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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기세가 세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사언이 사내를 주목한 이유는 주변의 인파들이 그를 중심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족장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이 저렇게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있을까.
그래서 사언은 저 사내가 족장이라 단정 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받았던 무례한 대접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수고했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을 해도 되는가.”
저 남자가 족장이란 말이지. 어지간히 인재가 없었나 보다. 기세가 강하기는 개뿔. 당장에 쓰러져도 어색하지 않을 남자로 보인다. 이를 내어 물어뜯는다면 그 자리에서 척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족이 이러한 대접을 했던 것인가. 자신들이 무서워서.
사언은 비릿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세의 정도를 정하자 긴장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사언은 마을에서 노닐었던 제 모습으로 돌아와 그를 비웃었다.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았다.
“지금은 무색해졌다곤 하나, 강족은 명색이 상전의 부족이다. 그대들의 시조가 우리 강족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그런 곳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인데 어찌 최소한의 심복들로만 오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당신들 쪽에서 나의 누님을 맞이하러 오는 게 맞지 않은가?”
가만히 말을 듣는 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는 않아 보였다. 사언이 늘어놓는 말들이 늘어날 때마다 점차 굳어 갔다. 표정을 감추려는 것인지 언뜻 보기엔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언의 눈에는 점차 굳어 가는 사내의 기색이 느껴졌다.
남자가 밀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본능이 활개 치기 시작한다. 그래. 이런 게 옳다. 이런 게 바로 강사언이었다. 기죽어서 꼬리를 말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답지 않다.
“입이 있다면 대답해 보라. 평생 그대들의 영역에서 살아야 할 누님인데, 축하를 받아야 마땅한데도 우리를 거절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이냐. 아, 재물은 거절하지 않는다고 들었지.”
한 번 입을 열자, 말이 유수와도 같이 쏟아져 나왔다. 정작 말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입이 움직였다. 불만스러웠던 생각이 여과를 거치지 않고 말로 바뀌어 그대로 남자에게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대들의 영토엔 그렇게도 재물이 부족한가. 그래서 먼 곳에서 온 신부를 이렇게 취급한단 말이냐.”
사언은 신이 난 것처럼 그대로 남자를 몰아붙였다. 주위의 분위기는 죽은 듯이 얼어붙었다. 누구 하나 속삭이기만 해도 여실히 전해질 정도로 살벌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남자도 침묵한 채였다. 자신의 말에 무엇 하나 대꾸하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통쾌했다. 말로 그들을 이긴 것이다. 이렇게나 볼 게 없는 남자였다니. 이렇게 된 판국이니 이대로 가마를 돌려 돌아가도 될 것 같다. 누님도 썩 내키는 기색은 아니지 않던가.
지금 이렇게 된 와중에도 누님은 목소리 하나 건네지 않는다. 좋을 대로 하라는 것일까. 사언은 어디 입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노려보고 있자, 남자가 긴 침묵 끝에 입을 떼었다.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의 것이었다.
“그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군요.”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지목한 쪽이 잘못되었습니다.”
남자는 한숨을 쉬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다 가까이 서 있던 시종 하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얼씨구.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사언은 삐딱하게 서서는 그들이 하는 양을 구경한다. 은밀하게 나눈 대화였지만, 사방이 고요했다. 그 덕에 서 있는 곳까지 대화가 들려왔다.
“아한 님은 어디 가셨나.”
“곧 오신다고 하셨는데……. 다시 가 보겠습니다.”
아한? 처음 듣는 이름이다. 누구기에 저 둘이 존칭을 써 가며 대한단 말인가. 자신들과 다른 체계라도 있는 것일까. 족장이 최고위가 아니라 그 위로 더 높은 인물이 있다는 것일까.
자신들을 쏙 빼놓고 돌아가는 판국에 사언은 눈살을 찌푸린다.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쥐 죽은 듯이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던 공간이 점차 사람들의 음성으로 메워지기 시작한다.
