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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꽃잎이 떨어지던 4월의 아침. 그날은 다른 날과는 달리 유난히 꽃 내가 짙었다. 사방에서 향내가 진동하였다. 굳이 애써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은은한 향이 풍겨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족의 일대는 목련의 은총에 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하늘이 도운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져야 하는 꽃이었다. 본디 목련은 이른 봄에 폈다가 소리 없이 지는 꽃이 아니던가. 그런 꽃이 아직도 피어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리고 역시나 말 옮기기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혀를 놀려 댔다. 강족(族)의 시조가 부족의 앞날에 행운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라고. 부족의 부흥을 곧장 자신들의 영광으로 연결하곤 본인들의 평안을 기대하였다.
봄의 끝자락이 다가오던 날. 하늘거리는 꽃잎이 깃털같이 내려앉던 그날은 모두에게 특별했다. 낙도국의 산맥에 숨어 사는 강족. 검은 머리칼이 마치 하늘에서 짠 베를 떠올리게 한다던, 강족 족장의 고명딸이 시집가는 날이었다.
“누님.”
겹겹이 쌓여 있던 천을 걷어 내고 장신의 사내가 신부실로 들어왔다. 사내의 발걸음엔 조심성이 없었다. 명색이 족장의 딸이 준비하고 있는 곳임에도,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밀실로 걸음을 하였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신부는 신부대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고운 자색의 비단으로 혼례복을 차려입은 신부는 한 떨기 꽃과도 같이 우아한 자태로 고개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신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언이구나.”
“식장까지 같이 간다고는 하지만, 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멋쩍은 얼굴을 한 사내는 쑥스러운 듯이 축하의 인사와 칭찬을 건넨다. 그러자 신부의 얼굴에도 수줍은 미소가 감돈다. 사내가 칭찬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사내의 표본과도 같았다. 남자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란 동생이었다. 그렇다 보니 표현하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무뚝뚝한 오라버니들을 닮아 버렸다. 생긴 것은 참 곱상하게 생겼으면서 속은 전혀 그렇지 않다니. 신부는 다소 씁쓸한 눈치다.
“설족의 영역까지는 제가 잘 모실 테니 걱정 마세요.”
“사언이가 있어 든든하구나.”
“암요. 발톱이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면 언제 써먹겠어요.”
그런 신부의 얼굴을 다르게 읽은 동생은 엉뚱한 곳에서 주먹을 쥐어 보인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동생의 다짐에, 신부는 한 번 더 한숨을 쉰다. 영문을 모르는 사언은 시집가는 누님이 신부 병에 걸렸겠거니 하며 입매를 다질 뿐이다.
“가마는 준비되었니.”
신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기다리고 있던 물음을 건넸다. 의외의 행동이었다. 사내 역시 먼저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슬며시 놀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벌써 마련되었습니다. 타기만 하면 됩니다.”
돌아오는 것은 걱정 말라는 확신에 찬 대답. 당차게 말하는 동생은 오늘따라 영락없는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구한 날 돌아다니기에만 바쁘던 동생이었다. 밤이면 밤마다 어디로 가는지 종적을 감추기가 일쑤고, 학문은 물론이거니와 통치에도 관심이 없어 망나니라고까지 불리던 동생. 그녀의 동생은 세간에선 평판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랬던 동생이 오늘따라 달라 보인다. 설족의 영토로 들어가는지라 그 역시 멋들어지게 옷을 차려입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부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홍색이 그와 유난히 어울린다.
신부는 그를 잠자코 지켜본다. 새삼 세월의 위력이 느껴진다. 조금 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준비해 놨으니 타면 된다는 확인을 건넸다. 신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갈 테니 사언인 먼저 가 있거라.”
“알겠어요. 안 그래도 혼인 전 신부의 곁엔 오래 있는 게 아니라 하여 혼났지 뭡니까.”
