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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부
1. 만남
식은땀이 내 이마를 타고 비 오듯 떨어졌다. 손에도 땀이 배어 쥐고 있는 노트 끝이 흐물흐물해졌다. 여기에 온다고 자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앞의 교도관은 척척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옆에서 세계적인 심리학자, 로벤이 긴장으로 딱딱해진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조나단, 긴장되나?”
“그야 상대는 세계적인 흉악범인걸요.”
역시 괜히 온 것 같아. 나는 떨지 않기 위해 애쓰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뉴욕 근교의 교도소에 와 있다. 우리가 복도를 하나 지날 때마다 뒤의 문이 쾅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양옆 감방에서 욕지거리와 조롱이 들려왔다. 뭐야, 여기 무서워. 로벤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묶여 있다고 해도 항상 조심하고 주의 깊게 다가가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그렇죠. 그러니 애초에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옆을 걷고 있는 로벤은 범죄심리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심리학자다. 그리고 나는 기자 지망생으로, 현재 뉴욕의 N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다.
아마도 이 말을 듣는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낱 대학생이 어떻게 세계적인 흉악범을 만나겠는가? 로벤이 농담을 던지듯 말을 건넸다.
“지금 네 표정을 보니 불독에게 쫓겼다던 열 살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나는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 로벤은 내 형의 친구다. 그리고 열 살 때 불독에 쫓기던 나는 결국에 형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쓰디쓴 기억이었다. 그걸 줄줄이 자기 친구에게 떠들다니.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형을 한 대 때려 줘야겠다.
평범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바로 세계적인 불황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지금, 기자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치솟는 물가와 함께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 역시 우상승 곡선을 그었다. 덕분에 나는 몇 번이나 유명 신문사 인턴에 지원했지만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그들이 나에게 은연중에 말하던 것은 ‘실무 경험의 부족’이었다. 학교를 아직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언제 실무 경험을 쌓으라는 건지. 그들은 학내 교지편집부라는 내 경력은 경험으로 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인턴 면접 때 옆자리에 앉은 T대 학생이 오지에서의 깊은 취재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을 보고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에게는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
때마침 학기가 끝나가는 겨울,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중동으로 취재를 갔던 미친 형 바론이 돌아왔다. 그는 깔끔한 외모는 어디다 두었는지 더럽기 그지없는 몰골로 집구석에 기어들어 왔는데, 놀랍게도 며칠 만에 다시 예전의 단정한 외모를 회복하는 기적을 보였다.
도전을 좋아하는 바론의 성정은, 이번에는 흉악범죄자를 건드리기에 이르렀다. 그는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친구 로벤과 함께 한창 이슈가 되었던 ‘슬로터(Slaughter) 키스터’를 취재하기에 이른다.
세상에, 키스터라니. 이미 미국 시민 모두가, 그가 가축을 다루듯 서른세 명의 성인 남성을 도살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키스터가 굳게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심리학자들이 어머니를 학대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 혹은 사회에 대한 증오에 의한 범죄가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었다. 키스터의 죽은 어머니가 정말 학대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바론은 로벤과 함께 그의 연구와 취재를 쭉쭉 진행해 나갔고, 마지막으로 키스터 본인과의 면담을 첨부해 기사와 논문을 남길 예정이었다. 그 제목은 모두 ‘흉악범과의 면담’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론의 맹장은 중요하기 그지없는 취재 당일, 보란 듯이 그의 바람을 배반했다.
“조, 조나단……!”
죽어 가는 표정의 바론이 떨리는 손으로 기자노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지원한 인턴십에 다 떨어지고 집에서 서바이벌 쇼 프로 따위를 보고 있던 나는, 심드렁한 손길로 그 노트를 받아 들었다. 난 그때까지 바론이 키스터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 녹음기는 책상 위에 있어.”
“바론, 나에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생각 하지 말고 수술이나 잘 받고 와.”
