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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키스터는 고개를 다시 떨어뜨린 채 벽에 매미처럼 붙은 나를 흘끗 보고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랜만에 귀염둥이랑 좀 놀아 보겠다는데 말이야. 둘만의 시간에 잘도 끼어드는군.”
“지금은 면담 시간이다.”
교도관은 죄수의 이런 돌발 행동에는 익숙해져 있는지 사무적이고도 강압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키스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우수에 찬 눈동자가 의미 없이 테이블을 훑었다.
“정말 재미없군.”
“그럼 면담을 다시 시작할까요.”
힘이 빠진 듯한 키스터의 태도에 로벤이 다시 기운을 얻어 입을 열었다. 키스터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고 대답한 뒤에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말해 두지만 내가 묻는 말에 전부 대답할 거란 생각은 버려. 내 과거사 캘 생각도 하지 말고, 내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성이기 때문에 난 어떤 코멘트도 덧붙이지 않을 거야.”
“……새겨듣지요.”
로벤은 키스터가 말한 ‘작품’이 그가 지나오며 남긴 처참한 행적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키스터가 먼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벤은 에둘러 키스터의 과거나, 살인에 대해 그가 느꼈던 감정, 행했던 행동 등을 캐내려 부단히 노력했다. 키스터는 그의 어린 시절을 묻는 로벤의 말에 코웃음만 쳤고, 살인에 대해 은근슬쩍 묻자 아까처럼 큭큭대며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려 방 안의 공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로벤은 굴하지 않고 면담을 이어 갔다. 계속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로 미친놈을 상대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는 그것을 실제로 해내고 있었다.
나는 바론이 건넨 기자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바론과 로벤이 키스터를 면담하기 위해 리스트업했던 질문들이 슬슬 동이 나고 있었다. 키스터는 면담 자체는 수락한 주제에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말을 아꼈다.
로벤이 잠시 텀을 두자는 듯 숨을 살짝 내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와 반대로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죠.”
“뭐지?”
“마지막의, 그래. 아까 당신이 흉측하게 생겼다고 했던 ‘마치’라는 서른세 번째 희생자분 말입니다.”
“씹다 뱉은 껌처럼 생겼다고 했지.”
키스터가 킬킬 웃었다. 로벤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우리의 잘 교육받은 심리학 박사님께서는 절대 ‘씹다 뱉은 껌’이라는 말을 고운 입에 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분에 대한 것입니다. 마지막의 살인 방법은 분명 이전의 서른두 명의 희생자와 달랐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떠한 심경 변화라도 있었습니까? 왜 살인 방법을 바꿨죠?”
그 말에 키스터가 웃음을 멈췄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더욱 더 붉은빛을 띠었다. 키스터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로벤을 노려보았다.
“어이, 이봐. 내가 분명히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로벤이 재빨리 사과했다. 그는 처음에 그가 나에게 주의했던 것처럼 범죄자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제1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이미 자극해 버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래, 상당히 불쾌했지. 그럼 나도 하나만 물어도 되겠지?”
키스터가 으르렁대며, 로벤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며 씹어 먹듯 말을 뱉었다.
“이런 면담으로 도대체 뭘 얻고 싶은 거지? 넌.”
“……저는.”
키스터가 다시 머리로 창살을 박았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났고. 나는 놀라서 노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럴 줄 알았어. 저놈은 역시 미친놈이었다. 얼굴, 절대 보여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키스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감방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닥쳐!!! 내가 그따위 것도 모를 줄 알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네가 여기 오기 전부터 난 네가 나를 만나서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넌 그저 내가 제대로 미친놈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을 뿐이잖아. 그리고 내 과거를 헤집어서 내가 미친놈이 된 이유들을 짜 맞추겠지. 그리고 네가 그걸 논문으로 발표하면 멍청한 정부며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겠지. 법안 개선이 필요하다. 공원을 좀 더 지어라. 교육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블라블라…….”
로벤이 다시 무언가 말을 하려다 격렬해진 키스터의 감정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키스터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사납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내가 왜 여기 잡혀 왔는지 너에게 알려 주지. 나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했어. 그것뿐이야. 로벤 박사, 겨울철에 빙어낚시를 해 본 적 있나? 했다면 왜 했지? 다섯 살 때의 숨겨진 기억이 너를 너무도 쿡쿡 찔러서 어쩔 수 없이 했나? 빌어먹을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무의식’이란 놈 때문에? 아니면 공원이 없어서? 그래. 그냥 하고 싶어서 했겠지!”
“…….”
키스터가 흰 창살에 이마를 대고 으르렁거렸다. 분노에 가득 찬 선홍색 눈이 창살 사이로 번뜩였다.
“나도, 하고 싶어서, 했어. 그뿐이라고. 이제 알아들었나? 이 멍청한 박사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침묵하던 로벤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역시 프로라서 그런지 그는 곧 굳은 표정을 풀고 슬쩍 미소까지 보였다.