사내는 한번 웃어 보이더니, 물건을 확인하고 오라 했다며 한 바퀴 돌아 휘장으로 분리된 공간으로 건너갔다. 설족에 보낼 혼수가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족장이 특히 신경을 썼다 하여 조금 전까지도 물건을 채워 넣느라 사람들이 들락거리던 통이었다.
역시나 곧이어 동생의 감탄이 터져 나온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동생의 눈에도 혼수들이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다. 신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준비로 바빠 그쪽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판국에 확인하나 마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 가장 들떠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의사가 없는 혼인. 세력을 키우기 위해 부족의 장들이 모여 일방적으로 혼인을 결정했다. 자신은 그 사이에 끼인 희생양이었다.
고개를 떨어트린 신부가 뒤를 확인해 본다. 동생은 아직 정신이 팔려 이쪽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며 걱정 말라던 동생. 그렇게 말하는 동생이 제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잘 안다. 태어나서부터 웃어른들의 치마폭에 싸여 자란 그였다. 데면데면하게 자란 그가 자신의 사정을 알아주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래서 동생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동생의 위치를 파악한 신부가 주먹을 펴 보인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대나무 이파리.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듯한 이파리엔 자그마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부는 흡사 고운 옥가락지를 보는 양, 찬찬히 그 글씨들을 읽어 내려간다.
초승달의 끄트머리가 서산에 걸리었을 때 붉은 바위가 정승같이 서 있던 길목으로.
익숙한 필체에선 장엄함이 풍긴다. 한 자 한 자 조심히 써 내려갔을 그. 보이지 않게 전달하기까지 그의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가 자리 잡았을까. 대나무 이파리가 그처럼 생각되어, 신부는 소중하게 잎을 끌어안았다. 그 작은 행동에도 잎은 쉽게 부스러져 흩어진다.
행여나 조각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확인한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아슬한 타이밍에, 동생이 다시금 그녀에게로 걸어 들어온다.
“행복하셔야 합니다. 누님.”
“그래, 고맙구나.”
행복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이 들을 말이 아니다. 그녀는 쓴웃음을 털어낸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여파가 작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은 결코 부귀를 바란 적이 없었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였으나, 사치를 바라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하나. 한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백년해로하는 것.
신부는 인사를 하고 나가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본다. 곱게 곧은 등. 한눈에 보아도 귀하게 큰 손이라는 티가 난다. 철없는 동생이었지만 오늘로써 마지막이었다.
부족의 눈에 뜨이지 않고 지내려면, 귀여운 동생의 근황조차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잠잠해지기를 바라며, 훗날에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휘장 너머로 사라지는 동생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청초한 그녀의 눈가로 한 줄기 눈물이 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행복하라는 말이 이처럼 쓰게 들릴 때가 있을까. 부족의 고난과 맞바꿀 자신의 행복. 행복해지라는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여러분.”
그리고 사언이도.
눈을 뜬 신부에게선 망설임이 사라져 있다. 볼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그녀의 망설임은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는 강족의 화연이 아니었다. 다짐하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는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다. 행복하라는 동생의 말을 갈무리하며 그녀가 드디어 일어섰다.
잠시 뒤, 비단 자락이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사이로 한 마리의 나신이 드러난다. 정갈한 회색빛의 털을 가진 그것은 늑대의 모양을 하고 있다. 신부가 사라진 곳에서 대신하여 나타난 늑대는 자신이 그 신부라도 되는 양 다시 한 번 제가 있던 곳을 짚어 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리 열어 둔 사창 너머로 몸을 날리고 만다.
목련의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던 봄. 최고의 신붓감이라 하여 부족의 화합 도모에 지렛대가 될 것이라던 족장 딸의 혼인이 있던 날. 비단옷만을 남겨 둔 채 신부가 사라졌다. 그 누구도 신부의 이탈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두가 들떠 자신의 영광에 심취해 있을 때 신부는, 아니 한 마리의 늑대는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신부가 사라졌음을 눈치챈 것은 시간이 한참이나 흐르고 나서였다.


2.


