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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목소리가 떨렸다.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형편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자에게서 나온 말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그대가 나와 혼인하는 것이다.”
간단하잖은가. 다시금 제 발밑을 간질이는 늑대에게로 손을 뻗으며, 남자가 말했다. 생각할 여유를 주려는 듯이 남자의 손길이 늑대를 보살핀다. 여유가 주어졌음에도 사언은 정지하고 만다. 숨을 멈춘 듯이 그 순간 딱, 멈추어 버렸다.
저게 지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누님은?”
“이미 없는 사람은 따져서 뭐하나. 시녀의 반응을 보니 이미 도망간 모양인가 본데.”
아니, 누님이 문제가 아닌데. 지금 이게 상황에 맞는 말이던가.
조금 전에 몰아붙여지던 때보다 더 당황해 버렸다. 혼인이라니. 자신과, 저 족장이랑 혼인이라고? 저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차라리 혀 깨물고 자결하라고 말했더라면 그게 더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배신감을 느끼다 못해 돌아 버렸나?
사언이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상식을 벗어난 지 오래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사언의 반응을 보더니 더욱 재미있다는 양 피식 조소를 짓는다.
“재미있지 않은가. 신부 대신 신부의 동생이라니.”
“……뭐?”
“설족을 무시하며 의기양양해하던 그대가, 도리어 설족의 일원이 된다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어딨다는 거지?”
남자는 은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연신 조소했다.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다. 저건 비소다. 흡사 갓 태어난 핏덩이 늑대들이 뭣도 모르고 쏘다니는 것을 보는 양, 자신을 비웃으며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엿 먹어 봐라. 이거다.
사언의 입이 떡 벌어진다. 용서를 받으려거든 자신의 반려가 되란다. 확인해 주는 남자의 음성이 더해지자,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설족은 반려자의 간택이 자유로우니 그 점은 걱정 마라. 마침 반려자가 필요하던 참이었거든. 비어 있는 걸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마침 잘됐군.”
“잠깐만요, 아한 님!”
그 소리에 참을 수 없어진 건 사언만이 아닌 듯했다.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여자 얼굴의 사내가 욱하며 끼어들었다. 사내는 그러라고 조언을 한 게 아니었다면서 한참이나 남자에게 설교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남자는 제대로 듣는 기색이 아니다. 어쩔 거냐는 듯이 사언에게로 눈빛을 보낼 뿐이다.
사언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자신을 빼고 모든 상황이 돌아간다. 자꾸 밀리던 것도 우스운데 갑자기 혼인 이야기가 나오더니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가 돌아간다.
더군다나 저 여자 얼굴의 사내는 후계자는 어쩔 거냐고 소리치고 있다. 쌍으로 지랄들을 한다. 후계자는 무슨 얼어 죽을. 혼인은 무슨 빌어먹을.
“야, 이 개놈아.”
사언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눈앞이 빨개지고 머릿속은 검은 불줄기로 가득 찬다. 당장 무엇이라도 토해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 제가 숙이고 들어가야 할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 이를 으득 갈며 사언은 남자를 향해 덤벼들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나보고. 남자랑 혼인하라고? 엿을 먹이려거든 정도껏 먹여라. 뭐? 혼인? 차라리 날 죽여라. 깨끗하게 죽여!”
악을 지르며 덤벼들었지만, 주위의 결박이 진로를 방해했다. 족장의 위험을 감지한 이들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들은 남자를 향해 달려드는 사언의 어깨를 붙잡고 바닥으로 떠밀쳤다. 덕분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조금도 닿지 못한 채로 차가운 칼날이 제 목에 닿고 말았다. 수그러들었던 소란이 다시금 일기 시작한다. 삿대질이 더해진다. 가만히 듣고 있지 못할 욕설들이 사언에게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사언은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응시했다. 제가 하는 말들을 분명히 들었을 남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유롭다. 오히려 크게 어깨를 떨며 웃기까지 한다. 하하하, 크게 웃은 남자가 허공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이목이 집중된다.
“참을성이 없군. 수컷과 혼인을 하라니 못 견디겠나? 치욕적으로 느껴지는가?”
