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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오늘따라 더욱 주변의 모든 사물이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서울 밤의 야경 또한 눈이 부셨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작은 제약 회사의 아들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눈매와 말투가 사랑받고 컸음을 짐작하게 했다.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는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브리핑을 하듯 제약 설명에 들어갔다.
“양배추에서 추출했기 때문에 기존의 위장약과 달리 부작용이 없어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약보다 효과도 좋아요.”
남자는 소미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호감을 내비쳤다.
“임상 시험 결과는 대만족이고,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반응도 기존 약들에 비해 좋은 편이에요.”
의약 설명회도 아니고 일반인이 듣기에는 따분한 이야기일 것이 뻔했기에, 정훈은 임상 시험을 성공한 제약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다 머쓱한 웃음을 내보였다.
“제가 이렇게 재미가 없어요.”
우진그룹에서 제시한 결혼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이 혈연, 학연, 연줄이었기에 정훈은 소미와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진보다 앳돼 보이네요.”
나이가 어리니 앳돼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정훈은 소미의 나이쯤은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미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훤히 보이는 속내에도 굳이 그 사실을 꼬집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정훈이 예매해 놨다는 뮤지컬까지 보고 나오자 시간은 이미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키가 상당히 크네요.”
“네.”
12cm 하이힐을 신었으니 175cm의 정훈보다 무려 5cm나 컸다. 부담을 주기 위해 일부러 골라 신은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괜히 다리만 고생이었다.
정훈은 극장을 나와 자연스레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 회장님 댁으로 가실 거죠?”
“전 여기서 가 볼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정훈을 쫓다 보면 주차장까지 따라갈 것 같아 소미는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간다고요?”
정훈은 돌아서는 소미의 팔목을 급하게 잡았다.
“데려다줄게요.”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차 안 가져왔잖아요.”
정훈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건…….”
혼자 가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다만, 차를 가져오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집에서 나올 때 분명 차 키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최 여사가 손에 들린 키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이내 빼앗아 버렸다.
“오늘 이건 필요 없을 게다.”
차 키가 필요 없을 것이라던 최 여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됐다.
“그럼 부탁할게요.”
정훈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승강이를 벌일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마지못해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방향에서 그리 안 멀어요.”
이번에도 결국 최 여사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평창동에 도착한 정훈은 정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차를 세웠다. 담벼락 아래 주차를 했다는 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기사도 아니고 집 앞에 툭, 내려 주고 갈 생각 따윈 없었다.
“말은 들었지만 부지가 엄청나네요.”
주변을 살피던 정훈이 끝내 감탄을 내뱉었다. 끝없이 이어진 담벼락이 장 회장의 권력과 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예의상이라도 답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소미는 정훈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해서 가세요.”
최 여사가 정해 놓은 통금 시각은 10시였다. 마음이 다급했다.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자 정훈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소미 씨만 괜찮다면 이번 만남,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요.”
유리창 너머 비치는 소미의 표정을 보아하니 100퍼센트 거절이었다. 정훈은 그녀의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당장에라도 손잡이를 열고 내릴 것 같던 손이 제자리를 찾듯 무릎 위에 올려졌다.
“저와의 결혼,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소미는 잘게 떨리는 두 손을 더욱 세게 마주 잡았다. 지금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했다.
“결혼하게 된다면, 더는 회장님께 신세 질 생각 없어요.”
결혼의 목적이 우진그룹이라면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었다. 최 여사가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 모르지만 뭐가 됐든 소미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정훈이 그녀와 결혼한다고 해도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정훈 씨 집안에 필요한 그 어떤 도움도 드리지 못할 거예요.”
정훈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소미 씨 마음 충분히 알았어요. 연락드릴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정훈은 연락하겠다고 말했지만 소미는 기대하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차는 미련 없이 출발했다.
높다란 담벼락 위에 멈춰 있던 CCTV가 소미를 따라 움직였다. 자동 센서 기능이었다. 소미를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나 다름없었다.
시야에서 정훈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소미는 습관처럼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9시 50분. 다행히 늦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소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짧게 심호흡을 내뱉은 뒤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걸음은 일자가 되도록. 시선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급할 땐 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뛰면 안 됐고 땅을 내려 봐서도 안 됐다.
