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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눈을 뜨자마자 가야 할 곳이 생긴 아현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예전에 출근하던 습관대로 누구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한 아현은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비치는 유리문을 보며 더할 것 없이 단정한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아현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쇼윈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기회를 다시 쥐여 준 그날의 그 목소리가 여전히 이명처럼 아현의 귓가를 맴돌았다.
“제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알겠다고 대답만 했을 뿐 재열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주말 내내 아현의 마음을 불편하게 억눌렀다.
고마움을 담아 점심을 좀 거하게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발걸음으로 막 건물 문을 밀고 들어설 때였다.
“아현아!”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에 아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곳엔 쇼윈에서 근무하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언론&마케팅 1팀 팀장 연주가 서 있었다.
허겁지겁 뛰어오던 연주는 거의 넘어지다시피 아현을 끌어안았다.
“여전하시네요.”
하루가 멀다 하고 덤벙대느라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이 특기인 연주를 부축하는 아현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여전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어쩜 늙지도 않고 이렇게 똑같아! 계집애, 너 나만 늙으라고 남몰래 저주 퍼부었지! 정말 이게 얼마 만이야! 다른 회사 면접 보러 갔었다며? 그거 배신인 거 알아, 몰라! 나 안 보고 싶었어?”
아현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질문을 쏘아 대는 연주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이러다 숨넘어가시겠어요.”
“숨 안 넘어가게 생겼어? 3년 전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어쩜 국제전화 아까워서 전화 한 통 하기 싫디?”
힘겨운 결혼 생활 속에서 그래도 참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는 동안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까 봐 아현은 쉽게 전화기조차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빨리 인정하지 마. 넌 그게 안 돼.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일단 다 대 보란 말이야. 먹혀들어 갈지 누가 알아.”
서운함이 만연한 연주를 아현은 적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연주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듣고 속상한 마음에 괜한 투정을 부리고 있음을 소리 내어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아프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지푸라기가 뜯어질 때까지 아니, 손쓸 새도 없이 거센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끝까지 버티고 싶었다.
자신이 그러쥐고 있었던 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손을 쉽게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손에 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는 것을 그때는 차마 알지 못했다.
손을 펴 볼 용기도, 버릴 용기는 더 없던 시리고 아린 기억들이 아현의 머릿속을 또다시 찔러 왔다.
“아침 안 먹었지? 예전에도 매번 일찍 출근한다고 아침 못 먹었잖아.”
주위에 내려앉은 무거운 기운을 애써 떨어트리며 한 톤 밝게 묻는 연주의 노력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현도 자기가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말간 얼굴로 연주를 마주했다.
“아직도 기억해 주시네요. 저희 자주 아침 먹던 그곳 아직도 있어요?”
주변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맛있는 회사 직원 식당은 불행하게도 조식을 제공하고 있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거긴 없어졌는데, 재열이가…… 아니, 아니지. 대표님께서 추천해 준 곳이 있어!”
연주가 고개를 있는 힘껏 내저으며 말을 정정했다.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일하는데도 이 습관 고치기가 참 어렵다, 어려워.”
연주와 재열, 그리고 회사의 모든 업무를 함께 총괄하고 있는 본부장 은석은 고등학생 때부터 죽마고우였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두 사람은 자신의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 재열이 자리를 잡는 데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적성에 안 맞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연주는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입사를 했고, 은석은 멀쩡히 잘 다니고 있던 IT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재열의 피와 살이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와 함께 회사로 들어왔다.
20년 동안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겠다고 결의하던 우정이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세 사람은 소소한 술자리에서 흐뭇해하곤 했다.
“대표님 아직 출근 안 하신 거 같으니까, 후딱 먹고 오자.”
연주는 비록 오래된 친구지만 낙하산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회사나 그 근처에서는 언제나 호칭에 신경을 썼다.
