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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록은 창문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걸음을 이어 갔다. 얼굴에 퍼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은반은 재빨리 창문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록은 이미 다 본 후였다. 녀석이 창가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하는 행동이 영락없이 사춘기 여고생인 데다가 공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실력이 가히 프로 선수급이다. 이록은 만만치 않은 앞날을 예감하며 앞으로 저 물건을 어떻게 요리할까, 라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 소득 없는 고민은 5분 후에 도착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끝이 났다. 이록은 그때까지도 머릿속을 가득 점령하고 있던 골칫거리 은반의 얼굴을 밀어내고, 핸드폰을 꺼내며 버스에 훌쩍 올라탔다.
“누나? 뭐하고 있었어?”
- ……잤어. 넌? 도서관이야?
“응. 지금 빌라로 갈 거야. 30분만 기다려.”
- 그냥 곧장 기숙사로 가.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여긴 신경 쓰지 말고.
하영과의 통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고, 빌라로 가겠다고 하는 말에는 늘 오지 말라고 대답한다. 여린 음성만큼이나 세상의 모든 일에 용기도 희망도 더는 걸지 않는다. 살 수 있는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은연중에 이록에게 인식시키기도 했다.
“됐어. 진심 아니란 거 알아. 지금 누나 옆에 누가 있다고 날 거절해? 간도 커. 끊어.”
하지만 이록은 단 한 번도 하영이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라 그에게 정신적인 둥지가 되었을 때부터 하영은 이록에게 단 한 명의 여자였고, 어머니였다. 그보다 열 살이 많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 고아원을 떠난 후에, 지독한 상실감으로 힘들어한 이록을 붙든 것은, 어른이 되어 그녀를 꼭 찾아가리란 희망이었다.
물론 그 희망은, 하영을 다시 만난 5년 전에 산산조각이 나긴 했다. 하영은 비서로 있던 장일그룹의 회장의 눈에 띄어 그의 숨겨진 정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록이 의대에 합격한 후에 자랑스럽게 회사로 찾아갔을 때였다. 행복하냐고 물으니 고아원에서 지낼 때보다 낫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존재와 공유했던 추억을 온통 거부당하는 것 같아 이록은 그때부터 하영을 잊으려 무섭게 노력했다.
만원인 버스 안에서 이록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손잡이 하나에 의지했다. 차창에 비치는 흐릿한 얼굴은 공부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일들로 충분히 지쳐 보였다. 일부러 굳게 다문 턱 선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안면 근육이 어지간히 굳어진 상태라 어색하기 짝이 없다. 웃을 일이 없었다. 병에 걸린 하영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연락을 해 왔던 석 달 전부터.
<행복한 빌라>의 3층에 도착한 이록은 302호에서 나오고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인사를 했다.
“학생 또 왔네?”
“네. 쓰레기 버리러 나가세요?”
“응.”
별 의미도 없는 매우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아주머니는 계단을 내려갔고 이록은 번호를 눌러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집 안은 현관에서부터 약 냄새가 진동했다. 늘 그랬듯 집 안은 불이 다 꺼져 있었고 하영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만 조그만 스탠드 불빛이 어른거렸다.
“귀신 나오겠네. 어두운 걸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밝은 게 싫은 거야?”
“어두운 게 좋아. 그래야 저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을 안 볼 수 있거든.”
그 말을 듣고 이록은 하영이 누워 있는 침대에서 정확하게 일직선상에 있는 화장대를 쳐다봤다. 하영이 상반신을 일으키면 그 모습이 그대로 거울에 비칠 것이다. 핏기 하나 없고 앙상하게 말라 버린 모습이 말이다.
“옮길까?”
“아니. 그냥 둬. 아프니까 변덕이 들끓어. 언제 또 내 얼굴이 보고 싶어질지 몰라.”
“변덕 많은 여자, 별론데. 그러게 진작 나한테 오지 그랬냐. 변덕이란 걸 할 수가 없게 만들어 줬을 텐데. 천애고아라 군대에 끌려갈 염려 없지. 최고의 의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 거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있어야 말이지.”
