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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남자가 하던 말대로, 설족은 강족에서 분화한 부족이다. 견디다 못한 하관들이 명분을 세워서 새로 부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설족의 혈통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강족이 세력도 많이 약해졌고, 무기의 힘을 빌려 설족이 융성해졌다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대단한 도련님이 꼼짝없이 갇혀 있을 리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족장의 힘은 얼마나 강대하다는 말일까. 그런 귀족이 족장의 힘에 짓눌려 일순간 무릎을 꿇었다니.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남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족장. 그런 족장이니, 강족이 도망간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족장은 서찰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시중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기운이 응축된 눈동자가 그에게로 꽂혀 들었다.
“위치는?”
“정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동쪽 숲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쪽이라. 작게 중얼거린 족장이 느긋하게 의자 뒤로 등을 기댄다. 여유만만인 그가 거슬렸던 건지, 맞은편의 좌군장이 결국 한마디 보태고 말았다.
“아한 님. 추격자를 보내야 합니다. 멀리 가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도망간 자를 잡으려면,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잡는 것이 원칙.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욕을 보이는데 꼭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중꾼이 저도 모르게 옳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들의 족장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어질러져 있던 서찰들을 밀어 놓고 목판을 꺼낸다.
“아한 님!”
“성질이 급하면 되는 일도 안 되는 법이야, 단령.”
다시 한 번 다그치는 좌군장을 향해, 족장이 고개를 들었다. 생생하게 요동치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다. 그 순간, 시중꾼은 깨달았다. 그가 무심한 것이 아님을. 강족의 사내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님을.
족장의 눈동자는 흡사 전투를 앞에 둔 때처럼 생생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속 안에서 무언가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이 울렁거렸다. 시중꾼은 족장이 어느 순간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안에 든 것을 터트릴 것처럼 손안으로 손톱을 길게 빼 보이고 있다.
“밥을 지을 때는 말이야…….”
뜸 들일 줄을 알아야 해.
아한이 요염하게 웃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올 때를, 알맞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할 때도 그렇다. 쉴 새 없이 쫓은 먹이는 사냥하는 맛도 없고 먹었을 때 맛도 없다. 사냥에서 최고의 묘미는, 잡힐 듯 말 듯 희망을 주면서…… 손안에 쥘 듯 말 듯 땀이 차오르는 순간, 몸을 날려 눈앞의 먹이를 잡아채고 마는 그 순간이 사냥에서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것만큼 짜릿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잡은 먹이는 맛도 좋았다.
가장 물이 오르는 시기를 재고 있는 것이다. 시중꾼은 감탄한다.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좌군장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덮는다. 둘의 반응에 아한이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바둑 둘 사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고. 바둑이나 두면서. 그렇게 읊조리는 아한의 시선이 동쪽을 향한다. 간 곳을 확인하려는 양 창 너머로 비치는 숲을 꼼꼼히 훑는다. 그러나 아한은 곧 고개를 거두어들였고 손을 치켜든 시중꾼을 불러들였다.
4.
밤이 되자 바람이 제법 심하게 불었다.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온 숲이 요동쳤다. 맨살에 닿는 공기가 차디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불이라도 더 가지고 올 걸. 지금 와서 후회해 보지만 이미 마차는 떠났다. 사언은 옷매무새를 여미며 빠르게 숲을 통과해 나갔다.
다행히도 쉽게 동쪽 문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막는 인원이 한둘쯤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상하게도 동쪽 문은 경비가 허술했다. 보초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무작정 동쪽으로 달려왔고 지금 이렇게 성공적으로 숲 안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쾌거가 따로 없다. 설족 놈들이 얼마나 노여워할까. 비어 있을 자신의 방을 생각하며, 사언은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에도 이렇게 곧잘 도망치곤 했다.
자신은 늑대의 형상을 가진 자 중에서 상당히 좋은 혈통에 속했다. 아버지는 족장이었고, 어머니는 대대로 족장의 아내를 배출하는 가문 출신이었다. 둘 다 늑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결과 자신도 꽤 좋은 피를 타고 태어났다.
짐승과 인간의 모습을 둘 다 취할 수 있는 초수에게 피는 중요했다. 피가 짙으면 짙을수록 능력이 좋았고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처음엔 초수들은 모두 훌륭한 혈통이었다고 했다. 자신들 안에서만 번식을 이어 갔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인간들이 이 근방까지 나라의 영역을 확장하지만 않았더라면, 피가 옅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초수의 피가 옅어져 갔다. 인간과 섞여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그에 대해 강족이 택한 방법은 숨는 것이었다. 인간과 다름없게 되어 버린 자들은 버리고, 능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들만을 데리고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래 계급과의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 혈통이 곧 힘인 세계에서, 하관들은 남겨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설족이다. 그들은 강족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와서 자신들만의 부족을 형성해 냈다. 척지고 원수처럼 지낸 것이 몇백 년이다. 그렇다 보니 두 부족이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것이다.
강족은 강족대로 혈통이 낮은 우매한 자들이라 하여 설족을 멸시했고, 설족은 설족대로 혈통주의에 빠진 이기적인 귀족들이라 하여 강족을 욕했다. 사언 역시 그렇게 배워 왔다. 어릴 적부터 설족을 배척해야 한다고 그렇게 배워 왔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설족이 강성해지면서부터다. 불과 몇십 년 만에 설족은 융성한 번성을 이룩해 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설족의 족장이라고 들었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을 길러 냈고, 주위 부족들의 항복도 받아 내었다.