아한 님이다. 아한 님이야.
소란스러워짐과 동시에 인파가 둘로 갈라졌다. 인위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갈라진 것이었다. 사언은 갈라진 틈에 집중했다.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늑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진다.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불평은 없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이 그들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이윽고 느긋한 걸음이 멈추어 섰다. 족장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어느새 방금 새롭게 등장한 남자의 뒤에 서 있다. 그 역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남자에게 예를 표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덕에 소음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긴장이 형성되었다. 소란을 듣고 있던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일순간에 소음이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남자의 시선이 뒤를 향해 꽂혔다. 시선을 받은 것은 처음 사언을 상대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남자의 이목이 제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답하는 시선이 사언을 향했다. 그러자 그 시선을 따라 남자의 고개도 함께 돌아간다. 서릿발 같은 눈동자 두 개가 사언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접이 미흡하다시며 무례한 게 아니냐는 역정을 듣고 있었습니다.”
저게 다 일러바치고 있어.
계집의 얼굴을 한 사내는 아무래도 족장이 아닌 듯했다.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 조아리는 모양새나 냉큼 일러바치는 꼴을 보더라도. 아무래도 그보다는, 조금 전 나타나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듣고 있는 남자가 족장인 듯 보인다.
예측이 맞아떨어진 건지 남자는 보고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제법 세세하게 간추려지는 말을 듣고 나자 그는 잠자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금 사언에게로 시선이 꽂혀 들었다.
눈빛이 얽히자 사언은 얼떨결에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강렬한 시선이 닿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게 되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럴까. 별로 꿇릴 구석도 없는데 잘못한 개처럼 주춤거리다니. 잘못한 것도 없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도 되는데.
피하지 말고 자신의 저력을 그대로 보여 주자며 사언이 투기를 모은다.
“그대가 강족의 사람인가.”
이번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의 시선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저를 옭아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기로에서 사언은 남자와 마주한다. 그리고 생각했다.
참 강렬한 기백이라고.
처음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사언이 떠올릴 수 있었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외의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먹을 잔뜩 들인 붓으로 순식간에 그림을 그려 가듯, 남자의 굵은 선들이 순식간에 뇌리로 박혀 들었다.
폭포수와도 같은 머리칼은 허리 아래로 굽이쳤다.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희디희다. 섬광과도 같은 햇빛이 날아들자, 폭포수는 굽이치며 잔뜩 머금고 있던 빛을 사방으로 내뿜는다. 남자가 그 순간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더라면, 사언은 꼭 시간이 멈춘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남자는 하나의 화폭과도 같았다. 색을 전혀 들이지 않았지만, 굵은 먹으로 그린 화폭은 상상 이상의 강렬함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 오직 하나. 푸르다 못해 시린 시선만이 생생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거대한 산맥을 연상하게 하는 남자의 존재감에, 사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난이 아니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못해 찌릿찌릿했다. 어마어마한 기백을 한 몸에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밀리고 있었다. 반항 한 번 못 한 채로 형세가 역전되었다.
사언은 억지로 그 시선을 뿌리쳤다. 고개를 머리칼 털어 내듯 강하게 한 번 휘젓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밀릴 순 없다. 억지로라도 남자의 도발에 응수해야만 했다.
“그렇다. 강태협의 넷째 아들이자, 오늘 혼례의 호위를 맡은 강사언이다.”
다행히 목소리는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무엇이 불만이기에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좌군장을 곤란하게 하는가.”
남자는 흡사 아이의 투정을 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시선은 얼핏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비웃는 낯으로 사언을 대하고 있었다.
사언은 그런 부분에 대해선 민감했다. 자신을 욕되게 하는 면에 한해서는 끝도 없이 예민해지는 성정이다. 자신의 직감이 소리친다. 널 비웃는 거라고. 질 수야 없지. 사언은 한쪽 입술을 크게 틀어 올렸다.