“가격은 굉장히 저렴한데 나오는 반찬들 퀼리티가 굉장히 높아. 중독성이 강해서 그런지 계속 생각나고.”
가게로 가는 동안 쉴 틈 없이 재잘거리는 연주를 아현이 마음 편하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게 낫다.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많이 힘들지 않았느냐, 그때의 상처를 다시 꺼내 들어 헤쳐 놓는 이들보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마냥 구는 연주의 배려가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유명세를 터트리던 배우 인호의 이혼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인 보호로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몇몇 포털 사이트를 뒤지면 아현의 얼굴이 버젓이 나왔다.
아현은 연주와 함께 가게로 가는 동안 종종 쏟아지는 눈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댔다.
“남의 일에 오지랖 떨 시간 있으면 지들 일이나 잘할 것이지. 남 일에 신경 쓰느라 시간 낭비하면서 매일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들 진짜 비호감이야.”
연주가 아현을 안쪽으로 세우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다 들리겠어요.”
“제발 좀 들었으면 좋겠네!”
그제야 힐끔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현에게서 거두어졌다.
“팀장님…….”
“잘못한 거 없는데 기죽을 필요 없어. 그리고 저런 것들을 뭐하러 신경 써?”
아현의 이혼에 대해서 일절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연주는 속상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이제 행복한 일들만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아현아.”
“감사드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거…….”
“근데 너 머리 자르니까 훨씬 세련되고 예쁘다.”
연주는 애써 화젯거리를 돌렸다.
허리춤까지 내려와 질끈 묶고 다녔던 머리를 어깨 부근까지 잘랐다. 그걸 알아본 연주가 아현의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팀장님도 변한 게 하나 있으신 거 같은데.”
“어떤 거?”
“살, 많이 빠지셨죠?”
아현이 연주의 어깨 부근을 주무르며 말했다.
“어머, 티 나? 나 요즘 운동하잖아!”
연주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으며 숨넘어가게 좋아했다. 아현은 이런 연주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귀여워했다.
“운동이요?”
“야근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업무가 많다 보니 운동할 시간도 없다고 불만 갖는 직원들을 위해 우리 김 대표님께서 지하에 헬스장을 만들어 주셨잖아. 자기도 운동할 생각 있으면 괜히 돈 들여서 헬스장 등록하지 말고 거기서 해. 규모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 샤워실에 찜질방, 거기다 캐비닛…… 어? 본부장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백반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연주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는 은석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갔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정 비서님!”
하지만 은석은 반가움에 달려드는 연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은석의 무심한 행동에 연주의 입술이 일시적으로 다발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본부장님. 잘 지내셨죠?”
“다시 들어오신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있었다. 맞잡은 따뜻한 손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은석과는 업무적으로 부딪힐 일이 많이 없었지만 아현은 언제나 오고 가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던 은석이 고마웠다.
가끔 일이 힘들어 옥상에서 숨죽여 울 때면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재열의 욕을 실컷 해 주던 상사였다.
물론, 진짜 재열을 싫어해서 하는 욕이 아니라 ‘재열도 알고 보면 인간적이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선의의 욕이었다.
은석과 대화를 하고 내려오면 그렇게도 무서웠던 상사 재열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진짜 감사한 건 저죠. 다시 돌아와 주셔서 진짜 감사드립니다, 정 비서님.”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는 은석의 모습에 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연주를 바라보았다.
“너 없는 동안…… 아이고, 말도 마. 성격답지 않게 별거 아닌 걸로 트집 잡고……. 아휴! 내가 그때 비서들 달래느라 들인 술값만 해도 거짓말 조금 보태면 강남에 빌딩 산다.”
연주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성가신 얼굴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은석이 바통 터치 하듯 말을 이었다.
“저 녀석 정 비서님 그만두시고 3년 동안 퇴사시킨 비서가 무려 열 명이 넘어요. 인사팀 직원들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다니까요. 제가 여기저기 눈치 보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은석의 시선 끝에 재열이 서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을 살포시 떼어 내 담배를 무는 그를 아현이 적적하게 바라보았다. 깊게 밴 담배 연기가 허허롭게 공중에서 흩어졌다.
