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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놔. 놓으라고. 미친 자식아. 놓으란 말이다!”
사언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발길질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잡히고 말았다. 남자의 전신이 제 몸을 압박했다. 그의 그림자가 사언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놓으라고 했잖아. 이 씹할 자식아!”
비참하기 짝이 없다. 억울하다 못해 눈물이 터져 나온다. 왜 자신은 이렇게 잡히고 만 걸까. 무엇 하나 갚지도 못한 채, 저 남자에게만은 계속해서 지고 마는 것일까.
사언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저를 누르는 남자의 무게감이 너무나도 강했다. 같은 수컷이지만 너무 다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채로, 저를 내리누르는 족장 아래에서 겨우 발버둥을 칠 뿐이다. 남자는 조금도 덤벼들지 못하는 나약한 쥐를 보듯이 저를 보고 있다.
사언은 좀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한다. 그를 지켜보던 남자가 낮게 한숨을 쉰다. 단단한 고개가 사언에게 가까워졌다.
“얌전해지는 편이 좋을 텐데.”
목 안을 거스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한기가 목 안에서 울려 대고 있었다. 사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남자의 서늘한 눈길이 내리꽂혔다.
“지금 당장 목덜미를 뜯어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거든.”
사언은 그 안에서 정복욕을 읽는다. 사냥하고 난 뒤의 쾌감. 오랫동안 도망치던 사냥감을 끝내 잡고만 듯한 승리감이 남자에게서 느껴졌다.
사언은 할 말을 잃고, 욕망으로 물결치는 짐승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래 축적된 듯, 혹은 새롭게 일어나는 감정인 듯. 그것은 남자의 눈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터지기 직전의 위험을 일부러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리 쉽게 당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거스르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칫하다간 골로 가 버릴지도 모른다.
사언은 반항하기를 그만두었다. 힘을 빼고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잠잠해지자, 남자 역시 일렁이던 열기를 갈무리한다. 터져 나올 듯이 끓어오르던 정복욕이 순식간에 가시고 대신 새어 나온 것은 만족감이다. 푸르디푸른 남자의 두 눈이 곱게 휘어졌다.
“착하군.”
당신한테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사언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쓴웃음을 보이더니 그제야 몸을 비켰다. 짓누르고 있던 무게감이 가시자 한결 편해진다. 얼얼한 어깨를 두들긴 사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뭐라 칭할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모여 뒤섞인 느낌이라 대꾸할 기분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자 일방적으로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더는 도망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이상은 용서치 않을 거니까.”
“안 가. 안 간다고. 됐어?”
재차 경고하는 말에 짜증 내며 대답하자 남자의 한쪽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러면서 짓는 얼굴에 의심이 상당해서, 사언은 또 한 번 울컥한다. 누굴 진짜 뭘로 보고.
자신이 조금 약삭빠른 것은 인정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무리였다. 상처가 터진 어깨에선 피가 퐁퐁 솟아 나오고 있고, 계속 달린 바람에 다리가 다 얼얼하다. 가지고 나온 식수도 없지. 이대로 더 도망친다 해도 몸이 성치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당한 적은 없었는데.
힘의 차이가 새삼 실감이 난다. 눈으로 추측하던 것과 몸으로 체감한 힘의 차이가 엄청났다.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힘을 가졌다. 귀족인 자신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지 않았는가.
더 고집을 부리다간 정말로 저 손에 꿰뚫려 죽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이 정도면 많이 봐준 셈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러게 누가 도망치라고 했나.”
볼멘 얼굴을 하고 있자, 남자가 슬쩍 비웃는 얼굴로 비꼬았다. 몇 번이나 봐도, 저 얼굴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저 비웃는 얼굴은 더더욱.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잘생긴 편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있으면 얄밉고 짜증만 난다.
“너 같으면 남겠냐? 잘도 남겠다.”
“그러면 잡히지나 말든가.”
결국, 잘못한 것은 자신뿐이고, 죽을죄를 지은 것도 자신뿐이지. 그래. 항상 다 내가 죄인이고 내 잘못이지.
사언은 억울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보든 말든, 풀 더미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거두었다. 특별히 새로 만들어 입기까지 한 옷이 고작 며칠 만에 넝마가 다 되어 버렸다. 이래선 입어 봐야 소용이 없지 않냐며 비웃음 받을 정도였다.
차라리 붕대로 써 버릴까.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이쯤에서 새로 안 갈면 피범벅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으로 하얀 천 하나가 건네어진다.