강족이 설족에 기게 된 것은 그 시점이었다. 기회주의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는 결국 변해 버렸다. 언제 집어삼켜질지 모르는 부족에 대해 끙끙거리며 앓았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못해 설족에 우호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완전한 우호는 아니었다. 강력한 힘에 굴복하는 형태로 변해 버린 것뿐.
사언은 그것이 싫었다. 아무리 봐도 강족이 설족에 기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가 센 노인들마저 설족과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언이 엇나가게 된 것도 그 시점부터였다. 답답한 노인들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 집을 나왔다. 삶에 만족한 적은 몇 안 되었으나, 어쨌든 지금 이대로의 강족이 좋았던 것이다.
넷째 아들로 태어나 변변한 재물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서서히 변해 가는 사람들이 못마땅했다. 그 틈에서 사언은 이기적으로 변해 갔다.
중요한 것은 자신 하나뿐.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강족이 쇠퇴하기 전에 제 발밑을 조금이라도 사수해 보고자 공격적으로 변해 간 것이다. 형제들도 아버지를 닮아 탐욕스럽게 변해 갔고 하나 남은 누님은 여자라는 이유로 정답지 못했다. 그나마 정상에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제 몸을 돌보려 도망치고 없다.
사언은 쓰게 웃었다. 이미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모순투성이인 강족, 그런 강족으로 태어난 자신.
설족의 족장에게 욕먹은 것이 못내 분하긴 했다. 강족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수컷으로서 짓눌린 자존심이 비참했다. 그러니 그가 내보인 타협책이 자신에게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족의 평안? 인정?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 발 빠른 노인네들. 여차하면 도망칠 것이 뻔한데. 그러니 설족이 순진하다는 거다. 특히 그 족장. 자신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언이 잘려 나간 나무 둥치를 발판 삼아 뛰어오르며, 피식 웃었다. 혼인 이야기라면 타격이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부하자 강요하지는 않았다. 설족이라 얍삽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지킬 건 지키는 성격일지도.
빠르게 숲을 헤쳐 나가던 사언이 속도를 늦춘다. 그리곤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가던 나무 하나를 잡곤 빠르게 타고 올랐다. 어쨌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젠 안 볼 사람인데. 족장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약속을 했든, 이젠 다 소용없다. 자신은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나무가 흔들리는 탓에 쉬이 올라가진 못했다. 손톱을 내어 찍어 가며 정상을 올랐고, 그 결과 나무로 뒤덮인 끝없는 숲의 군락이 드러났다.
사언은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살던 산맥도 숲이 작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끝도 없는 숲은 처음 보았다. 가도 가도 나무만이 반복될 뿐 끝이 나질 않는다. 방향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조금 전부터 달을 기준으로 삼아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무시할 수 없는 가설에, 사언은 어깨를 움츠린다. 어차피 밤을 이곳에서 보내긴 해야 했다. 이 어두운 밤중에 육감 하나만을 믿고 움직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저 멀리서 구슬피 우는 듯한, 짐승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숲엔 여러 짐승이 있다. 여차하다 뒤를 잡히면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사언이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근처에 몸을 숨길 곳이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지나가다 동굴을 본 듯도 하다. 어디쯤이었는지를 가늠해 보려는데, 그 순간.
지척에 가까운 기척 하나가 있었다.
숨을 죽인 듯한 기척. 이를 드러내고 가늠을 해 보려는 듯한 입가심. 틀림없는 짐승의 기척이었다. 사언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가열하게 울려 댔다. 상황이 좋질 못했다.
설족의 영역에서 벗어난 후 그야말로 달음박질치듯 달려왔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자신도 한계는 있다. 몇 시간을 달려오면 지칠 수밖에 없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고,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서 배는 곯아 있다. 당장 마음을 놓으면 쓰러질 정도다. 그런 자신과 몸을 숨기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짐승 하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자신을 사냥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사언이 급히 뒤를 바라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몸집 하나가 사언을 향해 물어뜯을 듯이 달려든다.
처음은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급히 몸을 날리고 보니 저 멀리서 오래 굶은 건지 눈이 회까닥한 짐승 하나가 보였다. 큰 몸집이나 털로 보나 늑대는 아니다. 고양잇과의 맹수다, 저건.
침을 줄줄 흘리며 헐떡이는 짐승의 모양을 사언이 살펴본다. 맛이 가도 단단히 갔다. 제정신으로 싸우다간 그대로 골로 갈 모양새다. 하는 수 없지. 다시 한 번 달려들려는 낌새가 보여서, 사언은 먼저 짐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언의 몸이 변모한다. 매끈한 피부 대신 회색빛 털 뭉치들이 촘촘히 돋아났고, 곱게 곧은 등은 굽어져 한 치 단단하게 변했다. 날 선 콧등에선 뼈가 우락하게 튀어나오더니 곧 짐승의 주둥이로 변형되었다. 붉은 옷가지가 떨어진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는 저보다 큰 몸집의 짐승에게로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크르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사투. 인간이 늑대로 변모할 줄은 몰랐던지, 잠시 놀랐던 짐승은 정신을 차리고 늑대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늑대의 기세도 그에 못지않다. 우세한 듯 밀고 나갔다가, 도리어 뒤지기를 반복한다.