무감한 얼굴로 뿌연 연기를 보던 재열의 짙은 눈동자가 느긋하게 감겼다가 떠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의 눈동자가 잠시 주위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가게 안에 있는 아현과 마주쳤다.
아현을 자신의 두 눈으로 꽉 잡아매며 재열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그 미소에 어쩐지 아현은 위로를 받았다.
담배를 지져 끄고 문 쪽으로 향하는 재열의 동선을 말없이 눈길로 좇았다.
“근데 오늘 백반 메뉴 뭐예요?”
옆에서 열심히 수저를 세팅하고 있던 연주가 매우 들뜬 목소리로 은석에게 물었다.
“몰라. 궁금하면 한 팀장이 직접 물어봐.”
아현의 기억 속 은석은 연주에게 항상 다정한 남자였다. 그랬기에 지금 들려오는 시큰둥한 목소리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본부장님.”
연주의 부름에 은석이 ‘왜’라고 써져 있는 것 같은 반항적인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으세요?”
“화? 화났냐고 물었어, 지금?”
“네.”
“내가 한 팀장한테 화낼 게 뭐가 있어. 추진력 있게 일 잘하고 회사를 위한 거라면 발 벗고 나서서 항상 희생하는데. 한 팀장한테는 화 안 났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달이 났어도 단단히 났던 모양이다. 별명이 ‘부처’일 정도로 인내심이 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특히 아현의 앞에서는 매너 있고 사람 좋은 모습만 보여 주던 은석이 이렇게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말씀이 묘하시네요. 그럼 한 팀장한테는 화 안 나고 다른 사람한테는 화가 난 모양이시죠?”
“글쎄.”
“혹시 해서 묻는 건데, 그 다른 사람이 한연주인가요?”
부정하지 않은 은석이 컵의 물을 단번에 비웠다. 아현은 살짝 긴장하면서도 은근히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연주가 주변을 산란하게 둘러보았다. 회사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은석.”
“이제 막 나갈 생각인가 봐, 한 팀장.”
“네 친구인 한연주로서 말하는 거니까 존대 받을 생각하지 말고 들어.”
그제야 은석도 위협적이던 눈빛을 거두었다.
“너 진짜 요즘 왜 그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연주가 은석에게 따지고 물을 때, 재열이 아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순간 일어난 미세한 바람에 독한 담배 연기가 아현의 코끝을 괴롭혔다. 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스쳐 지나가는 재열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아휴, 담배 냄새! 밥 먹는데 입맛 떨어지게!”
“넌 좀 떨어져도 되지 않을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심각하게 던진 재열의 농담에 연주가 흥분하며 방방거렸다.
“무슨 소리야? 아현이가 나 보자마자 살 많이 빠졌다고 그랬거든!”
“많이 빠지긴 했지.”
하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다는 듯한 재열의 반응에 연주가 콧방귀를 끼며 오늘따라 유난히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은석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20년 지기 친구라는 것들이 한 명은 맨날 돼지라고 놀리고 한 명은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하는 게 전부라니. 내가 인생을 헛살아도 한참을 헛살았어.”
연주가 ‘나 좀 위로해 줄래, 아현아?’ 하며 말을 덧붙이기가 무섭게 재열과 은석이 주문한 백반이 먼저 나왔다.
“이모, 저희 여기 백반 두 개 더 추가해 주세요.”
“그중 순두부 하나에는 조개 빼 주세요.”
재열이 돌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자신의 순두부에서 조개껍질을 걸러 내며 말했다. 연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현을 바라봤다.
눈을 뜨자마자 가야 할 곳이 생긴 아현의 발걸음은 제법 가벼웠다.
