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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까지 얼마나 남았지?”
재혁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선아가 대답하였다.
“한 시간 정도만 가면 된대요. 어때요? 떨리지 않아요?”
선아의 물음에 재혁이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에도 선아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그가 시트에 몸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가져온 에스프레소가 그의 자리에 놓였다. 잠을 깨려는 듯 고개를 저은 그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잔뜩 찌푸린 인상이 커피를 마시자 더욱 구겨졌다.
“다시 가져오라고 할까요?”
“됐어.”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커피는 유난히 가리는 그였다. 커피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도, 선호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재혁의 입에 맞는 커피는 좀처럼 없었다. 평소였다면 재혁의 사소한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을 선아가 이번만큼은 별말 없이 말문을 닫았다.
재혁에게는 스쳐 지나간 일 중 하나였지만, 그와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선아에게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는 아니라며 부정했지만, 그의 입맛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바뀌었는지 선아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길지 않았던 결혼 생활, 결혼만큼이나 빨랐던 이혼.
도망가듯 미국으로 떠나는 그와 함께 떠난 것은 선아의 삶에 손으로 꼽힐 정도로 운이 좋은 일이었다. 과거의 잔재는 그와 그녀의 삶에 필요 없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좀 쉬어요. 커피는 한국에 도착해서 마시면 되죠.”
선아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재혁이 시트에 몸을 맡겼다.

* * *

공항에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잘 차려입은 노인이 재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큰 도련님. 오셨습니까?”
노인의 모습에 재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세상이 나아지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렇지 않은 것들이 반드시 존재했다.
하나는 앞으로 그가 무너뜨려야 할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너뜨려야 할 그가 만들어 놓은 재혁의 세상이었다.
「당신의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요.」
“재혁 오빠.”
재혁의 미간이 꿈틀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인지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씩 꺼내졌다.
비행기에서 꾼 꿈 때문일까? 과거의 기억은 그에게 잊고자 했던 과거의 상처이자 평생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자리에 멈춘 재혁이 움직이지 않자 선아가 그의 뺨을 만지려 하였다. 그런 선아의 손을 막으며 재혁이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과거, 이제 그 누구도 곁에 둘 생각 따위 없었다.
재혁의 거부에 선아의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도망가듯 맨몸으로 미국에 갔던 그는 이제 그가 상대하려는 이와 눈을 마주할 정도로 성공해서 돌아왔다. 순수하게 그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 그렇기에 그 남자의 곁에 함께 있을 생각으로 모든 것을 버텨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그는 선아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선 너머에서 기다리는 그녀를 방치하고 버려 놓았다.
‘그래도 난 포기할 수 없어요.’
1년이 아니면 2년을 기다리면 된다. 2년이 아니면 더 오래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그의 곁으로 접근하는 여자 따위 얼마든지 짓밟고 무너뜨릴 힘이 그녀와 그녀의 부모에게는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기다린다면 결국 그의 곁에 머물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선아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재혁이 옆으로 다가오는 정장의 사내에게 짐을 맡겼다. 노인이 열어 주는 차의 문으로 들어간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큰 도련님.”
“아버지의 명령으로 온 것 아니었나?”
“회장님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듣는 도련님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둘의 대화를 듣는 선아의 눈이 다시 꿈틀댔다. 당황한 선아가 노인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님께서 본가로 데려오라고 하셨다고……앗.”
재혁의 눈이 입을 막은 선아를 향하였다. 당황한 선아가 노인을 짧게 노려보더니 다급히 변명을 이어 갔다.
“그게…… 회장님께서 오빠 걱정을 많이 하니까……. 물어보시는데 어쩌겠어요.”
“그렇겠지. 넌 그 사람이 보낸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오빠!”
“내 오피스텔로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오라며 난리를 부릴 인사니까. 5년 만에 왔으니 얼굴을 보여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본가로 가겠다.”
