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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록은 세운대학병원의 병원장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유신대학병원을 그만두면서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것에 5일이 걸렸고 사는 곳을 정리하는 데 또 하루가 걸렸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어수선한 상황 속에 떠다밀린 탓에, 이록은 혁수와 마주 앉았을 때 적지 않게 지쳐 있었다. 그런 이록을 보며 혁수는 흐뭇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며칠 전 세운대 병원으로 가겠다는 이록의 연락을 받고 혁수는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협박까지 일삼았으니 반드시 올라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시기도 빨랐던 것이다.
이런저런 변명과 협박을 가했지만, 모든 핑계를 거두어들이고서라도 이록은 큰물에서 놀아야 할 사람이다. 혁수는 아꼈던 제자를 향한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가 실린 눈빛으로 이록을 쳐다봤다.
“자네가 올라온 탓에, 유신대 병원에는 티오가 났을 테지. 그 덕분에 교수 자리를 꿈꾸던 어떤 흉부외과 펠로우가 정식 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한 거니 잘 올라온 거야.”
이록은 대답 없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혁수를 응시했다. 병에 걸린 이치곤 지나치게 또렷한 눈빛을 보면서, 사모님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그러자 쿡쿡, 밀려 올라오는 미소가 어색하게 느껴져 억지로 참았다. 그런 이록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혁수가 말을 이었다.
“심각한 협심증 환자가 엊그제 내원해서 지금 입원 중인데 내일 수술이 잡혀 있어. 혈관 상태가 굉장히 안 좋고 시기적으로도 늦어서 스텐트 삽입술은 불가능한 상태야. 원래는 유진표 과장이 집도하기로 했는데, 자네가 해. 유 과장은 다른 환자를 수술할 거야.”
이록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혁수가 그 수술을 제게 의뢰하는 이유를 짐작해서였다.
“스텐트 삽입술이 불가능하다면 절더러 관상동맥 우회술(coronary artery bypass graft, 막힌 관상동맥을 다른 혈관으로 대체하는 수술)을 시술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맞아. 잡지책에 날 정도로 수준급이었던 자네의 그 수술 말이야.”
“오자마자 대수술이라니. 교수님다우십니다.”
“아직 약과야. 난 자네를 마구 괴롭힐 생각이거든. 난 일선에서 물러난 지 꽤 되었으니 제자들의 활약이나 지켜보며 즐겁게 살 거야. 그건 그렇고 관상동맥 우회술을 라이브 써저리(live surgery, 새로운 시술법을 영상으로 생중계하는 형태)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나. 다들 자네가 온다는 사실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어서 말이야.”
한눈에 보기에도 혁수는 신이 나 보였다. 수술실 장면을 실시간 영상으로 송출하여 강당 같은 곳에서 그 동영상을 공개하는 라이브 써저리는, 웬만큼 실력 있는 의사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이록에게 제안할 생각을 하면서 혁수는 내내 싱글벙글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순수한 혁수의 진심을 알면서도, 이록은 괜스레 튕겨 보았다.
“설마 저를 상품으로 여기고 계시는 건 아니시죠?”
“그래, 맞아. 9년 동안 내 뒤통수를 친 대가야. 괘씸한 자넬 팔아서 장사라도 해 볼 속셈이다, 됐어? 환자 자료는 모두 자네 책상에 올려 두었네. 유신대 병원에서 수술을 어떻게 해 왔는지나 설명해 봐.”
“과거에는 수술에 대복재정맥(great saphenous vein, 다리의 정맥)이 대부분 사용되었는데 아무래도 동맥과는 조직의 성격이 다른 정맥 혈관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동맥압력으로 인한 혈관 손상이 누적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내유동맥(internal mammary artery)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동맥은 심장 옆에 있기 때문에 수술에 사용하기가 용이하죠. 또 절제되더라도 몸에 특별한 이상을 일으키지 않고 재발율도 낮은 편이죠.”
“내유동맥이라…… 가슴뼈 옆에 있는 걸 이용한다는 뜻이군. 대복재정맥으론 한계가 많았지.”