예전에 출근하던 습관대로 누구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한 아현은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비치는 유리문을 보며 더할 것 없이 단정한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아현의 입가에 번진 미소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쇼윈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기회를 다시 쥐여 준 그날의 그 목소리가 여전히 이명처럼 아현의 귓가를 맴돌았다.
“제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알겠다고 대답만 했을 뿐 재열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이 주말 내내 아현의 마음을 불편하게 억눌렀다.
고마움을 담아 점심을 좀 거하게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발걸음으로 막 건물 문을 밀고 들어설 때였다.
“아현아!”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에 아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곳엔 쇼윈에서 근무하는 동안 친하게 지냈던 언론&마케팅 1팀 팀장 연주가 서 있었다.
허겁지겁 뛰어오던 연주는 거의 넘어지다시피 아현을 끌어안았다.
“여전하시네요.”
하루가 멀다 하고 덤벙대느라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이 특기인 연주를 부축하는 아현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여전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어쩜 늙지도 않고 이렇게 똑같아! 계집애, 너 나만 늙으라고 남몰래 저주 퍼부었지! 정말 이게 얼마 만이야! 다른 회사 면접 보러 갔었다며? 그거 배신인 거 알아, 몰라! 나 안 보고 싶었어?”
아현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질문을 쏘아 대는 연주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였다.
“이러다 숨넘어가시겠어요.”
“숨 안 넘어가게 생겼어? 3년 전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어쩜 국제전화 아까워서 전화 한 통 하기 싫디?”
힘겨운 결혼 생활 속에서 그래도 참아야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는 동안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와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까 봐 아현은 쉽게 전화기조차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그렇게 빨리 인정하지 마. 넌 그게 안 돼.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일단 다 대 보란 말이야. 먹혀들어 갈지 누가 알아.”
서운함이 만연한 연주를 아현은 적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연주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듣고 속상한 마음에 괜한 투정을 부리고 있음을 소리 내어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아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아프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지푸라기가 뜯어질 때까지 아니, 손쓸 새도 없이 거센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끝까지 버티고 싶었다.
자신이 그러쥐고 있었던 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손을 쉽게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손에 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는 것을 그때는 차마 알지 못했다.
손을 펴 볼 용기도, 버릴 용기는 더 없던 시리고 아린 기억들이 아현의 머릿속을 또다시 찔러 왔다.
“아침 안 먹었지? 예전에도 매번 일찍 출근한다고 아침 못 먹었잖아.”
주위에 내려앉은 무거운 기운을 애써 떨어트리며 한 톤 밝게 묻는 연주의 노력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현도 자기가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말간 얼굴로 연주를 마주했다.
“아직도 기억해 주시네요. 저희 자주 아침 먹던 그곳 아직도 있어요?”
주변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맛있는 회사 직원 식당은 불행하게도 조식을 제공하고 있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거긴 없어졌는데, 재열이가…… 아니, 아니지. 대표님께서 추천해 준 곳이 있어!”
연주가 고개를 있는 힘껏 내저으며 말을 정정했다.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일하는데도 이 습관 고치기가 참 어렵다, 어려워.”
연주와 재열, 그리고 회사의 모든 업무를 함께 총괄하고 있는 본부장 은석은 고등학생 때부터 죽마고우였다.
사업을 시작할 당시, 두 사람은 자신의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 재열이 자리를 잡는 데에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적성에 안 맞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연주는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입사를 했고, 은석은 멀쩡히 잘 다니고 있던 IT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재열의 피와 살이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와 함께 회사로 들어왔다.
20년 동안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살겠다고 결의하던 우정이 빛나는 순간이었다고, 세 사람은 소소한 술자리에서 흐뭇해하곤 했다.
“대표님 아직 출근 안 하신 거 같으니까, 후딱 먹고 오자.”
연주는 비록 오래된 친구지만 낙하산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회사나 그 근처에서는 언제나 호칭에 신경을 썼다.