나는 노트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태평하게 휴대폰을 들어 앰뷸런스를 불렀다.
“맹장이 터진 모양이에요. 아니, 저 말고. 제 형이요.”
“조나단……!!! 너밖에 없다고! 으어어억.”
바론이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은 살았는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 중요한 취재야. 그냥 로벤 따라가서, 녹음만, 해. 녹음만 하고 메모도 좀 해 주면 좋고. 너도 취재 몇 번 해 봤잖아. 크으어어악. 나 죽네.”
좀 조용히 아파하면 덧나나.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첩을 팔랑팔랑 넘겼다. 익히 들어 본 로벤이라는 이름이 수첩의 맨 앞장에 적혀 있었다. 공동 작업이라도 하나 보지? 나는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수첩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조나단…….”
발목을 부여잡는 억센 손이 느껴졌다. 아래를 바라보니 바닥을 기던 바론이 내 발목을 잡고 불타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지옥에서 돌아온 망령이라도 되는 거냐. 나는 그를 대강 발로 떼어 내려다가 그의 말에 멈칫했다.
“추천서, 써 줄게! 형 W지 기자잖아. 맛깔나게 추천서 써 줄게!”
나는 슬쩍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수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써 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안 써 주더니. 내 입가에는 스리슬쩍 웃음이 맺혀 있었다.
“좋아. 그 말 번복하기 없음이야. 로벤 씨에게는 내가 연락할게.”
“그래……. 으…으으…….”
바론은 이제야 여한이 없다는 듯이 바닥에 엎어졌고, 곧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잘 부탁한다며 죽어 가는 와중에도 엄지를 치켜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JFK 공항으로 달려간 나는 우리의 목적지가 교도소란 것을 알고 합죽이가 되었다. 망할 형. 이런 말은 없었잖아. 하지만 저질러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면담자는 두 명으로 보고된 상태였고, 로벤은 그 바론의 동생답게 내가 자신이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캐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로벤의 순진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배반할 수 없었던 나는 리무진에 짐짝처럼 얹혀 교도소로 끌려오고 말았다.
“이곳입니다.”
교도관이 멈춰서 긴장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복도를 지나가기 전에 보았던 그 감방과 확실하게 달랐다. 두꺼운 철창은 무언가, 위험한 것을 격리시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옆을 보니 로벤이 긴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면담은 내가 한다. 조나단, 너는 녹음기 세팅과 메모를 맡아 줘. 시계를 보면서 그의 표정이나 행동을 네 나름대로 기록해 주면 고맙겠어. 시계 차고 왔지?”
나는 말없이 손목시계를 찬 왼쪽 손목을 들어 보였다. 로벤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모든 행동은 그가, 키스터가 허락하면 한다. 돌발 행동이나 말로 주의를 끄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마. 그는 맹수 같은 인간이니까.”
“맞습니다. 키스터 놈은 저번에 그를 이송하던 간수 중 하나의 귀를 물어뜯었죠. 저희도 동행할 테지만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런 면담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도관이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아무래도 이 면담에 회의적인 듯했다. 하긴, 가둬 놓는 것도 모자란 흉악범을 일부러 만나 면담까지 하겠다는 사람의 심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쨌든 이번 일로 그들도 할 일이 늘었으니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부디 그러길 빌죠.”
로벤의 말에 교도관이 슬쩍 웃고는 감방 쪽으로 갔다. ‘열겠습니다.’ 담담히 말한 교도관이 문을 열었다. 곧이어 비친 환한 빛에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면담을 위한 방의 중간에는 창살이 있는 벽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난폭한 흉악범으로부터 면담자를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한 장치였다. 교도관이 퉁명스럽게 고했다.
“면담자가 왔다.”
반대편에 의자에 묶여 하얀색 천으로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구속된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빛바랜 회색 머리가 덩그러니 흰 조명을 받고 있다.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 앉은키로 보아 신장은 큰 것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말라 보였다.