주위로 푸른 잔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형상이 채 그려지기도 전에 달려 들어와서는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일일이 관심을 두기엔 시선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에 사언은 대신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로는 화려한 가마 한 채가 그를 뒤쫓는 중이었다. 네 명의 장정이 가마를 이고 있고, 그 옆으론 각각의 혼수를 짊어진 짐꾼들이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다리를 놀리는 중이다. 출발하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언은 씩 웃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푸른 숲의 물결이 다시금 제게로 찾아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하나의 바람처럼 느껴질 것이었다. 누군가가 지나갔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한 줄기의 돌풍이 지나갔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바람이 아니고 돌풍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바람과도 같은 속도로 숲을 건너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인간들은 자신들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몇 번을 맴돌아도 그저 바람이 지나갔으려니 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말 것이다. 그랬다. 그들의 무리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과 달랐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였다.
초수(肖獸). 그들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언뜻 보면 사람과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모습은 매한가지였다. 후각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사언조차도 누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닮은 것은 겉모습뿐이었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인간과 초수는 그 근본 자체가 달랐다.
처음부터 ‘초수’라는 단어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원래부터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왔다. 인간들의 눈을 피해 살아왔고 숨어서 세력을 늘렸다.
몸을 숨겼던 자신들이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몇백 년 전부터였다. 오랜 평화로 인해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 버렸고, 그 결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지에서 한둘씩 인간에게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간들은 그들과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들과 닮았지만 너무나도 다른, 사람의 탈을 한 짐승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랬다. 초수(肖獸). 닮을 ‘초’ 자에 짐승 ‘수’ 자를 사용하는 그것은 짐승을 닮았다는 의미다. 인간이지만 짐승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멋대로 붙여진 이름에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짐승에 가깝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짐승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사람의 모습을 했지만 그들의 습성은 근본적으로 짐승에 가까웠다. 짐승의 모습을 할 줄 알았고, 사람의 모습을 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사람으로 변한다 해도 그 뛰어난 짐승으로서의 능력은 가시질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인간들은 자신과 다르다 하여 그들을 짐승이라 명명했다.
다만 짐승이라 해도 될 것을 구분 지어 부른 이유는, 인간과 너무나도 닮은 나머지 짐승이라기엔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초수’는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이었다. 정작 자신들 사이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인간이면 무슨 소용이고 짐승이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숲을 건너고 있는 자신들이 바로 그 초수였다. 그중에서도 늑대의 원형이었다. 인간의 모습임에도 그들이 빠르게 달릴 수 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참을 달리자 숲의 경계가 모습을 보였다. 줄곧 이어져 오던 녹음이 끊어짐에, 사언은 황급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행렬의 무리가 달음박질을 멈춘다. 엄선한 이들로 뽑았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아무리 짐승에 가깝다 해도 먼지 하나가 날리지 않을 수가 있다니. 느닷없는 지시에도 불평 하나 없다. 사언은 피식 웃어 보이곤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큰 바위 하나를 어렵지 않게 타고 올랐다. 몇 번 발돋움질하여 정상에 오르자,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천하의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 보는 광경은 넋을 놓게 했다.
주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간을 찡그리고 집중해 살펴보자 곳곳에서 작은 마을들이 보인다. 이 경계선부터는 지금과는 달리 숲이 한층 옅어지기 시작한다.