폐부를 찌를 듯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볼이 아릴 정도로 찬바람이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순간 서늘할 정도로 차갑던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가 지옥이야. 너랑 내가 서 있는 이곳.”
그와 함께 한때는 이곳을 지옥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그녀에게 이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
그녀는 적응했고, 살아남았으니까.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반듯하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차갑고 추운 건 사람이든 계절이든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년 겨울을 기다렸다. 그를 닮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인지, 겨울을 닮은 그를 기다리는 것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육중한 대문 앞에 선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내쉰 후 벨을 눌렀다.
“저예요.”
바로 대문이 열리리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유정은 머뭇거렸다.
―어떡하지. 10시 넘었다고 문 열어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아직…….”
소미는 급하게 손목을 들었다. 하, 기가 막힌 듯 잇새로 신음이 터졌다. 시계는 여전히 9시 50분이었다. 급하게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0시 10분.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내 마음이 불안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조금만 일찍 오지 그랬어. 미안해.
그렇게 인터폰은 끊어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대문 앞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오늘은 너무 추웠다.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안 늦을게요.”
―나야 열어 주고 싶지. 그런데 지시가 그래.
“제가 들어가서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
―아이고, 계속 이러면 내가 곤란해. 미안해.
역시나 이번에도 인터폰은 끊어졌다. 또 한 번 벨을 누르려 손가락을 가져다 대던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몇 번을 누른다 해도 대문이 열리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죄 없는 유정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었다.
유정은 슬쩍 도현의 눈치를 살폈다. 짧은 시간을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장씨 집안사람들이 모두 별나다는 거였다. 오죽하면 ‘이래서 재벌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추운 날 소미를 밖에 두진 않을 테니 말이다. 뭐라고 말이라도 한번 해 볼까 생각이 들었을 때 미영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이 집에서 가장 무서운 건 회장님도 사모님도 아니에요. 도련님이지. 도련님은 사모님과 회장님을 합쳐 놓은 거 같다니까요.”
집에 돌아온 도현은 미영의 말을 증명하듯 집 안을 뒤집었다. 세세한 먼지 한 점까지 꼬투리를 잡으며 저보다 나이 많은 다섯 명의 고용인을 종처럼 부렸다.
유정은 눈동자만 흘끗거리며 도현을 훔쳐보았다. 할 말은 산더미인데 밥줄이 걸려 있어서인지 입술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 쉬세요.”
유정은 도현의 서늘한 말투에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아니, 왜 이 집 식구들은 다들 소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래.”
소미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있어야 할 도현이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집에 돌아왔다. 최 여사는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반갑지도 않은지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를 탓하며 마사지를 받으러 나갔다. 도현도 최 여사의 행동이 익숙한 것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이 추운 날, 소미가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 주지 말라 한 것이 유정의 입장에선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휴, 돈 받고 일하는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유정은 푸념을 내뱉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소미는 최 여사의 기분이 풀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통금을 어긴 벌이었다.
“추워…….”
발이고 종아리고 금세 얼어붙어 감각이 사라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치마가 아닌 두툼한 바지를 입었을 거다. 하이힐도 신지 않았을 거고, 울 코트가 아닌 든든한 오리털 파카를 걸쳤을 터였다. 하지만 후회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
이가 달달 떨리고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들었다. 소미는 최대한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쭈그리고 앉아 다리가 저린 건지, 추위에 몸이 저린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감각이 둔해져 갔다. 살갗을 아리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졸음이 쏟아졌다.
12시가 다 되었을 때 도현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소미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도현은 깨우지 않고 곁에 서서 소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숨을 크게 내쉬자 잇새로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춥네.”
목소리에 반응하듯 소미의 눈썹이 움찔댔다. 서서히 눈을 뜬 소미는 눈앞의 커다란 인영을 보고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얏.”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현은 팔을 뻗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도현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 상태였다. 미국에 있어야 할 그가 눈앞에 있었다.
“도현아?”
다리가 찌르르 저린 것도 잊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것도 잊혔다.
“따라와.”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바라보는 시선 역시 변함없이 서늘했다.