남자는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눈부신 은발이 그의 고갯짓을 따라 목덜미로 흘러내린다. 저를 향하는 맹렬한 시선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다. 남자가 보인 행동은, 그저 사언을 향해 눈썹을 추켜세운 것. 그것뿐이다.
“그대가 선사한 치욕을 나는 참았는데. 왜 그대는 못 참나.”
저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알겠다. 보이기는 여유로워 보여도 정작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치욕을 참긴 개뿔이, 참나. 못 넘어가겠으니 이런 식으로 보복하려는 거다, 분명.
도저히 참지 못하고 사언이 이를 갈았다.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자, 남자의 얼굴에 비소가 번진다.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거슬린다. 저를 비웃는 작은 행동에도, 짜증이 치밀고 견딜 수 없다.
수컷과 혼인하는 것. 그것도 저 족장이 먼저 제게 말을 꺼냈다. 그 말인즉슨 저를 암컷처럼 대하겠다는 것이다. 체격으로 보나 외양으로 보나 약하게 생긴 것은 자신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랬다.
사언은 그런 도발에 약했다. 본의 아니게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걸로 시답잖은 시비가 잦았다. 사언을 아는 이들은 더는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도 해 왔다. 덕분에 지금은 그런 대접을 받지는 않는다. 남들보다 곱상하게만 생겼을 뿐, 보통 수컷들의 체격보다 크다. 그랬던 자신인데.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저 남자는 간단히 그것을 무시했다. 월등한 수컷의 조건으로 자신을 비웃고 혼인으로 치욕을 안겨 준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순식간에 길게 자란 손톱이 파고든다. 당장에라도 수체화(獸體化)할 것처럼 몸이 화끈거리고 비참했다.
“배짱이 크군.”
그런 사언을 향해, 남자가 걸어왔다. 결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언의 앞으로 다가와 선다. 사언의 시선은 죽지 않는다. 도리어 물어뜯을 듯이 남자를 쏘아본다. 남자는 그런 사언이 재미있다는 듯,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어. 그대가 그렇게 싫다고 하니, 억지로 권할 생각은 없다. 나도 그렇게까지 반려가 필요한 건 아니고 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달이 여섯 번 차오를 만치의 시간을 주겠다. 그 사이에 증명해 보여라. 너희 일족의 신뢰성을. 그러면 인정해 주마.”
이전 것보다 괜찮은 조건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를 믿지는 못하겠다. 사언은 사라지지 않는 남자에 대한 불신감을 안고 그를 바라본다. 저만치 있는 그의 심복들은 저마다 머리를 붙잡고 있다. 불평하던 여자 얼굴의 사내도 한숨을 쉬며 이마를 붙잡고 있다.
골치 아픈 듯한 그들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닌 듯하다. 제멋대로 하는 성격인 건가. 사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도망간 신부 대신 그대가 신부가 되든지. 그대로 멸족당하든지.”
이것 봐. 순 자기 멋대로 하잖아.
입술 끝까지 개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다행히도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더 이상 일을 그르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멸족되는 것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는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당장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다. 그러고 나면 믿음을 증명하든, 그대로 튀어 버리든지 하면 된다. 지금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강족이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앞날이 먼저다. 죽기는 싫었고 족장의 아내가 되는 것은 더욱더 싫었다.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 지루했던지 남자가 재촉해 온다. 보란 듯이 손톱을 길게 빼 보인다. 어렵지 않게 돋아난 그것은, 가죽쯤은 쉽게 찢겨 나갈 정도의 날카로움을 머금고 있다. 순간 제 배가 꿰뚫리는 광경이 떠올라, 사언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도 저도 싫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난 기다림에 익숙지 않거든.”
어쩔 거냐는 듯 목덜미로 가까워지는 손톱을 보며, 사언이 할 수 있었던 반응은 한 가지뿐이었다. 벼리어진 손톱에서 옅은 피 냄새가 풍겨 왔다. 예민한 코끝으로 번지는 비린내를 맡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손톱이 거두어진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남자는 사언의 반응에 재차 비웃음을 건넨다.
“풀어 줘.”