돌아다니는 것을 즐겨 많은 곳을 들렀지만,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족장의 아들로서 멀리 나가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나가도 곧장 파수꾼들에 들켜 끌려왔다. 그나마 요즘엔 요령이 생겨 하루까지는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쫓고 쫓기던 추격전이 생각나자, 절로 웃음이 난다. 그랬던 자신이 지금 이렇게 버젓이 부족의 경계선에 서 있다. 애써서 호위를 맡은 보람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설족의 영역에 들어오겠는가. 이 선을 넘으면 설족의 영역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본디 불가침 영역이었다. 부족과 부족 간의 영역은 정해진 바가 있어 특정한 일이 아니고서야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되었다. 넘어가는 순간 서로의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초수. ‘짐승을 닮음’. 그들이 짐승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사람은 서로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은 다르다. 서로 죽여 먹이로 삼는 것이 가능했다. 죄책감은 없다. 어차피 죽고 나면 똑같으니까. 인간의 모습은 겉가죽에 불과했고 속은 짐승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자신들은 늑대. 그러니까 사언은 한마디로 늑대였다. 늑대인간. 그것이 바로 강족이었고, 그는 족장의 넷째 아들, 강사언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사람의 모습을 한 짐승을 잡아먹으니. 더럽다 하여 침을 뱉고 함부로 무기를 날린다.
상황이 그러하니 같은 초수끼리 배척의 아픔을 나눌 법도 하건만 그것은 또 아니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일족의 일원들뿐. 설족이 강족의 뿌리에서 분화된 분가라고 할지라도 같게 적용되었다. 서로서로 경계하고 헐뜯으니 짐승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사언은 자신이 인간이 아님에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자신은 자신만의 삶이 있으니 말이다. 인간이 이해를 못 한다 하여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답게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채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인간은 자신들을 구별할 줄 모르고, 짐승들은 함부로 공격해 오지 않는다.
그만하면 살 만하지 않은가?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
“누님은?”
“……피곤하다시며 주무신다 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내려와 행차를 돌아보자, 시녀 하나가 따라와 머리를 조아린다. 왠지 모르게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언은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으로 치면 일주일 정도 걸릴 거리를 달려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기 전에 출발해 해가 중천에 떴으니 한나절을 달린 셈이었다. 그러니 지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혼인이라 하여 어젯밤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했다. 깨우지 말라는 시녀의 당부가 있었기에 사언은 그러려니 한다. 시집가는 여자의 마음을 알지는 못하지만 평온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의 모습으로 왔다면 더 빨랐을 텐데.
사언은 아쉬운 마음에 혀를 축인다. 왜 굳이 인간의 혼례를 따라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는 자신들이라곤 하지만, 애초에 둘은 존재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짐승의 모습이었다면 이보다 더 빨랐을 것이고, 편하기도 했을 것이었다.
노인네들은 이래서 도움이 안 된다. 강족의 늙은이들은 다 그랬다. 점잖고 아는 체만 할 줄 알지 정작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저렇게 늘어놓은 혼수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세에 무관심한 자신이라지만 지금 이 혼례가 팔려 가듯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디 거하게 치러야 할 혼례를 이렇게 신부 하나와 최소한의 측근으로만 진행할 이유가 있던가.
혼례는 눈속임에 불과하고 실속을 챙기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오랫동안 모아 놓은 부족의 재산이 공으로 넘어가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입 안이 쓰다.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제 몫까지 남지 않으리라는 것은 안다. 제가 못 가질 재물들이 엉뚱한 놈들의 손에 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강족에서 떨어져 나간 떨거지 놈들의 수장이라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파투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사언이 그러지 못하는 것은, 말은 그렇게 해도 실상 세력은 설족이 우위에 있기 때문. 영역만 따지더라도 자신들보단 설족이 더 방대하다. 인간들을 피해 꼭꼭 숨은 자신들과는 달리, 설족은 인간들, 다른 짐승들과 맞서 가며 영역을 키워 냈다. 그러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가마를 아무리 호화롭게 꾸며 봐야, 그들의 눈엔 같잖게 보일 것이다. 옛날 자신들이 모셨던 상전의 딸이 조촐한 행차를 한다며 아마 비웃지 않을까. 재물은 취하되, 축하객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라, 사언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길게 자라더니 제 주먹을 파고든다. 하지만 돌아가기엔 늦어 버렸다. 다시금 달음박질을 시작한 그들의 시야로 거대한 설족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 *

무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신분을 대라.”