“다음에 혹시 기회가 있다면 조금 더 재미있는 질문거리를 들고 찾아뵙도록 하죠.”
면담이 끝났다는 것을 감지한 모양인지, 키스터의 눈이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심드렁한 눈으로 돌아온 그가 지겹다는 듯이 내뱉었다.
“맘대로 해.”
의자에 등을 기대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공부하라는 잔소리에 지친 소년 같아 보였다. 나는 생각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주위에 정상인밖에 없는 세계에서 계속 살아서 그런가, 나는 계속 놈을 정상인으로 보며 재단하려 하고 있었다.
실은 내가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형태를 취한 사람을 해치는 괴물일 뿐인데도.
나는 키스터가 다시 나를 보거나, 말을 걸어올까 봐 로벤을 따라 황급히 감방 밖으로 나갔다. 로벤은 마지막으로 ‘면담에 응해 줘서 감사합니다.’ 따위의 신사적인 인사를 하느라 뭉그적거려서 나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끝났으면 빨리 좀 나가자고!
나는 감방을 나가는 로벤의 등 뒤에 거의 붙다시피 해서 방을 나갔다. 애꿎은 호기심이 나를 자극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 키스터는 의자에 단단히 구속된 채로 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로벤과 내가 있던 창살의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 선홍색 눈동자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잠시 바라보자 키스터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움직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황급히 감방을 나섰다. 제발 그가 나를 깨끗이 잊어 주기를!

마쳐야 할 수속을 모두 마친 우리는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로벤이 교도소 사무장과도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미 하늘은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밖으로 달리듯이 나온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 시간 동안 깊고 어두운 늪에 빠져 있다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것 같았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폐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셨다. 이제야 살 것 같다.
뒤따라 나온 로벤이 내 어깨를 짚었다. 고개를 돌리니, 걱정스러운 녹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놀랐지? 아까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 아뇨. 저도 놀라서 아무것도 못했는걸요.”
“아니, 네 경우에는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어. 그리고 네 메모를 봤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잘 정리해 주었더군. 오늘 잘해 줬다. 고생 많았어.”
로벤이 내 어깨를 굳세게 쥐고 미소를 지었다. 왠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오늘 겪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그나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별말씀을요. 형한테 추천서도 받기로 했는데요 뭐.”
그래. 나한테는 추천서가 있다. 슬로터 키스터가 내 얼굴을 봤다고? 흥, 사람의 기억이란 오묘해서 얼굴 같은 건 쉽게 잊히는 법이다. 게다가 키스터는 서른세 명을 죽인 중죄인으로, 내가 죽기 전에 그 단단한 감옥에서 나올 일이 없을 거다. 고로 난 안전하다.
얼굴색을 되찾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나를 보며 로벤이 고개를 갸웃했다.
“추천서?”
“형이 써 주기로 했어요. 형 W지 기자잖아요. 발도 넓고.”
로벤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조금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추천서라. 받으면 도움은 될지도 모르지.”
“그냥 도움이 아니라 아예 취업 자리는 따 놓은 거나 다름없죠!”
형은 W지에서 나름 유명한 기자다. 동생을 추천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겠지만, 오늘의 일을 잘 버무린다면 신빙성 정도야 얼마든지 채워 넣어 줄 자신이 있었다. 잘 하면 이번 여름방학에 나도 W지의 인턴기자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로벤이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바론이 W지에서 아직도 일하고 있다면 그렇겠지.”
“네?”
내 얼굴이 쨍 하고 굳었다. 선량한 얼굴의 로벤 박사는 잔인하게도 얼음 석상처럼 굳어 버린 나를 망치로 깨부쉈다.
“바론 지금 프리랜서야. 회사 때려치웠어.”
그 말에 간신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한동안 석상이 되어 있다가, 실감이 나지 않아 손가락을 꼼지락댔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괴성을 질렀다.
“씨발!!! 형!!!!!! 이 미친놈아!!! 아오, 악, 악!!!!”
나는 아까의 키스터 못지않게 발광했다. 온갖 욕을 씨불이며 나는 형의 휴대폰으로 전화했다.
오늘 인간재해를 몸소 체험한 나와 달리 형은 수술을 곱게 마친 것 같았다. 형을 따라 병원에 온 어머니가 ‘바론 자고 있다.’고 상냥하게 형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인공호흡 장치를 끊어 버릴까.”
손을 덜덜 떨며 복수를 계획하는 나에게 로벤이 찬물을 끼얹었다. 시선에 소금이라도 절여 두었는지 느껴지는 시선이 짜다.
“조나단, 맹장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인공호흡 장치는 쓰지 않아.”
“…….”
그렇게 난 아무 수확도 없이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안녕, 4학년. 반가워. 나는 아무 경력도 없는 기자 지망생 조나단이라고 해. 젠장.
“택시!!!”