“키스터, 고개를 들어.”
교도관이 키스터를 재촉했다. 로벤이 교도관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슬쩍 웃었다. 자신이 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교도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뒤로 물러나 벽 쪽에 기대섰다.
“키스터 씨.”
로벤이 키스터를 불렀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직업 정신도 참 대단하시지. 슬로터라고 불리는 사내에게 씨(Mr.)를 붙이다니. 키스터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분이 지났을까, 로벤이 다시 조용히 말을 건넸다.
“키스터…….”
“왁!!”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 키스터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창살에 머리를 박았던 것이다. 창살 사이로 찢어지게 열린 동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번들번들한 눈이 이리저리 움직여 로벤과 나, 교도관을 훑어봤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참았다. 역시 괜히 왔어. 오늘 밤에는 분명 악몽을 꿀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 안의 녹음기와 노트를 생명줄인 것처럼 꽉 부여잡았다.
로벤은 움찔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범죄심리학자인 그는 설마 이런 일에 익숙한 걸까. 나는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키스터는 창살에 부딪친 이마가 아프지도 않은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껄렁한 태도로 로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쇼?”
“저는 범죄심리학자, 로벤 멕스웰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래. 심리학자 양반. 간수에게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키스터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게 노트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그를 훔쳐봤다.
키스터는 그 흉악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적으로 꽤 미남으로 취급받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톤이 밝아서 은색으로도 보이는 회색 머리에, 붉은빛이 강한 선홍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덮여 있었다. 또한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 보였다. 얼굴만 보자면 나와 비슷한 또래 같았다.
나는 살짝 놀랐다. 아까의 그 돌발 행동을 내가 분명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는 꽤나 ‘일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역시 요즘 미친놈들은 생긴 건 일반인이랑 똑같다던데 정말이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미친놈이 내 주위에 또 없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부디 그런 불행의 주인공이 내가 되지 않길 빌었다.
키스터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보나 마나 내 범죄 동기 같은 걸 물으러 왔겠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잖아.”
키스터는 ‘끔찍한’을 강조하며 로벤을 비웃었다. 로벤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 그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 대화를 녹음하거나 기록해도 되겠습니까?”
“내 의향을 묻는 거야? 신사적이기도 하지.”
키스터가 다시 웃어 젖혔다. 로벤은 잠시 기다렸다. 키스터는 웃는 것에 질렸는지 순식간에 무표정이 되었다. 그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자 로벤은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 나? 나는 당황하다 녹음기를 세팅하라는 뜻임을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중간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녹음기 세팅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제발 내가 이 미친놈의 눈에 띄지 않기를. 나는 슬며시 녹음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녹음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강렬한 시선을 느껴 눈을 돌린 나는 흠칫 놀랐다. 키스터의 붉은 눈이 어느새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나는 등 뒤로 불길함이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이쪽 귀염둥이는 아직 자기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손을 쓸 수 없는 키스터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벤이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다시 수습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녹음기를 세팅하는 데 집중했다. 괜히 살인마 눈에 찍히고 싶지 않았다.
“이쪽은, 제 면담을 도와주는 조나단 군이라고 합니다.”
로벤이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방 안에 잠시 긴장감이 맴돌았다. 슬그머니 녹음기 세팅을 마치고 뒤로 물러나려는데, 키스터가 고개를 저으며 위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저 귀염둥이 입으로 자기를 소개했으면 좋겠어. 왜 네가 대신 소개하는데? 보호자라도 되나? 아님 애인?”
공기가 삽시간에 쨍하고 얼어붙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나단 군. 소개하게.”
로벤이 미안하다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면담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면담 상대가 흉악범에 미친놈이기 때문이지만. 난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을 소개했다.
“조나단 에이프릴입니다.”
“에이프릴.”
