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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수학여행 일정이 모두 끝난 날, 은반은 오후 늦게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외가 있는 날이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집까지 열심히 달렸다. 거의 일주일 만에 그를 보게 된다는 감격에 겨워, 인숙에게 곧 집에 도착한다는 사전 연락도 하지 않은 채였다. 일주일 동안 온전히 수학여행 자체에 집중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오늘만 기다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문을 열고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도착한 은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서둘러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거실 한편에 놓인 커다란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인숙이 은반을 발견하곤 서둘러 다가왔다.
“이제 도착한 거야?”
“응. 엄마! 쌤한테 연락한 거 없지?”
은반은 인숙을 스쳐 지나가며 주방으로 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며 그제야 인숙을 쳐다봤다. 은반의 질문에 인숙이 잠시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연락?”
“수학여행 다녀왔으니 피곤하다고 과외 건너뛰자고 합의 본 거 아니지? 나, 오늘 공부할 거란 말이야. 요즘 내가 공부에 대한 열의가 얼마나 굉장한지 엄만 모르지? 놀라실 거야.”
은반은 가득 채워진 컵을 거의 입안에 털어 넣는 수준으로 물을 마시곤 식도가 터질세라 꿀꺽 넘겼다.
“저기. 은반아! 잠깐만!”
그래서 인숙의 얼굴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언가 곤혹스러운, 그래서 선뜻 꺼내기가 힘든,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망설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왜?”
“선생님, 엊그제 과외 그만두셨어.”
은반은 입안에 아직 남아 있는 물을 목으로 넘길 생각도 하지 않고 멀거니 인숙을 보고만 있었다.
“……왜?”
목소리를 내려다 그제야 물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꿀꺽 삼킨 은반이 막힌 목소리를 내었다.
“집에 누가 돌아가셨는지 장례식을 치르고 왔다더라구. 나한테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 하니 가족은 아니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였어. 당분간 좀 쉬고 싶다고 하시더라.”
인숙의 말이 윙윙대는 소음처럼 들렸다. 제대로 듣고 이유를 파악해야 하는데 은반의 마음은 이미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과외비 계산해서 드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거절하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얘길 안 하니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너 성적 올려 줬는데 아까워. 너한테 인사 못 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 공부 열심히 하라더라. 과외는 걱정 마. 엄마가 다른 선생님 찾아볼게.”
“어…… 엄마. 저, 전화번호 좀. 쌤 전화번호.”
은반은 입술을 깨물며 두리번거렸다. 인숙의 주변을 뒤지며 핸드폰을 찾았다. 다행히 인숙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다급히 빼앗듯 받아 들곤 이록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단축키를 누르는 손길에는 불안감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핸드폰 너머에서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라는 메시지로 현실이 되었다.
“엄마. 혹시 쌤…… 다른 연락처 몰라? 살고 있는 집이라도.”
“기숙사에서 지내잖아. 그것 말곤 모르는데.”
학교. 학교를 잊고 있었다. 은반의 얼굴을 가득 덮고 있던 초조함이 안도감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 안도감이 학교에 가면 분명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바뀔 무렵, 은반은 제 소매를 붙들며 식사 여부를 물어 오는 인숙을 뿌리치고 현관을 나섰다. 생각이, 한시라도 빨리 그를 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치달았다.
세운대 의대 교정은 아득하다 싶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난번 밤에 왔을 때는 어두운 길을 잘도 찾아다녔던 것 같은데, 아직 환한 지금은 오히려 더 막막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 할지 쉬이 해답이 나오지 않아 시야만 애꿎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때 은반의 앞으로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의대생이 지나갔다. 은반이 황급히 그들을 불러 세웠다.
“저. 말씀 좀 물을게요. 4학년에 표이록 씨라고 혹시 아시나요? 그분을 만나러 왔는데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두 사람 중 한 명이 은반의 아래위를 잠시 훑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록이는 학교 안 나온 지 며칠 됐는데.”
“어딜 좀 다녀온다고 했어요. 쉬고 싶다고.”
두 사람의 대답은 그 의미들이 비슷해 보였다. 결국 지금은 그를 만날 수가 없다는 거다. 은반은 두 사람이 했던 대답 속에서 다녀온다고 했다는 말에 기대를 걸었다. 돌아온다고 했다니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저, 죄송한데요. 혹시 돌아오면 이 전화번호 좀 전해 주세요. 꼭 전해 주셔야 해요. 오래 못 보면 저 망가질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꼭 전해 주셔야 돼요.”
주머니를 뒤져 사탕 껍질을 찾고 그들로부터 볼펜까지 빌려, 그곳에다 전화번호를 적어 넣었다. 번호를 써 내려가는데 왈칵 눈물이 솟았다. 두 의대생들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은반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곤 설핏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떠난 후 돌아서는데, 다리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하반신이 후들거렸다. 쩍쩍 갈라진 허전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만 같아 은반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Ban’s note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핸드폰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울릴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는 편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보다 나았다. 그는 내 앞에 있다고, 저만치 앞에서 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야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갈 수 있는 것처럼.☆☆」



