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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대학병원


1화

프롤로그


“셋 중에 골라 봐. 이번엔 제대로야.”
인숙이 책상 위에 사진 세 장을 툭 던진 건, 은반이 까만 손톱에 화룡점정을 찍을 때였다. 이쑤시개의 끄트머리에 하얀색 물감을 묻혀 점을 찍듯이 찍어 나가면, 이 엄지손톱은 ‘눈 오는 밤’이라는 걸출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것이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엄마의 훼방에 은반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던져진 사진 세 장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저 이쑤시개의 끄트머리에만 집중했다.
“어머니. 제가 지금 역사적인 순간의 기로에 서 있어서 그러는데 5분 후에 다시 들어오실래요? 환한 미소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요.”
“시끄럽고, 얼른 골라. 한 시간 내로 연락하지 않으면 딴 집에서 채 갈지도 몰라. 이번엔 경쟁률이 장난 아냐.”
“네네. 그러니까 딱 5분 후에…… 아얏!”
인숙이 기어이 은반의 ‘예술품’에 흠집을 내어 버렸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 것으로 네일아트의 완성도가 물 건너간 것이다. 손톱은 하얀색과 까만색이 뒤범벅이 되어 복잡한 추상화를 방불케 했다.
“엄마아!”
은반은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홱 들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향해 불만 섞인 어투로 소리치자, 인숙이 그보다 더 강도 높게 고함을 쳤다.
“어서 고르라고 했지? 이번에는 철저하게 네 선택에 따를 거야. 지난번처럼 엄마가 골라서 선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 네 입에서 안 나오게 할 거라구. 그래서 사진도 준비한 거야. 나 이번에 각오 단단히 했다?”
은반의 방은 두 여자가 내는 고함 소리에 일순 공기가 달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엄마의 파죽지세에 살짝 기가 눌린 은반은 마지못해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마에 ‘나? 과외 선생’이라고 써 놓은 사람들이 사진 속에서 딱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반은 그것들을 대충 스윽 훑는 척하다가 다시 인숙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한층 누그러뜨린 음성과 미소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최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기로 했다.
“엄마. 나 과외 끝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어. 이제 2주일이 지나면 겨울방학 끝나고 새 학년이 돼. 나도 숨은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맞선 볼 것도 아닌데 사진들 중에서 고르라니 웬 말?”
“넌 숨 쉴 자격도 없어, 이것아. 1학년 마지막 성적이 26명 중에 24등이 뭐야? 어휴. 내가 정말 쪽팔려서.”
“24등이 어때서? 내 밑으로 두 명이나 더 있다는 건데 대단한 거지. 그리고 아직 2년이 더 남았어.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그중 한 명이 다음 달에 유학 가고 또 다른 한 명은 연예인 준비하는 애라며! 그럼 결론적으론 네가 꼴찌라는 거 아냐! 네 학교에 다달이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인숙은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결국 은반의 미약한 봉기는 이쯤에서 막을 내리게 될 것이었다.
“거참. 행복이 뭐 성적순인가요? 우리의 삶의 질은 성적 말고도 아주 다양한 부분에서 풍족하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적 때문에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건 맞아. 학생들은 다 그래. 그러니까 어서 골라. 안 그러면 너 이번 달부터 용돈 없어.”
“어허. 우리 어머니 또 당 떨어지셨네. 알았어. 고를게. 어디 한번 물건들 좀 볼까나.”
좋은 말로는 과외, 나쁜 말로는 돈 낭비인 그것을 위해서, 은반은 무겁게 한숨지으며 사진들을 집어 들었다. 내키지 않지만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으니 용돈만은 끊지 말아 달라는 애절한 표정도 곁들였다. 용돈을 걸고넘어지는 건 매우 치사하지만 모든 엄마들이 자식들한테 행하는 특권이니까.
첫 번째 사진. 반쯤 벗겨진 앞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 그리고 눈가의 과도한 주름이 이 과외 시장에서 오래 뒹굴었음을 암시했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듯 보이지만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만들어진 미소다.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허세가 가득일 테고 수업도 기계적일 것이다. 게다가 너무 늙었으니 패스.