“사돈국에 대한 태도가 졸렬하기 짝이 없다. 재물만 취하지, 축하객들마저 받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환영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알아서 찾아오게 해 놓고는 하마터면 문전박대를 당할 뻔했다.”
그 자리에서 세게 나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쫓겨났을 것이다. 입을 열수록 말에 힘이 실린다. 사언은 조금 더 강하게 남자를 몰아붙였다.
“우리는 강족이다. 일찍이 갈라져 따로 분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리가 본가 격이고 상전이다. 발 벗고 나오지는 못해도, 적어도 예의는 차려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군. 그게 아니면…….”
사언의 두 눈이 도발하듯이 길게 휘어졌다.
“그대들의 부족은 예의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가.”
말을 마치자 주위에서 동요가 일었다. 족장이 앞에 있었기에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진 것이었다. 소란의 틈에서 남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듣지 못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저러는 걸 거다. 왜. 오래간만에 옳은 말을 들으니 귀가 번쩍 뜨이더냐. 사언은 어떠냐는 듯이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설족의 영역에 들어온 후 간만의 승리였다. 혈류가 빠르게 치솟을 만큼의 쾌감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줄곧 아무 말 없던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재미있는 말이군. 일리가 있어.”
남자는 정말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한다. 덕분에 사언은 당황해 버렸다. 화를 내고 욕을 했으면 했지, 쉽게 잘못을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슨 의도인가 싶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남자의 곁으로 그제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늑대 한 마리가 다가섰다. 은빛 털을 가진 그것은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건지 남자의 발밑을 맴돈다. 남자는 제게 얼굴을 비비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든다. 다시금 시선이 꽂혀 들었으나 말과는 달리 눈빛은 매서웠다.
“잘못은 했으니 사과를 해야겠지. 사과는 당사자에게 직접 하면 되겠지.”
“……어떤 방식이든 좋다.”
“그럼 해결됐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신부를 그대로 두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으니.”
남자가 느긋한 걸음을 시작했다. 조용하지만 큰 보폭으로 순식간에 사언의 쪽에 가까워진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피부에 닿는 저릿함이 강해졌다. 꼭 번갯불에 맞은 것처럼 온몸에 맴도는 혈류가 뜨거워져 왔다.
남자가 드디어 사언의 곁을 지나쳤다. 사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로 붙박여 있었다. 지나치려는가 싶던 순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쇠로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대는 혼례를 문제 삼는 게 아닌 것 같군.”
사언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남자를 응대했다. 마주친 얼굴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약점이라도 잡은 듯이 입술 끝엔 비웃음이 묻어 있었다.
“조금 전부터 목덜미가 따가워.”
사언이 눈을 크게 떴다.
“꼭 누가 물어뜯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뒤편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멀어지자, 따가울 지경이었던 피부가 평온함을 되찾는다. 그러나 심장은 그렇지 못했다. 들켜 버렸다. 비밀 이야기를 들킨 것처럼 심장이 발끝으로 추락해 버렸다.
혼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언이 일찍이 혼례에 큰 관심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누님을 불쌍하게 여기게 된 것은 이곳에 와서다. 무서울 정도로 무관심한 시선들을 보며, 벌레 대하는 듯한 설족의 시선을 보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사언이 안타까워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재물들. 그리고 명예. 혼례를 운운한 것은 핑계였다. 단지 그것을 도구로 삼아 위아래의 예의에 대해서 운운했고, 자신도 못 가지는 재물들을 쉬이 가져가는 설족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자신이 분개했던 것은 그 부분이다.
남자는 그것을 읽어 냈다. 너무나도 다른 존재감으로 말미암은 질투를. 저보다 나은 수컷을 대하는 시기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족장보다 몸집이 컸더라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거만한 남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골격은 족장이 훨씬 더 컸고, 얼핏 느껴지는 기력 또한 남자 쪽이 훨씬 우세했다. 괜히 족장이 아니었다. 당황한 사언의 눈동자가 남자의 뒤를 쫓는다.