4. 어레스트(Arrest, 심정지): 심장이 멎다


“9년을 기다렸다고? 헌디 올해도 텄어. 못 만나. 일찌검치 접고 딴 놈 알아보소.”
뚫는 것을 불사할 정도로 은반의 얼굴을 노려보던 윤씨 할머니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노려보는 눈길을 풀지 않은 채 이 관상풀이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뉘앙스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반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단호한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이러시면 안 돼요, 할머니. 나 멘붕 온다니까?”
“잉? 메, 뭐?”
“정신줄 놓는다구요. 진료고 뭐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좀 있다가 할머니 팔에 주사 놓을 때 막 아프고 그러실 텐데?”
은반은 주삿바늘 자국으로 초토화되어 있는 윤씨 할머니의 가는 팔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퇴행성 뇌질환을 앓고 있는 윤씨 할머니가 두려운 듯 움찔한다. 은반은 순간적으로 협박의 방향을 잘못 잡았나 싶어 미간을 좁혔다. 그저 할머니와 대화를 좀 더 나누고자 관상을 봐 달라고 쓸데없이 매달렸던 게 후회가 되었다.
“그려도 아닌디. 닿아 있는 인연이 아직 없는디.”
“아아, 알았다. 우리 할머니께서 이걸 원하셨구나아. 원래 제가 눈칫밥 하나로 병원 생활을 버티고 있는 사람인데요. 요 며칠은 쪼오금 소홀했다, 내가. 자, 에이 기분이다. 저 오늘 전 재산 다 풉니다, 할머니.”
은반은 할머니의 팔을 내려놓은 후 가운의 안쪽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석 장을 꺼내었다.
“자아, 할머니. 다시 갑니다. 올해 제가 어떻게 된다구요?”
그것을 할머니의 손바닥에 쥐여 주고는 인상 좋은 표정을 과도하게 지어 보이자 할머니가 아이처럼 웃었다.
“잉. 만나네. 만나게 되것어. 올 것이 오고 있네. 조만간 만나것어.”
윤씨 할머니가 지폐 세 장을 들고 신기한 물건을 대하듯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은반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따가 주사 시간에 주사 맞고 나서 집에 돌아가실 때, 손주한테 줄 사탕 사서 들어가세요. 아셨죠?”
“잉. 그려.”
세심한 손길로 지폐를 세고 있는 할머니를 두고, 은반은 조용히 회관을 빠져나왔다. 마을회관 앞마당에는 어느새 어슴푸레 저녁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앞마당 양쪽으로 즐비한 꽃나무들을 보며 여기저기에 깊이 들어와 있는 시골의 봄을 느꼈다. 모두 서울에선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광경이다.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때 시야로 회관 입구에 붙어 있는 플랜카드 속 선명한 글자가 들어왔다.