“가다가 죽게 둘 순 없으니 이걸 써라.”
남자의 앞자락이 펄럭였다. 허리를 덧대고 있던 천을 풀어 헤친 것이었다. 사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낚아채듯이 천을 거머쥐었다. 그길로 어깨의 천을 풀어 새것으로 갈았다.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된 걸까. 사언은 한숨을 쉬어 본다. 하나가 엉키니, 그다음 일들이 차례차례 꼬이기 시작한다. 이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봐도 통하지가 않는다. 거대한 벽 하나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무언가를 찾아 사언에게로 돌아왔다. 손에 뭔가가 들려 있어서 또 뭔가 싶어 바라보니,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게로 건넨다. 영문을 모르는 사언의 손에 둥글게 엮은 덩굴줄기가 잡힌다.
“지금 그대에게 딱 어울릴 것 같아서.”
덩굴줄기가 뭐 어떻단 말인가. 사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주워 들었다. 허리에 묶는 건가. 용도를 알 수 없어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있으려니, 깜박했다는 듯 남자의 고개가 다시금 사언에게로 돌아왔다.
“목에 걸어.”
“……목?”
사언은 시키는 대로 목에 걸어 본다. 걸어 놓고 보니 뭔가 찜찜하다. 생각날 듯 말 듯 한데. 도대체 이걸 왜 걸라고 하는 거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덩굴을 만져 보고 있으니, 끝이 연결된 것이 보인다. 둥글게 묶인 덩굴줄기 중의 하나가 느슨하게 풀어져 남자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거.
“항간에선 이렇게들 이야기를 하지.”
딱딱하게 굳은 사언에게 덧붙여진 말은 효과가 상당했다.
“개 목걸이라고.”
도망가는 개들에겐 즉효라고 하더군.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다면서 남자가 빙긋 웃어 보였다. 이번엔 비웃는 얼굴이 아니다. 제법 활짝 웃어 보이는 얼굴은 밝기까지 하다.
하지만 사언은 다시 한 번 속이 뒤틀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더는 꼬일 수 없다는 듯이 속이 상당히 쓰라려 온다. 주먹을 날리고 이대로 도망칠까. 아니면 도망이든 뭐든 일단 저 얼굴을 찢어발기기부터 할까. 후자가 더 끌린다.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으면 절반 정도는 분이 풀릴 듯도 하다.
그러나 어서 오라는 듯이 남자는 줄을 끌어당겼다. 잠시도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재촉했다. 덕분에 사언은 생각하고 있던 바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우직한 팔뚝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배가 꿰뚫리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아서 성질을 죽이고 얌전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걸음이 느려지면 줄이 팽팽히 당겨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며 사언이 눈을 감는다. 힘이 없는 자가 억울한 법이던가. 그 의미를 자신이 이해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뒤늦게야 후회를 해 보지만 때는 늦었다. 그렇게 강족에서 찾아온 반갑지 않은 손님의 탈주는 미수로 끝나고 말았다.

* * *

두려워하던 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족장을 맞으러 나온 좌군장은 저를 보자마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을 참으려는 듯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웃음소리가 다 새어 나온다. 그 바람에 사언은 더욱 심란해지고 만다.
“꼴좋군요.”
“어쩌라고.”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는데 왜 이리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많을까. 이젠 누가 뭐라고 욕해도 욱하지 않을 만큼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우두머리 놈. 이렇게 참을 만하면 다시 성질을 건드린단 말이지.
하는 짓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성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툭 튀어나온 게 있으면 쏙 들어간 게 있어야 뭐라도 맞든가 하지, 자신과 남자는 인발을 잘못 끼워 넣은 집처럼 계속하여 틀어지고만 있었다.
원래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맞든지 말든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단정 짓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 사언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반전되어 뭘 해도 아쉽고 부족한 것은 자신이다 보니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족장이 마음이 틀어져 저를 죽이겠다고 해 버리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길 수밖에.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지금은 더 조심해야 한다.
“용케도 잡아 오셨군요.”
족장의 뒤를 한 무리의 시비들이 따른다. 족장의 곁에 선 좌군장이 사언을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그러자 시선들이 일제히 한 군데로 모여든다. 졸지에 시선을 받게 된 사언은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홱 틀어 버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어. 한 바퀴 가볍게 돌아볼까 했는데 바로 보이더군.”