간단한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쥐어흔든 남자는 가마 앞에 당도했다. 남자의 눈짓에 양옆으로 서 있던 시종들이 가마를 내려놓는다. 그러자 시녀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자물쇠의 고리를 거머쥐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사언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금을 해제하는 시녀의 손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저 시녀가 유난히 머뭇거리던 것이 생각난다. 이상할 정도로 사언의 눈치를 보고 가마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설마. 사언이 경악한다. 그에 보답하듯 가마의 문이 열렸다.
끼익. 경첩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가마의 내부가 드러난다. 그를 기점으로 소강되어 있던 소음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는다. 손에 들려 있던 자물쇠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떨어졌다. 안색이 파래진 시녀가 땅이 꺼져라 무릎을 꿇는다. 살려만 달라며 고개를 조아린다.
진짜일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왠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사언은 맹렬히 머릿속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불안스러운 시선이 가마의 안을 향한다.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한 내부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폭발했다.
“가마가 비었다!”
“신부가 사라졌어! 능멸하려는 수작이다!”
있어야 할 신부가 그곳에 없었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남자의 시선이 사언에게 박힌다. 꽤 신경을 거스를 만한 거만한 시선임에도 사언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엉켜 버렸다. 엉망이 되어 엎어지고 말았다. 누님이 어째서 없는 건지, 어디로 간 건지조차 생각할 수가 없다. 그저 폭발할 듯한 심장 하나가 머릿속에서 내뱉은 말을 수습해 보라며 과격하게 울려 대고 있을 뿐이었다.
사언이 고개를 돌렸다.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는 눈동자 둘을 움직여 바닥에 틀어박힌 시녀를 본다. 시녀는 조금 전부터 죄송하다는 말만 할 뿐 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어깨로 보아 흐느껴 울고 있다는 것만 짐작이 가능할 뿐.
제대로 입단속을 당했겠지. 혹은 아예 아는 것이 없다던가. 그 생각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시녀는 사언과 시선이 마주치자 더욱 큰 울음을 토해 놓는다.
“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만 주세요…….”
미치겠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바로 나라고.
목덜미로 여러 따가운 시선들이 닿는다. 적대감 어린 시선들. 사언은 비로소 자신이 꺼내 놓은 말들의 위력을 느꼈다.
꺼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제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그런 식으로 모욕해서는 안 되었다. 남자의 위력에 짓눌려 일순간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오기가 치솟아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저 족장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었다. 지금 저를 둘러싼 설족들이 어마어마한 살기를 제게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욕보이는 말을 하나도 아니고, 수도 없이 내뱉어 버렸다.
짐승의 분노는 무섭다. 한 번 화가 나면 눈빛이 변해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하다. 다수 대 일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이 자리에서 찢겨 나가는 것도 이상하지가 않은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사언은 고개를 치켜든다. 기를 바짝 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는다.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역시나 되돌아온 족장의 음성은 음산했다. 절로 몸이 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마주친 남자의 시선은 뜻밖에도 걱정하던 수준은 아니다. 생각하던 것보다 평온했다.
“그대가 떠들던 그 대단한 혼인날에 신부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맞이하러 몸소 나오기까지 했거늘 바람을 맞아 버렸어.”
그러나 사언은 저 남자가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겉보기에는 평안하였으나 그 속에서 일렁이는 듯한 열기가 뻗치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푸른 불꽃의 무리가 사언에게까지 넘실넘실 풍겨 오는 듯했다.
잔뜩 벼리어진 동공이 가늘게 좁혀져 자신에게 향한다. 침을 삼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라, 당장에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제게 자유는 없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한 듯해서 하는 말인데. 애초에 혼인 이야길 꺼낸 건 그쪽이 먼저다. 내가 사정해서 한 게 아니야.”
“…….”