15일 동안 무료로 진료해 드립니다.
-세운대학병원 레지던트 일동

이제 일주일이 남았다. 은반은 얼른 병원으로 돌아가 흉부외과 의국원들 속에 다시 섞이고 싶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빵 한 조각으로 버티는 타이트한 생활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그리운 건 그곳이 은반에겐 매우 특별하기 때문일 터였다.
세운대학병원은 대대로 매년 4월과 5월에 걸쳐 각 과의 레지던트 1년 차들을 대상으로, 지방의 시골 마을에 의료봉사 행사를 실시해 왔다. 행사는 보름 동안 행해지는데 이 기간 동안 레지던트들은 해당 마을 노인들의 가벼운 질환과 기본적인 건강검진을 한다. 검진에서 이상증후가 발견되면 즉시 근처 큰 병원으로 이송시킨다.
흉부외과에서 유일하게 레지던트 1년 차였던 은반은 별다른 저항을 해 보지도 못하고 끌려왔다. 2년 차, 3년 차 선배들의 ‘나도 1년 차 때 다 겪었던 일’이라며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인사말을 받으면서 말이다.
“선생님. 여기서 뭐하세요?”
산 뒤로 넘어가는 태양의 붉은 꼬리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정형외과 레지던트 1년 차로 파견된 손정애 선생이 다가왔다. 은반이 돌아보더니 앉으라는 듯 벤치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네, 선생님. 진료는 다 끝나셨어요?”
“네. 어깨가 뻐근해 죽겠어요.”
“노인분들 대부분이 정형외과 환자들이라 손 선생님이 우리 중에 제일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뭘요. 그냥 엑스레이 찍고 봐 드리는 것뿐인데요. 근데 설 선생님은 뵐 때마다 대단하세요.”
“제가요? 어떤 점이…… 혹시 미모가?”
은반이 턱없는 기대감으로 속눈썹을 깜빡이며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손 선생이 그건 절대 아니라는 듯 피식 웃는다.
“다른 대학 의대를 나와서 우리 병원에 레지던트로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수도권의 빅4라고 알려진 대학병원들은 텃세가 워낙 심하잖아요. 특히 세운대학병원은 뭐 말해 봐야 입만 아프죠. 인턴 모집도 말만 모집이지, 세운대 졸업생들만 받기로 유명한 곳인데.”
“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실패하는 법이 없거든요. 저한테는 반드시 세운대학병원에 가야만 하는 목적이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음…… 첫사랑 찾기?”
물론 은반의 대답을, 손 선생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누구든 그랬다. 1년 재수 끝에 지방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그곳 대학병원에서 인턴까지 마친 후, 레지던트를 세운대학병원에 지원했다는 부분까지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첫사랑 찾기’라고 대답을 하면 대부분 웃곤 했다. 기가 막힌다는 뜻인지, 네가 그럼 그렇지라는 의미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그 반응들에 은반은 허탈했다는 것이다.
이록 때문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고, 1년 재수를 하면서까지 그가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이제 드디어 그 세상에 왔고, 환자들을 보며 어설픈 의사 정신이 스멀스멀 생기고 있는 마당인데, 정작 그는 없다.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으레 의대 교정을 헤맸고, 레지던트로 합격해서 들어와 가장 먼저 그를 찾았지만 9년 전에 홀연히 사라졌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누구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갑작스레 생각의 결이, 혹시 의사가 되려고 했던 마음가짐이 백 프로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건가, 하는 의심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건 아니다. 그녀는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고, 환자들을 상대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돌보던 환자가 테이블 데스(table death)를 하는 바람에 며칠 동안 우울했던 기억도 있다.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답답해진 것은 오늘따라 유난히 몸이 힘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가 아무리 신뢰성이 제로라지만 윤씨 할머니의 엉터리 관상도 한몫 단단히 한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숨겨 두었던 두려움과 나약함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은반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들었다. 마을을 품고 있던 태양이 어느새 산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보지 못할 이곳에서의 태양에 대고 그녀는 매일 습관처럼 하는 질문을 내던졌다.
쌤…… 잘 있어요?

부산 송도 방향으로 향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서 혁수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시원해지는 것도 같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은 아픔이었다.
사흘 전 <월간 닥터>라는 잡지책에서 발견한 이록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수도권 지역의 병원장 모임에 참석할 준비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토록 여러 가지 회한의 감정에 심경이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월간 닥터>에는 ‘관상동맥 우회술 적정성 평가 1등급 선정’이라는 큰 제목 아래 부산 유신대학병원의 흉부외과 교수팀이 소개되어 있었다. 생명연장의 효과도 없고 미학적으로도 가치가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어서 환자들이 꺼려하는 수술 중 하나인데, 최근 유신대학병원의 흉부외과 팀에서 그 인식을 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록이 있었다.
9년 전 본과 4학년 때 갑자기 학교를 떠났던 이록은, 혁수가 우즈베키스탄의 타운젠트 병원에 파견을 나간 사이에 다시 복학을 했다. 그리고 졸업을 무사히 하고 의사고시까지 패스했단 소식까지 들었다.
그러나 왜 세운대학병원이 아닌 이런 곳에 내려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간 이록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늘 수포로 돌아갔는데, 운 좋게도 잡지책에서 근황을 알게 된 것이다.
혁수는 창문을 조금 내린 후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원하게 뻗은 해안 도로에 접어들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바다 냄새가 퍼져 있는 바람을 쐬며, 혁수의 마음은 벌써부터 긴장의 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유신대학병원에 도착한 혁수는 기사를 향해 기다리라 당부한 후, <월간 닥터> 잡지책을 들고 외과 병동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학병원답게 분주한 내부를 휘둘러보고는 접수 테이블로 발길을 옮겼다. 번호표를 뽑아 들려는데 시야의 한편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무리가 비쳤다. 혁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무리들 속에 이록이 있었다. 오후 회진 중인지 차트를 들여다보며 레지던트와 인턴들로 보이는 젊은 의사들을 이끌고 로비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디서든 눈에 띄었던 큰 키와 훤칠한 생김새는 여전했지만, 9년 전과는 다른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올해 서른넷이 되었을 테니 아무래도 연륜이 그런 분위기를 만든 거라고, 막연하게 그렇게만 생각했다.
“표이록!”
혁수는 먹먹한 감정을 추스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록이 차트로부터 시선을 떼어 낸 후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는지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시선이 얼마 지나지 않아 혁수에게로 고정되었다.