맹렬한 늑대의 기세에 짐승은 당황한 눈치. 제가 밀릴 줄은 몰랐던 건지 악에 받치기 시작한다. 시퍼렇게 달아오른 눈에 핏물이 들기 시작한다. 열육치 사이로 뜨거운 숨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를 내어 달려들며 정신을 빼앗는다. 급기야 짐승은 분에 못 이긴 듯 괴성을 토해 놓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받친 짐승이 크게 한번 포효한다. 그리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이를 눈치챈 늑대가 피하려다 말고 크게 한 번 당하고 만다. 피하는 것보다 짐승의 주둥이가 더 빨랐던 것이다. 어깻죽지를 크게 물어 뜯겼다. 살점이 뜯어져 나간다. 잠시 멈춰 선 늑대가 제 다리를 살펴서 물어뜯긴 것을 확인하고는 되레 이를 드러낸다. 곧이어 그의 눈에도 붉은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두 마리의 짐승이 엉켜든다. 피가 터지고, 살가죽이 뜯겨 나가는 혈투가 계속된다. 그 광경을 감추려는 듯, 잠시 머물러 있던 바람은 다시금 일기 시작하고 숲이 흔들렸다. 노랗게 켜진 두 쌍의 시선이 빛을 그리며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빛은 허공으로 수없이 많은 곡선을 그렸다. 누구 하나가 멈출 때까지 그치지 않고 끝없는 선을 허공에 그려 냈다.
곧이어, 한 쌍의 빛이 점멸한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생명이 꺼진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고, 다시 월광이 비추어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더 작은 덩치의 짐승이다. 그 짐승은 제 승리를 뽐내려는 듯 어금니를 드러내며 크게 한 번 울부짖었다. 서글픈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바람결에 실려, 숲 안을 맴돌며 요동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역시 힘겨웠던 것일까. 늑대는 옅은 숨을 한 번 토해 놓고는 제가 쓰러트린 짐승의 위로 쓰러졌다. 남은 한 쌍의 빛이 스러진다. 늑대가 토해 놓은 울음이 한 바퀴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자는 없었다. 쓰러진 두 마리의 나신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사언이 일어난 것은 다음 날, 막 동틀 무렵이었다. 꼬박 한나절을 자고 만 셈이다. 일어나니 어깨의 쓰라림이 강해졌다. 아 참. 물려 버렸지. 어제. 그제야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발밑에 물컹거리는 것이 어젯밤 겨우 쓰러트렸던 짐승이라는 것도 그제야 생각이 난다.
어깨의 상처를 확인하던 사언이 울컥한다. 제법 깊게 물려 버렸다. 인간들보다 회복이 빠르다곤 하지만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언은 제가 입고 있던 옷을 찾아 한 자락을 찢어 내고는 어깨를 동여맸다. 돌아가기 전까지 임시방편에 만족할 수밖에.
새삼 숲의 어둠이 실감 난다.
지금은 이렇게 날이 밝아지고 있지만. 어두워지면 그 깊이가 엄청나다. 제 귀가 예민해서 다행이었지. 조금만 방심했다간 그대로 뒤를 채여 버렸을 것이다. 저렇게 누워 있는 상대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오한이 들어서, 사언은 혀를 빼어 물고 드러누워 있는 짐승을 살펴본다. 잠시 살펴보다 혀를 차고는 살을 한 움큼 떼어 냈다. 그리곤 입으로 가져갔다.
생살은 좋아하지 않는데.
먹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차려진 것만 먹다 보니 식성이 까다로워져 버렸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쥐나 토끼 같은 걸 잡아서는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곤 했지. 피가 뚝뚝 흐르는 생살을 씹어 먹고 있으려니 어릴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만큼 맛있진 않은 것 같다. 생긴 게 무식하게 생겨서 그런가. 뱉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맛이 없었지만, 일단 배를 채워 둬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일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언은 이 숲이 방심해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영역 근처의 숲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방비가 허술했던 것은 그 탓인지도 몰랐다. 위험한 곳이니 보초 자체가 필요가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갈 바보는 없으니까.
간단히 끼니를 때운 사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변모하느라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대강 주워 입고, 굳은 피를 털어 냈다. 나뭇가지에 문대는 걸로 피 냄새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민한 짐승들은 분명히 이 피 냄새를 맡을 것이다.
조용해도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입증이 되었다. 사언은 숨을 죽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민해진 탓인지 자꾸 주변의 기척들이 신경이 쓰인다. 조금 전부터 근처를 알짱거리는 발걸음 소리 하나가 감지되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사언은 몸을 낮춰 제 기척을 숨긴다. 피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못내 신경 쓰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웅덩이부터 찾는 건데. 잘못했다.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간혹 일부러 먹잇감을 불러들이기 위해 피를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제 앞마당에서 그러는 것과 남의 집 한가운데서 이러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몸을 숨길 곳이 없지 않은가.
