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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현은 거울에 비친 긴장 어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겼다.
어깨가 다 들썩일 정도로 깊게 한숨을 내쉬어도 무언가를 먹고 체한 것처럼 꽉 막힌 명치는 도통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8년 만에 보는 면접이었다. 긴장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오롯이 취업을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불타오르던 어린 날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다듬고 화장실에서 나온 아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인사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방인의 출현도 인지하지 못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동선을 정신없이 살피는데 누군가가 알은체를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한…….”
“아! 정아현 씨 맞으시죠? 오늘 최종 면접 보러 오신!”
“아, 네. 맞아요.”
자신을 단박에 알아봐 주는 남자에 아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아현은 회의실로 움직였다.
“이력서 보니까 여기서 집이 꽤 멀던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한 시간 20분 정도 걸렸어요.”
“와, 진짜 멀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남자의 너스레에 아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저희 팀장님 오실 거예요.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남자가 나가고 공허한 회의실을 건조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회의실이었다.
그러다 문득, 중앙에 앉아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젝트의 사안들을 살피며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던 재열이 떠올랐다.
그 무엇 하나 대충이라는 법이 없던 상사였다. 회의실 인테리어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상사.
잘…… 지내고 계실까?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는 꼭 한 번씩 독한 감기에 걸리곤 하셨는데…….
그리움과 걱정이 잔뜩 물든 염려조차도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에 아현의 얼굴이 급속도로 씁쓸해져 갔다.
“반갑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꾸만 깊어지려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떨어트리려 무던히도 애쓰던 아현은 회의실로 다급하게 들어오는 팀장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취했다.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아현의 맞은편에 앉은 팀장은 턱 끝까지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한번 상념에 잠기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터라, 아현은 자신이 무려 30분이나 기다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정아현 씨는 전에 있던 회사에서 꽤 높은 신뢰를 받고 있더군요.”
이력서에 적은 경력이라고는 ‘쇼윈’밖에 없기에 아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기색을 읽은 팀장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 아무래도 신뢰도가 중요시되는 직업이다 보니 이전 회사 근무 태도를 참고하게 되더라고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팀장의 호탕한 말에 아현은 대답 대신 쓴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생각하실까.
가정에 충실하고 싶다며 단호하게 회사를 나온 직원이 다른 회사에 합격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으니…….
재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걱정스러워 하던 아현은 속으로 가만히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더 이상 자신의 상사가 아님에도 여전히 재열에게 연연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기까지 했다.
“저희 회사는 전에 일하셨던 엔터테인먼트 앤 미디어 사업인 ‘쇼윈’하고는 전문 분야가 아예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을 다루는…….”
아현은 자꾸만 퍼져 나가는 재열의 모습을 뒤로하고 회사 경영 철학부터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이어지는 자부심 충만한 팀장의 설명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경은 분산되고 머릿속에는 대표실에 앉아 있는 재열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아현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러세요?”
앞에 앉아 있던 팀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뭐 궁금한 사항 있으세요?”
“궁금한 건, 일하면서 물어보고 싶어요.”
아현의 상냥하지만 꽤 당돌한 대답에 팀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날 최종 합격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면접을 볼 사람이 한 명 더 있지만, 자신은 인상 좋은 아현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덧붙인 팀장이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제발 합격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던 쇼윈 때와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다른 분야를 다루는 회사인 데다 ‘경력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그 정도의 일을 해내지 못할까 겁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로비로 내려가는 번호판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아현이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곳엔 한때 너무나 익숙했던, 하지만 지금은 반가운 얼굴이 되어 버린,
“조금만 늦었어도 못 만날 뻔했네요, 우리.”
그녀의 첫 직장 쇼윈의 대표 김재열이 서 있었다.
* * *
“오랜만입니다.”
고조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맴돌고 있던 침묵을 뚫고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다사로운 한줄기 빛에 반사된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3년 만에 본 그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다부져 슈트가 너무 잘 어울리는 몸매, 갈망에 차 있는 듯 촉촉한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까지.
여전히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투 샷을 넣는 것도, 커피를 마실 때 느슨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버릇도, 웬만한 테이블 밑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기다란 하체 때문에 비스듬히 앉아 오른쪽 다리를 꼬는 것도.
깊게 밴 추억 속의 그를 떠올린 아현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커피로 입술을 적셨다.
“나름 괜찮은 상사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주어 없는 그의 말에 아현의 커다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저를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아현이 쇼윈에서 일한 기간은 5년 정도였다. 처음엔 인사팀으로 입사했지만, 비서의 갑작스런 퇴사로 인해 공석이 되어 버린 자리를 채우고자 임시로 투입이 되었다.