겨우 성문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검은 천을 어깨까지 두른 무리가 사언의 일행을 막아 세웠다. 날카롭게 벼른 창을 어깨로 들이민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어 버리겠다는 위협적인 태도다.
사언은 당황하고 말았다. 기가 찬 나머지 대답도 나오지 않는다. 어서 비키라는 심산으로 둘을 바라보았지만 기세가 등등한 것은 오히려 저쪽이었다. 성명을 대지 않으면 처리해 버리겠다는 협박이 날아오기까지 한다. 그 기세가 농담조로 들리지 않아 사언은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딱 봐도 혼례 행차라는 모른단 말인가. 자색에 홍실로 꾸며 놓은 마차가 혼례 용도가 아니면 어디에 쓰이겠는가. 천으로 눈을 가렸다면 보이지 않아서라고 이해를 했을 것이다. 멀쩡히 보이는 주제에 이렇게 막아서다니 무슨 베짱이란 말인가. 기가 찬 나머지 웃음이 다 새어 나온다.
“신분을 대라. 그러지 않으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두 눈이 있다면 똑바로 봐라. 그대들은 혼례를 치르러 오는 신부의 일행에게 이다지도 무례한 대접을 한다는 말인가!”
웃음도 잠시, 안색을 싸늘하게 굳힌 사언이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러자 두 사내의 미간이 움찔한다. 당황한 두 개의 시선이 사언의 뒤를 향한다. 홍실로 수를 놓은 가마가 눈에 들어온 모양인지, 그제야 난감한 기색이 된다. 기세를 몰아 사언은 언성을 높였다.
“나는 강족의 사언이다. 그리고 이 가마에 오른 분은 너희 족장의 부인이 되실 분이다! 우두머리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즉시 비켜야 할 것이다.”
“……들어가시오.”
미심쩍은 눈초리가 가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벼르고 있던 창을 거두어들였다.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는 사내들을 보며 사언은 이를 으득 갈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같은 늑대라 하여 그래도 말은 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돌아가는 사정을 그렇게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마을은 혼례를 한다 하여 한 달 전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건네어지고 덩달아 들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화려한 가마를 끌고 가도를 걷는 중임에도 그들을 맞이하는 시선 하나 없었다. 다른 영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환영의 무리조차 없다. 그저 무관심한 눈초리가 사언에게로 뻗어졌다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누님이 가마에 타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만일에 말을 타고 갔거나 걸어갔다면 이러한 분위기를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방외객인 자신마저 가슴이 따끔따끔한데,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야 할 누님은 얼마나 지독한 무관심 속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저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사언의 시선이 가마에 머무른다. 누님이 유난히 조용한 탓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렇게나 풀이 죽어 얼굴 한번 비치지 않는 것이리라. 누님에 대한 연민이 절로 솟아올랐지만 그 순간에도 궁궐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던 건지, 궐 앞에 모인 한 무더기의 인파가 보인다. 적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성난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한 숫자도 아니었다. 대강 눈으로도 짚어지는 환영 인파를 훑어보며 사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세 좋게 달려온 것에 비해 너무나도 대접이 형편없다.
이게 다 저 싹수없는 수장과의 혼인을 추진한 노인네들 때문이다. 갈수록 세력이 늘어난다는 소문을 듣고는 떡고물이라도 얻어 보고자 딸을 내어 주며 줄을 서려 하는 것이다. 설족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걸까.
모습을 확인할 정도의 거리쯤에서 사언은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오던 혼례 행차도 자연스레 멈추어 선다. 걸음 소리가 사라지자 적막이 대신하여 찾아든다. 사언도 말이 없었고 버젓이 서 있는 설족의 무리도 말이 없었다. 이미 심사가 뒤틀릴 대로 틀어진 터라 사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남자는 유약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키는 큰 데에 반해, 살집은 없었다. 옷자락 안으로 비치는 근육이 아니었더라면 성별을 착각했을 법도 하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이 한몫을 거들었을뿐더러, 남자의 얼굴엔 여자들이나 지을 법한 눈웃음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