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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각, 새벽 2시에 가까워졌다.
말아 쥔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짓이 지쳐 갈 즈음이었다. 벌컥, 현관문이 열렸다. 술에 잔뜩 취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하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박하원.”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비틀거리던 하원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2시네. 나 때문에 잠 깼어? 이거 미안해라.”
비꼬는 하원의 표정은 미안하다는 말과는 다르게 실실거리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의 모습이, 저 때문에 화가 난 그의 얼굴에 하원은 통쾌했다.
나직하게 한숨을 뱉은 그가 하원의 팔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할 말이 무수히도 많아 보이지만 참고 있는 그의 입술이 우직하게 다물어져 있었다.
“들어와.”
낮게 가라앉아 있는 그의 목소리였다. 새벽과 잘 어울렸다. 자다 깬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산뜻하고 깔끔했다. 마치 지금까지 깨어 있었던 사람 같았다.
하원은 현관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구두를 벗었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운 것도,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 것도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를 기다렸으니까.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는 모른다.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저만 화났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다. 억눌렸던 감정이 폭주했다. 하원은 들고 있던 핸드백을 그에게 던졌다. 얼굴로 날아온 핸드백을 그가 가뿐히 잡았다.
“나쁜 자식.”
그것마저 못마땅했다. 잇새 사이로 욕지기를 뱉은 하원은 죽일 듯 그를 노려보았다. 레스토랑에서 혼자 2인 음식을 먹던 저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기로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짜증 난다는 말투였다. 그 또한 인내심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언제 인내심이라는 게 있던 사람이었나? 그가 드러낼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하원은 궁금했다. 냉혈남 신우현이 화가 나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참으로 볼만할 것 같았다.
“신우현 당신 참.”
“…….”
“못됐다.”
머리끝까지 솟았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그를 찾아와 따지는 제 모습이 너무 우습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맥이 풀려 버렸다. 다시 본 그의 얼굴은 화를 참는 건지, 화를 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못돼 처먹었다, 정말.”
“…….”
“당신, 그렇게 잘났어? 뭐가 그렇게 뻔뻔하고 당당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하원은 담아 두었던 말을 쏟아 냈다.
지금까지 수없이 참았던 순간들.
혼자 삭히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순간들.
내가 사랑하니까 됐다며 먼저 사랑한 사람도, 먼저 사랑한 순간도 나니까 괜찮다.
그리 위안 삼아 그 옆에 있었던 시간.
다 부질없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이렇게 제자리인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서운한 감정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오래 묵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떠올라 서운한 감정에 보태는 자신이 이렇게 추잡하고 치사한 사람인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여전히 그는 대답이 없다. 하원의 말을 가로막고 따지지도, 그렇다고 그만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묵묵히 그녀가 쏟아 내는 원망을 들을 뿐이었다.
“당신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고.”
“알아듣게 말해.”
흥분해 소리치는 그녀와 달리 우현은 침착했다.
“한 시간을 기다렸어. 아니, 혼자 맥주 마시면서도 계속 기다렸어.”
기다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지.
나는, 당신에게 뭘까?
“그러니까 난 당신을 깨운 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아. 소란을 부린 것도. 지금까지 내가 당신을 기다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처음엔 무슨 일이 있나 싶다가 연락해 볼까 휴대폰을 들었다가.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 때마다 ‘역시’ 하고 인정해 버렸다.
일곱 시간을 내리 기다렸다.
혹시나 미안하다고 연락이라도 오면, 어떻게 화를 낼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고, 맥주를 마시는 도중 그가 찾아오면 맥주를 얼굴에 뿌려 주려고 했었다. 오만한 그의 표정에 하원이 턱 끝을 추켜올렸다.
“그런데 당신은 끝끝내 연락 한 통 없더라.”
그게 제일 비참했다. 연락 한 통 없이 바람맞힌 그의 행동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자신이. 한심하고 머저리 같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바람맞는 거 한두 번 아닌데 오늘은 참 그렇더라.”
“…….”
“참 당신다워. 이래야 신우현이지.”
하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는 턱 끝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러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눈물을 보이며 칭얼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오늘이야말로 속에 담아 둔 말을 남김없이 쏟아 내려고 했다. 5년의 길고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맨 정신엔 절대 못 하는 것을 지금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당신, 미워. 너무 미워. 밉다, 정말.”
그런데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은 참으로 한심하고.
“정말.”
순간이었다. 한달음에 가까이 다가온 우현의 품에 하원이 안겨 버린 것은. 그로 인해 하려던 말들은 순간 싹 달아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먼 길을 택시 타고 달려왔다.