“그러는 게 어떠냐고 먼저 말을 한 것은 그대의 족장이다. 이젠 생각조차 나지 않는 조부의 이름을 들먹이더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아버지라면 그랬을 법도 하다. 자신이 아버지와 똑 닮았으면 닮았지, 다르진 않으니. 그 결과로 자신도 남의 영토에 와서는 우위를 들먹이지 않았나. 과거의 영광을 들먹이며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웃기지 않은가. 옛날의 일을 들먹여서 좋은 점이 뭐가 있지? 그래 봐야 지금 이 산맥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우리고, 생각만 있으면 그대의 부족쯤은 사라지게 된다. 설족엔 그럴 만한 힘이 있고 재물도 있어.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원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불쌍한 생각이 들더군.”
얼마나 급했으면 딸을 다 줄까 하는 생각이 말이야.
순간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깃들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양 두 눈을 휘어뜨리고는 크게, 그리고 느긋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며 제법 한참이나 웃는 낯을 한다. 그런 족장의 모습에 주위의 시선도 물들어 간다. 흉흉하던 시선들이 조소로 변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적어도 내가 급해서 신부를 맞이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강족의 사언아.”
아버지.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사언은 당장에라도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알지도 못하고 그런 식으로 입을 놀린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흔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언은 남자의 분위기에 완전히 휘말려 버렸다. 구제도 할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어 갔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게 되어 버렸다.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우세한 것은 자신의 부족이 아니다. 설족이다. 거의 강족의 두세 배 이상이 될 정도로 설족의 영역은 방대했다. 영역이 방대하면 먹잇감도 많아진다. 자원이 많아진다. 영역인즉슨, 그 부족의 세력과 비례하는 것이었다.
그런 설족이 마음만 먹으면 지도는 달라진다. 산맥에 숨어들어 사는 작은 부족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저울의 눈금이 설족에 기울던 그때부터 이미 세도는 변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쩌자고 떵떵거리며 소리를 쳤던 것일까. 사언이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빠른 시선으로 퇴로를 물색했지만 이미 주위는 설족이 둘러선 이후였다. 도망칠 구석도 없다. 남자는 그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한층 기세를 높여 왔다.
“옛정이 불쌍해서 그대로 두고 있었던 것인데, 방자한 그대가 일을 그르쳤구나. 강족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았다. 믿음이 깨어질 정도였어.”
“……내가 어리석었어. 신부를 찾아오겠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부는 중요하지 않다. 사라진 믿음은 말로 구하는 게 아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지지 않았나. 나는 강족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더 이상은 있어서 안 될 부족이라 단정 지었다.”
사언은 숨을 들이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남자의 목소리엔 확신이 실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힘이 깃들어 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모욕감이 머리를 치켜든다. 여러 생각이 뒤엉켰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누님에 대한 원망. 이렇게까지 힘이 없는 부족에 대한 원망. 그리고……. 수컷으로서 이렇게도 밀릴 수 있다는 수치감. 마지막의 것은 꽤 타격이 컸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힘 한번 쓰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커서였다.
고개를 드니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의 시선은 오만했다. 어쩔 거냐고 묻는 눈빛엔 여유가 묻어난다. 꼭 사냥하는 것 같다. 도망치려는 사냥감을 이리저리 굴려 외진 곳으로 몰아넣었을 때. 마지막으로 송곳니만 들이대면 끝이 날, 그런 순간.
인정하기 싫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언이 남자의 시선을 한참이나 마주한다. 제 눈빛에선 얼마큼의 두려움이 느껴질까. 이전에 잡아먹은 적 있던 사슴만큼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까.
사언의 눈동자에서 빛이 죽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활 타오르던 빛이 문이 닫힌 듯, 일순간 사그라진다. 능력을 벗어난 사태는 체념을 안겨 줄 뿐이다.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계속되면 손을 놓게 된다. 사언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때마침 조소로 일관하던 남자의 시선이 반짝였다. 흥미로운 것을 보는 듯한 목소리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지. 그대의 부족이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그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