전보다도 더 냉정해진 그를 보는 노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옅게 묻어 나왔다. 노인이 처음 본 재혁은 저렇게 차갑지도 모든 이들에게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세우던 이도 아니었다. 온기가 가득 느껴지던 열 살의 남자아이는 제 아버지의 손아귀에 억지로 들어오면서 바뀌기 시작하였다.
5년 전에 그가 잠깐이나마 온몸의 증오를 내려놓는 시기가 있었지만, 결국 노인의 바람은 짧은 시간만큼이나 사라져 버렸다.
“본가로 모시겠습니다. 큰 도련님.”
고개를 숙인 노인이 차를 출발시켰다. 끊임없이 그게 아니라며 항의하는 선아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재혁의 눈이 밖의 배경에 고정되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것이 변한다고 좋은 건 없잖아요.」
재혁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비행기에서 꾼 꿈이 원인인 듯했다.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는 재혁을 안으며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속삭였다. 그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여인, 그렇기에 그와는 맞지 않았다.
병실에서 도장이 찍힌 이혼 서류를 내밀던 여인의 눈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였다.
「쉬어요. 쉬어도 돼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를 연신 흔들었다. 밖을 보는 남자의 입가에 쓴 미소가 감돌았다.
“쉴 수 없어.”
“오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재혁의 반응을 살피듯 선아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재혁의 귀에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 * *

차 안에서는 다 보이지도 않는 철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그 후로도 차가 5분을 더 들어간 후 멈추었다. 재혁이 차에서 내리자 대기하던 고용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재혁의 걸음이 열린 문으로 향하였다.
“짐 꺼내지 마.”
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려던 고용인의 몸이 움찔댔다. 하지만 재혁은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 따위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자 깔끔하다 못해 답답한 집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혁아.”
올린 머리에 크림색 정장을 입은 중년 여인이 재혁을 보자 한달음에 다가왔다. 재혁을 보는 여인의 표정은 환하였지만, 절대로 뛰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한국 경제를 책임진다는 다섯 개의 대그룹 중 하나인 MJ 그룹의 안주인이자 재혁의 아버지인 서병국 회장의 부인인 이화였다. 동생인 지한의 생물학적 어머니였지만, 재혁에게는 새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더 불렸던 여인, 그럼에도 서병국보다는 그나마 대화가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건강하셨습니까?”
“여전히 딱딱하기는. 나야 잘 지냈지. 어디 보자……. 역시 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왜 이리 마른 거니?”
“그렇게 마르지는 않았습니다.”
“어미의 눈에 보이는 자식은 또 그게 아니란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어미라 말하는 이화를 재혁이 말없이 쳐다보았다. 적어도 그에게 부인이라는 존재가 생기기 전까지 그나마 의지했었던 여인이었다. 재혁의 어머니가 죽고 1년 후, 후처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이화는 병국의 비서였다.
경계하는 재혁과는 달리 바라보는 이화의 눈에는 조금의 경계도 없었다.
하지만 열 살 이후로 누구보다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재혁의 눈에는 이화가 왜 이렇게까지 호의적으로 다가와 주는지 알고 있었다.
“지한이는 안에 있습니까?”
“아니야. 잠깐 나갔어. 점심 준비할까?”
“아니요. 인사만 드릴 생각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인사만 하고 간다는 것이냐?”
멀리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재혁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댄 장본인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나이만 들었을 뿐, 재혁의 모습과 똑같은 중년 남자였다. 다만 매서운 인상만큼이나 마른 재혁과는 달리 방에서 나타난 중년 남자는 큰 키만큼이나 몸체의 살이 제법 있었다.
이화에게서 몸을 돌린 재혁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재혁의 모습에 병국이 혀를 찼다.
재혁의 피의 반을 이루고 있는 아버지임에도 그는 철저히 병국을 거부하였다.
“이 집에 왔으면 나에게 먼저 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선아는 어디에 두고 온 것이냐?”
“자기 집으로 갔겠지요.”
“네가 버리고 온 것이 아니냐? 장차 너의 아내가 될 아이인데…….”
“누가 그것 멋대로 정한단 말입니까?”
