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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서 경험 쌓는 게 중요한 일이에요. 힘들게 이뤄낸 것만은 값어치 있는 것도 없으니까요.”
-경험?
“유명한 배우들도 과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들이에요. 민지도 경험을 쌓으면.”
-우리 민지 고생하는 게 그렇게 좋니?
“네?”
나긋하던 인숙의 목소리가 쌀쌀맞게 변했다. 채연의 한쪽 눈썹이 절로 찡그려졌다.
-우리 민지는 그깟 경험 안 쌓아도 금방 탑 배우가 될 거라고. 뭐 알지도 못 하면서 경험 타령이야?
“…….”
할 말을 채연에게 인숙의 타박이 이어졌다.
-그깟 돈 해 주기 싫어서 민지 위하는 척하는 거니? 빵집 장사 잘 된다면서 가족끼리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니?
“고모.”
-나 아니었으면 빵집을 네가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고모, 이 돈은…….”
-네 엄마, 아빠 사망 보험금 지금까지 잘 보관해 준 대가치곤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 안 하니?]
대가라. 채연은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모는 쉬지 않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정말 서운하구나. 난 널 정말 친딸처럼 생각했는데.
신빙성을 느낄 수 없는 고모의 목소리가 가히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늘 불리할 때마다 나오는 감성 팔이에 불과했다.
“죄송해요.”
-그럼 언제까지…….
채연이 생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지 고모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번엔 안 되겠어요.”
-뭐?
“죄송하지만…….”
-됐다. 끊으마.
채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겼다. 채연은 멍한 얼굴로 멋대로 통화가 끊긴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통화하는 사이 머리는 거의 다 말라 있었다.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닦아 내며 채연은 조용한 핸드폰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방에서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 통을 꺼내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을 모질고 천하의 인정머리 없는 년이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부모님 보험금만큼은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다. 부모님 목숨 값을 채연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관한 당연한 일을 마치 권리마냥 행사하려 드는 고모의 행동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채연은 컵에 물을 따라 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오갈 곳 없는 자신을 받아 준 고모였기에 채연은 인숙에게 끝까지 모질게 하지 못했다. 만약 고아가 된 자신에게 고모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아마 채연은 시설에 맡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없는 살림에 자신을 거두어 주었던 고모의 마음까지는 의심하고 싶지 않은 게 채연의 마음이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살면서 은혜를 다 갚아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비록 민지와 차별을 받으며 컸지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서운했던 감정들은 채연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무렴 피붙이보다 남이 더 소중할까.
“남, 인가.”
살면서 저도 모르게 기대게 된 적이 있었다. 부모가 아닌 고모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채연이 원하는 것은 민지에게 보여 주는 애정이 아니었다. 그저 빈말이라도 좋으니 칭찬 한번, 눈길 한번,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봐 주는 따듯한 말 한마디었다.
하지만 결국 그때마다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기대게 되는 건, 자신이 어리석기 때문이었다. 채연은 반쯤 남은 물을 다 마시곤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잡음을 내는 진동 소리가 채연의 귀를 괴롭혔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 * *

