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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장. 저택의 사람들
언덕배기로 올라서던 차가 멈춰 섰다. 내려서자 머리 위로 솜털 같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잿빛 하늘로 보아 제법 많은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성을 연상시키는 높은 담벼락의 저택이었다. 담벼락 사이로 겨울에도 푸르다는 소나무가 슬쩍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미는 한동안 걸음을 멈춘 채 넋 놓고 높다란 담벼락을 바라봤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잘 가꾼 풍경의 정원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소미의 눈길을 끈 건 붉은 동백꽃이었다. 눈송이가, 잇새로 새하얀 입김이 나오지 않았다면 겨울인 것도 잊을 만큼 갖가지 색이 눈에 띄었다.
소미는 무도회에 초대받은 공주님이 된 것만 같았다. 집 안 전체에 클래식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자 설렘과 두려움, 걱정과 불안이 한데 뒤섞여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리 오너라.”
소미는 김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네가 사용할 방의 옆방은 도련님이 사용하시니까, 되도록 조용히 지내야 한다.”
“네.”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계단을 밟고 2층에 오른 김 집사는 복도의 가장 끝에 자리한 방으로 소미를 데려갔다. 베이비 핑크로 앤티크하게 꾸며진 방은 오각형에 가까운 구조 때문인지 다락방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 여사와 살 때도, 보육원에서 지낼 때도 늘 누군가와 함께했기에 소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부터 네가 사용할 방이다. 불편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저이에게 말하면 해결해 줄 거야.”
방 안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짐을 정리하던 여자는 행동을 멈춘 채 허리를 숙였다.
“이정아라고 합니다.”
“미세스 이.”
“네, 집사님.”
김 집사의 부름에 정아는 잰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섰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고 싶었지만 소미에게까지 들리진 않았다.
김 집사가 방을 나가자 정아는 소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따라와.”
정아는 소미를 욕실로 데려갔다.
“앞으로 여길 사용하면 돼.”
“네.”
“앞으로 너 혼자 여길 쓸 거야. 깨끗하게 사용해.”
“네.”
킁킁, 소미는 은은한 향기에 코를 발름거렸다. 자꾸만 맡고 싶어지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옷은 벗어 여기에 두고 욕조에 들어가 있어.”
“씻고 왔어요.”
“알아, 그래도 다시 씻어야 해.”
소미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정아가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욕조에는 이미 물이 한가득 받아져 있었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에 머뭇거리다 결국 옷을 벗어 그녀가 알려 준 바구니에 차곡차곡 넣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 본능처럼 손을 먼저 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한 손으로 물을 휘젓자 욕실에 은은하게 퍼져 있던 향기가 짙어졌다. 꽃향기 같기도 했고 달콤한 과일 향기 같기도 했다.
욕조에 발을 담갔다. 뜨거운 열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후유.”
복에 겨운 호강 앞에 감사는 못할망정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달칵― 닫혔던 욕실 문이 열리고 정아가 들어왔다. 소미는 화들짝 놀라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까악.”
“여자끼리 뭘 놀라고 그래. 씻겨 주려고 들어왔어.”
“아뇨. 저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소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몸을 씻겨 준다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아. 하지만 지시가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듯 자세를 잡고 욕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소미의 팔을 잡아당겨 타월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지우개에서 떨어지는 가루처럼 벗겨진 각질층이 내려앉았다. 정아의 타박이 이어졌다.
“이 때 좀 봐. 목욕은 언제 한 거야?”
“아파요.”
소미는 자신이 도살장에서 마지막 깃털을 뽑히는 닭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을 박박 문지르고 그것도 부족해 뜨거운 물을 머리부터 끼얹었다.
“앗! 뜨거워요.”
“이제야 사람 같네.”
정아의 얼굴에 눈주름이 깊게 팼다. 괴팍하게 몸을 밀던 사람이 맞을까 싶은 온화한 미소였다.
“어차피 바로 옷 입고 내려가야 하니까 가운은 필요 없어.”
소미는 수건만 두른 채 욕실에서 쫓겨났다. 살갗이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뒤따라 나온 정아는 옷장에서 속옷과 원피스를 내주었다. 새 옷이었다.
“네가 가져온 옷은 쓸 만한 게 없어. 사모님 지시를 듣길 잘했지.”