키스터가 내 성을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동안 ‘에이프릴, 에이프릴. 조나단 에이프릴.’이라고 중얼거려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뭐야, 이름 외우는 거 아냐? 나는 불안해졌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키스터가 다시 나를 불렀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큭큭큭큭큭큭!!!”
키스터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발광하며 몸을 떨었고, 나는 순식간에 사자 앞의 쥐처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큭큭큭, 에이프릴!! 에이프릴!!! 아주 귀여운 성이야! 내 마지막 사냥 상대의 이름은 마치였는데, 그놈은 씹다 뱉은 껌처럼 생겼었지. 하지만 넌 아주 귀엽게 생겼군.”
“…….”
씨발, 좆됐다. 아무래도 난 살인마한테 찍힌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돼?! 난 녹음기 세팅밖에 안 했다고! 난 그 순간 날 여기로 보낸 형을 저주했고, 갑자기 터져 버린 형의 맹장을 저주했고, 신을 저주한 뒤, 신에게 보낸 저주를 취소하고 신에게 내 목숨을 구걸했다. 제발 살려 줘요. 이 흥미가 제발 일시적인 거라고 나에게 말해 줘.
키스터가 흉악범이라는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는 유혹적인 미성으로 나를 불렀다.
“어이, 고개 좀 들어 보지 그래? 귀염둥이.”
나는 바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들면 살인자가 내 얼굴을 외울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로벤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지 유지하고 있던 포커페이스를 깨뜨리고 있었다. 로벤 형, 어떻게 좀 해 줘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키스터가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고개 들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
“조나단 에이프릴. 내가 나중에 너를 찾아가서 무슨 짓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 당장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
그 말에 몸이 떨렸다. 손에 바로 땀이 찼다. 나 지금 살인 예고 들은 거야? 등골이 저릿하게 서늘해지는 느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키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키스터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반들거렸다.
아. 괜히 고개 들었다. 저 새끼 지금 눈으로 사진 찍고 있어.
살인마의 뇌 한구석에 얼굴이 찍혀서 현상수배지처럼 떡하니 박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내 얼굴을 확인한 키스터가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운을 떼었다. 마치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데 속을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지만.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그만해라. 키스터.”
그때 내 옆에서 철컥, 하고 무거운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벽 쪽에 시립해 있던 교도관이 포켓에 차고 있던 권총에 손을 가져간 것이다.
“젠장, 왜 방해질이야.”
키스터가 불만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든든한 기사님의 등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가스 불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잠깐, 근데 지금 막으면 어떡해! 키스터가 지금 나를 자신의 뭔가로 규정한 것 같은데, 고맙고도 원망스러운 교도관님 때문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들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잡아 줍쇼 하는 것처럼, ‘저기 슬로터로 유명한 키스터 씨? 아까 말하려던 것 한 번만 더 말해 줄래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불길한 상상들이 퍼져 갔다.
첫 번째로 나타난 키스터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밝은 회색 머리가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선홍빛 눈이 순진하게 휘어지며 기쁨으로 그득해졌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새로운 친구구나!”
미친 상상이었다. 슬로터 키스터 같은 친구 따위 절대 싫어. 트럭으로 준다고 하면 트럭을 폭파시켜 버릴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두 번째 키스터가 나타나 깔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 눈은 어둠에 한 발 걸친 것처럼 질척했으며, 탁해 보였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새로운 사냥감! 마치 다음에는 에이프릴이지! 큭큭큭, 서른네 번째 사냥감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다니 운이 좋은걸!”
씨발, 왠지 이거 같다.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발휘되지 않았던 내 초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만일 키스터가 내 존재를 무언가로 규정하려고 했으면 반드시 후자라고.
1부
1. 만남
식은땀이 내 이마를 타고 비 오듯 떨어졌다. 손에도 땀이 배어 쥐고 있는 노트 끝이 흐물흐물해졌다. 여기에 온다고 자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앞의 교도관은 척척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옆에서 세계적인 심리학자, 로벤이 긴장으로 딱딱해진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조나단, 긴장되나?”
