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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홉시 맨





단팥빵, 애플파이, 견과류 타르트 순서대로 비닐봉지에 담던 채연은 바구니에서 포장된 마들렌을 집었다.
“이번에 개발한 신 메뉴 밤 마들렌이에요. 한번 맛보세요.”
봉투를 건네던 채연의 손이 스치듯 남자의 손과 부딪혔다. 여자보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 보였다. 예쁘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베이킹 하느라 거칠고 뭉툭해진 채연의 손과 사뭇 달랐다.
“여기 빵이 입에 맞으세요?”
단골손님의 평가가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벌써 석 달째 자주 보는 얼굴이니 말이다.
“나쁘지 않아요.”
좋다는 건지, 별로라는 건지 감 잡을 수 없는 미지근한 대답이 날아왔다.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더없이 차가워 보였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남자가 곧장 대답하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면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와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빵을 사러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계산하면서 채연의 신경은 온통 남자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향했다. 사지도 않을 빵을 혹시나 손으로 만지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거스름돈과 영수증 받으세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는 채연과 또다시 남자의 손이 부딪혔다. 남자의 시선이 채연의 손에서 얼굴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몰려있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지나다가 들린 여자도 남자를 보자마자 가게 단골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갑에서 거스름돈을 넣던 남자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네, 선배님. 몇 시까지요?”
손목을 올려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뒤돌았다.
“하, 지금 올라갑니다.”
조금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채연이 가게를 나서는 남자의 등 뒤로 인사를 하자, 빵을 고르는 시늉을 하던 여자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채연은 마른 한숨을 쉬며 투명 유리 벽 너머로 신호등을 건너는 여자들을 노려보다 여자들의 손이 탄 빵을 정리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대놓고 항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고급 빌딩이 밀집된 근처다 보니, 안 좋게 소문나면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이 들이닥쳤다가 이제 막 한가해진 채연은 따뜻한 믹스 커피 한 잔을 가지고 카운터로 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카운터에 그제야 채연의 눈에 남자 지갑이 보였다.
“설마.”
방금 가게를 나간 남자의 지갑이란 생각에 채연은 반사적으로 지갑을 들고 가게를 나섰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이후였다. 그가 지갑을 찾으러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틀에 한 번씩 들리던 손님이니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지갑을 찾아가겠지만 남의 지갑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것이 채연은 불편했다. 그래서 그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명함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채연은 지갑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지갑에 있는 건 운전면허증과 신분증, 만 원짜리 지폐와 신용카드 몇 장, 거래처 명함으로 보이는 명함 하나가 전부였다.
“아홉시 맨의 이름이…….”
최건호구나.
지갑에서 신분증을 빼낸 채연이 중얼거렸다. 신분증 사진은 지금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혼잣말을 하며 채연은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삼일에 한 번씩 출근길에 빵을 사는 이 손님은 늘 9시만 되면 가게에 들렀다. 지나가는 평범한 남자들과 확실히 대조되는 훈남으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비주얼을 자랑했다. 소년과 남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묘한 섹시미와 남성미를 풍겼다. 또 가게를 나서며 빵을 한입 뜯어 먹고 비죽 올라간 입꼬리는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몸에 착 감긴 슈트를 입은 그의 몸은 날렵해 보였고 마치 모델 포스를 풍겼다. 범접할 수 없는 최강 비주얼을 자랑하는 손님을 서아는 ‘아홉시 맨’이라고 불렀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그 호칭은 남자의 신변을 대신하고 있었다. 채연의 시선이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로 향했다. 채연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 어쩐지 어려 보인다 했다. 신분증 사진은 지금보다 더 어릴 때인 모양이다. 어쨌든 그의 명함은 나오지 않은 지갑을 서랍 속에 넣었다.
“사장님!”
벌컥 가게 문이 열리면서 심부름을 다녀온 서아가 돌아왔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서아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조금 전에 나갔는데.”
“정말요?”
“응. 조금만 빨리 오지.”
서아가 카운터에 올려놓은 비닐 봉투에서 김밥을 꺼내는 채연이 당사자보다 더 아쉬운 얼굴이 되었다.
“새로 오픈해서 손님이 엄청 많더라고요. 김밥 집 때문에 손님 줄어드는 거 아닌가 몰라.”
두껍게 만 김밥을 한 입 넣으며 서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홉시 맨이 김밥 집으로 방향을 틀까 걱정인 것이다.
“김밥 맛있데.”
아낌없이 넣은 재료 덕분인지 몇 개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일반 김밥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료도 많이 들어가서 배도 부르고 맛도 나쁘지 않아요. 정말 손님 줄어드는 거 아닐까요?”
또다시 걱정스러운 서아의 시선이 채연에게 향했다.
“메뉴가 완전히 다르니까 괜찮을 거야.”
아직까지 매출에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거기다 김밥 집 보다 빵집 오픈 시간이 더 이른 덕분에 같은 시간에 오는 손님은 그대로였다.
“참, 그 손님 지갑 놓고 갔더라고. 뒤늦게 보고 뒤따라갔는데 한발 늦었지 뭐야.”
채연이 서랍 속에서 남자 지갑을 꺼내 보여 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
반색하며 지갑을 바라본 서아는 금송아지 마냥 애지중지 지갑을 건네받았다. 네이비색 심플한 반지갑이었다. 지갑을 펼친 서아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보다 두 살 어리네요. 난 연하는 딱 질색인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서아의 모습에 채연이 웃어 버렸다. 서아가 연하를 싫어한다는 것쯤 채연은 알고 있어 실망스러운 반응을 진작에 예상했다. 편하고 기댈 수 있는 포근함과 여유는 연상에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아무래도 짝사랑 정리해야겠어요.”
중얼대며 말하는 모습이 마치 김치찌개에서 된장찌개로 메뉴를 변경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채연은 피식 웃으며 믹스 커피 타러 주방으로 들어가는 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구은 빵 덕분에 작은 규모의 베이커리 내부에 고소하면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달콤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채연이 지은 매장 이름이었다. 베이킹부터 진열, 카운터 보는 일까지 채연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과일을 넣어 만든 파이, 단팥 앙금을 넣어 만든 빵, 베이글, 야채로 만든 머핀과 파운드케이크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며칠 동안 밤샘 끝에 새로 개발한 메뉴, 밤을 넣어 만든 밤 마들렌은 손님들에게 시식용으로 증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초콜릿과 쿠키도 만들어 판매할 생각이었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메뉴와 맛으로 승부 보는 수밖에 없어 채연은 메뉴 개발에 힘쓰고 있었다.
“지갑은 서랍에 넣어 둘 테니까 혹시 나 없을 때 오시면 지갑 드려.”
“그럴게요.”
서아에게 당부하며 채연은 서랍에 그의 지갑을 넣고 열쇠로 잠갔다. 서랍 열쇠는 카운터 안쪽에 걸어 두었다.
“아, 오늘 날씨 진짜 좋네요.”
유리 벽 너머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이 채연의 고운 뺨에 닿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내리쬐는 볕을 맞아도 행복할 것 같은 쾌청한 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채연에겐 악몽과도 같은 날이기도 했다. 부모님 기일이, 돌아오고 있었다.