주변을 맴돌던 기척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사언은 몸을 낮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기척이 지나가기를,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 지나가기를 빌었다. 그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대지에 발자국을 찍는 것과 같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 상태에서 싸웠다간 위장행인데. 사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대로 도망가? 말아? 생존을 위해 다투는 마음속에서 사언은 도망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최대한 몸을 숙인 채로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때가 나빴다. 발을 뗌과 동시에 지척에서 나뭇가지들을 헤치는 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제 몸 돌볼 겨를 없이 사언은 그대로 몸을 날려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그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저 몸을 돌려 뛰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아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동체시력이 뛰어난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하게 기척의 주인을 인지했다.
그 남자였다.
흩날리던 은발은, 그 외엔 다른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유독 그 주위만 빛을 뿌려놓은 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언으로선 익숙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처참할 정도로 패배했으니 그 존재감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이미 머릿속에 톡톡하게 각인이 된 것이다. 이 기척은 그 남자의 것이라고.
“젠장…….”
차라리 어제 그놈을 한 번 더 상대하는 게 편하겠다.
상대가 너무나도 나빴다. 하필 지금 설족과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그것도 일반인이 아니라 우두머리인 족장과! 저건 진짜 체통도 없나. 많은 추격자를 두고 왜 자기가 쫓아오느냔 말이다.
기겁한 사언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속도로 고개를 원위치하고 만다. 멀리서 야차 한 마리가 저를 쫓아오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즐거워하는 듯한 얼굴로.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깨를 물린 통증과 맞물려 거대한 현기증이 머리로 엄습해 왔다. 도망쳐야 한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생존을 위해서. 저 손아귀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었다. 뒤통수가 당긴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만한 거리까지 따라잡혀 버렸다. 이를 악문 사언이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역시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얼굴이 사언을 맞이했다.
남자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땀이 온몸에 흐르고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른 사언과는 달리, 그는 땀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꼭 가벼운 운동을 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도망치더니, 여기까진가.”
귓가에 남자의 속삭임이 닿았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저를 훌쩍 따라잡은 남자의 전신이 보였다. 그는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라는 듯이, 산책을 하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여유롭게 말까지 건네었다.
사언이 이를 악문다. 남자의 말은 무시하고, 남은 힘을 짜내어 속도를 높였다. 다가왔던 남자가 조금씩 멀어진다. 거리가 만들어졌다.
저거 뭐야 진짜.
혈통적으로 자신이 더 우수하지 않은가. 피의 능력만 따지면 자신이 더 우수할 터. 그런데 저 남자는 그걸 무색하게 한다. 가볍게 뛰어넘고는 다시금 자신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깨에서 나는 걸로 보아 상처가 터진 것이었다.
“다쳤나 보군. 이 근방은 위험해. 부족인들도 잘 안 오는 곳이거든.”
그러나 사언은 다시 한 번 뒤를 잡히고 말았다. 이젠 아예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는 듯, 살가운 모양새로 저를 맞이했다. 남자의 설명을 들은 사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바로 추격자가 따라붙지 않는다 싶더니, 그 생각이 맞았나. 지킬 필요가 없으니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원체 숲이 깊어서 출입이 없으니 보초를 줄여 놓았던 것이었다.
길을 택한 건 자신이었지만 또 한 번 속았다는 느낌이 머리를 강타한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쫓지 않았다니. 남자는 그것을 계산하고서 다음 날에야 자신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지치게 될 줄 알고는 처음부터 풀어 준 것이었다.
그 순간. 사언의 한계도 끝에 다다랐다. 몸의 한계와 더불어 인내의 한계가 다가왔다. 저를 사냥감 대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가 거슬린 탓이었다.
방향을 틀어 바닥을 짚었다. 몸을 구부려 반동을 흡수하고는 나아가던 속도 그대로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사언이 손아귀를 크게 넓혔다. 손톱을 길게 빼내고는 살갗을 쥐어뜯을 것처럼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이성을 잃은 공격은 정확성이 없었다. 남자는 손쉽게 피하더니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사언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성이 나오는군.”
“닥쳐!”
지금 저 남자를 찢지 않으면 평생의 한이 될 것이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분노가 속에서 터져 나왔다. 사언은 무차별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그대로 갈아 버릴 것처럼 날을 세워 달려들었으나 무슨 짓을 해도 생살을 찢는 쾌감은 전해지지 않는다. 제가 달려드는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남자의 다리가 움직였다.
눈앞에 사냥감이 있는데. 죽여 버리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전혀 닿지를 않는다. 불편함이 해소되지를 않는다.
급기야 사언이 참지 못하고 변형을 시도한다.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어깻죽지가 왜소하지만 더욱 단단하게 변한다. 그러나 방해가 있었다. 제대로 변형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남자가 어깨를 틀어잡았다.
우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 입었던 곳이 다시 한 번 터져 나갔다. 사언이 길게 비명을 지른다. 떨쳐 내려 했지만 강한 힘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순 없다는 듯이 발버둥 치려는 제 팔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메어친다.