“유일하게 동쪽 숲에 출입하실 수 있는 아한 님이 아닙니까.”
주거니 받거니 저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뒤따르던 시비들이 자꾸 킥킥 웃는 건지 뒤통수가 따갑다. 사언은 그제야 제 목에 매여 있던 덩굴을 쥐어뜯고 말았다. 갈기갈기 찢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이었지만, 그걸 왜 푸느냐는 아한의 시선이 따라왔다.
사언이 세 번째 손가락으로 답을 대신하자 픽 한 번 웃은 남자는 화제를 직무로 옮겼다. 덕분에 사언은 김이 샜다. 뒤에서 여실한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애꿎은 시비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어딜 웃고 난리야.
“거처를 옮기게 하고 의원을 데려와. 사절을 만나겠다.”
“다치셨습니까?”
“나 말고.”
저 강아지. 아한은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이 턱짓으로 사언을 가리켰다. 졸지에 강아지가 된 사언이 남자를 노려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역시나 남자의 비난 섞인 웃음뿐. 족장이 무슨 짓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저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피곤한 노릇이라 이젠 정말 피곤했다. 사언은 어깨를 늘어트리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붉게 도배된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남자는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갈라섰다. 많은 무리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자신과 좌군장. 그는 사언을 향해 따라오라 이르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를 헤쳐 지나갔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붉은 자수가 인상적인 문 앞. 잠시 망설이던 그는 한숨을 쉬고는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그러자 색색의 장식으로 도배된 방의 형편이 드러났다.
“저번 방은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번엔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더는 도망 못 가실 겁니다. 감시도 더 붙여 드릴 거구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방 안까지 발을 들여놓진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 것을 대한다는 듯이 얼굴까지 일그러져 있다. 덫이라도 심어 놓은 낌새였다.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야, 이거? 의심이 턱 끝까지 솟아올랐지만, 그걸로 입씨름할 힘은 없었다.
사언은 남자가 들어가라고 하기도 전에 방에 들어가 뻗고 말았다. 그러자 뒤에서 지켜보던 좌군장이 의원을 데려오겠다고 일러두고는 문을 닫아 주었다. 비로소 평안함이 찾아든다. 몸 누일 곳이 생기자 절로 몸이 퍼진다. 가눌 수조차 없는 피로엔 어깨의 상처도 한몫하는 듯 온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사언은 눈을 감고 말았다. 의원이 치료하러 저를 찾을 것이지만, 버티기엔 너무나도 피곤했다. 까무룩 밀려드는 수마를 느끼며 사언은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방엔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옷이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고 임시로 묶어둔 천이 깨끗하게 갈려 있었다. 그사이에 다녀간 건가. 혹시나 해서 어깨를 들춰 보자 손색없이 묶인 붕대가 보였다. 풀어 볼 마음은 들지 않아서, 관심을 접기로 했다. 굳이 손대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이다. 괜히 손댔다간 덧날지도 모른다. 초수들의 회복 속도는 인간의 것을 훨씬 웃돌았다. 더군다나 강족인 자신은 더욱더 그랬다. 이 정도 상처라면 며칠만 쉬고 나면 나을 것이다.
상처를 돌보는 것 대신에, 사언은 방으로 시선을 두었다. 겹겹이 몰려들었던 피로에 눌려 죽은 듯 자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안내된 방은 상당히 화려했다. 전날의 방이 최소한의 성의만 보여 준 방이었다면 지금은 작정하고 꾸민 방이라고 해야 할까.
곳곳에 놓인 붉은 자수가 들어간 장식들. 온통 붉은 무늬인 가구들을 보자 불현듯 머릿속에서 뭔가가 수면을 깨고 올라온다. 저 붉은 자수들은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어디서 봤던 건지 한참 생각해 보지만 쉽게 떠오르진 않았다.
사언은 찝찝한 마음을 안고 방 안을 둘러본다. 장식뿐만이 아니라 크기도 상당했다. 한 사람이 지낼 곳으로 두기엔 공간이 남아돈다. 깊숙이 들어온다 했더니 이런 방을 숨겨 두고 있었나. 처음부터 이런 방을 주었으면 좀 좋았을까. 좁고 답답한 방보단 큰 곳이 좋은 법이다. 또 도망갈까 봐 이런 방을 준 건가.