두 번째 사진. 화려한 컬을 자랑하는 풍성한 머리칼과 붉은색의 립스틱, 손톱으로 긁으면 손톱 밑에 잔뜩 끼일 것같이 두꺼운 화장이 절로 인상을 찡그리게 했다. 옆에서 향수 냄새에 질식할 일이 있나. 그리고 같은 XX염색체한테서 수업받는 건 긴장감이 없어서 싫다. 패스.
사진 두 장을 차례대로 내려놓은 은반은 마지막 사진을 손에 들었다. 축 늘어져 있던 몸이 순간적으로 긴장에 휩싸였다. 은반은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책상 앞으로 바짝 당겨 가선 사진 속 얼굴에 코를 박았다. 개안을 한 심봉사의 기분이 되어 입이 절로 스르르 열렸다.
“언빌리버블!”
그러곤 사진을 인숙의 앞으로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낙찰.”
“기집애. 나 닮아서 하여간 보는 눈은 있다니까.”
“보기 좋은 떡이 공부할 때 먹기도 좋은 법이거든.”
“중학교 때부터 전국 수석을 놓치지 않은 학생이야. 지금은 세운대학교 의대 본과 4학년이고. 그동안 과외 제의를 숱하게 받았는데 한 번도 응하지 않았었대. 근데 이번엔 웬일인지 몰라. 하긴 의대생이 과외를 할 시간이 어딨겠어.”
드디어 은반이 과외를 다시 하게 된 게 기뻤는지 인숙이 조금 들뜬 음성으로 사진 속 인물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은반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용돈 끊겠다는 말은 쏙 들어가리라. 감동의 물결에 휩쓸린 척 두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와우! 세운대학교에다가 의대생이라…… 쩐다. 원래 대단한 사람들의 얼굴은 조금 찐따여야 하는 거 아냐, 엄마? 최고에 최고가 겹쳐졌는데도 이런 비주얼이 가능하다니 대박이구만.”
“그래. 이 사람으로 고를 거야?”
“응. 엄마. 내가 사람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이 사람 말야. 옆에 두면 저절로 성적이 오를 상이야.”
“으이구!”
은반의 엉뚱한 말에 인숙이 또다시 그녀의 정수리에 알밤을 선사했다.
“아얏! 아, 왜 자꾸 때려, 엄만!”
“넌 학생이고, 이 사람은 과외 선생이야. 행여 딴마음 먹지 마.”
“난 지금 질풍노도의 시기야, 엄마. 잘생긴 남자 앞에서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나이라구. 하지만 순기능도 있어. 이 선생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겁나 공부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성적이나 올려놓고 말하자, 응?”
“내 태몽 무시하지 마, 엄마. 개천에서 암고양이가 청진기 들고 솟구쳤다며. 이건 분명히 신의 계시야. 이번 과외 쌤이 의대생인 것도 하나의 암시인 거지. 혹시 알아?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될지?”
인숙은 이제 헛소리까지 하는 은반을 짠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대답도 귀찮다는 듯 돌아서서 방을 나가 버린다. 은반은 방에서 무사히 엄마를 퇴치했다는 감격에 겨워하며 그제야 기지개를 쭈욱 켰다.
떡칠이 된 손톱을 허망한 눈길로 보다가 문득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은반은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는 들여다보았다. 지겨운 과외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주범이라도 되는 듯 사진 속 미끈하게 잘생긴 남자를 힘껏 노려보았다. 가지런히 누운 눈썹 아래 짙은 눈동자는 선해 보였고, 매끄럽게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 선이 매우 선명해서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된 지금부터 꼼짝없이 이 인간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운이 나쁘면 내년 수능 치기 직전까지도 각오해야 할지도. 그 생각을 하자 골치가 지끈 아파 왔다. 그동안 과외 제의를 한사코 거절했다면서, 왜 이번엔 뜬금없이 하겠다고 나서선 엄마의 허영심에 불을 지핀 건지. 왜 하필 이렇게 잘생겨선 군말 없이 선택하게 만든 건지.