회진을 끝낸 이록은 혁수가 기다리고 있을 병원 내 휴식 공원을 향해 뛰었다. 뛰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벤치에 앉아 있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일어서는 혁수를 보자 회한이 먼저 달려들었다.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 이록은 그제야 혁수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절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꽁꽁 숨어 살고 있었는데.”
농담이 버무려진 첫마디를 내뱉고 나자 혁수와의 사이에 존재했던 9년의 거리가 금세 무색해지는 것 같았다. 혁수가 피식 웃으며 <월간 닥터>를 내밀었다.
“이렇게 하고서 숨어 살고 있었다고? 이렇게, 날 알아봐 주소, 하면서?”
“그렇군요. 이럴까 봐 가장 못 나온 사진을 실은 건데.”
“유신대 병원 흉부외과 팀이 심장이식술을 비롯해서 실력이 좋다는 소문은 듣긴 했는데 그 중심에 네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에 띄는 사람은 뭘 하든 티가 날 수밖에 없어. 숨어 산다고 했는데도 봐, 이렇게 금세 발각이 되고 말잖아?”
이록은 혁수의 손에 들린 잡지책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낸 후 그를 바라봤다.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흰 머리와 세월이 흘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주름살을 걷어 내니, 그가 가장 존경하고 동경했던 민혁수 교수의 모습이 차츰 드러났다.
“못된 놈. 나 우즈벡에 교환의로 파견 나가 있는 2년 동안 몰래 복학해서 졸업하고 의사고시까지 보고 말이야. 전쟁 피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급했누.”
“전쟁을 피해 도망친 것, 맞습니다, 교수님. 굉장히 많은 총성이 난무했으니.”
“그런데 나한테는 왜 매년 명절 때며 생일 때며, 그렇게 보약이나 선물을 보낸 건가. 도망을 쳤으면 도망자답게 아예 숨어 버릴 것이지.”
“아셨습니까?”
“잡지책에서 부산이라는 글자를 봤을 때 알게 되었지. 퀵으로만 보낸 이유가 있었어. 부산이라는 지명만 떨렁 있을 뿐 발신인이 없어서 난 처음엔 이게 나를 향한 테러인가 했지.”
이록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혁수만큼은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매년 선물을 챙긴 것인데, 그것을 용케 알아챈 혁수에게나 어설프게 흔적을 남겨 버린 자신에게나, 실소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왜 세운대 병원이 아닌 이곳에 내려와 있는 거지?”
현실을 일깨우는 혁수의 그 질문에, 이록은 그간 억지로 밀어 두었던 그곳에서의 기억을 되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곳에 머물기엔 아픈 기억이 많았습니다. 그땐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만신창이가 되었을 겁니다.”
“결혼은 했나?”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잘됐군. 여길 홀가분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옆에 와. 흉부외과 스텝 한 명이 건강이 안 좋아져서 조만간 병원을 그만두게 될 거야. 널 우리 병원에 모셔 오고 싶다. 내가 세운대 의대 병원장이 된 건 알지?”
이록의 변명을 다 듣고 난 혁수가 대뜸 돌발 제안을 해 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찾아온 것인 양, 혁수의 표정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이 잡지책을 보고 사흘 동안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네. 난 세운의대 졸업생이 다른 병원을 위해 헌신하는 꼴은 못 봐.”
“헌신이라기보다는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도피라고 생각하십시오, 교수님.”
“그냥 와. 토 달지 말고. 나 죽을 병 걸렸단다, 이록아.”
“……네?”
이록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곤 혁수를 응시했다. 한동안 막힌 말문을 열지 못한 채였다.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죽을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사람치곤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여서 더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지내고 싶어.”
“교수님!”
“산 사람 소원, 들어줄 거지?”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겁니까.”
“그게 궁금하면 올라오라니까.”
아픈 사람의 곁에 머문다는 것이 얼마나 영혼까지 갉아먹는 일인지 잘 아는 이록에게, 혁수의 지나치게 덤덤한 표정과 말투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자네, 이 병원 레지던트들한테 호랑이로 유명하다며. 아까 기다리는 동안 자네에 대해 여기저기 묻고 다녔지.”
게다가 혁수는 한술 더 떠서 대화의 분위기가 우울해지니 흐름마저 바꾸어 버렸다.
“올라와서 우리 레지던트들 기강도 좀 잡아. 요즘 애들이 너무 철이 없어.”
주름살이 퍼진 눈가를 잔잔하게 좁히며 이쪽까지 동요시키는 혁수의 미소에, 이록은 더는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9년 만에 만난 은사(恩師)는 그렇게 이록의 얼어붙은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다.