처음부터 잘 대해 줬으면 도망치진 않았겠지. 사언은 그것 보라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한 면을 가득 채운 여닫이문들을 발견했다. 웬 문이 이렇게도 많이 달려 있단 말일까.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사언은 여닫이문 하나를 활짝 열어젖혔다. 개선장군이라 할 만큼 드센 기세로 열었으나, 조금 전의 기세와는 달리 곧장 후회하고 말았다.
“일어났군.”
……잠시만.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왜 옆방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사언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문을 다시 닫았다. 그대로 모른 척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문은 다시 열리고 말았다. 대꾸도 듣지 못한 남자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 것이었다.
그는 기다란 장신의 자태로, 멍하니 서 있는 사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잠이 덜 깼나 보군.”
“당신이 왜 거기서 튀어나와?”
설마 그 여자 얼굴이 말한 감시가 이런 감시는 아니겠지. 감시를 더 붙여 두겠다던 좌군장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말하는 낯짝이 유난히 고소하다는 얼굴이긴 했는데. 사언은 무시할 수 없는 가설에 당황한 채 남자를 주시했다.
그 사이 옷을 갈아입은 그는 말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뒤를 흘긋 보자 방금 벗어 놓은 듯한 옷이 개어져 있는 게 보인다. 제게 어깨를 동여매라고 덧대진 천을 풀어주던 그 옷을 저곳에서 갈아입었다는 건 설마.
“내 방이니까.”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대꾸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사언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말에 생각날 듯 말 듯하던 사실이 비로소 떠올랐기 때문이다.
붉은색의 자수. 자색의 옷들. 그건 전부 혼례를 위한 것들이었다. 자신만 해도 누님을 위해 옷을 붉게 새로 지어 입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온통 붉고 화려하게 도배된 이곳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한 명의 방치고는 유난히 큰 방. 족장의 방과 이어진 방. 바로 신방이었던 것이다.
“좌군장 불러 줘. 저번에 줬던 방을 쓰겠어.”
“그럴 순 없지. 다시 도망갈지도 모르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렇다고 이런 방을 주는 게 어디 있어!”
아니, 아무리 감시가 필요해도 그렇지. 신방을 주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 많고 많은 방을 두고 왜 이런 방을 주냔 말이다.
급기야 이상한 상상이 스쳐 지나감에, 사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얼굴이 허옇게 뜬 사언을 보며 즐거워하는 쪽은 우직하게 서 있는 남자였다. 설족의 족장, 그러니까 아한은 안색이 파래졌다 하얘졌다 하는 사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묶이고 싶다고 안달이 나 있는 모양인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줘야지.”
사언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다시 한 번 그의 의중을 떠보지만 물러날 기색은 아니다. 정말로 그 방이 제게 배당된 건지, 아한이 어떠냐며 기분을 물어온 것이다.
급기야 그는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곱게 차려진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은색의 머리칼이 그의 걸음에 따라 찰랑찰랑 움직인다. 이내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사언을 향해 돌아왔다. 사언이 시야에 가득 찬 발밑을 따라 고개를 드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저보다 크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어때. 마음에 드나?”
“난 허락한 적 없어. 하겠다고 한 적 없어.”
누구 좋으라고 혼인 같은 걸 한단 말인가. 좌군장. 그 여자 얼굴도 참 이상하다. 분명 혼인에 대해서 싫어하는 기색이었는데 왜 갑자기 신방을 내어 줄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자신을 엿 먹일 수 있는 상대가 족장밖엔 없어서? 혼자서 감당하기엔 벅차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거기엔 남자의 평가도 한몫했을 것이다. 자신이 결코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생긴 것과는 달리 성격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곤 이렇게 족장의 바로 옆방을 내어 준 것으로 짐작된다.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언이 어깨를 떨었다. 그런 사언을 향해, 아한은 고소하다는 듯 응수했다.
“싫다고 도망가는 꼴이 꼭 혼인 앞두고 도망간 네 누이 같지 않은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옳은 말을 듣게 되면 화가 나는 법.
“입 함부로 놀리지 마.”
“함부로 행동하고 놀리고 있는 것은 너다. 애초에 그 방정맞은 입을 잘못 놀려 일을 크게 만든 것도 그쪽이지 않은가.”
아오, 진짜. 한 마디도 안 져.