“그야 상대는 세계적인 흉악범인걸요.”
역시 괜히 온 것 같아. 나는 떨지 않기 위해 애쓰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뉴욕 근교의 교도소에 와 있다. 우리가 복도를 하나 지날 때마다 뒤의 문이 쾅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양옆 감방에서 욕지거리와 조롱이 들려왔다. 뭐야, 여기 무서워. 로벤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묶여 있다고 해도 항상 조심하고 주의 깊게 다가가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그렇죠. 그러니 애초에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옆을 걷고 있는 로벤은 범죄심리를 연구하는 세계적인 심리학자다. 그리고 나는 기자 지망생으로, 현재 뉴욕의 N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다.
아마도 이 말을 듣는 모두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낱 대학생이 어떻게 세계적인 흉악범을 만나겠는가? 로벤이 농담을 던지듯 말을 건넸다.
“지금 네 표정을 보니 불독에게 쫓겼다던 열 살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나는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 로벤은 내 형의 친구다. 그리고 열 살 때 불독에 쫓기던 나는 결국에 형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쓰디쓴 기억이었다. 그걸 줄줄이 자기 친구에게 떠들다니.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형을 한 대 때려 줘야겠다.
평범한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바로 세계적인 불황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지금, 기자가 되기는 매우 힘들다. 치솟는 물가와 함께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 역시 우상승 곡선을 그었다. 덕분에 나는 몇 번이나 유명 신문사 인턴에 지원했지만 높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그들이 나에게 은연중에 말하던 것은 ‘실무 경험의 부족’이었다. 학교를 아직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언제 실무 경험을 쌓으라는 건지. 그들은 학내 교지편집부라는 내 경력은 경험으로 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건만, 인턴 면접 때 옆자리에 앉은 T대 학생이 오지에서의 깊은 취재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것을 보고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에게는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실무 경험이 필요하다!
때마침 학기가 끝나가는 겨울,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지 중동으로 취재를 갔던 미친 형 바론이 돌아왔다. 그는 깔끔한 외모는 어디다 두었는지 더럽기 그지없는 몰골로 집구석에 기어들어 왔는데, 놀랍게도 며칠 만에 다시 예전의 단정한 외모를 회복하는 기적을 보였다.
도전을 좋아하는 바론의 성정은, 이번에는 흉악범죄자를 건드리기에 이르렀다. 그는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친구 로벤과 함께 한창 이슈가 되었던 ‘슬로터(Slaughter) 키스터’를 취재하기에 이른다.
세상에, 키스터라니. 이미 미국 시민 모두가, 그가 가축을 다루듯 서른세 명의 성인 남성을 도살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키스터가 굳게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심리학자들이 어머니를 학대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 혹은 사회에 대한 증오에 의한 범죄가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었다. 키스터의 죽은 어머니가 정말 학대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바론은 로벤과 함께 그의 연구와 취재를 쭉쭉 진행해 나갔고, 마지막으로 키스터 본인과의 면담을 첨부해 기사와 논문을 남길 예정이었다. 그 제목은 모두 ‘흉악범과의 면담’으로 통일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바론의 맹장은 중요하기 그지없는 취재 당일, 보란 듯이 그의 바람을 배반했다.
“조, 조나단……!”
죽어 가는 표정의 바론이 떨리는 손으로 기자노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지원한 인턴십에 다 떨어지고 집에서 서바이벌 쇼 프로 따위를 보고 있던 나는, 심드렁한 손길로 그 노트를 받아 들었다. 난 그때까지 바론이 키스터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노, 녹음기는 책상 위에 있어.”
“바론, 나에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생각 하지 말고 수술이나 잘 받고 와.”
나는 노트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태평하게 휴대폰을 들어 앰뷸런스를 불렀다.
“맹장이 터진 모양이에요. 아니, 저 말고. 제 형이요.”