은반은 미간에 뚜렷하게 새겨진 주름을 애써 펴며, 무심결에 사진을 뒤로 돌렸다. 엄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보였다.
세운대학교 의대. 표이록.
이름인가?
“표이록…….”
은반은 그 이름을 입속에서 가만히 되뇌었다. 그러다 무언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치받쳐 아주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 한없이 밀려드는 한숨에 툭, 책상에 엎드린 은반은 눈앞에 가득한 이록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1. 완전한 사육


은반의 아버지는 은반이 태어나기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활전선에 뛰어든 인숙은, 생활력이 강했던지 은반을 들추어 업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그 ‘일’이라는 건 종류와 장르를 불문했다.
식당 설거지, 장사, 청소, 부업 등 법적으로 건전한 일도 했지만 돈이 조금 벌리자 이자 놀이 같은 불건전한 일도 하기 시작했다. 희한한 건 엄마가 손을 대는 건 시간이 흐르면 대박이 난다는 사실이었다.
조그만 땅을 샀는데 그게 몇 년 후에 재개발 지역으로 확정이 나는가 하면, 구멍가게로 시작한 떡볶이집이 매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는 비슷하게 졸부가 된 친구들로부터 종종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었다. 그런 재미에 빠지다 보니 당연히 마음에 여유가 없게 되었고 은반을 향한 관심의 종류가 ‘공부’에 국한되기 시작했다.
빵빵한 하드웨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소프트웨어 때문에, 은반에게 언제나 최고의 학원과 최고의 과외 선생을 붙였다.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다그치고 집착했다.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은반은 인숙에게서 칭찬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를 위해 미리 이부자리를 펴 놓아도, 신발장을 말끔히 정리해도, 돌아오는 말은 ‘공부나 해.’였다. 그게 상처라는 걸 엄마는 모른다. 그 상처를 가리고 늘 겉으로 헤헤 실실 웃고 다닌다는 걸 엄마만 모른다.
“하암…….”
책상에 엎드린 은반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창밖만 물끄러미 보면서 하품을 했다.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생각의 한편에는 이제 곧 시작될 두 시간짜리 과외를 어떻게 해야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가 진행 중이었다. 보기만 해도 위산이 역류할 것만 같은 문제집 말고 다른 것에 그 사람의 주의를 돌려야 될 텐데.
“설은반, 너야? 오늘부터 나한테 사육당할 애가?”
그렇게 모종의 계략을 꾸미려던 찰나, 머리 위로 굵고 또렷한 음성이 쏟아졌다. 은반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사진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니다, 실물이 더 나은가? 키도 엄청나다. 작년에 사귀었던 기우 녀석이 180센티였는데 그보다 더 커 보인다. 어쨌든 그의 외모는 순간적으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은반을 온통 긴장시킨 것이다.
이록은 방 안을 휘둘러보곤 화장대 의자를 가져와 은반의 옆에 놓았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의자에 앉아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은반을 쳐다보았다. 이미 은반의 모친으로부터 입수한 은반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재생시키며 핏, 웃어 보였다. 과외는 처음이지만 사람을 조련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오래전 고아원 동생들을 이끄는 골목대장이었을 때부터.
“아주 바쁜 의대 본과 4학년에 본의 아니게 과외 선생이라는 얄궂은 운명에 처하게 된 몸이시다. 세운대학교 의대에 다닌다는 건 이미 들었을 테고, 이 빼어난 외모도 사진으로 이미 봐서 감흥이 덜할 테니 자, 이제 네 소개를 들어 볼까?”
“에이. 쌤도 저에 대해 이미 다 아시면서. 이 바닥이 원래 다 그런 거죠, 뭐. 서로에 대한 넘치는 지식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신뢰가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기싸움.
이록은 세상을 통달한 것 같은 표정의 은반을 보며 모종의 기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읽었다. 그것에 휘말리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벌써부터 감지되는 이 녀석의 엉뚱함은 실로 웃음만 나게 했다. 이록은 은반의 앞에 놓인 문제집을 제 쪽으로 끌어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부여하는 원칙은 딱 한 가지야. 내가 내 주는 숙제, 절대 딴 친구한테 하청 주지 마라. 어떤 종류의 숙제든 네가 직접 해야 돼. 알겠어?”