그의 품에 안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술김에라도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 감정이 욱해져 이별을 하게 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의 품이 전부인 것 같을까.
말하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뜨거운 눈물은 여전히 턱 끝에서 떨어져 우현의 셔츠를 적셨다.
“내일 얘기해.”
가까이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은 울림이 일었다.
“다 들어 줄 테니까.”
“흐윽.”
“일단 자자.”
다 이해한다는 듯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하지 마. 차라리 화를 내고 더 오만해지란 말이야. 변명도 없이 다정하게 구는 건, 반칙이라고.
하원은 셔츠를 꼭 쥐고 눈물을 쏟아 냈다. 쏟아 내고 또 쏟아 내도 좀처럼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울음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다정한 그의 모습에 한 번 더 기대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마다 상처받는 걸 알면서도. 마치, 죽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산다는 말을 한 누군가처럼, 하원도 그러고 싶었다.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또다시 기대하게 되고,
이런 자신이 참으로 미련스럽다며 타박해도,
한 번만 더 참아 볼까,
이해해 볼까,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굳게 다 잡았던 마음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 * *

“우욱.”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 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어지러웠고 속은 말도 아니었다. 변기를 붙잡고 한참 씨름하던 하원이 허리를 폈다. 변기 물을 내리고 비틀거리며 세면대에 섰다. 거울 속 추한 몰골이 하원의 눈에 들어왔다. 세면대 물을 틀어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얼굴을 닦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걸려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마셔.”
하원은 놀란 눈으로 우현이 건네는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건네는 컵을 받을 생각 없이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가 덧붙였다.
“꿀물이야.”
미안한 얼굴로 하원은 컵을 받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 잤어?”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 때문에 깼어.”
어투는 쌀쌀맞은데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잠을 방해한 사람한테 대하는 태도가 너무 친절한 거 아냐? 꿀물까지 타 주고.”
“고작 꿀물 하나 가지고, 뭘.”
고작 꿀물에 감동한 나는 뭘까. 그녀에겐 ‘고작’이 아니었다.
“앉아.”
우현이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어차피 뜨거운 꿀물을 서서 다 마실 수 없었다. 먼저 의자에 앉은 우현의 맞은편에 하원이 의자를 끌어다 당겼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적요가 머물렀다. 그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야근이 일상인 사람이니 자신 때문에 잠에서 깨어 피곤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무리 오늘 주말이라고 해도 늦잠 잘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그였다. 하원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꿀물을 마셨다.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쯤 몇 시쯤 되었을까. 그리 오래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은데…….
“난 이거 다 마시고 잘게. 우현 씨 먼저 자.”
괜한 어색한 적막에 하원이 그를 방으로 들여보내려고 했다.
“나도 어차피 잠에서 깼어.”
할 말이 없어진 하원은 다시 머그잔을 들었다.
“왜, 뭐라고 안 해?”
“뭐라고 해 줄까?”
되레 그가 물었다.
“화라도 내라고.”
그래야 자신도 반박할 말이 생길 테니까. 그러다 감정이 욱해져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못 하고 하게 되더라도 차라리 그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변명이라도 해 보든가.”
어쩌면 지금 자신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무슨 변명?”
그는 계속 되묻기만 한다. 하원은 침묵을 지켰다.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얼마나 기다렸어?”
“이 집에 쳐들어오기 전까지.”
우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미련한 짓 좀 작작해.”
“미련한 짓?”
애당초 그에게 다정한 말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당연히 없어야 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애당초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짓이 미련한 거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의 이성적인 논리로 본다면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되레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미련한 짓을 해 본 적이 있어?”
있을 리가 없다. 미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건 이성보다 감정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 앞에선 논리적인,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걸. 사랑하게 되면 눈이 멀고 귀가 먹는다는 말은 이해나 할까. 그가 말하는 미련한 짓의 근원은 그였다.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쳐들어오든가.”
“…….”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래도 한 번은 미안하다고 해 주면 안 되는 거였을까. 아무리 미련한 짓이라고 해도,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냥 져 주면 안 되는 걸까. 단 한 번이라도 그랬다면 오기 같은 건 부리지 않았을 텐데.
“이젠 기다리지 마.”
그 말이 꼭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언제나 바라는 것은 그렇게 크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번에도 제 잘못.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먼저 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다른 방에서 잘게.”
“응.”
갑자기 마음이 허해졌다. 지금까지 같이 자던 방이 아닌, 다른 방으로 향했다. 조금 더 작은 방이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하원의 귀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