그의 호기 어린 말에 하영은 비싯 웃었다. 웃기려고 내뱉은 말이니 웃어 주긴 해야겠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숨 쉬기가 뻐근한 가슴에서 잠시 통증이 밀려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영의 그 찡그린 인상을 보며 이록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그녀의 얼굴로 뻗어 간 팔을 머뭇머뭇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아프면서도 여전히 청초하기 짝이 없다. 아픈 얼굴마저도 그 옛날 그가 무척 따랐던, 건강했던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여자와 어머니. 그 중간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그녀를 향한 감정 때문에, 이록은 아직도 그렇게 아프고 서글펐다.
“좀 더 자도록 해. 난 여기에 좀 앉아 있다가 시간 되면 나갈 테니까.”
하영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무언은 곧 긍정의 의미. 이록은 침대 옆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몸을 묻었다. 턱을 괴고 하영을 응시했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께가 불안정하게 들썩거렸다.
그녀의 병명은 심장암이었다. 학계에도 보고된 케이스가 전무한 희귀병이라 대처 방법도, 치료 방법도 딱히 없는 수준이었다.
지난달에 흉수가 차서 급히 병원에 들른 이후, 의사로부터 기대수명이 더 줄어들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다. 의사는 심장에서 조직을 떼어 내어 종양이 양성인지 음성인지 먼저 파악을 해야, 방사선이든 약물이든 일반적인 항암치료가 가능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모두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항상 돈이 문제였다. 어마어마한 검사비와 약값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이록에게 부족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외부장학금은 전공서적과 임시방편으로 처방받은 하영의 약값을 대기에도 벅차다. 하영의 병을 알고 장일그룹 회장은 그 즉시 그녀를 버렸고, 의지할 데가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록에게 연락을 했다. 과외를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하영이 검사나마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를 위해 이록이 과외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그를 더 이상 보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상관없었다.
“그 영감한테서 떨어져 나올 때 위자료라도 듬뿍 받지 그랬어. 고작 이 빌라 한 채가 뭐냐.”
딱히 하영의 대답을 바라고 나간 말은 아니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하영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게. 근데, 그 영감님만 믿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내 잘못도 있어.”
“지금이라도 이 빌라 팔자. 자존심을 버렸다면 돈이라도 챙기라고.”
“여길 파는 건 싫다고 했잖아. 싫어. 두 번 다시 그 얘긴 꺼내지 마.”
이곳을 팔자는 말에 하영은 유난히 반대가 심했다.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이록은 답답해지는 가슴을 다독여야 했다.
“그렇게 사는 게 힘들었어? 좀 더 누나 자신을 아낄 순 없었던 거야? 정상적인 남자를 만나서 정상적으로 사랑하고 결혼을 하고 행복할 순 없었어?”
“태생부터가 정상이 아닌데 그건 무리지.”
“그럼, 나를 기다렸어야지. 누나랑 비슷한 태생인 나한테라도 기댔어야지.”
“그런 말 하지 마. 넌 귀여운 동생이야. 그게 깨어지면 너나 나나 피곤해. 나는 지금 이기적이게 널 이용하고 있어. 아프면 외로우니까 너라도 내 옆에 두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난 쭉 이기적일 거야.”
애초에 하영이 자신을 사랑해 주리란 기대는 품지 않았다. 하영의 말대로 이록은 그녀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고아원의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도 안다. 그러했기에 다른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오랜 세월 이어졌던 그의 짝사랑은 충분히 보답을 받는 거라 여겼다. 이록이 보고 싶었고 기대했던 것은 절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어.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약해 보이는 하영을, 이록은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늘 태산 같았던,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어른이었던 그녀가 지금은 더없이 힘없고 약한 어린아이로 보였다.
이록의 생각은 하영을 향한 안타까움에 고정되어 있었다.