속옷과 원피스는 모두 하얀색이었다. 겉감이 레이스로 처리된 새하얀 원피스는 비즈가 알알이 박혀 있어 불빛에 은은하게 반짝였다. 허리 라인에는 검은색 벨벳 리본이 포인트로 자리 잡혀 있었다. 옷은 몸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꼭 맞았다.
“잘 맞네.”
정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미는 몸에 딱 맞는 새 옷이 어색했다. 지금껏 새 옷은 언제나 한 치수, 또는 두 치수 크게 입었다. 그래야 내년, 내후년에도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너무 딱 맞는 거 같아요. 이래선 내년에 못 입잖아요.”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이쪽에 앉아. 머리 말려 줄게.”
화장대 앞에 앉자 정아는 드라이기를 꺼냈다. 바람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넌 좋겠다. 네 평생 이런 집에서 언제 살아 보겠니. 이런 대접은 또 언제 받아 보고. 지금 네가 입은 원피스만 해도 얼만지 아니?”
정아는 인형 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소미의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피스와 한 쌍인 진주 머리띠를 머리에 씌워 주었다.
“다 됐다.”
꾀죄죄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법사를 만난 신데렐라처럼.
정아는 머리카락을 털어 낸 후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이제 사모님께 인사드리면 되겠다.”
“사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만나 보면 알게 돼.”
정아는 1층까지 소미를 안내한 후 할 일이 있다며 다시 2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소미는 한참을 응접실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집 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힐끔거리며 소미의 모습을 살폈다. 가끔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네 부모님은 어쩌다 어린 널 두고 돌아가셨니.”
“교통사고요.”
고용인들의 관심이 시들어 갔다. 최 여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비하면 그들의 관심은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오지 않는 최 여사를 기다려야 할지 갑갑했다. 목이 말랐다. 배가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밀랍 인형처럼 앉아 있으려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곳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나중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부모의 품을 떠난 뒤 조 여사의 밑에서 지내다 보육원으로, 그리고 이제는 장 회장의 집까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옮겨 다닐 수 있는 떠돌이 신세였다.
일곱 살 때 교통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미는 쭉 조모인 조 여사의 손에 컸다.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일가족 자살 시도였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소미가 태어난 해부터 힘들어졌다고 했다. 대출에 대출을 받아 회사를 운영해 오던 부친은 마지막에 사채까지 빌렸다. 빚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벼랑 끝에 내몰리자 죽음을 선택했다.
소미는 그때부터 조 여사의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건강하던 조 여사는 소미가 열세 살 되던 해에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발견 당시 너무 늦어 손을 쓸 수 없었다. 추석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여사는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은 소미가 ‘재수 없는 아이’라며 소곤거렸다. 소미만 아니었다면 조 여사는 앞으로 20년은 거뜬히 살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소미를 향해 부모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조모까지 잡아먹었다며 손가락질해 댔다. 그래서인지 누구 하나, 오갈 데 없는 소미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학교와 가까운 금빛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슬픔에 잠길 새도 없었다. 살기 위해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보육원의 생활도 길지 못했다. 보육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을 쯤 장 회장의 집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우진그룹에서 후견인으로 나서 주었기에 소미는 보육원이 아닌 우진그룹의 장학생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네가 할 일은 도련님의 학교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돕는 거다. 같은 나이라고 해서 말대꾸해서도, 얕잡아 봐서도 안 된다. 도련님은 앞으로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이란 걸 명심하고. 그분 덕에 네가 장학생으로 이 집에 올 수 있게 된 거니 항상 감사하렴. 네가 네 그릇을 다 하게 되면 후에 그만큼 보상도 있을 게야.”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1월의 어느 날 벌어진 일이었다.
도현은 한동안 2층 계단에 선 채 먼발치에서 소미를 내려 봤다.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는 어린 시절 보았던 송아지와 닮았다. 순간 가슴이 찌르르 전율했다. 눈동자만큼이나 새까만 긴 머리는 윤기가 흘러 탐스러웠다. 저릿하던 가슴이 나중에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집안일을 관장하는 김 집사가 도현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도련님,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도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건 드문 일이라 김 집사는 서둘러 1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김 집사의 입가가 느슨해지더니 팔자 주름이 파였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됐어요.”
도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곧장 도망치듯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 하나둘 내리던 눈이 온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고용인을 제외한 이곳의 주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와서 밥 먹어.”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집 안에는 다이닝 룸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가늠하건대 손님이 왔을 때나 사용하는 곳으로 보였다. 소미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테이블에 저절로 몸이 위축됐다.