“네. 환자의 자료를 살펴봐야겠지만 스텐트 삽입술이 불가능한 단계라면 이 시술을 해야 할 상황일 겁니다.”
“그렇군.”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씀하신 환자를 한번 봐야겠군요.”
이록이 일어서자, 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록은 자신을 바래다주기 위해 출입문까지 따라온 혁수를 문득 돌아보았다.
“왜 속이셨습니까.”
이록의 돌발 질문에 혁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간을 좁힌다.
“어떻게 알았냐.”
“제게 교수님 댁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아셨어야죠. 퀵 보낼 때마다 번호를 썼으니.”
“흐음. 속은 걸 알았으면서도 올라온 이유가 뭐지?”
“사모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교수님께서 제 걱정으로 한숨을 쉬는 걸 한두 번 보신 게 아니라고.”
“거참. 그 사람이 쓸데없는 얘기까지 했군.”
“교수님이 병을 앓고 계셨다는 게 사실이었다면 저는 올라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록의 표정과 말에는 야속함보다는 병이 있다는 혁수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안도하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그것을 혁수도 눈치챘는지 그제야 긴장의 눈빛이 풀리기 시작했다.
“왜?”
“두 번은 겪을 자신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를 속여야 할 정도로 절박하시다는 걸 알았으니, 그래서 올라온 겁니다. 산 사람 소원은 들어주는 게 예의라죠.”
혁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뭐가 두 번이라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대신에 모른 척 저를 갖고 논 셈이었던 이록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괘씸한 녀석.”
“가 보겠습니다.”
혁수는 문을 열고 나가는 이록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문이 닫히자, 들뜬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갔다. 소파로 돌아가는 발길은 더없이 느렸다. 확실히 이록은 변했다. 일주일 전 유신대 병원에서 봤을 때 느꼈던 그 차가움을 피부로 느낀 것이다. 이록을 이곳에 불러들인 것이 실수가 아니길, 그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바랐다.
병원장실을 나와 외과 병동으로 향하는 로비를 통과하던 이록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은 유신대 병원의 그것과 다른 것이 없었지만, 감정의 흐름은 확실히 달랐다. 1학년에 입학하면서부터 이 병원을 보며 꿈을 키워 왔던 그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뭉클하거나, 혹은 서글픈 모습으로 이록의 망막에 아롱졌다.
“야아. 너 립글로스 색깔 천박해 보여.”
“쳇. 싼 티 나는 건 너도 만만치 않아.”
문득 바로 옆의 대기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교복 차림의 여고생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퍼프로 볼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모종의 기시감. 이록은 그 광경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늘였다.
교복, 여고생, 그리고 화장품.
몇 가지 물건들의 연상 작용은, 어떤 오래된 기억을 돌이키게 만들었다. 하영의 죽음이 임박했던 그 즈음에 알게 된 어떤 녀석이 이목구비가 흐릿한 상태로 얼핏 생각난 것이다. 이록은 기억 속 흐릿한 실루엣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려 애를 썼지만 그 얼굴은 끝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잊으려 노력했던 시간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대신에, 다른 것이 떠올랐다.
그 녀석의 이름이…….
‘설은반이었던가.’
***
“1년 차 설은반이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의국으로 뛰어 들어온 은반은 녹초가 된 상태로 늘어져 있는 우석과 태민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어제 봉사활동 일정을 모두 끝내고 올라온 탓에 오늘은 오후에 출근해도 상관없었지만, 저 없이 바쁠 의국원들 생각에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은반의 그 배려를 재빨리 간파한 3년 차 태민이 손까지 흔들어 주는 다정함을 보였다.
“잘 다녀왔어? 보름 동안 공기 좋은 시골에서 푹 쉬었겠구나. 잘 먹고 잘 자니 우리 1년 차 얼굴 빤딱빤딱한 거 봐라.”
“그럴 리가요, 선생님. 으음…… 제가 우리 의국 스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데요. 시골 공기, 그게 다 뭔가요.”