그 남자가 하던 말대로, 설족은 강족에서 분화한 부족이다. 견디다 못한 하관들이 명분을 세워서 새로 부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설족의 혈통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강족이 세력도 많이 약해졌고, 무기의 힘을 빌려 설족이 융성해졌다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대단한 도련님이 꼼짝없이 갇혀 있을 리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족장의 힘은 얼마나 강대하다는 말일까. 그런 귀족이 족장의 힘에 짓눌려 일순간 무릎을 꿇었다니. 혈통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남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족장. 그런 족장이니, 강족이 도망간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족장은 서찰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시중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기운이 응축된 눈동자가 그에게로 꽂혀 들었다.
“위치는?”
“정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동쪽 숲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쪽이라. 작게 중얼거린 족장이 느긋하게 의자 뒤로 등을 기댄다. 여유만만인 그가 거슬렸던 건지, 맞은편의 좌군장이 결국 한마디 보태고 말았다.
“아한 님. 추격자를 보내야 합니다. 멀리 가기 전에 잡아야 합니다.”
도망간 자를 잡으려면, 멀리 가지 않았을 때 잡는 것이 원칙.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욕을 보이는데 꼭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중꾼이 저도 모르게 옳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들의 족장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어질러져 있던 서찰들을 밀어 놓고 목판을 꺼낸다.
“아한 님!”
“성질이 급하면 되는 일도 안 되는 법이야, 단령.”
다시 한 번 다그치는 좌군장을 향해, 족장이 고개를 들었다. 생생하게 요동치는 두 개의 눈동자가 있다. 그 순간, 시중꾼은 깨달았다. 그가 무심한 것이 아님을. 강족의 사내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님을.
족장의 눈동자는 흡사 전투를 앞에 둔 때처럼 생생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속 안에서 무언가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이 울렁거렸다. 시중꾼은 족장이 어느 순간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안에 든 것을 터트릴 것처럼 손안으로 손톱을 길게 빼 보이고 있다.
“밥을 지을 때는 말이야…….”
뜸 들일 줄을 알아야 해.
아한이 요염하게 웃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올 때를, 알맞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할 때도 그렇다. 쉴 새 없이 쫓은 먹이는 사냥하는 맛도 없고 먹었을 때 맛도 없다. 사냥에서 최고의 묘미는, 잡힐 듯 말 듯 희망을 주면서…… 손안에 쥘 듯 말 듯 땀이 차오르는 순간, 몸을 날려 눈앞의 먹이를 잡아채고 마는 그 순간이 사냥에서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것만큼 짜릿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잡은 먹이는 맛도 좋았다.
가장 물이 오르는 시기를 재고 있는 것이다. 시중꾼은 감탄한다.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고, 좌군장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덮는다. 둘의 반응에 아한이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바둑 둘 사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고. 바둑이나 두면서. 그렇게 읊조리는 아한의 시선이 동쪽을 향한다. 간 곳을 확인하려는 양 창 너머로 비치는 숲을 꼼꼼히 훑는다. 그러나 아한은 곧 고개를 거두어들였고 손을 치켜든 시중꾼을 불러들였다.
4.
밤이 되자 바람이 제법 심하게 불었다.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온 숲이 요동쳤다. 맨살에 닿는 공기가 차디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불이라도 더 가지고 올 걸. 지금 와서 후회해 보지만 이미 마차는 떠났다. 사언은 옷매무새를 여미며 빠르게 숲을 통과해 나갔다.
다행히도 쉽게 동쪽 문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막는 인원이 한둘쯤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상하게도 동쪽 문은 경비가 허술했다. 보초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 무작정 동쪽으로 달려왔고 지금 이렇게 성공적으로 숲 안을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쾌거가 따로 없다. 설족 놈들이 얼마나 노여워할까. 비어 있을 자신의 방을 생각하며, 사언은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에도 이렇게 곧잘 도망치곤 했다.
자신은 늑대의 형상을 가진 자 중에서 상당히 좋은 혈통에 속했다. 아버지는 족장이었고, 어머니는 대대로 족장의 아내를 배출하는 가문 출신이었다. 둘 다 늑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결과 자신도 꽤 좋은 피를 타고 태어났다.
짐승과 인간의 모습을 둘 다 취할 수 있는 초수에게 피는 중요했다. 피가 짙으면 짙을수록 능력이 좋았고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처음엔 초수들은 모두 훌륭한 혈통이었다고 했다. 자신들 안에서만 번식을 이어 갔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인간들이 이 근방까지 나라의 영역을 확장하지만 않았더라면, 피가 옅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초수의 피가 옅어져 갔다. 인간과 섞여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그에 대해 강족이 택한 방법은 숨는 것이었다. 인간과 다름없게 되어 버린 자들은 버리고, 능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들만을 데리고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래 계급과의 마찰이 있었다고 했다. 혈통이 곧 힘인 세계에서, 하관들은 남겨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설족이다. 그들은 강족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와서 자신들만의 부족을 형성해 냈다. 척지고 원수처럼 지낸 것이 몇백 년이다. 그렇다 보니 두 부족이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것이다.
강족은 강족대로 혈통이 낮은 우매한 자들이라 하여 설족을 멸시했고, 설족은 설족대로 혈통주의에 빠진 이기적인 귀족들이라 하여 강족을 욕했다. 사언 역시 그렇게 배워 왔다. 어릴 적부터 설족을 배척해야 한다고 그렇게 배워 왔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설족이 강성해지면서부터다. 불과 몇십 년 만에 설족은 융성한 번성을 이룩해 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설족의 족장이라고 들었다.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을 길러 냈고, 주위 부족들의 항복도 받아 내었다.