***
과외를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다. 그사이 은반은 개학을 했고 이록 역시 마지막 학년이 되어 의사 고시 준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부속 대학병원에 실습생으로 나가 임상경험을 하고 나면 최소한 세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생활한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바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과외를 하는 날은 그나마 하영의 빌라에도 갈 수 있는 여유가 있었지만 나머지 생활은 거의 폐인 수준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록은 과외 하는 날을 알게 모르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의 유일한 숨구멍. 학교 밖으로 나와 사람들 속에 섞이면 식물이 햇빛을 받고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생기가 돌곤 했다. 은반과의 위태로운 과외 하기는 어느새 그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게 된 것이다.
꽃샘추위가 절정을 내달리는 밤. 이록은 은반의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발걸음은 느리기도 했고 또 빨라지기도 했다. 오르막이 있는 지점에서 느리게 걷고 있는데 그의 옆으로 누군가가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은반이었다.
이록은 피식, 웃었다. 녀석의 등에 매달린 가방의 보조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어딘가 눈에 익은 물건들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영의 화장대에서 본 화장품들과 유사한 품목이다. 저 녀석이!
이록은 성큼성큼 걸어 가방을 덮고 있는 은반의 긴 머리칼을 뒤에서 붙잡았다. 그러자 은반의 머리가 뒤로 쑥 딸려 왔다.
“아악!”
뒤에서 가해진 갑작스런 접촉에 놀란 은반은 사색이 되어, 문제집과 샤프가 들린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성폭행, 강도 따위의 흉측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해야 하는데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붙잡힌 머리칼로부터 압도적인 공포감이 전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오는 건데. 민영이 이 나쁜 년 때문에 오늘 드디어 피를 보게 생겼다. 은반은 마른침을 삼키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음성을 끌어내었다.
“이, 이거 안 놔? 조,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며, 몇 걸음만 더 가면 파출소거든? 고함지르면 겨, 경찰 아저씨들이 바로 튀어나오신다고. 모, 못 믿겠어? 보, 보여 줄까? 그, 그래 까짓…….”
“벌써 끌려가고도 남았겠다, 인마.”
횡설수설 중언부언, 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눈앞이 하얘져 있는데,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반은 재빨리 눈알을 굴려 이 음성의 주인을 추리했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그가 누구란 걸 깨달았을 때, 은반은 황급히 뒤돌아섰다.
“쌤! 뭐예요! 저 진짜 놀랐다구요!”
아직 남아 있는 공포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콩콩 쳐 버렸다. 이록이 인상을 찌푸리며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몇 차례고 더 쳤을 것이다. 이 무쇠주먹으로 말이다. 은반은 멈칫하며 주먹을 거두어들였다.
“넌 나 같은 남자가 옆에 지나가고 있는데 눈길도 안 가든?”
“그건 제 잘못이 아니죠. 존재감을 뿜어내지 못한 쌤 잘못이지. 그리고 솔직히 쌤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래? 어쩌냐. 이번 시험도 엉망이겠네. 넌 공부하는 데 환경도 중요하다며?”
“그러니 집에 가는 길임에도 이렇게 공부 삼매경이죠. 환경이 받쳐 주질 않으니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은반은 자랑이라도 할 모양으로 이록의 눈앞에 문제집을 대충 스윽 스쳐 보였다. 사실은 오늘 검사를 받을 숙제를 다급히 하고 있는 거였지만, 가로등 하나만 겨우 켜져 있는 골목이니 그가 이 문제집을 알아챌 리 만무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역시 문제집이라는 물건에 꽤 예민했다.
이록이 은반의 손에서 문제집을 확 낚아챈 후 그녀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부분을 꼼꼼하게 살폈다. 또 들켰구나, 싶어 은반의 얼굴이 낙담으로 일그러졌다.
“이게 과연 올바른 의미의 공부일까?”
“……하청은 안 줬어요. 제가 직접 풀고 있다고요. 이것 보세요. 잔뜩 충혈된 제 눈을. 그리고 정수리에 원형 탈모증도 곧 생길 것 같아요.”
“노력은 가상하군. 낮 동안 학교에서 실컷 놀다가 과외 시작 10분 전에야 부랴부랴 숙제를 하는 네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구나.”