“쌤.”
“어감이 별로야. 쌤통이라고 놀리는 것 같다. 선생님이라고 해.”
“쌤. 쌤은 애인 있어요? 아, 의대생이라 바빠서 여자 사귈 시간이 없었겠다. 그럼 여자사람 친구는 있어요? 쌤 정도의 얼굴이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다 거느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은반은 턱을 괸 채로 이록을 쳐다보며 긴 속눈썹을 껌뻑거렸다. 과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히는 정도의 모습을 기대했건만,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심해 보였다. 마치 이런 칭찬은 이제 지겹다는 정도? 이 진지함에 같이 휩쓸리지 않아야 하는데. 오늘은 정말 공부하기가 싫단 말이다.
“알아. 그러니까 이제 문제집을 펼까? 수학 하고 영어 할래? 아니면 영어 먼저 하고 수학?”
“음…… 인생 공부 먼저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우리 훈훈한 담소나 나눠요, 쌤. 예로부터 선생과 제자의 첫 만남에는 일정한 공식과 룰이 있죠. 바로바로 Q&A 타임! 와우! 쌤도 정신없이 바쁘실 텐데 마음의 여유는 가져야죠. 안 그래요?”
“그래? 흐음. 질문하는 건 내가 소유한 명석한 두뇌로 비추어 볼 때 알맞지가 않고, 답하는 것도 A4용지 한 장 이상의 분량이 아니면 난 심심한데. 그럼 딴 걸 할까? 네 과거사나 읊어 보지 뭐.”
이록은 은반이 취한 제스처와 비슷한 양으로 책상에 턱을 괴고 녀석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든 은반의 정보를 입으로 술술 불기 시작했다.
“가장 잘하는 과목은 수탐이고 지난 모의고사에서 6등급, 그나마도 가장 취약한 과목인 언어영역과 불과 한 등급 차이 남. 언어영역은 1학년 마지막 전국 모의고사에서 기록적인 등급을 기록함. 7등급.”
“……하하하. 뭐 그런…… 알짜배기 정보를 다 입수하셨대.”
“1학년 1학기 때 잰 아이큐는 105. 이것도 과외를 하면서 문제를 미리 습득하여 가능했던 점수. 지금까지 과외 선생은 다섯 명. 모두 결과가 신통치 않았음.”
“키가 더 컸으니까 이제 아이큐도 더 높아졌을 거예요. 그리고 그 쌤들은 모두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요. 전 공부하는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됐고.”
이록은 다시 고개를 들고 반듯하게 앉았다. 문제집의 표지를 넘기며 턱을 도도하게 추켜올렸다.
“네 적나라한 현실이 까발려지니 기분이 어때?”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그럴 리가. 충분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생긴 사람 앞에서 치부가 드러나면 누구나 그래.”
“쌤.”
“선생님!”
“쌤은 왜 과외를 하게 된 거예요? 지금까지 숱한 제의를 다 거절했다면서요? 근데 이번엔 왜요? 왜 하시는 건데요?”
“글쎄. 너 같은 문제아를 만나서 개과천선시킬 운명이었나? 24등이라니. 그건 하루를 나타낼 때 쓰이는 숫자인 줄로만 알았다.”
“설마 돈 때문이에요?”
핵심을 피해 가는 은반 때문에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려는 순간, 문제집을 넘기는 이록의 손길이 차츰 느려졌다. 그의 눈동자에 아주 잠시 회한 같은 것이 스쳤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그런 허한 색채가 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록은 그것을 은반이 발견하기 전에 찰나의 미소로 갈무리했다.
“맞아. 돈 때문이야.”
“흐음. 전국 수석이시니 등록금은 기본적으로 해결될 테고 용돈은 집에서 타서 쓸 거고, 대체 돈이 왜 필요한 건데요?”