강족이 설족에 기게 된 것은 그 시점이었다. 기회주의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는 결국 변해 버렸다. 언제 집어삼켜질지 모르는 부족에 대해 끙끙거리며 앓았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 못해 설족에 우호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완전한 우호는 아니었다. 강력한 힘에 굴복하는 형태로 변해 버린 것뿐.
사언은 그것이 싫었다. 아무리 봐도 강족이 설족에 기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가 센 노인들마저 설족과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언이 엇나가게 된 것도 그 시점부터였다. 답답한 노인들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주 집을 나왔다. 삶에 만족한 적은 몇 안 되었으나, 어쨌든 지금 이대로의 강족이 좋았던 것이다.
넷째 아들로 태어나 변변한 재물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서서히 변해 가는 사람들이 못마땅했다. 그 틈에서 사언은 이기적으로 변해 갔다.
중요한 것은 자신 하나뿐.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강족이 쇠퇴하기 전에 제 발밑을 조금이라도 사수해 보고자 공격적으로 변해 간 것이다. 형제들도 아버지를 닮아 탐욕스럽게 변해 갔고 하나 남은 누님은 여자라는 이유로 정답지 못했다. 그나마 정상에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제 몸을 돌보려 도망치고 없다.
사언은 쓰게 웃었다. 이미 그때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모순투성이인 강족, 그런 강족으로 태어난 자신.
설족의 족장에게 욕먹은 것이 못내 분하긴 했다. 강족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수컷으로서 짓눌린 자존심이 비참했다. 그러니 그가 내보인 타협책이 자신에게 그리 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족의 평안? 인정?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 발 빠른 노인네들. 여차하면 도망칠 것이 뻔한데. 그러니 설족이 순진하다는 거다. 특히 그 족장. 자신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요즘 시대에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언이 잘려 나간 나무 둥치를 발판 삼아 뛰어오르며, 피식 웃었다. 혼인 이야기라면 타격이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부하자 강요하지는 않았다. 설족이라 얍삽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지킬 건 지키는 성격일지도.
빠르게 숲을 헤쳐 나가던 사언이 속도를 늦춘다. 그리곤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가던 나무 하나를 잡곤 빠르게 타고 올랐다. 어쨌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젠 안 볼 사람인데. 족장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약속을 했든, 이젠 다 소용없다. 자신은 성공적으로 도망쳤다.
나무가 흔들리는 탓에 쉬이 올라가진 못했다. 손톱을 내어 찍어 가며 정상을 올랐고, 그 결과 나무로 뒤덮인 끝없는 숲의 군락이 드러났다.
사언은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자신이 살던 산맥도 숲이 작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끝도 없는 숲은 처음 보았다. 가도 가도 나무만이 반복될 뿐 끝이 나질 않는다. 방향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조금 전부터 달을 기준으로 삼아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무시할 수 없는 가설에, 사언은 어깨를 움츠린다. 어차피 밤을 이곳에서 보내긴 해야 했다. 이 어두운 밤중에 육감 하나만을 믿고 움직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저 멀리서 구슬피 우는 듯한, 짐승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숲엔 여러 짐승이 있다. 여차하다 뒤를 잡히면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사언이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근처에 몸을 숨길 곳이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지나가다 동굴을 본 듯도 하다. 어디쯤이었는지를 가늠해 보려는데, 그 순간.
지척에 가까운 기척 하나가 있었다.
숨을 죽인 듯한 기척. 이를 드러내고 가늠을 해 보려는 듯한 입가심. 틀림없는 짐승의 기척이었다. 사언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가열하게 울려 댔다. 상황이 좋질 못했다.
설족의 영역에서 벗어난 후 그야말로 달음박질치듯 달려왔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자신도 한계는 있다. 몇 시간을 달려오면 지칠 수밖에 없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고,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서 배는 곯아 있다. 당장 마음을 놓으면 쓰러질 정도다. 그런 자신과 몸을 숨기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짐승 하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자신을 사냥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사언이 급히 뒤를 바라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몸집 하나가 사언을 향해 물어뜯을 듯이 달려든다.
처음은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급히 몸을 날리고 보니 저 멀리서 오래 굶은 건지 눈이 회까닥한 짐승 하나가 보였다. 큰 몸집이나 털로 보나 늑대는 아니다. 고양잇과의 맹수다, 저건.
침을 줄줄 흘리며 헐떡이는 짐승의 모양을 사언이 살펴본다. 맛이 가도 단단히 갔다. 제정신으로 싸우다간 그대로 골로 갈 모양새다. 하는 수 없지. 다시 한 번 달려들려는 낌새가 보여서, 사언은 먼저 짐승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언의 몸이 변모한다. 매끈한 피부 대신 회색빛 털 뭉치들이 촘촘히 돋아났고, 곱게 곧은 등은 굽어져 한 치 단단하게 변했다. 날 선 콧등에선 뼈가 우락하게 튀어나오더니 곧 짐승의 주둥이로 변형되었다. 붉은 옷가지가 떨어진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늑대 한 마리였다. 늑대는 저보다 큰 몸집의 짐승에게로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크르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목숨을 담보로 내건 사투. 인간이 늑대로 변모할 줄은 몰랐던지, 잠시 놀랐던 짐승은 정신을 차리고 늑대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늑대의 기세도 그에 못지않다. 우세한 듯 밀고 나갔다가, 도리어 뒤지기를 반복한다.