“조나단……!!! 너밖에 없다고! 으어어억.”
바론이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은 살았는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 중요한 취재야. 그냥 로벤 따라가서, 녹음만, 해. 녹음만 하고 메모도 좀 해 주면 좋고. 너도 취재 몇 번 해 봤잖아. 크으어어악. 나 죽네.”
좀 조용히 아파하면 덧나나.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첩을 팔랑팔랑 넘겼다. 익히 들어 본 로벤이라는 이름이 수첩의 맨 앞장에 적혀 있었다. 공동 작업이라도 하나 보지? 나는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수첩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조나단…….”
발목을 부여잡는 억센 손이 느껴졌다. 아래를 바라보니 바닥을 기던 바론이 내 발목을 잡고 불타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지옥에서 돌아온 망령이라도 되는 거냐. 나는 그를 대강 발로 떼어 내려다가 그의 말에 멈칫했다.
“추천서, 써 줄게! 형 W지 기자잖아. 맛깔나게 추천서 써 줄게!”
나는 슬쩍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수첩을 다시 집어 들었다. 써 달라고 할 때는 죽어도 안 써 주더니. 내 입가에는 스리슬쩍 웃음이 맺혀 있었다.
“좋아. 그 말 번복하기 없음이야. 로벤 씨에게는 내가 연락할게.”
“그래……. 으…으으…….”
바론은 이제야 여한이 없다는 듯이 바닥에 엎어졌고, 곧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잘 부탁한다며 죽어 가는 와중에도 엄지를 치켜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JFK 공항으로 달려간 나는 우리의 목적지가 교도소란 것을 알고 합죽이가 되었다. 망할 형. 이런 말은 없었잖아. 하지만 저질러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면담자는 두 명으로 보고된 상태였고, 로벤은 그 바론의 동생답게 내가 자신이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캐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로벤의 순진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배반할 수 없었던 나는 리무진에 짐짝처럼 얹혀 교도소로 끌려오고 말았다.
“이곳입니다.”
교도관이 멈춰서 긴장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복도를 지나가기 전에 보았던 그 감방과 확실하게 달랐다. 두꺼운 철창은 무언가, 위험한 것을 격리시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옆을 보니 로벤이 긴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 그는 내 어깨를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면담은 내가 한다. 조나단, 너는 녹음기 세팅과 메모를 맡아 줘. 시계를 보면서 그의 표정이나 행동을 네 나름대로 기록해 주면 고맙겠어. 시계 차고 왔지?”
나는 말없이 손목시계를 찬 왼쪽 손목을 들어 보였다. 로벤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모든 행동은 그가, 키스터가 허락하면 한다. 돌발 행동이나 말로 주의를 끄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마. 그는 맹수 같은 인간이니까.”
“맞습니다. 키스터 놈은 저번에 그를 이송하던 간수 중 하나의 귀를 물어뜯었죠. 저희도 동행할 테지만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런 면담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도관이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아무래도 이 면담에 회의적인 듯했다. 하긴, 가둬 놓는 것도 모자란 흉악범을 일부러 만나 면담까지 하겠다는 사람의 심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쨌든 이번 일로 그들도 할 일이 늘었으니까.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부디 그러길 빌죠.”
로벤의 말에 교도관이 슬쩍 웃고는 감방 쪽으로 갔다. ‘열겠습니다.’ 담담히 말한 교도관이 문을 열었다. 곧이어 비친 환한 빛에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면담을 위한 방의 중간에는 창살이 있는 벽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난폭한 흉악범으로부터 면담자를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한 장치였다. 교도관이 퉁명스럽게 고했다.
“면담자가 왔다.”
반대편에 의자에 묶여 하얀색 천으로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구속된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빛바랜 회색 머리가 덩그러니 흰 조명을 받고 있다.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 앉은키로 보아 신장은 큰 것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말라 보였다.