* * *

막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온 채연은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윙, 윙 시끄러운 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가 채연의 귓가에 울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거의 반쯤 말라갈 때쯤, 화장대에 올려둔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채연은 드라이어 전원을 끄곤 핸드폰을 들었다.

<고모>

발신인의 이름을 바라보던 채연은 잠깐 고민 끝에 액정 화면을 터치했다.
“네. 고모.”
-바쁘니?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기가 어깨에 뚝뚝 떨어졌다. 채연은 화장대 위에 올려둔 수건으로 머리끝을 닦았다.
“지금 퇴근해서 씻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평소 안부 전화조차 잘 하지 않는 사이었기에 채연은 고모 인숙의 전화가 의아했다.
-일은 무슨. 참, 우리 민지가 연예인 기획사에서 캐스팅이 됐지, 뭐니?
“그거 참 잘됐네요.”
대답하는 채연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민지는 다섯 살 어린 친척 동생으로 채연 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산 동생이었다. 간신히 들어간 대학교 4년제를 졸업하고도 번번한 직장 없이 연예인이 되겠다며 까먹은 돈이 꽤 되었다. 그중 절반이 넘는 돈은 고모부 몰래 채연이 해 준 돈이기도 했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캐스팅이 되었다가 인숙의 몰상식함으로 인해 캐스팅이 엎어지기도 했으며 높은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음에도 민지는 연예인이 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모는 딸의 꿈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러니 채연의 입장에선 민지의 캐스팅 소식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말씀하세요.”
채연의 채근에 ‘말하기 곤란하긴 하다만……’ 하면서 한참 뜸 들들인 끝에 고모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쪽에도 빽이 없으면 못 뜨는 모양이야. 너도 알잖니? 우리 민지, 학원 다닐 때 주연 급 연기에도 손색없는 거.
“…….”
채연은 잠자코 인숙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우리가 빽이 있니 뭐가 있니? 이번에 마지막으로 도와주면 안 될까? 우리 민지가 크게 성공하면 다 갚아 줄게. 이자까지 쳐서.
결국엔 또 돈 이야기였다. 마지막 연예 기획사 사기는 채연의 돈에 고모가 고모부 몰래 대출까지 받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그런데 어떻게 또 제 앞에 대고 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지 채연은 언어도단 상태에 빠졌다.
“고모.”
-이번이 마지막이다. 민지가 이번에 안 되면 정신 차리겠다고 하니까 마지막으로 도와주면 안 될까? 언니 좋다는 게 뭐니?
“저번에 사기당한 거 잊으셨어요? 거기서도 돈만 받고 연락 두절이었잖아요.”
-얘, 그거야 잘 몰랐으니까 그랬던 거고. 이번엔 확실하다니까. 기획사 사무실까지 갔는데 이름만 대면 아는 배우들이 줄줄이 포스터가 붙어 있더란다.
철썩 같이 사기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고모에게 뭐라 말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 채연은 마른 한숨을 토해 냈다.
“저번에도 말씀 드렸다시피, 연예 기획사에서 돈을 요구하는 것부터가 의심해 봐야 해요.”
-요구라니? 요구가 아니고 내가 우리 민지 잘 봐달라고 성의 표시하는 거야. 우리 민지 주연 만들려고.
재능과 끼가 넘치는 배우 지망생들이 어디 한둘일까. 돈으로 민지를 주연 급 배우로 만들겠다는 고모의 터무니없는 야망에 민지의 기가 꺾일 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돈으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배우 지망생들이 왜 있겠는가. 그 후로 인숙은 민지가 어떤 기획사에 어떤 작품을 하게 될 예정인지에 대해 길게 자랑해댔다. 물론 채연은 인숙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