혁수를 보내고 하루 일과를 모두 끝낸 후, 교수 방으로 돌아온 이록은 의자에 털썩 몸을 묻었다. 심난하게 일그러진 이마를 문지르며 의자를 돌려 창문 쪽을 바라봤다. 세운대학병원으로 오라는 말보다도 병에 걸렸다는 말이 몇 배로 더 귀에 남아 있어 괴로웠다. 믿을 수 없는 그 말에, 그의 가슴이 또 한 번 갈라지고 있었다.
하영의 죽음은 이록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그중 가장 크고 뚜렷한 변화는 웃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영의 죽음 그 자체보다도 열심을 쏟아부었던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커다란 상실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의도적이었지만 지금은 습관이 되었다. 누구도 곁에 두려 하지 않는다. 잔뜩 얼어붙은 심장에 두 번 다시 봄은 오지 않았다.
민 교수 때문에 또다시 그 상실감을 겪게 될까 두렵다. 그 아픈 기억의 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다시 대면하게 될 것들이 두렵다. 그의 소중한 이를 또 잃게 될까, 그것이 두려웠다. 이록은 버릇처럼 코팅을 하여 창문에 붙여 놓은 사각형의 조그만 것에 시선을 던졌다.

괜찮아, 짜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새로 떠.☆☆

우습게도, 9년 전의 그 쿠폰을 이록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고 오로지 혼자서만 견뎌야 했던 오랜 시간 동안, 유일하게 그를 버티게 했던 글귀였다. 책 속의 유명한 문구도 아니고 명언도 아닌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의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부서져 내려 폐허가 되어 버린 그의 주변에도 언젠가 새로운 태양이 뜰 거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했을 뿐이었다.
심난할 적마다 쿠폰을 보며 의지를 했듯, 이번에도 이록은 저 조그만 물건을 보며 갈등을 어렴풋이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민혁수 교수님 댁입니까.”
- 네. 맞습니다. 누구세요?
“사모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표이록입니다.”
대답을 하는 이록의 표정이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을 넘나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선 한참 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았나 싶어 이록이 다시 말을 하려는데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음성의 대답이 건너왔다.
- ……표이록? 내가 아는 그 표이록이 맞나요?
“네.”
-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에요? 살아는 있었던 거예요? 나 지금 막 가슴이 내려앉으려고 해.
“걱정만 안겨 드려 죄송합니다, 사모님.”
- 그래요. 충분히 죄송해야 돼. 나 정말 마음 아팠다구요.
마음 아팠다고 말하는 사모님의 목소리는 실제로 울컥하는 듯했다. 이록은 다시 시작되려 하는 이들과의 인연에 복잡 미묘한 감정부터 먼저 들었다.
“자세한 인사는 나중에 올라가서 직접 뵙고 드리겠습니다. 제가 전화를 드린 건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 언제 올라올 건데요? 얼마나, 아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죽겠어요. 아니, 그보다…… 물어볼 게 뭐죠?
“민 교수님께서 혹시 어디가 아프십니까?”
- 응? 아픈 곳 전혀 없는데요. 지난달에도 정밀검진 받은걸요. 왜? 우리 그이 만난 거예요? 어디가 아프대요?
쉬지 않고 물어 오는 사모님에게 이록은 조금 전에 있었던 혁수와의 만남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다 말하고 난 후 들려온 건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이록은 의아해하며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차분하게 기다렸다.
- 우리 그이가 이록 학생을……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나 아직도 학생이라고 부르네. 버릇이 됐나 봐요.
“괜찮습니다, 사모님.”
- 아무튼 이록 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오려고 마음 단단히 잡수셨나 봐요. 그런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다 하시다니. 이록 학생, 꼭 올라와야겠어요. 아니면 우리 그이, 앞으로 더 심한 거짓말도 하실지 몰라요.
사모님은 그렇게 말하며 남편이 했던 하얀 거짓말을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그 웃음소리가 이록의 귀에 머물러 있었다. 매우 오랜만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