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래.”
모처럼의 휴일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차가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탔을 때 목적지가 어디인지 짐작을 했어야 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었던 이름 이서연. 민욱은 그녀를 만나러 온 거였다.
“나, 저 자식 졸업하고 나면 청혼할 거다.”
청혼?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는 고백에 미간을 찡그린 은석이 서연을 돌아봤다.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여자. 아이보리색의 니트 아래로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아무리 봐도 고작 스물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대학 졸업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고, 제임스 딘을 좋아하는 여자. 고양이를 무서워하고, 금붕어를 좋아하는 여자. 머릿속에 떠오른 여자에 관한 것들에 은석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서연이란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 민욱 덕분에 그녀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짓궂게 구는 손님들의 물음에 여자는 말갛게 웃고 있었다. 말갛다라…….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에 그의 턱이 살짝 굳었다. 누군가의 미소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눈길이 쏠리는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면 지금처럼 그녀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계속 웃고 있다. 아무에게나 다정하게 웃어 주는 여자의 태도가 별로 맘에 안 든다. 눈에 가득 담긴 살가움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웃음이 헤픈 여자는 딱 질색이야.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은석은 쏠리는 신경을 잘라 내었다.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무뚝뚝한 은석의 질문에 민욱이 소리를 내어 낄낄거렸다. 누굴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을까. 딱 꼬집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을 정말로 좋아하는 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너한테 오래 붙어 있는 여자가 없는 거다. 그냥 좋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민욱의 확신 어린 대답에 다시 한 번 서연을 훑어본 은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라. 여자 하나 보겠다고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놈에게 무슨 대답을 바라겠는가. 그러면서도 은석의 눈동자는 잡지 너머로 보이는 여자에게서 한참이나 멈춰졌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머리 위에서 상큼한 목소리가 울린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좋아하는 여자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던 민욱과 달리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던 은석은 슬쩍 찌푸린 얼굴로 서연을 올려다봤다. 니트 위로 목걸이에 달린 달 모양의 펜던트가 반짝거렸다.
“오빠 이거.”
서연이 불쑥 쇼핑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엄마가 번번이 미안하다고 입막음이라도 하고 싶으시다네.”
“부르지 그랬어. 가뜩이나 접시 들고 왔다 갔다 하느라고 힘든데 뭐하러 들고 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뭐.”
“이야, 어머니 덕분에 일주일 내내 포식하겠다. 역시 날 생각해 주는 사람은 따로 있다니까.”
쇼핑 봉투 안엔 각종 밑반찬과 간식거리가 차곡차곡 담아져 있었다. 팔불출처럼 나서는 민욱을 바라보는 은석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나 혼자 올라가도 된다니까……. 번번이 귀찮게 해서 미안해, 오빠.”
“미안하긴. 어차피 집에 오는 길인데.”
은석은 민욱의 거짓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뻔뻔한 놈. 제 집엔 들르지도 않았으면서……. 은석의 언짢은 심사를 알아챈 민욱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용서를 구해 왔다. 서연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애원했다.
“지금은 좀 참아 줘. 나중에, 응?”
“미친놈.”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친구의 긴 짝사랑을 알고 있었지만 은석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좋아야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떠날 채비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은 서연도 따라 나섰다.
“민욱아, 번번이 미안해. 우리 서연이 좀 잘 부탁해.”
서연의 어머니가 민욱에게 인사를 건네자 민욱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어휴, 어차피 가는 길인데요 뭘. 다음번에 내려올 때 어머니가 회국수나 다시 비벼 주세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어 봐도 어머니 손맛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 알았어. 민욱이 먹이려면 물 좋은 놈으로 잡아 놓을게.”
“감사합니다!”
“엄마, 다녀올게.”
“조심해서 다녀와. 서훈이 허튼짓 안 하고 있나 잘 살펴보고.”
어려서부터 아래윗집에 살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그러더니 누가 보기에도 서로 대하는 태도에 허물이 없어 보였다. 민욱이 운전석에 오르며 은석을 향해 눈짓을 해 보였다. 뒷자리로 가 달라는 뜻이다.
“망할 자식.”
은석이 낮게 투덜거리며 뒷자리에 앉자 헤벌쭉 벌어지는 민욱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뒤에 앉아도 되는데…….”
이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사히, 그리고 빨리 서울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에 들른 세 사람은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왔다.
“아차차, 서연이 좋아하는 커피를 잊어버렸네. 아메리카노, 시럽 듬뿍 넣어서 금방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뛰어가는 민욱의 뒷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던 서연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은석과 시선이 부딪혔다. 그의 표정은 냉랭했다. 웃음이 그대로 어색해졌다. 설마 날 보고 있었던 걸까?
“…….”
괜히 무안해진 서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차에 올랐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가슴이 벌렁거린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 일을 거드느라 사람들 시선을 받는 일엔 익숙해진 그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은석이란 남자가 바라보는 건 적응이 되지 않는다. 민욱을 따라 가게로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 탓이었을까. 분명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민욱을 기다리느라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서연은 곁눈질로 힐끗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요동쳤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모양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서연은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정말 근사하게 생겼구나…….
민욱이 친한 친구라며 그를 소개하던 순간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숱이 많은 눈썹 아래로 깊고 짙은 눈동자와 반듯한 콧날,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전체적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그에게서 흐르고 있다. 어떻게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무엇. 이지적인 분위기랄까.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쳤어도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았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럴 때 눈이라도 호강하는 수밖에.