벌써 속이 쓰리다. 한 일주일을 굶은 듯 강하게 속이 아려 오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남자를 노려봐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는 듯 당당하게 저를 내려다본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도망칠 수 있을 때까지. 혹은 약속한 6개월이 지날 때까지. 그동안은 이렇게 싫은 얼굴과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앞날이 컴컴해졌다. 도무지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도망도 어느 정도 승산이 있어야 가는 거지. 꼴로 보아 온종일 감시가 붙어 있을 게 뻔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제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다 알아차릴 것이 뻔하다. 여우같은 남자가 아닌가. 저번처럼 문이라도 깨고 도망치려 하다간 대번에 알아차리고 급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말인가.
다시 믿음을 주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
“그 말 아직도 유효해? 신뢰를 회복하면 봐주겠다는 말.”
일족이고 뭐고 날 가만 좀 놔주라, 제발.
사언이 하나 남은 동아줄을 잡고 협상을 걸어 본다. 의중을 떠보려는 듯 아한의 신중한 시선이 사언의 얼굴에 머물렀다. 잔뜩 긴장해 바라보는 제 얼굴을 샅샅이 훑어본다. 지금 제 얼굴은 절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일 것이다.
강사언 많이 죽었다. 성질 많이 죽었다. 이렇게 부탁을 해 보는 게 얼마 만이었던가. 잘나기로 그지없는 자신이 연신 이렇게 깨지는 것도 처음이다. 일족들이 이런 모습을 봤으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정말 그 사언이 맞느냐며 침을 튀겨 대겠지.
더 나아가, 잘됐다며 누님 대신 혼인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설족과의 우호에 신경을 쓰는 노인네들이니까. 그럴 순 없다. 조금 못나 보이더라도 그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저 태연자약한 남자의 손에 굴러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남자는 혼인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를 무시해 온 강족과 혼인을 생각한 것만 해도 그렇다. 게다가 저를 엿 먹이겠다는 의도로 혼인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저 의중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뭇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크게 벗어났다. 생각하는 게 다르니 족장인 거고, 융성하게 발전을 이룩해 낸 거겠지만. 일단 자신은 그 놀음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다. 적당한 선에서 자존심 꺾고 후딱 해치울 수밖에.
“이제 와서 그 말을 꺼내다니,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역시나 남자는 그리 환호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젠 익숙한 비소를 입가에 걸어 보인다.
“남자가 한번 한 말을 꺾는 것도 뻔뻔한 행동이지.”
“말은 잘하는군.”
“말이라도 못 하면 지금 나가서 뒈져 버리게.”
뻔뻔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그런 기회를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다. 사언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리꽂히는 시선을 받아쳤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시선이 거두어졌다. 거슬리는 긴 머리칼을 뒤로 넘긴 남자는 예상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약속한 말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돋는군.”
흥미라니.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사언이 눈을 깜빡이고 있자, 그 안으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숲에서 목격했던 남자의 눈빛이 떠오른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서웠던 눈빛. 탐색하듯 길게 찢어져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게 저를 옭아매던 시선. 그것은 짐승의 눈빛이었다. 모습은 인간이었지만, 눈빛만은 짐승의 것이었다.
그때의 광경이 다시금 살아난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벽이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자 벽이 등 뒤로 다가왔다. 어느 곳으로도 달아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언이 고개를 들어 아한과 마주한다. 저를 벽으로 몰아넣은 남자의 얼굴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기라도 한 듯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은빛 타래 몇 가닥이 사언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오만한 도련님이 어떻게 날 설득시킬지 궁금하거든.”
그렇게 말한 아한은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빨간 혀가 호선을 그린다. 요사스러운 뱀과도 같은 모양으로 입술 위를 기더니 고갯짓과 함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왔다. 간을 보는 듯,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나게 하는 듯.
미끈한 뱀은 순식간에 사언의 입술을 핥고 사라진다. 사언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재할 틈이 없었다. 아한의 입술 한쪽 끝이 거만하게 비틀어지고 나서야 표정이 변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꼭 분칠한 듯이 허옇게 떠 버렸다.
“두고 봐.”
무릎 꿇고 빌게 해 주마.
어째 설득의 의미가 틀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사언은 아한을 마주 보며 속 안으로 흘러내리는 피의 강에 두고 맹세했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었다. 지금 당한 일도, 이때까지 계속해서 당한 일들도 모두 복수해 주고 말 거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낸 사언이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그것은 다른 미련을 떨쳐 내고 확신하게 된 얼굴이었으나, 한편으론 남자에게 대항하는 마지막 철갑 옷을 두른 모양새이기도 했다. 그러자 아한의 얼굴에 요기가 번진다. 온몸이 기대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불꽃이 번지듯이 시선이 교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