도현이 리모컨을 누르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혀 있던 차고 문이 열렸다. 차고에 들어찬 빼곡한 차들을 볼 때마다 소미는 마구간이 떠올랐다. 일단 장 회장이 사용하는 차가 다섯 대였고, 최 여사의 차는 세 대였다. 편의에 따라 고용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차가 두 대, 가족들이 함께 사용하는 차가 한 대, 그리고 도현의 차가 두 대였다. 그중 한 대는 현재 소미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새 차가 나오면 중간중간 차고에 놓여 있다 사라지곤 했다.
소미의 눈에 도현의 집은 세도가의 양반집 같았다. 집안 대소사를 관리하는 집사와 그 밑으로 다섯 명의 고용인, 네 명의 수행비서, 열세 명의 경호원이 있었다.
“타.”
“지금 사모님한테 벌 받는 중이야.”
소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얼어 죽더라도 집 앞에 있어야 했다.
“어머니 안 계셔.”
“무슨…….”
도현의 대답에 소미는 최 여사의 차를 찾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최 여사의 차 한 대와 경호 차량 두 대가 보이지 않았다.
“너였어?”
두 시간 동안 밖에서 떨게 한 사람이 도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소미가 얼굴을 구겼다. 도현은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차에 타라는 표정으로 소미를 은빛 아우디에 밀어 넣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집에서 키우는 똥개한테도 이렇게 안 해.”
“그러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도현은 소미의 기분 따윈 상관없다는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두 시간을 밖에 세워 두고, 그것도 부족해 자신을 끌고 한밤중에 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너랑 나랑 갈 데가 한 곳밖에 더 있어?”
“뭐?”
“호텔.”
미국에 가기 전 도현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살아 숨 쉬듯 되살아났다.
“새것 뚜껑을 딱 열잖아. 그럼 그때부턴 내용물이 바뀌지 않는 한 누가 열어 보든 티가 안 나. 이미 열었던 거니까. 내가 널 건드리지 않는 이유가 그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가웠고 귓불에 닿은 숨결은 도현의 상태를 말해 주듯 지나치게 뜨거웠다.
“돌아오면 너부터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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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더욱 주변의 모든 사물이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서울 밤의 야경 또한 눈이 부셨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작은 제약 회사의 아들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눈매와 말투가 사랑받고 컸음을 짐작하게 했다.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는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브리핑을 하듯 제약 설명에 들어갔다.
“양배추에서 추출했기 때문에 기존의 위장약과 달리 부작용이 없어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약보다 효과도 좋아요.”
남자는 소미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호감을 내비쳤다.
“임상 시험 결과는 대만족이고,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반응도 기존 약들에 비해 좋은 편이에요.”
의약 설명회도 아니고 일반인이 듣기에는 따분한 이야기일 것이 뻔했기에, 정훈은 임상 시험을 성공한 제약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다 머쓱한 웃음을 내보였다.
“제가 이렇게 재미가 없어요.”
우진그룹에서 제시한 결혼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이 혈연, 학연, 연줄이었기에 정훈은 소미와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사진보다 앳돼 보이네요.”
나이가 어리니 앳돼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정훈은 소미의 나이쯤은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미에 대한 세세한 정보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훤히 보이는 속내에도 굳이 그 사실을 꼬집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정훈이 예매해 놨다는 뮤지컬까지 보고 나오자 시간은 이미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키가 상당히 크네요.”
“네.”
12cm 하이힐을 신었으니 175cm의 정훈보다 무려 5cm나 컸다. 부담을 주기 위해 일부러 골라 신은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괜히 다리만 고생이었다.
정훈은 극장을 나와 자연스레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 회장님 댁으로 가실 거죠?”
“전 여기서 가 볼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정훈을 쫓다 보면 주차장까지 따라갈 것 같아 소미는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간다고요?”
정훈은 돌아서는 소미의 팔목을 급하게 잡았다.
“데려다줄게요.”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차 안 가져왔잖아요.”
정훈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건…….”
혼자 가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다만, 차를 가져오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집에서 나올 때 분명 차 키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최 여사가 손에 들린 키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이내 빼앗아 버렸다.
“오늘 이건 필요 없을 게다.”
차 키가 필요 없을 것이라던 최 여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됐다.
“그럼 부탁할게요.”
정훈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승강이를 벌일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마지못해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방향에서 그리 안 멀어요.”