함께 서울로 가는 동안 느낀 거지만 서연은 민욱과 은석이 친구라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 할 줄 아는 민욱과 반대로 은석은 말수가 적었다. 하는 쪽보다는 주로 들어 주는 쪽이 맞을 것이다. 민욱의 물음에 마지못해 대답을 할 때마다 근사한 목소리가 귓가를 나직이 울렸다. 목소리가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는 거구나. 서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깐 눈을 부칠 생각에 서연은 가방을 뒤적여 MP3를 꺼내 이어폰을 한쪽 귀에 끼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허스키한 음성의 나른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남자의 모습과 노래가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여자 친구가 있을까? 문득 드는 궁금증에 서연은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일요일 오후.
터미널 근처 카페는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붐볐다. 같은 건물에 자리한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남아 있던 자리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채우고 나자 늦게 들어온 손님들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문이 열릴 때마다 출입구 쪽을 바라보던 서연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0분. 진즉에 왔어야 할 민욱은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작정 기다리라고 해 놓고 나타나지 않는 그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쯤인지 전화라도 해 볼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앞자리에 털썩 누군가가 앉았다.
“……!”
마주 앉은 상대가 은석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볼이 순식간에 달아오르더니 심장은 미친 듯이 달음질을 쳤다. 이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을까.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민욱이 부탁으로 온 거니까.”
은석은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서연을 향해 무뚝뚝하게 뱉어 냈다. 그렇게까지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은석은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민욱이 이 새끼, 별걸 다 시키고 있어. 은석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심부름이나 시키는 민욱이가 원망스러운 것은 둘째치고 시킨다고 여기에 앉아 있는 스스로의 행동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다면 오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가게 생겼어. 서연이 기다릴 텐데 네가 좀 가져다주라.
젠장!
부탁받은 선물 꾸러미를 탁자 위로 툭 던지다시피 올려놨다.
“이거 전해 달래더군.”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차나 한 잔 사든가.”
“그럴게요. 뭐 드실래요?”
“아메리카노. 시럽 없이 진하게.”
찻잔을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시간이 졸음에 빠진 느림보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딱히 나눌 대화도 마땅치 않아 그저 할 일없이 뜨거운 찻잔만 어루만지며 홀짝였다.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은석이 손목시계를 힐끗했다.
“시간 다 됐으면 일어나지.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민욱이한테 부탁받은 거라니까.”
성큼성큼 카페를 빠져나가는 은석의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서연은 그제야 자신이 그에게 반했음을 깨달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 그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말인 줄만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그런 일이 불가능할 줄 알았었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어제 헤어진 이후로 불쑥불쑥 그가 생각이 났다. 어떤 남자일까. 그는 뭘 좋아할까. 어떤 스타일의 여자에게 관심이 있을까. 그가 사용하는 시원하면서도 아릿한 짙은 블루 향은 어떤 향수일까. 사소한 궁금증들이 서연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탔다. 쇼핑몰이 함께 있는 탓에 매 층마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탔다.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에 떠밀려 구석으로 몰린 서연이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 약한 신음을 토했을 때였다. 공간이 조금 넓어지나 싶더니 그가 앞을 막아섰다. 사각의 구석진 자리. 양쪽으로 팔을 뻗어 그가 경계를 친 덕분에 누군가의 몸이 부딪혀 오지는 않았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반말이 싫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그랬구나. 친구의 동생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서연의 눈앞에 그의 가슴께가 보였다. 짙은 남색의 셔츠로 감싸인 가슴과 약간 거뭇하게 수염이 솟아나는 턱의 경계에 시선을 둔 서연은 점심으로 먹었던 순두부찌개가 괜히 신경 쓰여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어쩌면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너무도 가까운 거리. 이마에 와 닿는 따듯한 숨결. 머릿속이, 마음이 어지럽다. 이 남자 때문에……. 나 정말 미쳤나 봐…….
터미널로 들어섰을 때 타야 하는 버스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만 천천히 들어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버스를 바라보던 서연은 가방끈을 힘껏 움켜쥐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를 책망하듯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안녕히 가세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도망치듯 버스에 오른 서연이 자리에 앉아 앞쪽을 두리번거렸지만 은석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벌써 가 버린 걸까.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서연은 바보처럼 보였을 자신이 한심해 울고 싶어졌다.
“바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지…….”
서운한 마음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떠나고 들어오는 차량들로 복잡한 터미널이 꼭 제 마음 같아 보이는 건 왜일까. 고작해야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지. 어쩌면 그 두 번이 전부일지도 모를 사람이잖아. 한심해, 이서연.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선율이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애달픈 목소리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원래 이렇게 슬픈 노래였던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목이 메었다.
운전 기사가 올라타고 차가 막 출발을 하려던 때였다.
“잠깐만요.”
갑자기 뛰어 올라온 은석이 숨을 몰아쉬며 두툼한 머플러를 서연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목 내놓고 다니지 마. 보는 사람이 더 추워.”
그는 머플러 하나를 던지듯 쥐어 준 채 사라졌고 차는 출발했다. 멍한 상태로 바깥을 내다보는 서연의 눈에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그가 보였다. 누군가를 배웅하거나 마중 나온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유독 그 사람만 도드라져 보였다. 그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손에 잡히는 머플러의 부드러운 감촉을 꽉 그러쥔 채 서연은 이미 멀어져 버린 터미널을 오랫동안 돌아보았다. 설명하기 힘든 뭉근한 열기가 가슴으로 몰려들었다. 그건 분명 난생처음 겪는 생경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