“키스터, 고개를 들어.”
교도관이 키스터를 재촉했다. 로벤이 교도관에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슬쩍 웃었다. 자신이 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교도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뒤로 물러나 벽 쪽에 기대섰다.
“키스터 씨.”
로벤이 키스터를 불렀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직업 정신도 참 대단하시지. 슬로터라고 불리는 사내에게 씨(Mr.)를 붙이다니. 키스터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1분이 지났을까, 로벤이 다시 조용히 말을 건넸다.
“키스터…….”
“왁!!”
쾅, 하는 큰 소리가 났다. 키스터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창살에 머리를 박았던 것이다. 창살 사이로 찢어지게 열린 동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번들번들한 눈이 이리저리 움직여 로벤과 나, 교도관을 훑어봤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참았다. 역시 괜히 왔어. 오늘 밤에는 분명 악몽을 꿀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손 안의 녹음기와 노트를 생명줄인 것처럼 꽉 부여잡았다.
로벤은 움찔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범죄심리학자인 그는 설마 이런 일에 익숙한 걸까. 나는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키스터는 창살에 부딪친 이마가 아프지도 않은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껄렁한 태도로 로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쇼?”
“저는 범죄심리학자, 로벤 멕스웰이라고 합니다.”
“아아, 그래. 심리학자 양반. 간수에게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키스터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에게 들키지 않게 노트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그를 훔쳐봤다.
키스터는 그 흉악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사회적으로 꽤 미남으로 취급받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톤이 밝아서 은색으로도 보이는 회색 머리에, 붉은빛이 강한 선홍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덮여 있었다. 또한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 보였다. 얼굴만 보자면 나와 비슷한 또래 같았다.
나는 살짝 놀랐다. 아까의 그 돌발 행동을 내가 분명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그는 꽤나 ‘일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역시 요즘 미친놈들은 생긴 건 일반인이랑 똑같다던데 정말이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미친놈이 내 주위에 또 없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부디 그런 불행의 주인공이 내가 되지 않길 빌었다.
키스터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보나 마나 내 범죄 동기 같은 걸 물으러 왔겠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잖아.”
키스터는 ‘끔찍한’을 강조하며 로벤을 비웃었다. 로벤은 평정을 잃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당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 그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 대화를 녹음하거나 기록해도 되겠습니까?”
“내 의향을 묻는 거야? 신사적이기도 하지.”
키스터가 다시 웃어 젖혔다. 로벤은 잠시 기다렸다. 키스터는 웃는 것에 질렸는지 순식간에 무표정이 되었다. 그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자 로벤은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 나? 나는 당황하다 녹음기를 세팅하라는 뜻임을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중간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녹음기 세팅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제발 내가 이 미친놈의 눈에 띄지 않기를. 나는 슬며시 녹음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녹음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때였다. 갑자기 옆에서 강렬한 시선을 느껴 눈을 돌린 나는 흠칫 놀랐다. 키스터의 붉은 눈이 어느새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나는 등 뒤로 불길함이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이쪽 귀염둥이는 아직 자기소개를 안 한 것 같은데.”
손을 쓸 수 없는 키스터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로벤이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가 다시 수습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녹음기를 세팅하는 데 집중했다. 괜히 살인마 눈에 찍히고 싶지 않았다.
“이쪽은, 제 면담을 도와주는 조나단 군이라고 합니다.”
로벤이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방 안에 잠시 긴장감이 맴돌았다. 슬그머니 녹음기 세팅을 마치고 뒤로 물러나려는데, 키스터가 고개를 저으며 위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난 저 귀염둥이 입으로 자기를 소개했으면 좋겠어. 왜 네가 대신 소개하는데? 보호자라도 되나? 아님 애인?”
공기가 삽시간에 쨍하고 얼어붙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나단 군. 소개하게.”
로벤이 미안하다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면담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면담 상대가 흉악범에 미친놈이기 때문이지만. 난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을 소개했다.