족장의 한마디에 뒤를 장악하고 있던 창날들이 거두어진다. 얼얼한 손목에 혈류가 돈다. 사언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몸을 튼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심복들을 향해 걸어간다. 기다란 은빛 머리칼이, 남자의 걸음에 따라 크게 한번 휘날렸다. 흡사 갈기를 보는 듯한 위용이었다. 적어도 지금 그를 바라보는 사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마, 오늘 처음 경험했던 강인한 수컷의 위용 때문이었을 거다. 남자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했다. 그 정도로 존재감이 강한 수컷은 처음 보았다. 사언의 눈가에 그늘이 스며든다. 처음 겪어 보는 패배였다. 그것은 무척 쓰디썼다.


3.


그길로 바로 궁으로 끌려 들어왔다.
양옆으론 무장 차림을 한 사내 둘이 둘러싸고 있다. 바로 앞에는 잘난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좌군장(左軍將)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러니 어디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사언은 그대로 찍소리도 못 하고 궁을 돌고 돌아 자신의 방이라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따라 들어온 것은 좌군장뿐이었다. 방문을 열어젖힌 그는 들어오라고 사언을 안내했다.
“이곳이 묵게 되실 곳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사언은 방을 둘러본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던 건지, 방 안엔 기본적인 물품들만이 놓여 있다. 때 하나 없는 깔끔한 흰색 벽지에, 나무를 덧대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이불을 깔아 만든 침대. 창문은 조그마했고 그 외에 특별한 물건들은 없었다. 제법 괜찮은 방이었다.
하지만 사언은 속으로 말을 삼킨다. 생활용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날카로운 물건들은 싹 치워진 것처럼 보인다. 하다못해 손톱을 갈기 위한 칼조차 없다.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굴뚝같았지만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그저 알겠노라고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다. 그러자 좌군장이 한숨을 쉰다.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좌군장. 그러니까 여자 얼굴의 사내는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자꾸 저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여실한 배척에, 사언은 울컥하고 만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음에 들게끔 행동할 생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뭐래.”
“아한 님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처리해 버렸을 겁니다.”
확실히 덧대어지는 음성. 정작 바라본 얼굴은 곱기 그지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말은 뼈가 있었다. 죽이려던 것을 봐준 것이니 나대지 말라는 그런 경고가.
속이 따끔하게 저려 온다. 자신의 처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방 안을 둘러보는 좌군장을 바라보며, 사언은 제 처지를 가늠해 본다. 확실히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조금만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건사하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부족 전체에게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은 그저 누님의 호위를 맡은 것뿐이었고 평소보다 신이 나서 설족으로 온 것뿐이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있다면 공개된 곳에서 입을 잘못 놀린 것. 그것도 설족이 보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수장을 욕보인 것이었다.
만약에 그곳에 누님이 있었더라면. 누님이 그저 가마 안에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님은 없었고, 자신은 설족을 두 번이나 능멸한 죄인이 되었다. 참 우습다. 조건 하나로 상황이 이렇게나 바뀌어 버리다니.
“누님은 안 찾아보는 건가?”
누님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사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좌군장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찬장을 살피던 그가 답을 한다.
“찾아볼 가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혼인을 약속했었잖아. 이렇게 흐지부지 끝내도 되는 건가? 찾아서 왜 그런 건지 문책이라도 하는 게 맞지 않나?”
우리는 그러는데.
강족이었더라면 당장에 설족을 찾아가 따졌을 것이다. 자신들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고. 신부는 어디로 갔느냐면서 당장 찾아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사지를 찢어 버릴 것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조용하다. 소란이 있었던 것은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고, 그마저도 처리되자 다시 조용해졌다. 사언은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부족은 달라도 같은 종족이고 사고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왜 찾으러 가지 않는 거지? 일은 확실히 처리해야 하지 않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사언의 얼굴에, 좌군장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연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이미 도망친 마당에. 강족의 순수 혈통이라면 개인의 능력은 뛰어날 겁니다. 마음만 먹고 모습을 감추면 자취를 없애는 게 가능하단 말입니다. 꼴을 보아하니 충동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아서 뭐합니까.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효율적으로 살아야죠. 이마를 톡톡 두들겨 보인 그는 마지막으로 침대 아래를 살펴보더니 확인이 끝났다며 말을 건넨다. 사내의 말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왜 그런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꽤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설족과 강족의 차이에 대해서. 그런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자신의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뼛속부터 강족인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언은 깊게 생각하기를 관두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리는 말로는, 자신만 남겨 두고 모든 재화와 가마는 돌려보내기로 했다지. 자신의 안위에 대한 것은 일족에 통보를 해 두겠다고 했다.