“넌 내 아들이다. 당연히 자리에 맞는 신부를 선택하는 것도 회장인 나의 몫이지.”
“제 부인입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그 잘난 회사의 제물입니까?”
재혁의 비아냥거림에 병국의 눈썹이 꿈틀댔다. 으득 이를 간 병국이 재혁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들었다. 그런 재혁을 이화가 막았다.
“여보. 참으세요.”
“당신은 나설 자리가 아니야.”
“이제 미국에서 돌아온 애와 이러실 건가요?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아 있으시잖아요!”
이화의 만류에 병국의 눈이 재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병국을 노려보는 재혁의 눈은 차분하다 못해 고요했다. 병국의 앞에서 화를 내봤자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속 깊이 날카로운 검을 벼르고 돌아온 한국이었지만, 아직 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그 아이는 제 복을 제가 찼어!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일어난 일에 난 무관하다!”
병국의 변명에 재혁이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병국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생각 따위는 없다. 그리고 책임을 돌린다 한들 달라지는 것 또한 하나도 없었다.
“전 다시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감히!”
화를 내는 병국을 말리며 이화가 재혁을 보았다.
죽은 부인의 유일한 소생인 재혁은 불쾌할 정도로 병국과 똑같았다. 심지어 성격은 물론이고 회사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능력 또한 병국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이 떠난 미국, 5년 만에 돌아온 재혁은 MJ가 미국에 진출하려는 사업에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MJ가 미국에서 손잡으려 했던 기업은 재혁이 병국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약의 대리자로 세웠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는 그 손 안 올리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너!”
“그리고 전 다시 이 감옥으로 돌아올 생각 따위 없습니다. 어떻게 탈출해서 나온 곳인데 다시 돌아오겠습니까? 아버지의 잘난 기업은 지한이에게 주세요. 그게 새어머니와 모두를 위해서 좋을 테니까 말이죠.”
새어머니라는 말에 이화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병국이 10년 만에 알아낸 이화의 본심을 재혁은 지한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이화가 재혁에게 호의를 가지는 것은 MJ가 지한에게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뿐이었다.
“이런 감옥 따위 통째로 줘도 싫습니다.”
“너란 놈은 멍청하다 못해 바보인 것이냐? 한심한 놈!”
병국의 독설에도 재혁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5년 전과는 달리 주도권을 잡은 것은 재혁이었다. 6개월, 계약만 마무리되는 대로 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날 것이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넌 그래도 내 아들이다!”
으르렁대는 병국의 독설을 들은 재혁의 몸이 멈추었다.
열 살 이후로 그가 보는 세상은 어떤 색도 없었다. 일말의 자비라고는 없는 병국의 행동에 재혁은 갈가리 찢기고 무너졌다.
그 자신만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처럼 마음속 깊이 증오만을 품으며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노력한다면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병국의 영향 아래서 바뀌는 일이라고는 산산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것밖에 없었다.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병국이 무엇이라 소리쳤지만, 재혁은 주저 없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병국과 재혁이 마주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듯 고용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몸을 숙이는 그들을 보며 재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감옥은 자신 쪽에서 사절이다. 어느새 나타난 노인이 재혁을 향해 몸을 숙였다.
“큰 도련님. 별채에 방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며칠이라도 머무시지요.”
“필요 없어.”
“아? 형!”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혁의 눈이 돌아갔다.
병국와 재혁의 날카로운 외모와는 달리 부드러운 눈매에 보기 좋은 미소가 지어져 있는 젊은 남자가 재혁에게 달려왔다. 재혁보다 여덟 살 어린 지한을 보자 그의 눈매에 서려 있던 한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왔다는 소릴 듣고 서둘러 왔는데 다행히 만났네.”
“음.”
“얼굴을 보아하니 이미 아버지와 한판 했구나?”
이를 드러내며 대립하는 병국과 선을 긋고 상대하는 이화와는 달리 배다른 동생인 지한과는 비교적 괜찮은 관계였다. 이화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유들유들하고 붙임성이 좋은 지한을 재혁은 싫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