“지갑 잃어버린 거 모르나 봐요.”
서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보통 지갑 잃어버리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 법이니까.”
“하긴, 저도 저번에 카드 지갑을 편의점에 두고 그냥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집 안만 뒤졌잖아요. 다음 날 편의점에 갔더니 알바생이 알아보고 주더라고요.”
“그것참 다행이네.”
아무래도 그는 여기에 지갑을 두고 간 걸 까맣게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단골손님이라곤 하나, 매일 빼먹지 않고 오던 손님이 아니었기에 하루건너 뛴다고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남의 지갑을 보관하고 있으니 찝찝하기도 하고 괜한 걱정이 들었다.
“뭐, 아홉시 맨도 곧 기억하고 지갑 찾으러 오겠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서아는 빵을 정리하고 마른 수건으로 쇼 케이스를 닦았다. 짝사랑 그만둔다더니, 정말 하루아침에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최건호…….”
“네?”
혼잣말하는 채연의 말을 전부 듣지 못 했는지 쇼 케이스를 닦던 서아가 뒤돌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홉시 맨의 이름을 알아 버려서 그랬을까. 이름 대신 부르는 호칭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침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쇼 케이스를 닦던 서아가 열린 문을 향해 인사했다.
“고모부.”
채연은 고모부 주석의 방문에 놀라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출근길에 잠깐 들린 모양이었다.
“가게에 있었구나. 급하게 오느라 미처 연락을 못 했다.”
“어쩐 일이세요?”
채연의 물음에 주석은 난처한 얼굴로 뜸 들이며 입을 열었다.
“어제 네 고모가 전화했었지?”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주석과 함께 채연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집안일을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엔 껄끄러웠다.
“면목이 없구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주석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내가 한 번만 더 네게 전화해서 돈 얘기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으니, 또 전화하는 일 없을 거다.”
결국 주석은 마음 쓰고 있을 채연을 안심시키러 걸음을 한 것이었다. 어제 또 집안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평소엔 온순한 성격을 지닌 고모부는 화가 나면 불같은 성격이었다. 때문에 제아무리 뻔뻔한 인숙이라 할지라도 남편의 눈치를 보고 살았다. 아침부터 가게에 찾아와 큰소리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잠잠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뭐하러 그러셨어요.”
“네 고모가 네게 가져간 돈이 얼마니? 내가 그때 미리 알았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거다. 민지 연예인 만들겠다고 네게 돈 가져가는 꼴 난 더는 못 본다.”
주석은 이를 바드득 갈며 분노했다. 조카의 돈은 물론, 대출까지 끌어다 쓴 돈이 어마어마했기에 치를 떠는 것도 당연했다. 어차피 주석이 난리를 치지 않았어도 채연은 더 이상 돈을 마련해 줄 생각이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러다 정말 큰 사기라도 당할까 봐 염려되었다.
“고모부, 연예인 되는 건 좋지만 잘 알아보라고 하세요, 사기도 사기지만,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큰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에요.”
“민지가 너처럼 똑 부러지고 철들면 얼마나 좋을까.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서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하는 거 보면……. 아이고.”
주석의 입에서 절로 곡소리가 터졌다. 고새 10년은 늙은 것 같이 보이는 주석의 얼굴에 채연은 마음이 짠해졌다. 누구보다 자신을 친딸처럼 아껴 주었던 고모부였다. 고모부마저 없었다면 채연은 그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기운 내세요.”
달리 위로할 말이 없었다.
“너야말로 어제 고모가 한 말 신경 쓰지 말거라.”
“신경 안 써요. 걱정은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채연이 대답했다. 어느덧 거짓말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구나.”
부리나케 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연은 그냥 간다는 주석을 가게로 데리고 가 빵 한 봉지와 케이크를 포장해 손에 쥐어 주었다.
“고모부 회사 가서 자랑하세요. 조카가 만든 거라고요.”
주석은 미안해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걸 채연은 끝까지 받지 않았다.
“사장님, 고모부 오랜만이시네요.”
“응, 그러게.”
늘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단 분이셨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진 신세를 자신에게 갚아야 한다고 늘 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래서 항상 자신에게 신경 쓰던 고모부였다. 고모네 집에 얹혀살며 차별받을 때도 고모와 민지 몰래 손에 사탕 하나를 쥐여 주며 웃던 주석은 어린 채연에게 큰 힘이 되었었다.

* * *

“하, 어디다 둔 거지?”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건호는 지갑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윤 선배의 전화를 받고 빵집에서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 퇴근 무렵까지 지갑을 꺼낼 일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건호는 지갑의 행방에 대해 생각했다. 신용카드야 정지하면 그만하고 신분증과 운전 면허증은 재발급하면 되었다. 문제는 클라이언트 명함이었다. 2주 전 사무실로 의뢰를 하러 온 클라이언트는 강원도에 펜션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팅을 거쳐 콘셉트를 잡았고 조만간 포트폴리오로 2차 미팅을 계획 중이었다. 그런데 클라이언트에게 받은 명함을 지갑에 둔 것이었다. 당장 내일모레가 클라이언트와 미팅 날인데 하필이면 같이 미팅에 참석하기로 한 김 팀장에게 다른 일이 잡혀 미팅 날을 다시 잡아야 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연락처가 있는 명함을 잃어버렸으니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젠장.”
절로 건호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성일 디자인’
인테리어 회사에 이제 막 입사한 지 6개월 남짓이었다. 겨우 인턴 딱지를 떼고 정규직이 되자마자 해고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경험을 쌓겠다며 KS 건설 임원직으로 있는 부친의 제안을 거절하고 패기 있게 선택했지만 해고당하게 생긴 것이다. KS 건설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하지만, 일하는 게 재미있어지던 참이었다. 해고라도 당하면, 제일 좋아할 사람은 부친이었다. 보나마나 이번 기회에 KS 건설에 입사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분이었다. 그는 지금의 성일 디자인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분명 KS 건설에 입사하면 동기들과 경쟁해야 할 게 눈에 보였다. 치열하게 싸워야 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기에 건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지금껏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당장 내일 클라이언트와 미팅 날짜를 조절해야하는데 연락처를 모르니 통화를 시도할 방법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퇴근 시간을 한참을 넘긴 후임에도 건호는 클라이언트의 명함 생각에 퇴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1년도 채 안 돼서 해고당하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지갑 때문에 속이 타고 목도 탔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에서 생수 한 잔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그의 시야에 어둠이 어둑하게 내려앉은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건호는 창문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경쟁하듯 높게 세워진 주변 빌딩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편의점을 제외하고 카페나 음식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자정을 넘긴 후이니 당연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이라고 말하며 일찍 퇴근한 선배 정후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느긋한 성격으로 일에 치여도 전혀 조급함이 없는 그 모습이. 건호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에서 나왔다.
결국 집에서조차 지갑을 찾지 못한 건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정비를 맡긴 차 대신 오랜만에 버스에 탔다. 걱정과 근심으로 숙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건호의 얼굴은 푸석했다. 하지만, 버스 내 여자들의 시선은 일제히 건호에게 향해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자신에게 향한 여자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클라이언트의 미팅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