“허튼짓하다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철저하기 그지없다. 몇 번이나 확인하더니 나가다 말고 다시 한 번 경고를 덧댄다. 뜨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일단은 넘어가는 게 우선이다. 사언은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어 보낸다.
“걱정하지 마. 얼굴도 곱상하게 생겨서는 하는 행동도 순 계집같이 구네.”
가만히 듣고 있는 남자의 이마 위로 혈관이 도독도독 돋아난다. 눈에서 불길이 활활 이는 게 보였지만, 사언은 시치미를 떼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괜한 의심 하지 말고 바쁠 텐데 할 일이나 하지 그래? 얼굴값 한다는 소리 듣기 전에.”
순간 욱한 그가 뭐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사언은 그대로 그를 밀어 버리고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잠시간 벽을 타고 흐른다. ……이를 가는 소리가 문을 타고 들리는 것은 착각일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통쾌했다. 설족에 들어와서 줄곧 당하기만 하지 않았는가. 내색은 하지 않아도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이로써 조금은 갚았다.
……정작 중요한 그 남자에겐 갚지 못했지만.
귀를 세워 문 앞에 대 보니,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린다. 여자 얼굴 사내는 사라진 모양이지만, 아직 남은 숨소리는 둘. 경호라고 붙여 놓은 사내들은 교체되기 전까지 계속 붙어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쪽 문은 제외. 남은 길은 저기 하나 있는 창문밖엔 없나.
사언은 반대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유심히 살펴본다. 작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보니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는 되는 듯했다. 머리를 잘 끼워 넣으면 그대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호위들이다. 창 아래를 바라보니, 큰 수목에 올라갔을 때 세상이 작게 보이던 그 정도 높이인 듯했다. 근처 나무에 잘 걸쳐지면 다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재 본 사언이 씨익 웃었다.
이대로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다. 애초에 이럴 생각으로 고분고분 따라온 게 아니던가.
물론 뒷일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나서 나올 반응이 두려운 건 매한가지다. 부족은 소중하다. 자신의 터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싫었다. 괜히 불쌍한 척하며 가련하게 떨고 있기는 싫다. 뒷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 전쟁이 일어나겠다 싶으면 그대로 도망가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누님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가. 부족 따윈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버렸다. 강족은 원래 그랬다. 말만 단결이지 정작 중요한 곳에선 뭉치지 못한다. 보고 자란 것이 그것뿐이니, 생각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엔 없다.
사언은 한쪽에 놓여 있던 이불을 끌고 왔다. 그대로 창문 위에 덧대었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꼼꼼하게 막았다. 그러자 방 안이 일순간 어두워진다. 하나 있던 광원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낮이 사라진다.
부디, 예민한 저들 귀에 들리지 않기를.
짧은 기도를 마지막으로 사언은 강하게 주먹을 날렸다. 온 힘을 다해 허공으로 주먹을 날린 결과, 맞닿은 주먹으로 유리가 부서지는 감각이 전해진다. 잔뜩 긴장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다행히 소음은 크지 않다. 성공이었다.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내자, 자신이 주먹을 날린 그대로 유리가 깨져서 부스스 떨어진다.
결과가 좋은데? 사언은 혀를 내두르며 남은 유리 조각들을 하나씩 걷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탈출 경로가 완성된다. 바닥에 남은 것은 무수한 유리의 잔해뿐. 조금 뒤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이 유리 조각들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은 온데간데없겠지.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허구한 날 돌아다녀 골방에 갇혔을 때 쓰던 방법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사언은 콧노래를 부르며 조심스레 창 너머로 발을 딛는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서늘한 저녁의 공기가 발밑을 간질인다. 탁 트인 숲의 공기가 자신을 맞이한다. 어서 오라고. 그런 곳에 갇혀 있지 말라고.