맹렬한 늑대의 기세에 짐승은 당황한 눈치. 제가 밀릴 줄은 몰랐던 건지 악에 받치기 시작한다. 시퍼렇게 달아오른 눈에 핏물이 들기 시작한다. 열육치 사이로 뜨거운 숨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를 내어 달려들며 정신을 빼앗는다. 급기야 짐승은 분에 못 이긴 듯 괴성을 토해 놓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받친 짐승이 크게 한번 포효한다. 그리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이를 눈치챈 늑대가 피하려다 말고 크게 한 번 당하고 만다. 피하는 것보다 짐승의 주둥이가 더 빨랐던 것이다. 어깻죽지를 크게 물어 뜯겼다. 살점이 뜯어져 나간다. 잠시 멈춰 선 늑대가 제 다리를 살펴서 물어뜯긴 것을 확인하고는 되레 이를 드러낸다. 곧이어 그의 눈에도 붉은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두 마리의 짐승이 엉켜든다. 피가 터지고, 살가죽이 뜯겨 나가는 혈투가 계속된다. 그 광경을 감추려는 듯, 잠시 머물러 있던 바람은 다시금 일기 시작하고 숲이 흔들렸다. 노랗게 켜진 두 쌍의 시선이 빛을 그리며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빛은 허공으로 수없이 많은 곡선을 그렸다. 누구 하나가 멈출 때까지 그치지 않고 끝없는 선을 허공에 그려 냈다.
곧이어, 한 쌍의 빛이 점멸한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생명이 꺼진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고, 다시 월광이 비추어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더 작은 덩치의 짐승이다. 그 짐승은 제 승리를 뽐내려는 듯 어금니를 드러내며 크게 한 번 울부짖었다. 서글픈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바람결에 실려, 숲 안을 맴돌며 요동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역시 힘겨웠던 것일까. 늑대는 옅은 숨을 한 번 토해 놓고는 제가 쓰러트린 짐승의 위로 쓰러졌다. 남은 한 쌍의 빛이 스러진다. 늑대가 토해 놓은 울음이 한 바퀴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자는 없었다. 쓰러진 두 마리의 나신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 *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사언이 일어난 것은 다음 날, 막 동틀 무렵이었다. 꼬박 한나절을 자고 만 셈이다. 일어나니 어깨의 쓰라림이 강해졌다. 아 참. 물려 버렸지. 어제. 그제야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발밑에 물컹거리는 것이 어젯밤 겨우 쓰러트렸던 짐승이라는 것도 그제야 생각이 난다.
어깨의 상처를 확인하던 사언이 울컥한다. 제법 깊게 물려 버렸다. 인간들보다 회복이 빠르다곤 하지만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언은 제가 입고 있던 옷을 찾아 한 자락을 찢어 내고는 어깨를 동여맸다. 돌아가기 전까지 임시방편에 만족할 수밖에.
새삼 숲의 어둠이 실감 난다.
지금은 이렇게 날이 밝아지고 있지만. 어두워지면 그 깊이가 엄청나다. 제 귀가 예민해서 다행이었지. 조금만 방심했다간 그대로 뒤를 채여 버렸을 것이다. 저렇게 누워 있는 상대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오한이 들어서, 사언은 혀를 빼어 물고 드러누워 있는 짐승을 살펴본다. 잠시 살펴보다 혀를 차고는 살을 한 움큼 떼어 냈다. 그리곤 입으로 가져갔다.
생살은 좋아하지 않는데.
먹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차려진 것만 먹다 보니 식성이 까다로워져 버렸다. 그래도 어릴 적에는 쥐나 토끼 같은 걸 잡아서는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곤 했지. 피가 뚝뚝 흐르는 생살을 씹어 먹고 있으려니 어릴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만큼 맛있진 않은 것 같다. 생긴 게 무식하게 생겨서 그런가. 뱉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맛이 없었지만, 일단 배를 채워 둬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의 일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언은 이 숲이 방심해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영역 근처의 숲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쩌면, 방비가 허술했던 것은 그 탓인지도 몰랐다. 위험한 곳이니 보초 자체가 필요가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갈 바보는 없으니까.
간단히 끼니를 때운 사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변모하느라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대강 주워 입고, 굳은 피를 털어 냈다. 나뭇가지에 문대는 걸로 피 냄새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예민한 짐승들은 분명히 이 피 냄새를 맡을 것이다.
조용해도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입증이 되었다. 사언은 숨을 죽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민해진 탓인지 자꾸 주변의 기척들이 신경이 쓰인다. 조금 전부터 근처를 알짱거리는 발걸음 소리 하나가 감지되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사언은 몸을 낮춰 제 기척을 숨긴다. 피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못내 신경 쓰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웅덩이부터 찾는 건데. 잘못했다.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간혹 일부러 먹잇감을 불러들이기 위해 피를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제 앞마당에서 그러는 것과 남의 집 한가운데서 이러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몸을 숨길 곳이 없지 않은가.