하나의 지시를 내리면 서너 개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 오는 아현의 능력을 높게 산 재열이, 직속 비서로 정식 인사 발령을 내려 함께 호흡을 맞춘 게 4년이었다.
결코 다정다감한 상사는 아니었지만 괜한 트집을 잡거나 추태를 부리던 상사도 아니었다.
그 흔한 점심 한 번 같이해 본 기억이 없지만 상사인 재열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꽤 두터웠다. 되도록 그의 단 한 명의 비서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3년이라는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으로 귀국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쇼윈 본사 앞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날락했던 문인데 이제는 저 너머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점심시간에 맞춰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재열을 본의 아니게 몰래 훔쳐보며 깊은 한숨을 되새기기도 했다.
한참을 두 눈에 옹골차게 들여놨던 쇼윈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선 구인 사이트에 공채조차 뜨지 않은 쇼윈의 이름을 몇 번이나 쳐 봤다.
쇼윈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아현의 손끝에서만, 마음 귀퉁이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그리움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걸 인정한 순간 다른 회사 공채를 보았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면접까지 봤는데 이렇게 재열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 욕심이 생긴다.
쇼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그의 단 하나뿐인 비서로서 일하고 싶다는 과분한 욕심이.
유난히도 짙고 깊은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듯 그녀를 두 눈에 꽉 담고 놓아주지 않았다.
문득, 변하지 않은 건 그의 외형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언제나 갈증에 이른 듯 자신을 옭매던 눈빛. 그 눈빛 또한 변하지 않았다. 아현은 자신을 향해 있는 재열의 눈동자를 살며시 피했다.
그녀가 조금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재열이 시선에서 아현을 풀어 주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을 느낀 아현이 뒤늦은 안부를 물었다.
“아니요. 잘 못 지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무감한 대답에 아현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애정이 많이 담겨 있던 직장이다 보니 퇴사 후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래서 관련 기사는 꼭 읽어 보고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면 하던 일을 만사 제쳐 두고 TV 앞에 앉았었다.
나쁜 소식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업가의 자질을 천성으로 타고난 재열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기에 아현이 그만두고도 회사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톱스타의 영입에, 투자하는 드라마, 영화는 전부 흥행 행진을 보였고 발굴한 아이돌 역시 해외에서 다진 입지와 벌어들이는 수입이 어마 무시했다.
그러니까 즉, 잘 지내지 못했다는 재열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공적인 일은 없다는 게 아현의 생각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아현의 근심 어린 물음에 무심하게 손끝으로 커피 잔을 매만지고 있던 재열이 입술 끝에 작은 미소를 걸쳤다.
그게 좋아서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비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잘 지내진 못했습니다.”
입술 끝에 잠시 머물러 있던 미소만큼이나 묘한 대답이었다.
그 미소에 선뜻 말을 건넬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아현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걱정돼요? 표정이 딱 그런 거 같은데.”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죠. 오래도록 함께 일했고, 저에게 참 좋은 상사셨어요.”
“좋은 상사였다…….”
허탈함이 역력한 그의 말이 연기처럼 공기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재열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언가를 망설였다.
그러다 굳은 마음을 먹고 습관처럼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정 비서님에게 나에 대한 기억은 그게 끝인 거죠?”
뭐가 더 필요하냐는 듯 반항이 아닌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아현을 마주하며 재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좋았던 사람이라서.”
여전히 알 수 없는 재열의 말을 들으며 아현은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코끝에 고소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정 비서님.”
목소리는 바로 어제 들은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 잔에 두었던 시선을 재열에게로 돌렸다.
“네.”
대답하고 싶다. ‘쇼윈’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그 자리에서 서서 ‘네, 대표님’이라고.
“정 비서님의 기억 속에 좋은 상사는 나 하나였으면 싶은데. 과분한 욕심입니까?”
“네?”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비서도 정 비서님뿐인 것 같은데. 다들 일 많이 시킨다며 싫어하더라고요.”
“일이야…….”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받는 대우에 비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이었기에 딱히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일들도 너무 못하고.”
“…….”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겁니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정 비서님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카페에 퍼져 가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위로 실린 재열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아현은 코끝이 괜스레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누군가는 그래도 자신을 원하고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못내 안심이 됐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까지 차갑게 굳어 있던 아현의 마음을 살며시 녹여 주었다.
뜨거워진 아현의 눈시울만큼 붉은 재열의 입술이 다시 떼어졌다.
“쇼윈으로 돌아오시죠. 제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아현은 거울에 비친 긴장 어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겼다.