이번에도 결국 최 여사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평창동에 도착한 정훈은 정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차를 세웠다. 담벼락 아래 주차를 했다는 건,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기사도 아니고 집 앞에 툭, 내려 주고 갈 생각 따윈 없었다.
“말은 들었지만 부지가 엄청나네요.”
주변을 살피던 정훈이 끝내 감탄을 내뱉었다. 끝없이 이어진 담벼락이 장 회장의 권력과 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예의상이라도 답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소미는 정훈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해서 가세요.”
최 여사가 정해 놓은 통금 시각은 10시였다. 마음이 다급했다.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자 정훈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소미 씨만 괜찮다면 이번 만남,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요.”
유리창 너머 비치는 소미의 표정을 보아하니 100퍼센트 거절이었다. 정훈은 그녀의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당장에라도 손잡이를 열고 내릴 것 같던 손이 제자리를 찾듯 무릎 위에 올려졌다.
“저와의 결혼,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소미는 잘게 떨리는 두 손을 더욱 세게 마주 잡았다. 지금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했다.
“결혼하게 된다면, 더는 회장님께 신세 질 생각 없어요.”
결혼의 목적이 우진그룹이라면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었다. 최 여사가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 모르지만 뭐가 됐든 소미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정훈이 그녀와 결혼한다고 해도 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정훈 씨 집안에 필요한 그 어떤 도움도 드리지 못할 거예요.”
정훈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소미 씨 마음 충분히 알았어요. 연락드릴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정훈은 연락하겠다고 말했지만 소미는 기대하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차는 미련 없이 출발했다.
높다란 담벼락 위에 멈춰 있던 CCTV가 소미를 따라 움직였다. 자동 센서 기능이었다. 소미를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나 다름없었다.
시야에서 정훈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소미는 습관처럼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확인했다. 9시 50분. 다행히 늦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소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짧게 심호흡을 내뱉은 뒤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걸음은 일자가 되도록. 시선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급할 땐 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뛰면 안 됐고 땅을 내려 봐서도 안 됐다.
폐부를 찌를 듯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볼이 아릴 정도로 찬바람이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순간 서늘할 정도로 차갑던 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기가 지옥이야. 너랑 내가 서 있는 이곳.”
그와 함께 한때는 이곳을 지옥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 그녀에게 이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
그녀는 적응했고, 살아남았으니까.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반듯하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차갑고 추운 건 사람이든 계절이든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년 겨울을 기다렸다. 그를 닮은 겨울을 기다리는 것인지, 겨울을 닮은 그를 기다리는 것인지 이제는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육중한 대문 앞에 선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내쉰 후 벨을 눌렀다.
“저예요.”
바로 대문이 열리리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유정은 머뭇거렸다.
―어떡하지. 10시 넘었다고 문 열어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아직…….”
소미는 급하게 손목을 들었다. 하, 기가 막힌 듯 잇새로 신음이 터졌다. 시계는 여전히 9시 50분이었다. 급하게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0시 10분.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내 마음이 불안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조금만 일찍 오지 그랬어. 미안해.
그렇게 인터폰은 끊어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벨을 눌렀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대문 앞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오늘은 너무 추웠다.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안 늦을게요.”
―나야 열어 주고 싶지. 그런데 지시가 그래.
“제가 들어가서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
―아이고, 계속 이러면 내가 곤란해. 미안해.
역시나 이번에도 인터폰은 끊어졌다. 또 한 번 벨을 누르려 손가락을 가져다 대던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몇 번을 누른다 해도 대문이 열리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죄 없는 유정을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었다.
유정은 슬쩍 도현의 눈치를 살폈다. 짧은 시간을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장씨 집안사람들이 모두 별나다는 거였다. 오죽하면 ‘이래서 재벌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추운 날 소미를 밖에 두진 않을 테니 말이다. 뭐라고 말이라도 한번 해 볼까 생각이 들었을 때 미영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이 집에서 가장 무서운 건 회장님도 사모님도 아니에요. 도련님이지. 도련님은 사모님과 회장님을 합쳐 놓은 거 같다니까요.”