“가격은 굉장히 저렴한데 나오는 반찬들 퀼리티가 굉장히 높아. 중독성이 강해서 그런지 계속 생각나고.”
가게로 가는 동안 쉴 틈 없이 재잘거리는 연주를 아현이 마음 편하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게 낫다.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많이 힘들지 않았느냐, 그때의 상처를 다시 꺼내 들어 헤쳐 놓는 이들보다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마냥 구는 연주의 배려가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유명세를 터트리던 배우 인호의 이혼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반인 보호로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몇몇 포털 사이트를 뒤지면 아현의 얼굴이 버젓이 나왔다.
아현은 연주와 함께 가게로 가는 동안 종종 쏟아지는 눈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댔다.
“남의 일에 오지랖 떨 시간 있으면 지들 일이나 잘할 것이지. 남 일에 신경 쓰느라 시간 낭비하면서 매일 힘들다고 징징대는 것들 진짜 비호감이야.”
연주가 아현을 안쪽으로 세우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다 들리겠어요.”
“제발 좀 들었으면 좋겠네!”
그제야 힐끔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현에게서 거두어졌다.
“팀장님…….”
“잘못한 거 없는데 기죽을 필요 없어. 그리고 저런 것들을 뭐하러 신경 써?”
아현의 이혼에 대해서 일절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연주는 속상한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리쉬었다.
“이제 행복한 일들만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아현아.”
“감사드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거…….”
“근데 너 머리 자르니까 훨씬 세련되고 예쁘다.”
연주는 애써 화젯거리를 돌렸다.
허리춤까지 내려와 질끈 묶고 다녔던 머리를 어깨 부근까지 잘랐다. 그걸 알아본 연주가 아현의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팀장님도 변한 게 하나 있으신 거 같은데.”
“어떤 거?”
“살, 많이 빠지셨죠?”
아현이 연주의 어깨 부근을 주무르며 말했다.
“어머, 티 나? 나 요즘 운동하잖아!”
연주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으며 숨넘어가게 좋아했다. 아현은 이런 연주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귀여워했다.
“운동이요?”
“야근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업무가 많다 보니 운동할 시간도 없다고 불만 갖는 직원들을 위해 우리 김 대표님께서 지하에 헬스장을 만들어 주셨잖아. 자기도 운동할 생각 있으면 괜히 돈 들여서 헬스장 등록하지 말고 거기서 해. 규모는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 샤워실에 찜질방, 거기다 캐비닛…… 어? 본부장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백반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연주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는 은석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갔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정 비서님!”
하지만 은석은 반가움에 달려드는 연주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은석의 무심한 행동에 연주의 입술이 일시적으로 다발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본부장님. 잘 지내셨죠?”
“다시 들어오신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있었다. 맞잡은 따뜻한 손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은석과는 업무적으로 부딪힐 일이 많이 없었지만 아현은 언제나 오고 가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던 은석이 고마웠다.
가끔 일이 힘들어 옥상에서 숨죽여 울 때면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재열의 욕을 실컷 해 주던 상사였다.
물론, 진짜 재열을 싫어해서 하는 욕이 아니라 ‘재열도 알고 보면 인간적이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선의의 욕이었다.
은석과 대화를 하고 내려오면 그렇게도 무서웠던 상사 재열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진짜 감사한 건 저죠. 다시 돌아와 주셔서 진짜 감사드립니다, 정 비서님.”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는 은석의 모습에 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연주를 바라보았다.
“너 없는 동안…… 아이고, 말도 마. 성격답지 않게 별거 아닌 걸로 트집 잡고……. 아휴! 내가 그때 비서들 달래느라 들인 술값만 해도 거짓말 조금 보태면 강남에 빌딩 산다.”
연주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성가신 얼굴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은석이 바통 터치 하듯 말을 이었다.