내뱉은 후 이록은 문제집을 은반의 품에 안겨 주고 그녀를 앞질러 걸었다. 은반 역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뒤를 따라 걷는데, 돌연 그가 홱 뒤돌아섰다.
“아얏!”
이록의 가슴팍에 은반의 얼굴이 그대로 꽂혀 버렸다. 코끝에 찡한 통증이 일어 그 부분을 슥슥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코를 문지르는 손길의 속도가 차츰 느려졌다. 그제야 은반은 자신의 몸이 이록의 가슴에 지나치게 겹쳐져 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접촉에 본의 아니게 뛰어 버린 가슴을 다독이려 숨을 내쉬는데, 이록이 팔을 뻗어 은반의 가방 뒤에서 화장품들을 꺼내었다.
“엄마 보시겠다. 이건 내가 압수. 방에 들어가면 줄게.”
은반의 시선이 그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학교 마치고 민영이와 함께 시내에 나가기 전 열심히 두드리고 발랐던, 여고생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들이 그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제자를 위하는 그 애틋한 마음, 부디 오래오래 가길 빕니다, 쌤.”
“그걸 들키면 네가 피곤해지고, 네가 피곤해지면 나는 더 피곤해질 테니 될 수 있는 한 시끄러워질 일은 미리부터 차단하는 거야. 의미부여 하지 마라. 이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니니까. 고딩 주제에 화장품이라니 그렇게 빨리 늙고 싶어?”
낮은 목소리로 면박을 준 후 이록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은반도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어른이 되면 좋을 것 같으니까요. 한마디로 사는 게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이 더 재미있지 않아? 선택의 폭이 넓고 네 앞에는 다양한 가능성의 문들이 열려 있잖아.”
“그것도 능력이 되어야 말이죠. 전 그냥 어른이 되면 웃을 일도 많을 것 같고 울 일도 많을 것 같고 그래요. 그게 재미죠. 안 그래요, 쌤?”
“웃을 일도, 울 일도 많긴 하지. 단지 차이는, 어린아이는 어른이 그 눈물을 닦아 주지만, 어른은 그걸 홀로 견뎌야 한다는 거지.”
그의 말을 듣고 은반은 걸음을 멈추었다. 얼핏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어른은 모든 일에 홀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거다. 처음으로 누군가로부터 인생의 충고를 들은 것 같은 자각이 은반을 생소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그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도 어른이 되고 싶어?”
“네.”
“그래. 빨리 어른이 되어서 부디 그 세계의 고단함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절대 나약해지지 말고.”
누구처럼, 나약해지지 말고.
이록은 그렇게 주문했고 은반은 애매모호한 그의 말뜻을 헤아리려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초인종에서 ‘넌 안 들어오고 뭐해!’라는 엄마의 앙칼진 음성을 들은 후에야, 집 안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했다.
“뭐? 헤어져?”
세면대에 서서 손끝에 물을 묻혀 앞머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민영이 놀랄 만한 정보를 물어 왔다. 작년에 은반이 사귀었던 기우가 최근에 새로 사귄 여자아이랑 헤어졌다는 뉴스였다.
“그래. 그년이랑 같은 반 애가 말해 준 거니까 틀림없을 거야.”
“호오. 그으래? 아무튼 그 새낀 열 여자 마다하지 않아서 큰일이야. 어른이 되면 좀 달라지려나? 지가 흘린 눈물은 지 손으로 닦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며칠 전 밤 이록이 했던 말을 응용하고 있는데, 민영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거울 속 그녀를 쳐다봤다.
“아, 그런 게 있어. 너같이 솜털 보송보송한 애기들은 모르는 그런 세상이 있단다. 고단함으로 얼룩진 어른들만의 세상이란 게 있어.”
“뭔 소린지. 그래, 이제 어쩔 거야?”
“뭘?”
“널 찬 놈이 새로 사귄 여자애랑 헤어졌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어때야 되는데?”
“뭔가 가슴이 막, 막 통쾌하고 시원한 그 어떤…….”