은반이 그윽하게 눈을 감고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양 코를 킁킁대자, 태민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부탁의 말을 꺼내었다.
“참, 너 온 김에 별관 지하 강당에 가서 라이브 써저리 좀 참관하고 와라. 새로 오신 교수님 집도하에 관상동맥 우회술 수술 중이시다. 아침 7시에 시작했으니 지금 중반 즈음에 접어들었겠다. 그래도 흉부외과 라이브 써저린데 우리 중 한 명이라도 가서 참관해야 모양새가 좀 나지 않겠냐? 네 바이탈이 제일 쌩쌩해 보이니 부탁한다. 급한 일 있으면 내가 문자 넣을게.”
“에에? 선생님. 저 환자들 먼저 둘러보고 오면 안 될까요? 그 후에 꼭 강당으로 간다고 약속드립니다.”
“이게 죽을라고. 1년 차가 어디 감히 3년 차 말을 씹어? 병원 기강이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안 그냐? 설은반?”
옆에 앉아 있던 2년 차 우석이 발로 걷어차는 시늉을 하며 대뜸 발끈하고 나서자, 은반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헤헤. 왜 이러세요. 권우석 선생님. 제가 언제 안 간다고 했나요? 갑니다, 가요. 제 습관이 원래 그렇거든요. 누가 명령을 하면 1차 튕기고 본다, 2차도 튕기고 본다, 3차에 드디어 수락한다. 대한민국은 원래 삼세번의 나라, 아닌가요?”
은반은 우석의 올라간 다리를 꾹 누르며 웃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세운대 병원 흉부외과 의국에서 폭력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접하고 싶으십니까? 권 선생님? 그것도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너 여자가 맞긴 하냐?”
“선생님이 남자가 맞는다면 저도 여자가 틀림없겠죠.”
은반의 한 방에 우석은 대꾸를 그만두고 눈만 흘겨 대었다. 평소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우석의 입에서 또 다른 힐난이 쏟아질까, 은반은 냅다 돌아섰다.
“그럼, 선배님들. 저는 강당으로 갑니다. 슈우웅!”
“권우석, 넌 은반이한테 왜 그래.”
은반이 사라지자, 태민이 우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톰과 제리도 아니고, 만나기만 하면 투덕거리는 통에 선배로서 중심을 잡아 주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밉잖아요. 세운의대 출신도 아닌데 저리 고개 빳빳한 꼴이라니. 우리 세운대 출신들은 성골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구요.”
“별게 다 밉냐, 넌? 은반이가 우리 병원에 지원한 인턴들 중에 성적 1위란 거 몰라? 병원에서 다른 대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뽑은 이유가 있는 거야. 병원에서조차 성골 진골 그만 나누고, 새로 오신 표이록 교수님에 대해서나 불어 봐. 그 교수님이 학창 시절 때 레전드였다던데. 왜 지금까지 부산에 계셨던 거지?”
“그건 저도 들은 게 없어요. 흐음. 전국 수석을 도맡아 했었단 얘기는 들었어요. 그리고 성격이 장난 아니시라던데요?”
“그렇겠지. 휴우…… 죽어났구나.”
별다른 정보도 없이 그저 ‘성격이 장난 아니다.’라는 사전 인식이 박혀 두 사람은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강당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부 인사들로 보였다. 모두 정면에 보이는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은반은 제일 뒷줄에 조용히 앉았다. 강당 입구에서 들고 들어온, 이번 라이브 써저리 관련 팸플릿은 둘둘 말아서 뻐근한 양쪽 손목을 툭툭 두드리는 데 썼다. 스크린을 응시했지만 환자들을 보러 갔어야 했다는 아쉬움에,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스크 위로 드러나 있는 집도의의 눈에,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묘한 두근거림, 이어지는 낯익은 느낌에 은반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얼굴 전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의 분위기는 그녀에게 꽤 익숙한 느낌으로 와 닿았다.