“조나단 에이프릴입니다.”
“에이프릴.”
키스터가 내 성을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동안 ‘에이프릴, 에이프릴. 조나단 에이프릴.’이라고 중얼거려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뭐야, 이름 외우는 거 아냐? 나는 불안해졌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키스터가 다시 나를 불렀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담겨 있었다.
“큭큭큭큭큭큭!!!”
키스터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발광하며 몸을 떨었고, 나는 순식간에 사자 앞의 쥐처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큭큭큭, 에이프릴!! 에이프릴!!! 아주 귀여운 성이야! 내 마지막 사냥 상대의 이름은 마치였는데, 그놈은 씹다 뱉은 껌처럼 생겼었지. 하지만 넌 아주 귀엽게 생겼군.”
“…….”
씨발, 좆됐다. 아무래도 난 살인마한테 찍힌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돼?! 난 녹음기 세팅밖에 안 했다고! 난 그 순간 날 여기로 보낸 형을 저주했고, 갑자기 터져 버린 형의 맹장을 저주했고, 신을 저주한 뒤, 신에게 보낸 저주를 취소하고 신에게 내 목숨을 구걸했다. 제발 살려 줘요. 이 흥미가 제발 일시적인 거라고 나에게 말해 줘.
키스터가 흉악범이라는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는 유혹적인 미성으로 나를 불렀다.
“어이, 고개 좀 들어 보지 그래? 귀염둥이.”
나는 바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들면 살인자가 내 얼굴을 외울 게 뻔한데 내가 어떻게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로벤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지 유지하고 있던 포커페이스를 깨뜨리고 있었다. 로벤 형, 어떻게 좀 해 줘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키스터가 낮은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고개 들라고.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
“조나단 에이프릴. 내가 나중에 너를 찾아가서 무슨 짓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 당장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
그 말에 몸이 떨렸다. 손에 바로 땀이 찼다. 나 지금 살인 예고 들은 거야? 등골이 저릿하게 서늘해지는 느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키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키스터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반들거렸다.
아. 괜히 고개 들었다. 저 새끼 지금 눈으로 사진 찍고 있어.
살인마의 뇌 한구석에 얼굴이 찍혀서 현상수배지처럼 떡하니 박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내 얼굴을 확인한 키스터가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며 운을 떼었다. 마치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데 속을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지만.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그만해라. 키스터.”
그때 내 옆에서 철컥, 하고 무거운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벽 쪽에 시립해 있던 교도관이 포켓에 차고 있던 권총에 손을 가져간 것이다.
“젠장, 왜 방해질이야.”
키스터가 불만스럽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든든한 기사님의 등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가스 불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잠깐, 근데 지금 막으면 어떡해! 키스터가 지금 나를 자신의 뭔가로 규정한 것 같은데, 고맙고도 원망스러운 교도관님 때문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들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잡아 줍쇼 하는 것처럼, ‘저기 슬로터로 유명한 키스터 씨? 아까 말하려던 것 한 번만 더 말해 줄래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난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 불길한 상상들이 퍼져 갔다.
첫 번째로 나타난 키스터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밝은 회색 머리가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선홍빛 눈이 순진하게 휘어지며 기쁨으로 그득해졌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새로운 친구구나!”
미친 상상이었다. 슬로터 키스터 같은 친구 따위 절대 싫어. 트럭으로 준다고 하면 트럭을 폭파시켜 버릴 거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두 번째 키스터가 나타나 깔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 눈은 어둠에 한 발 걸친 것처럼 질척했으며, 탁해 보였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새로운 사냥감! 마치 다음에는 에이프릴이지! 큭큭큭, 서른네 번째 사냥감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다니 운이 좋은걸!”
씨발, 왠지 이거 같다.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발휘되지 않았던 내 초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만일 키스터가 내 존재를 무언가로 규정하려고 했으면 반드시 후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