주변을 맴돌던 기척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사언은 몸을 낮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기척이 지나가기를,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 지나가기를 빌었다. 그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대지에 발자국을 찍는 것과 같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이 상태에서 싸웠다간 위장행인데. 사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대로 도망가? 말아? 생존을 위해 다투는 마음속에서 사언은 도망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최대한 몸을 숙인 채로 그 자리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때가 나빴다. 발을 뗌과 동시에 지척에서 나뭇가지들을 헤치는 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제 몸 돌볼 겨를 없이 사언은 그대로 몸을 날려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그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저 몸을 돌려 뛰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아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동체시력이 뛰어난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정확하게 기척의 주인을 인지했다.
그 남자였다.
흩날리던 은발은, 그 외엔 다른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유독 그 주위만 빛을 뿌려놓은 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언으로선 익숙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처참할 정도로 패배했으니 그 존재감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이미 머릿속에 톡톡하게 각인이 된 것이다. 이 기척은 그 남자의 것이라고.
“젠장…….”
차라리 어제 그놈을 한 번 더 상대하는 게 편하겠다.
상대가 너무나도 나빴다. 하필 지금 설족과 마주칠 게 뭐란 말인가. 그것도 일반인이 아니라 우두머리인 족장과! 저건 진짜 체통도 없나. 많은 추격자를 두고 왜 자기가 쫓아오느냔 말이다.
기겁한 사언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속도로 고개를 원위치하고 만다. 멀리서 야차 한 마리가 저를 쫓아오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즐거워하는 듯한 얼굴로.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깨를 물린 통증과 맞물려 거대한 현기증이 머리로 엄습해 왔다. 도망쳐야 한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생존을 위해서. 저 손아귀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었다. 뒤통수가 당긴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만한 거리까지 따라잡혀 버렸다. 이를 악문 사언이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역시나.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얼굴이 사언을 맞이했다.
남자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땀이 온몸에 흐르고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지경에 이른 사언과는 달리, 그는 땀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꼭 가벼운 운동을 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도망치더니, 여기까진가.”
귓가에 남자의 속삭임이 닿았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저를 훌쩍 따라잡은 남자의 전신이 보였다. 그는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라는 듯이, 산책을 하는 것처럼 바로 옆에서 여유롭게 말까지 건네었다.
사언이 이를 악문다. 남자의 말은 무시하고, 남은 힘을 짜내어 속도를 높였다. 다가왔던 남자가 조금씩 멀어진다. 거리가 만들어졌다.
저거 뭐야 진짜.
혈통적으로 자신이 더 우수하지 않은가. 피의 능력만 따지면 자신이 더 우수할 터. 그런데 저 남자는 그걸 무색하게 한다. 가볍게 뛰어넘고는 다시금 자신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어깨에서 나는 걸로 보아 상처가 터진 것이었다.
“다쳤나 보군. 이 근방은 위험해. 부족인들도 잘 안 오는 곳이거든.”
그러나 사언은 다시 한 번 뒤를 잡히고 말았다. 이젠 아예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는 듯, 살가운 모양새로 저를 맞이했다. 남자의 설명을 들은 사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바로 추격자가 따라붙지 않는다 싶더니, 그 생각이 맞았나. 지킬 필요가 없으니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 원체 숲이 깊어서 출입이 없으니 보초를 줄여 놓았던 것이었다.
길을 택한 건 자신이었지만 또 한 번 속았다는 느낌이 머리를 강타한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쫓지 않았다니. 남자는 그것을 계산하고서 다음 날에야 자신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지치게 될 줄 알고는 처음부터 풀어 준 것이었다.
그 순간. 사언의 한계도 끝에 다다랐다. 몸의 한계와 더불어 인내의 한계가 다가왔다. 저를 사냥감 대하는 듯한 남자의 태도가 거슬린 탓이었다.
방향을 틀어 바닥을 짚었다. 몸을 구부려 반동을 흡수하고는 나아가던 속도 그대로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사언이 손아귀를 크게 넓혔다. 손톱을 길게 빼내고는 살갗을 쥐어뜯을 것처럼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이성을 잃은 공격은 정확성이 없었다. 남자는 손쉽게 피하더니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사언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성이 나오는군.”
“닥쳐!”
지금 저 남자를 찢지 않으면 평생의 한이 될 것이다. 부글부글 끓는 듯한 분노가 속에서 터져 나왔다. 사언은 무차별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그대로 갈아 버릴 것처럼 날을 세워 달려들었으나 무슨 짓을 해도 생살을 찢는 쾌감은 전해지지 않는다. 제가 달려드는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남자의 다리가 움직였다.
눈앞에 사냥감이 있는데. 죽여 버리고 싶은 상대가 있는데. 전혀 닿지를 않는다. 불편함이 해소되지를 않는다.
급기야 사언이 참지 못하고 변형을 시도한다.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어깻죽지가 왜소하지만 더욱 단단하게 변한다. 그러나 방해가 있었다. 제대로 변형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남자가 어깨를 틀어잡았다.
우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 입었던 곳이 다시 한 번 터져 나갔다. 사언이 길게 비명을 지른다. 떨쳐 내려 했지만 강한 힘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순 없다는 듯이 발버둥 치려는 제 팔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으로 메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