갑자기 스크린 속 집도의가 놀라우리만큼 간결한 동작으로 카메라를 짧게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는 착각 속에, 은반의 머릿속은 마구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컥, 잡음을 내고 일순 멈춰 버린 건 그때였다.
설마…….
“쌤…….”
저도 모르게 그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은반은 정신없이 둘둘 말았던 팸플릿을 다시 폈다. 표지를 주욱 훑어 내려가는 손가락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아래 칸에 쓰여 있는 명단을 보았을 때, 은반은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환자: 강민수(57세)
집도의: 세운대학병원 흉부외과 전문의 표이록
은반은 다시 고개를 들고 스크린 속 이록을 보았다. 그제야 울컥하는 심정이 입으로 터져 나와 훅, 하고 숨을 터뜨렸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자신에게 장담했던 것처럼, 그녀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두 달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존재가 지금 그녀의 앞에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 와중에 태민으로부터 문자가 들어왔다.
유진표 과장님의 수술실 13번 방으로 콜. 어시(assistant)가 부족하다 하니 지금 당장 들어가기 바람.
은반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보류할 수밖에 없게 한 문자를 야속한 듯 쳐다보다가 다시 스크린에 집중하는 것만 하염없이 반복했다.
저녁 7시 즈음, 이록은 중환자실의 콜을 받고 달려왔다. 라이브 써저리로 수술이 진행되었던 강민수 환자에게서 바이탈(vital)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근처에서 다른 환자들을 보고 있던 태민과 우석, 그리고 흉부외과 치프인 민기까지 모두 몰려들어, 오늘 처음 대면하게 된 이록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간호사가 말을 이었다.
“맥박과 혈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수님.”
“차트 가지고 와요.”
간호사가 건넨 차트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이록은 고개를 들고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중환자실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강민수 환자, I/O 체크(환자에게 투여된 수액량과 소변을 비롯한 배출량의 비교)를 누가 했지?”
“접니다, 교수님.”
우석이 나서서 손을 번쩍 들었다. 강민수 환자가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로 내려왔을 때 마침 유일하게 자리에 있었던 탓에 바이탈이나 I/O체크를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록의 잔뜩 굳은 표정과 대면하자, 우석은 금세 자신이 오류를 범했음을 직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몇 년 차야?”
“2년 차 권우석입니다.”
따악!
우석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이록은 그의 뺨을 거칠게 올려붙였다. 그 힘이 굉장히 강하여 우석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하였다. 순간적으로 중환자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태민과 민기, 그리고 간호사들까지 숨을 죽이며 이록의 눈치만 슬슬 살펴 대었다.
“지금 I/O가 파지티브(positive, 투여된 수액량이 소변량보다 많음)야. 몇 시간마다 체크한 거야?”
“세, 세 시간마다 체크를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수술장에서 나온 지 만 하루도 안 된 중환자의 I/O를 3시간마다 체크한다는 게 말이 돼? 관상동맥 수술은 추후 최소한 3일 동안 매 시간 경과를 보면서 바이탈 체크를 해야 돼. 그건 본과 2학년 전공 책에도 나와 있어. 3시간은 대체 누구네 집 개새끼 이름이지?”
“죄송합니다, 교수님. 중환자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체크 주기가 항상 세 시간이어서.”
“레지던트는 뇌가 없는 졸개가 아니다.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
“네. 알겠습니다.”
“라식스, 도파민을 써서 추후 바이탈부터 잡아 놔. 그 후에 나한테 노티(noti)해.”
“네, 교수님.”
우석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돌아선 이록은, 마침 뒤에 서 있는 레지던트로 보이는 여자와 마주쳤다.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다소 당황한 표정의 그녀를 스윽 무심하게 스치듯 지나갔다.
“쌤…….”
하지만 어딘가 제법 귀에 익은 말투가 들려왔을 때 이록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깊은 눈빛부터 목에 걸린 신분증을 확인하기까지, 이록의 시선은 한동안 그녀에게 붙박여 있었다.
「Ban’s note
누군가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그날. 9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나는, 그토록 벅찼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