“저 녀석 정 비서님 그만두시고 3년 동안 퇴사시킨 비서가 무려 열 명이 넘어요. 인사팀 직원들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다니까요. 제가 여기저기 눈치 보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은석의 시선 끝에 재열이 서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을 살포시 떼어 내 담배를 무는 그를 아현이 적적하게 바라보았다. 깊게 밴 담배 연기가 허허롭게 공중에서 흩어졌다.
무감한 얼굴로 뿌연 연기를 보던 재열의 짙은 눈동자가 느긋하게 감겼다가 떠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의 눈동자가 잠시 주위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가게 안에 있는 아현과 마주쳤다.
아현을 자신의 두 눈으로 꽉 잡아매며 재열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그 미소에 어쩐지 아현은 위로를 받았다.
담배를 지져 끄고 문 쪽으로 향하는 재열의 동선을 말없이 눈길로 좇았다.
“근데 오늘 백반 메뉴 뭐예요?”
옆에서 열심히 수저를 세팅하고 있던 연주가 매우 들뜬 목소리로 은석에게 물었다.
“몰라. 궁금하면 한 팀장이 직접 물어봐.”
아현의 기억 속 은석은 연주에게 항상 다정한 남자였다. 그랬기에 지금 들려오는 시큰둥한 목소리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본부장님.”
연주의 부름에 은석이 ‘왜’라고 써져 있는 것 같은 반항적인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으세요?”
“화? 화났냐고 물었어, 지금?”
“네.”
“내가 한 팀장한테 화낼 게 뭐가 있어. 추진력 있게 일 잘하고 회사를 위한 거라면 발 벗고 나서서 항상 희생하는데. 한 팀장한테는 화 안 났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사달이 났어도 단단히 났던 모양이다. 별명이 ‘부처’일 정도로 인내심이 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특히 아현의 앞에서는 매너 있고 사람 좋은 모습만 보여 주던 은석이 이렇게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말씀이 묘하시네요. 그럼 한 팀장한테는 화 안 나고 다른 사람한테는 화가 난 모양이시죠?”
“글쎄.”
“혹시 해서 묻는 건데, 그 다른 사람이 한연주인가요?”
부정하지 않은 은석이 컵의 물을 단번에 비웠다. 아현은 살짝 긴장하면서도 은근히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연주가 주변을 산란하게 둘러보았다. 회사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박은석.”
“이제 막 나갈 생각인가 봐, 한 팀장.”
“네 친구인 한연주로서 말하는 거니까 존대 받을 생각하지 말고 들어.”
그제야 은석도 위협적이던 눈빛을 거두었다.
“너 진짜 요즘 왜 그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연주가 은석에게 따지고 물을 때, 재열이 아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순간 일어난 미세한 바람에 독한 담배 연기가 아현의 코끝을 괴롭혔다. 아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스쳐 지나가는 재열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표정을 고쳤다.
“아휴, 담배 냄새! 밥 먹는데 입맛 떨어지게!”
“넌 좀 떨어져도 되지 않을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심각하게 던진 재열의 농담에 연주가 흥분하며 방방거렸다.
“무슨 소리야? 아현이가 나 보자마자 살 많이 빠졌다고 그랬거든!”
“많이 빠지긴 했지.”
하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다는 듯한 재열의 반응에 연주가 콧방귀를 끼며 오늘따라 유난히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은석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20년 지기 친구라는 것들이 한 명은 맨날 돼지라고 놀리고 한 명은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하는 게 전부라니. 내가 인생을 헛살아도 한참을 헛살았어.”
연주가 ‘나 좀 위로해 줄래, 아현아?’ 하며 말을 덧붙이기가 무섭게 재열과 은석이 주문한 백반이 먼저 나왔다.
“이모, 저희 여기 백반 두 개 더 추가해 주세요.”
“그중 순두부 하나에는 조개 빼 주세요.”
재열이 돌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자신의 순두부에서 조개껍질을 걸러 내며 말했다. 연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