식탁 위에는 나물과 고기반찬이 가득했다. 음식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생각해 보니 종일 먹은 게 없었다.
“많아요.”
“누가 너 혼자 먹는대? 도련님 내려오실 거야.”
도련님이라는 소리에 소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에 땀이 고이는 느낌에 치마를 살짝 움켜쥐었다.
등받이가 기다란 의자는 뽐내는 자태만큼 묵직했다. 소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의자를 잡아당겨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끈거리는 은빛 가죽 시트에 궁둥이를 붙였다.
“흠집 안 나게 조심해. 며칠 전에 들인 거니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무척이나 불편했다. 가시방석에 앉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가시방석이 이보다 편할 것 같았다.
얼마 후 또래의 남자아이가 다이닝 룸에 들어섰다. 새하얀 남방에 한눈에도 질감 좋아 보이는 고급 스웨터를 입은 아이는 그야말로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새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반듯한 콧대, 또렷한 입술선. 아이는 잘생기다 못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매는 날카로워 보였다. 서늘한 시선이 닿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따뜻한 밤색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소미는 자리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끼기긱. 날 선 소리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미는 서둘러 눈치를 살폈다. 소리를 낸 건 소미였는데 도현의 시선은 미영을 향했다. 싸느랗다. 시선이 어찌나 살벌한지 오금이 저렸다.
미영이 황급히 도현을 향해 등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실장님은 제 말이 우스우신가 보죠?”
“오늘 바로 해 놓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소미를 향해 톡톡 쏘아 대던 미영이 쩔쩔맸다.
어른이 아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상황을 소미는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졌고 묘하게도 두 사람의 행동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소미에게 버거운 의자가 남자아이라고 가볍지는 않았을 테고, 몇 번이고 소리가 났을지 모른다. 의자를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발 커버를 깔라는 요구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미영이 꾸지람을 듣게 되자 소미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습관처럼 미영의 눈치를 살폈다.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보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1장. 저택의 사람들
언덕배기로 올라서던 차가 멈춰 섰다. 내려서자 머리 위로 솜털 같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잿빛 하늘로 보아 제법 많은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성을 연상시키는 높은 담벼락의 저택이었다. 담벼락 사이로 겨울에도 푸르다는 소나무가 슬쩍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미는 한동안 걸음을 멈춘 채 넋 놓고 높다란 담벼락을 바라봤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잘 가꾼 풍경의 정원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소미의 눈길을 끈 건 붉은 동백꽃이었다. 눈송이가, 잇새로 새하얀 입김이 나오지 않았다면 겨울인 것도 잊을 만큼 갖가지 색이 눈에 띄었다.
소미는 무도회에 초대받은 공주님이 된 것만 같았다. 집 안 전체에 클래식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자 설렘과 두려움, 걱정과 불안이 한데 뒤섞여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리 오너라.”
소미는 김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네가 사용할 방의 옆방은 도련님이 사용하시니까, 되도록 조용히 지내야 한다.”
“네.”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계단을 밟고 2층에 오른 김 집사는 복도의 가장 끝에 자리한 방으로 소미를 데려갔다. 베이비 핑크로 앤티크하게 꾸며진 방은 오각형에 가까운 구조 때문인지 다락방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 여사와 살 때도, 보육원에서 지낼 때도 늘 누군가와 함께했기에 소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부터 네가 사용할 방이다. 불편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저이에게 말하면 해결해 줄 거야.”
방 안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짐을 정리하던 여자는 행동을 멈춘 채 허리를 숙였다.
“이정아라고 합니다.”
“미세스 이.”
“네, 집사님.”
김 집사의 부름에 정아는 잰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섰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고 싶었지만 소미에게까지 들리진 않았다.
김 집사가 방을 나가자 정아는 소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따라와.”
정아는 소미를 욕실로 데려갔다.
“앞으로 여길 사용하면 돼.”
“네.”
“앞으로 너 혼자 여길 쓸 거야. 깨끗하게 사용해.”
“네.”
킁킁, 소미는 은은한 향기에 코를 발름거렸다. 자꾸만 맡고 싶어지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옷은 벗어 여기에 두고 욕조에 들어가 있어.”
“씻고 왔어요.”
“알아, 그래도 다시 씻어야 해.”