어깨가 다 들썩일 정도로 깊게 한숨을 내쉬어도 무언가를 먹고 체한 것처럼 꽉 막힌 명치는 도통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8년 만에 보는 면접이었다. 긴장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오롯이 취업을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불타오르던 어린 날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다듬고 화장실에서 나온 아현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인사팀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이방인의 출현도 인지하지 못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동선을 정신없이 살피는데 누군가가 알은체를 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한…….”
“아! 정아현 씨 맞으시죠? 오늘 최종 면접 보러 오신!”
“아, 네. 맞아요.”
자신을 단박에 알아봐 주는 남자에 아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남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아현은 회의실로 움직였다.
“이력서 보니까 여기서 집이 꽤 멀던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한 시간 20분 정도 걸렸어요.”
“와, 진짜 멀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남자의 너스레에 아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저희 팀장님 오실 거예요.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남자가 나가고 공허한 회의실을 건조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회의실이었다.
그러다 문득, 중앙에 앉아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젝트의 사안들을 살피며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던 재열이 떠올랐다.
그 무엇 하나 대충이라는 법이 없던 상사였다. 회의실 인테리어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상사.
잘…… 지내고 계실까?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는 꼭 한 번씩 독한 감기에 걸리곤 하셨는데…….
그리움과 걱정이 잔뜩 물든 염려조차도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에 아현의 얼굴이 급속도로 씁쓸해져 갔다.
“반갑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꾸만 깊어지려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떨어트리려 무던히도 애쓰던 아현은 회의실로 다급하게 들어오는 팀장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취했다.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워낙 일이 많다 보니.”
아현의 맞은편에 앉은 팀장은 턱 끝까지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한번 상념에 잠기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터라, 아현은 자신이 무려 30분이나 기다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디 보자……. 정아현 씨는 전에 있던 회사에서 꽤 높은 신뢰를 받고 있더군요.”
이력서에 적은 경력이라고는 ‘쇼윈’밖에 없기에 아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기색을 읽은 팀장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 아무래도 신뢰도가 중요시되는 직업이다 보니 이전 회사 근무 태도를 참고하게 되더라고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팀장의 호탕한 말에 아현은 대답 대신 쓴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생각하실까.
가정에 충실하고 싶다며 단호하게 회사를 나온 직원이 다른 회사에 합격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으니…….
재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아 걱정스러워 하던 아현은 속으로 가만히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사람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더 이상 자신의 상사가 아님에도 여전히 재열에게 연연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기까지 했다.
“저희 회사는 전에 일하셨던 엔터테인먼트 앤 미디어 사업인 ‘쇼윈’하고는 전문 분야가 아예 다른, 소프트웨어 개발을 다루는…….”
아현은 자꾸만 퍼져 나가는 재열의 모습을 뒤로하고 회사 경영 철학부터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이어지는 자부심 충만한 팀장의 설명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경은 분산되고 머릿속에는 대표실에 앉아 있는 재열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아현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러세요?”
앞에 앉아 있던 팀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뭐 궁금한 사항 있으세요?”
“궁금한 건, 일하면서 물어보고 싶어요.”
아현의 상냥하지만 꽤 당돌한 대답에 팀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날 최종 합격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면접을 볼 사람이 한 명 더 있지만, 자신은 인상 좋은 아현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덧붙인 팀장이 그녀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제발 합격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던 쇼윈 때와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다른 분야를 다루는 회사인 데다 ‘경력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그 정도의 일을 해내지 못할까 겁이 나는 건지도 모른다.
로비로 내려가는 번호판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아현이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곳엔 한때 너무나 익숙했던, 하지만 지금은 반가운 얼굴이 되어 버린,
“조금만 늦었어도 못 만날 뻔했네요, 우리.”
그녀의 첫 직장 쇼윈의 대표 김재열이 서 있었다.
* * *
“오랜만입니다.”
고조 없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맴돌고 있던 침묵을 뚫고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다사로운 한줄기 빛에 반사된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3년 만에 본 그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다부져 슈트가 너무 잘 어울리는 몸매, 갈망에 차 있는 듯 촉촉한 까만 눈동자, 오뚝한 콧날까지.
여전히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고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투 샷을 넣는 것도, 커피를 마실 때 느슨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버릇도, 웬만한 테이블 밑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기다란 하체 때문에 비스듬히 앉아 오른쪽 다리를 꼬는 것도.
깊게 밴 추억 속의 그를 떠올린 아현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커피로 입술을 적셨다.
“나름 괜찮은 상사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주어 없는 그의 말에 아현의 커다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일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저를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아현이 쇼윈에서 일한 기간은 5년 정도였다. 처음엔 인사팀으로 입사했지만, 비서의 갑작스런 퇴사로 인해 공석이 되어 버린 자리를 채우고자 임시로 투입이 되었다.