“응. 통쾌하고 시원해. 그래. 네 말이 맞아. 축하 정돈 해 줘야겠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은반은 짐짓 비장하게 대답한 후 다시금 앞머리 정리에 열을 올렸다. 기우는 인숙의 친구 아들이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다. 엄마들끼리 친하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도 오가며 인사를 나누다가 기우가 먼저 사귀자고 접근했다.
학교생활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덥석 수락했지만 사귀는 내내 은반은 기우에게 무신경했다. 어찌 보면 차인 건 당연한 일인 거다. 그렇지만…….
“나를 차고 만 24시간도 안 되어서 딴 여자애를 사귀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은 내려야지.”
이건 용서가 안 되는 일이다. 은반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그러자 민영이 이번엔 팔짱을 척 끼며 뭔가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왔다.
“좋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그럼 이제 두 번째 용건. 너 새로 과외 하는 그 세운대 의대생 비주얼이 그렇게 미쳤다며? 응? 절정의 훈남이라며? 배신자. 왜 나한테 말 안 했니?”
은반은 뜨끔하여 잠시 멈칫했다. 이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가 친구분들 모임에서 다 말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그게 민영의 귀에까지 들어갈 리는 만무한데 말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민영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답이 나오지 않자, 은반은 괜스레 앞머리를 스윽 매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깻잎 퀄리티 봐라. 쩐다 쩔어. 난 아무래도 예술 쪽으로 나가야 되나 봐.”
“야! 빨랑 대답 안 해? 응?”
“켁켁. 왜 이래. 넌 그 얘길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민영이 은반의 목을 조르는 것으로 배신자를 응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해서 부연 설명도 곁들였다.
“아까 점심시간 때 너 책상에 엎드려서 졸다가 잠꼬대한 걸 누가 들었대. ‘울 쌤. 아웅. 잘생긴 울 쌤.’ 그랬다던데? 우리 학교엔 잘생긴 쌤이 없으니 그 쌤이란, 네 과외 쌤 말하는 거 아니겠어?”
은반은 뜨악해져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민영을 쳐다봤다. 그랬을 리가……. 공부는 비록 젬병이지만, 나름대로 아이들 사이에선 진중함과 진지함으로 무장된 이미진데 잠꼬대를 했을 리가. 더구나 뭐? 그 쌤을 두고? 은반은 민영의 말을 반신반의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하여간 남자라면 그저. 좋아. 얘기해 줄게. 켁켁. 세운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이고 미친 비주얼의 소유자야. 맞어. 피지컬도 끝내주지.”
자랑스럽게 술술 부니 민영이 그제야 은반의 목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뭔가 거창한 계획이 들어선 것 같은 얼굴로 은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은 건 나눠 갖는 거야, 친구야. 알지? 오늘 학교 끝나고 세운대 의대에 가 보자. 나 요즘 안구 영양실조야. 웰빙이 절실히 필요해.”
“거길 간다고 해서 그 쌤을 볼 수 있을까, 친구?”
“언제는 우리 사전에 고민과 갈등이란 게 있었나, 친구? 그냥 부딪혀 보는 거지.”
민영과의 대화는 언제나 이렇듯 즉흥적인 결정으로 끝이 나곤 했다. 가히 심각한 수준의 충동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민영의 손에 이끌려 화장실을 나서면서 은반은 혹여라도 그와 부딪히게 될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른 척하고 달아난다. 시치미 떼고 다가가 발랄한 음성으로 우유 한 잔 사 달라고 조른다 등등. 방법은 많고 대비책도 널렸다.
그러나 왠지 모를 찝찝함이 뒤따라와 은반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보물을, 억지로 공개해야 하는 것 같은 그런 찝찝함 말이다. 민영의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를 보기라도 한다면 한 시간도 안 되어 사랑에 빠질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영이 은반보다 아주 조금, 1g 정도 더 예쁘다는 사실도, 은반의 깡마른 몸매에 비해 민영은 볼륨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그렇게 생각하자 그때부터 창자가 꼬일 정도로 심사가 뒤틀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