소미는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정아가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욕조에는 이미 물이 한가득 받아져 있었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에 머뭇거리다 결국 옷을 벗어 그녀가 알려 준 바구니에 차곡차곡 넣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 본능처럼 손을 먼저 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한 손으로 물을 휘젓자 욕실에 은은하게 퍼져 있던 향기가 짙어졌다. 꽃향기 같기도 했고 달콤한 과일 향기 같기도 했다.
욕조에 발을 담갔다. 뜨거운 열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후유.”
복에 겨운 호강 앞에 감사는 못할망정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달칵― 닫혔던 욕실 문이 열리고 정아가 들어왔다. 소미는 화들짝 놀라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까악.”
“여자끼리 뭘 놀라고 그래. 씻겨 주려고 들어왔어.”
“아뇨. 저 혼자 씻을 수 있어요.”
소미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몸을 씻겨 준다니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아. 하지만 지시가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듯 자세를 잡고 욕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소미의 팔을 잡아당겨 타월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지우개에서 떨어지는 가루처럼 벗겨진 각질층이 내려앉았다. 정아의 타박이 이어졌다.
“이 때 좀 봐. 목욕은 언제 한 거야?”
“아파요.”
소미는 자신이 도살장에서 마지막 깃털을 뽑히는 닭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을 박박 문지르고 그것도 부족해 뜨거운 물을 머리부터 끼얹었다.
“앗! 뜨거워요.”
“이제야 사람 같네.”
정아의 얼굴에 눈주름이 깊게 팼다. 괴팍하게 몸을 밀던 사람이 맞을까 싶은 온화한 미소였다.
“어차피 바로 옷 입고 내려가야 하니까 가운은 필요 없어.”
소미는 수건만 두른 채 욕실에서 쫓겨났다. 살갗이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뒤따라 나온 정아는 옷장에서 속옷과 원피스를 내주었다. 새 옷이었다.
“네가 가져온 옷은 쓸 만한 게 없어. 사모님 지시를 듣길 잘했지.”
속옷과 원피스는 모두 하얀색이었다. 겉감이 레이스로 처리된 새하얀 원피스는 비즈가 알알이 박혀 있어 불빛에 은은하게 반짝였다. 허리 라인에는 검은색 벨벳 리본이 포인트로 자리 잡혀 있었다. 옷은 몸에 크지도 작지도 않게 꼭 맞았다.
“잘 맞네.”
정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미는 몸에 딱 맞는 새 옷이 어색했다. 지금껏 새 옷은 언제나 한 치수, 또는 두 치수 크게 입었다. 그래야 내년, 내후년에도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너무 딱 맞는 거 같아요. 이래선 내년에 못 입잖아요.”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이쪽에 앉아. 머리 말려 줄게.”
화장대 앞에 앉자 정아는 드라이기를 꺼냈다. 바람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넌 좋겠다. 네 평생 이런 집에서 언제 살아 보겠니. 이런 대접은 또 언제 받아 보고. 지금 네가 입은 원피스만 해도 얼만지 아니?”
정아는 인형 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소미의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피스와 한 쌍인 진주 머리띠를 머리에 씌워 주었다.
“다 됐다.”
꾀죄죄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법사를 만난 신데렐라처럼.
정아는 머리카락을 털어 낸 후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이제 사모님께 인사드리면 되겠다.”
“사모님은 어떤 분이세요?”
“만나 보면 알게 돼.”
정아는 1층까지 소미를 안내한 후 할 일이 있다며 다시 2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소미는 한참을 응접실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집 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힐끔거리며 소미의 모습을 살폈다. 가끔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네 부모님은 어쩌다 어린 널 두고 돌아가셨니.”
“교통사고요.”
고용인들의 관심이 시들어 갔다. 최 여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비하면 그들의 관심은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오지 않는 최 여사를 기다려야 할지 갑갑했다. 목이 말랐다. 배가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밀랍 인형처럼 앉아 있으려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곳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나중엔 또 어디로 가게 될까. 부모의 품을 떠난 뒤 조 여사의 밑에서 지내다 보육원으로, 그리고 이제는 장 회장의 집까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옮겨 다닐 수 있는 떠돌이 신세였다.
일곱 살 때 교통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소미는 쭉 조모인 조 여사의 손에 컸다.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일가족 자살 시도였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소미가 태어난 해부터 힘들어졌다고 했다. 대출에 대출을 받아 회사를 운영해 오던 부친은 마지막에 사채까지 빌렸다. 빚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벼랑 끝에 내몰리자 죽음을 선택했다.