“어른들의 세상은 꽤 복잡한 법이거든. 일일이 알려고 들지 마. 그건 그렇고 너처럼 돈 많은 집의 공부 못하는 학생 하나 물어서 몇 달만 눈 딱 감고 고생하면 거액이 들어오는데, 이 좋은 걸 왜 그간 안 했나 모르겠다.”
“어머나아. 되게 솔직하고 화끈하시다아, 울 쌔앰.”
“그러냐? 공부할 땐 더 솔직하고 화끈한데 한번 볼래? 책 펴. 실시.”
이록의 음성이 다소 굳어진 것을 느낀 은반은 못 이기는 척 할 수 없이 문제집을 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매뉴얼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다음을 위해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두 시간 동안 펼쳐질 지옥의 관문에 입성한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한숨이 났다.
“노트. 앞으로 과외 하는 날마다 이 노트에 네 심경을 쓰도록 해. 일기라고 해도 좋고 메모지라고 생각해도 좋아. 귀찮다고 생각하지 말고 단 한 줄이라도 써. 도움이 될 거다.”
그때 이록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은반의 앞으로 툭 던졌다. 두꺼운 노트가 다섯 권짜리로 묶여 있었다. 은반의 눈동자가 노트로부터 이록의 얼굴로 옮겨 가며 점차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과외도 뜨악인데 일기까지? 이 인간이 공부를 심하게 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글자나 숫자를 좋아할 거라 여기는 걸까?
“두께가 장난 아닌데요? 게다가 다섯 권이라니. 십 년은 거뜬히 쓰겠네.”
“그래. 십 년간은 쓰라고 주는 거야.”
은반은 문제집을 펴는 척하며 이록이 준 노트를 슬그머니 옆으로 치우고 외면해 버렸다. 마치 그의 지시를 듣지 못한 것처럼, 그가 노트를 주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처럼.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지옥은 이록에게나 은반에게나 똑같았다. 은반은 도무지 정립되지 않는 공식과 단어들로 고생을 했고, 이록은 기본 공식이나 단어와 숙어도 모르는 은반에게 설명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과외를 끝내고 1층 거실로 내려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인숙의 앞에 서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친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록은 무언가 잔뜩 기대감에 차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인숙에게 살짝 고개를 까딱한 후 옆에 선 은반을 흘깃 쳐다보았다. 공부하는 내내, 제가 공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역력하게 티를 냈던 이 골칫거리더러 들으라는 듯이 당당하게 음성을 높였다.
“앞으로 은반이가 저에 대해 싫은 소릴 좀 할 겁니다. 제가 과외를 할 동안에는 무조건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어머니. 주위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다 무시하시고 저만 믿으세요.”
이런 골칫거리쯤이야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인숙이 신뢰감을 한층 더 공고히 쌓으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럼요, 선생님. 전 은반이 말은 태어날 때부터 안 믿었어요. 얘가 옹알이할 때도요. 못하면서 하는 척, 막 그랬답니다. 호호호.”
인숙이 소리 내어 웃자 이록이 짐짓 난감해하며 은반을 쳐다보았다. 저 말이 과연 딸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인지에 대한 의문이 깔린 표정이었다. 그러자 이록의 내심을 모두 알아채기라도 한 듯 은반이 기계적으로 입을 열었다.
“친딸 맞아요, 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존재라지만 저는 불행히도 우리 어머니의 딸이 맞답니다.”
마치 이런 질문을 받는 건 비일비재하다는 투다. 이록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받아들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현관을 나가자 은반은 잽싸게 2층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책상 옆에 있는 커다란 창가에 쏜살같이 달려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선 집 앞 골목이 잘 보인다. 은반은 방금 막 대문을 나선 이록을 발견하곤 머쓱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가 골목 끄트머리쯤에 있는 맨홀에 빠져 다쳐서 부득이 과외를 그만두는 상상을 하며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을 때, 은반은 당황하여 홱 돌아섰다. 설마 그녀가 이곳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걸 발견한 건 아니겠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은반은 그렇게 자위를 하며 스르르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책상 위에는 이록이 준 노트가 있었다. 은반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아우. 뒷골이야. 난 나이도 아직 어린데 왜 이렇게 쑤신 곳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