나머지 발도 어렵지 않게 통과한 사언이 뒤를 돌아본다. 굳게 닫힌 방문.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늦게 발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늦게 발견하진 말고. 설족에서 이미 벗어났을 그쯤에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 여자 얼굴의 사내에게, 그리고 그 엄청난 존재감의 족장에게 쓰라린 패배감을 안겨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만했던 얼굴에 깃들 낭패감을 떠올리자, 배 아래가 당겨 온다. 호승지심이 인다. 그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입맛을 다신 사언은 가볍게 창을 통과하고 만다. 볼 수만 있다면 확인하고 싶지만. 지금은 도망가는 게 우선.
잘 있어, 순진한 설족들아.
사언은 그렇게 훌쩍 창 너머로 사라진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일더니 뒤이어 발걸음 소리가 허공에 남겨진다. 타다다닥. 허공을 보행하는 듯한 가벼운 소리는 점차 멀어져 간다.
그렇게 고요해진 방 안. 해가 저문다. 원래의 목적을 상실한 창문으로 서늘한 저녁 바람이 드나든다. 유리가 사라진 창문은 좀 더 여실히 저녁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틀 안으로 가볍게 흔들리는 나무 군락이 조명된다.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 바람을 따라 쉼 없이 흔들리는 숲의 무리가 보인다.
남아 있던 여명이 사그라진다. 밤의 냉기가 온전히 내려앉자, 훌쩍 다가온 어둠은 숲의 안쪽으로 드리워진다. 조금씩 집어삼키더니 이윽고 숲 전체는 그늘에 잠기고 만다. 바로 조금 전, 사언이 향한 곳이었다.

* * *

“아한 님, 아한 님!”
다급한 음성 하나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덕분에 회의를 하고 있던 무리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리고 만다.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게 된 시중꾼은 당황하며 가지고 온 소식을 알렸다.
“무슨 일인가.”
“강족의 사내가 탈출했다고 합니다!”
그 소리와 함께 탄식이 흘러나왔다. 탄식인 듯, 혹은 한숨인 듯도 한 그것은, 족장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는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한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않자 시중꾼은 당황했다. 강족의 사내라면, 조금 전에 크게 난리를 일으켰던 자다. 설족의 영역에 와서는 설족을 깎아내리며 당당하게 서 있던 그 남자. 흡사 빛이 나는 듯도 보였지만 족장에게 눌리자 그 성질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위엄 넘치는 족장의 힘에 짓눌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듯했다. 적어도 시중꾼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족장을 제외하고, 설족 중 가장 인물이 좋다는 좌군장에게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 온화하기라면 그를 따를 자가 없다고 칭송받는 그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를 갈다니. 그렇게 이 소식이 나쁜가. 시중꾼은 잔뜩 겁을 먹고는 차려 자세로 반대쪽도 바라본다.
아한은, 그들의 족장은 그대로 앉아 서찰을 읽고 있다. 자신이 가져온 소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어라.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 건가. 두 사람의 반응이 판이하다.
가장 먼저 화를 내는 것은 족장일 줄 알았다. 그렇게 공개된 곳에서 욕을 보이지 않았는가. 설족 이래에 가장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인 만큼, 명예가 훼손된 것에 대해 가장 많이 신경을 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시중꾼은 고개를 돌려 가며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의 난감함을 해결해 준 것은, 좌군장이었다.
“도망간 시각은 언제로 추정됩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시종이 저녁을 넣어 주려고 갔는데 반응이 없다기에 들어가 봤더니 창문이 깨져 있었습니다.”
괴물이지, 괴물. 부수는 건 둘째치고 그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리다니.
평범한 자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예로 자신이 시도해 본다면 주먹을 붙잡고 한동안 굴러다녀야 할 것이다. 역시 귀족은 다른 건가. 시중꾼은 처음 실감하는 혈통의 위대함에 혀를 내둘러 본다. 피의 짙기가 능력을 좌우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