소미는 그때부터 조 여사의 밑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건강하던 조 여사는 소미가 열세 살 되던 해에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발견 당시 너무 늦어 손을 쓸 수 없었다. 추석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 여사는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 참석한 친척들은 소미가 ‘재수 없는 아이’라며 소곤거렸다. 소미만 아니었다면 조 여사는 앞으로 20년은 거뜬히 살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소미를 향해 부모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조모까지 잡아먹었다며 손가락질해 댔다. 그래서인지 누구 하나, 오갈 데 없는 소미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학교와 가까운 금빛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슬픔에 잠길 새도 없었다. 살기 위해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보육원의 생활도 길지 못했다. 보육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을 쯤 장 회장의 집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우진그룹에서 후견인으로 나서 주었기에 소미는 보육원이 아닌 우진그룹의 장학생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네가 할 일은 도련님의 학교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돕는 거다. 같은 나이라고 해서 말대꾸해서도, 얕잡아 봐서도 안 된다. 도련님은 앞으로 네가 모셔야 할 사람이란 걸 명심하고. 그분 덕에 네가 장학생으로 이 집에 올 수 있게 된 거니 항상 감사하렴. 네가 네 그릇을 다 하게 되면 후에 그만큼 보상도 있을 게야.”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1월의 어느 날 벌어진 일이었다.
도현은 한동안 2층 계단에 선 채 먼발치에서 소미를 내려 봤다. 겁에 질린 까만 눈동자는 어린 시절 보았던 송아지와 닮았다. 순간 가슴이 찌르르 전율했다. 눈동자만큼이나 새까만 긴 머리는 윤기가 흘러 탐스러웠다. 저릿하던 가슴이 나중에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집안일을 관장하는 김 집사가 도현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도련님,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도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건 드문 일이라 김 집사는 서둘러 1층으로 시선을 옮겼다. 김 집사의 입가가 느슨해지더니 팔자 주름이 파였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됐어요.”
도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곧장 도망치듯 방으로 모습을 감췄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 하나둘 내리던 눈이 온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고용인을 제외한 이곳의 주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와서 밥 먹어.”
소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방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집 안에는 다이닝 룸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가늠하건대 손님이 왔을 때나 사용하는 곳으로 보였다. 소미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테이블에 저절로 몸이 위축됐다.
식탁 위에는 나물과 고기반찬이 가득했다. 음식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생각해 보니 종일 먹은 게 없었다.
“많아요.”
“누가 너 혼자 먹는대? 도련님 내려오실 거야.”
도련님이라는 소리에 소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에 땀이 고이는 느낌에 치마를 살짝 움켜쥐었다.
등받이가 기다란 의자는 뽐내는 자태만큼 묵직했다. 소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의자를 잡아당겨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끈거리는 은빛 가죽 시트에 궁둥이를 붙였다.
“흠집 안 나게 조심해. 며칠 전에 들인 거니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무척이나 불편했다. 가시방석에 앉아 본 적은 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가시방석이 이보다 편할 것 같았다.
얼마 후 또래의 남자아이가 다이닝 룸에 들어섰다. 새하얀 남방에 한눈에도 질감 좋아 보이는 고급 스웨터를 입은 아이는 그야말로 동화책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새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반듯한 콧대, 또렷한 입술선. 아이는 잘생기다 못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매는 날카로워 보였다. 서늘한 시선이 닿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따뜻한 밤색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소미는 자리에서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끼기긱. 날 선 소리에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미는 서둘러 눈치를 살폈다. 소리를 낸 건 소미였는데 도현의 시선은 미영을 향했다. 싸느랗다. 시선이 어찌나 살벌한지 오금이 저렸다.
미영이 황급히 도현을 향해 등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실장님은 제 말이 우스우신가 보죠?”
“오늘 바로 해 놓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소미를 향해 톡톡 쏘아 대던 미영이 쩔쩔맸다.
어른이 아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상황을 소미는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졌고 묘하게도 두 사람의 행동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소미에게 버거운 의자가 남자아이라고 가볍지는 않았을 테고, 몇 번이고 소리가 났을지 모른다. 의자를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발 커버를 깔라는 요구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미영이 꾸지람을 듣게 되자 소미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습관처럼 미영의 눈치를 살폈다.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보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