하나의 지시를 내리면 서너 개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 오는 아현의 능력을 높게 산 재열이, 직속 비서로 정식 인사 발령을 내려 함께 호흡을 맞춘 게 4년이었다.
결코 다정다감한 상사는 아니었지만 괜한 트집을 잡거나 추태를 부리던 상사도 아니었다.
그 흔한 점심 한 번 같이해 본 기억이 없지만 상사인 재열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꽤 두터웠다. 되도록 그의 단 한 명의 비서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3년이라는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으로 귀국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쇼윈 본사 앞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날락했던 문인데 이제는 저 너머로 단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점심시간에 맞춰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재열을 본의 아니게 몰래 훔쳐보며 깊은 한숨을 되새기기도 했다.
한참을 두 눈에 옹골차게 들여놨던 쇼윈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선 구인 사이트에 공채조차 뜨지 않은 쇼윈의 이름을 몇 번이나 쳐 봤다.
쇼윈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아현의 손끝에서만, 마음 귀퉁이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그리움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걸 인정한 순간 다른 회사 공채를 보았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면접까지 봤는데 이렇게 재열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 욕심이 생긴다.
쇼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그의 단 하나뿐인 비서로서 일하고 싶다는 과분한 욕심이.
유난히도 짙고 깊은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듯 그녀를 두 눈에 꽉 담고 놓아주지 않았다.
문득, 변하지 않은 건 그의 외형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언제나 갈증에 이른 듯 자신을 옭매던 눈빛. 그 눈빛 또한 변하지 않았다. 아현은 자신을 향해 있는 재열의 눈동자를 살며시 피했다.
그녀가 조금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재열이 시선에서 아현을 풀어 주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을 느낀 아현이 뒤늦은 안부를 물었다.
“아니요. 잘 못 지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무감한 대답에 아현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애정이 많이 담겨 있던 직장이다 보니 퇴사 후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래서 관련 기사는 꼭 읽어 보고 뉴스에 나오기라도 하면 하던 일을 만사 제쳐 두고 TV 앞에 앉았었다.
나쁜 소식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업가의 자질을 천성으로 타고난 재열의 판단은 언제나 옳았기에 아현이 그만두고도 회사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톱스타의 영입에, 투자하는 드라마, 영화는 전부 흥행 행진을 보였고 발굴한 아이돌 역시 해외에서 다진 입지와 벌어들이는 수입이 어마 무시했다.
그러니까 즉, 잘 지내지 못했다는 재열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공적인 일은 없다는 게 아현의 생각이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아현의 근심 어린 물음에 무심하게 손끝으로 커피 잔을 매만지고 있던 재열이 입술 끝에 작은 미소를 걸쳤다.
그게 좋아서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비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그런 건 없었는데, 잘 지내진 못했습니다.”
입술 끝에 잠시 머물러 있던 미소만큼이나 묘한 대답이었다.
그 미소에 선뜻 말을 건넬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 아현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걱정돼요? 표정이 딱 그런 거 같은데.”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죠. 오래도록 함께 일했고, 저에게 참 좋은 상사셨어요.”
“좋은 상사였다…….”
허탈함이 역력한 그의 말이 연기처럼 공기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재열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언가를 망설였다.
그러다 굳은 마음을 먹고 습관처럼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정 비서님에게 나에 대한 기억은 그게 끝인 거죠?”
뭐가 더 필요하냐는 듯 반항이 아닌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아현을 마주하며 재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좋았던 사람이라서.”
여전히 알 수 없는 재열의 말을 들으며 아현은 앞에 있는 잔을 들었다. 코끝에 고소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정 비서님.”
목소리는 바로 어제 들은 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 잔에 두었던 시선을 재열에게로 돌렸다.
“네.”
대답하고 싶다. ‘쇼윈’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그 자리에서 서서 ‘네, 대표님’이라고.
“정 비서님의 기억 속에 좋은 상사는 나 하나였으면 싶은데. 과분한 욕심입니까?”
“네?”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비서도 정 비서님뿐인 것 같은데. 다들 일 많이 시킨다며 싫어하더라고요.”
“일이야…….”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받는 대우에 비하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이었기에 딱히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일들도 너무 못하고.”
“…….”
“그래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겁니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정 비서님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카페에 퍼져 가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위로 실린 재열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아현은 코끝이 괜스레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누군가는 그래도 자신을 원하고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못내 안심이 됐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까지 차갑게 굳어 있던 아현의 마음을 살며시 녹여 주었다.
뜨거워진 아현의 눈시울만큼 붉은 재열의 입술이 다시 떼어졌다.
“쇼윈으로 돌아오시죠. 제겐 당신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