집에 돌아온 도현은 미영의 말을 증명하듯 집 안을 뒤집었다. 세세한 먼지 한 점까지 꼬투리를 잡으며 저보다 나이 많은 다섯 명의 고용인을 종처럼 부렸다.
유정은 눈동자만 흘끗거리며 도현을 훔쳐보았다. 할 말은 산더미인데 밥줄이 걸려 있어서인지 입술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 쉬세요.”
유정은 도현의 서늘한 말투에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아니, 왜 이 집 식구들은 다들 소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래.”
소미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있어야 할 도현이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끌고 집에 돌아왔다. 최 여사는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이 반갑지도 않은지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를 탓하며 마사지를 받으러 나갔다. 도현도 최 여사의 행동이 익숙한 것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이 추운 날, 소미가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 주지 말라 한 것이 유정의 입장에선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휴, 돈 받고 일하는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유정은 푸념을 내뱉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소미는 최 여사의 기분이 풀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통금을 어긴 벌이었다.
“추워…….”
발이고 종아리고 금세 얼어붙어 감각이 사라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치마가 아닌 두툼한 바지를 입었을 거다. 하이힐도 신지 않았을 거고, 울 코트가 아닌 든든한 오리털 파카를 걸쳤을 터였다. 하지만 후회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
이가 달달 떨리고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들었다. 소미는 최대한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쭈그리고 앉아 다리가 저린 건지, 추위에 몸이 저린 건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감각이 둔해져 갔다. 살갗을 아리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졸음이 쏟아졌다.
12시가 다 되었을 때 도현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소미는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도현은 깨우지 않고 곁에 서서 소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숨을 크게 내쉬자 잇새로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춥네.”
목소리에 반응하듯 소미의 눈썹이 움찔댔다. 서서히 눈을 뜬 소미는 눈앞의 커다란 인영을 보고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얏.”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던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현은 팔을 뻗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도현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 상태였다. 미국에 있어야 할 그가 눈앞에 있었다.
“도현아?”
다리가 찌르르 저린 것도 잊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는 것도 잊혔다.
“따라와.”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바라보는 시선 역시 변함없이 서늘했다.
도현이 리모컨을 누르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혀 있던 차고 문이 열렸다. 차고에 들어찬 빼곡한 차들을 볼 때마다 소미는 마구간이 떠올랐다. 일단 장 회장이 사용하는 차가 다섯 대였고, 최 여사의 차는 세 대였다. 편의에 따라 고용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차가 두 대, 가족들이 함께 사용하는 차가 한 대, 그리고 도현의 차가 두 대였다. 그중 한 대는 현재 소미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새 차가 나오면 중간중간 차고에 놓여 있다 사라지곤 했다.
소미의 눈에 도현의 집은 세도가의 양반집 같았다. 집안 대소사를 관리하는 집사와 그 밑으로 다섯 명의 고용인, 네 명의 수행비서, 열세 명의 경호원이 있었다.
“타.”
“지금 사모님한테 벌 받는 중이야.”
소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얼어 죽더라도 집 앞에 있어야 했다.
“어머니 안 계셔.”
“무슨…….”
도현의 대답에 소미는 최 여사의 차를 찾았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최 여사의 차 한 대와 경호 차량 두 대가 보이지 않았다.
“너였어?”
두 시간 동안 밖에서 떨게 한 사람이 도현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소미가 얼굴을 구겼다. 도현은 확인했으면 이제 그만 차에 타라는 표정으로 소미를 은빛 아우디에 밀어 넣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집에서 키우는 똥개한테도 이렇게 안 해.”
“그러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도현은 소미의 기분 따윈 상관없다는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두 시간을 밖에 세워 두고, 그것도 부족해 자신을 끌고 한밤중에 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너랑 나랑 갈 데가 한 곳밖에 더 있어?”
“뭐?”
“호텔.”
미국에 가기 전 도현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살아 숨 쉬듯 되살아났다.
“새것 뚜껑을 딱 열잖아. 그럼 그때부턴 내용물이 바뀌지 않는 한 누가 열어 보든 티가 안 나. 이미 열었던 거니까. 내가 널 건드리지 않는 이유가 그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가웠고 귓불에 닿은 숨결은 도현의 상태를 말해 주듯 지나치게 뜨거웠다.
“돌아오면 너부터 먹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