로벤이 말리건 말건 나는 바로 바론이 있는 Y병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러 세웠다. 노란색의 택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망설임 없이 택시 문을 열어 젖혔다. 어차피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자고 있겠지만 망할 형의 그 뻔뻔스러운 낯짝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로벤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Y병원으로 향하는 나에게 넉넉한 택시비를 쥐여 주었다.
“조나단, 대신 사과하마.”
택시에 타며 원수의 이름을 부르짖듯 Y병원을 외치는 나에게 로벤이 다가와 말했다. 말투는 덤덤했지만 나는 스치듯이 본 그의 눈에서 복잡한 심경을 읽었다. 그래. 나름 잘나간다던 자기 친구가 동생 속여 먹는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맘이 복잡하겠는가.
“바론이 그런 수까지 쓸 줄은, 나도 몰랐군. 그래, 그래서 네가 이곳에 오게 된 건가.”
로벤이 생각을 정리하듯이 자신의 턱에 구부린 검지를 대며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 깨달으셨나요. 평범한 대학생이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흉악범과의 인터뷰에 참석하러 달려올 리가 없잖아요, 보통.
“출발할 거요, 안 할 거요?”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던 택시기사가 뱉듯이 물었다. 로벤이 실례했다는 듯이 신사적인 동작으로 잡고 있던 택시 문에서 손을 뗐다.
“아, 잠깐만. 조나단.”
그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자신의 품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무심결에 받아 들며 그를 올려다보니 로벤이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내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바람에 그의 단정하게 정돈된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듯 휘날렸다. 나는 새삼스럽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로벤이 생각보다 준수한 미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우리 형이랑 같이 세워 놓으면 우리 형은 상대도 안 되겠구만.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갈무리하고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로벤은 범죄심리학자고, 겨울방학이 끝나면 1월부터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과제와 씨름해야 할 내가 그에게 연락을 취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나를 신경 써 주는 그가 고마웠다.
로벤과는 몇 번 형을 통해서 스치듯이 얼굴을 보거나, 형이 억지로 시킨 심부름을 갔을 때 만났을 뿐이라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그가 참으로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왜 이 사람이 우리 형 친구인 거지. 나는 세상의 불가사의를 목격한 것 같았다.
“그럼 또 보지.”
로벤이 그렇게 말하며 택시 문을 닫았다. 나는 ‘네, 다음에 봐요.’ 하고 말하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대화가 끝나자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택시를 출발시켰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 앞의 풍경을 보고 있다가, 왠지 신사적인 로벤이라면 떠나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로벤이 이제야 되돌아가기 위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잡는 것이 보였다.
역시 신사적인 사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군.
택시 뒤의 창문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로벤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까까지 선량한 웃음을 짓고 있던 로벤은 그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확인하고 싶었지만, 로벤은 이미 몸을 돌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택시가 점점 속력을 내고 있어서 더 로벤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사적이고 상냥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역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인만큼 일에 대해서는 진지해지는 걸까. 오늘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하는 건지도 모른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눈을 감았다.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N교도소에서 Y병원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바론을 제대로 족치기 위해서라도 체력과 정신력을 보충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택시의 라디오 소리를 뒤로 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쿠우우울―
나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1인 병실에 몸을 뉘인 바론은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처주무시고 계셨다. 곱슬기를 띠고 있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이마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숱이 많은 속눈썹이 감긴 눈 아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쿠우우우울―
다시 숨소리가 들렸다. 바론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뱉고 있었다. 숨소리가 참 평안하기도 하시지. 달콤한 거짓말로 동생을 흉악범에게 보내 놓고는. 나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고 왼손으로는 재킷 주머니 안에 든 바론의 기자노트를 더듬었다.
내가 합당한 보상 없이 이걸 맨입으로 내놓나 봐라. 바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오늘은 안정을 취하라고 의사가 그러더구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뒤를 돌아본 나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에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읽은 나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살짝 풀었다. 우리 집에서 어머니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맹장도 맹장이지만, 피로와 스트레스가 계속 누적되어 왔다고 하더구나. 집을 살펴보니 바론 책상에서 신경안정제도 보이던데. 조나단, 혹시 바론이 최근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그야 동생에게 오늘 아주 흉악한 거짓말을 했죠. 입을 오물거리며 바론이 행한 못된 짓을 일러바치려던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론은 최근에 회사도 그만두고 키스터 사건을 계속 조사하러 다녔다고 한다. 쓰러지기 전에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그의 뻔뻔한 뇌에 스트레스를 안겨 줬을 리는 없고, 아마도 바론이 스트레스를 받은 건 ‘키스터 사건의 취재’ 때문일 거다. 아니면 W지라는 좋은 직장을 잃게 되어서거나.
바론이 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가족에게 말한 것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최근에 바론은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무언가를 하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서 한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반복하는 수상한 행동을 했었다.
나는 슬쩍 바론을 쳐다보았다. 감긴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시큰거리며 코를 찔렀다. 나는 일부러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추측을 입 밖으로 내어 추궁당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해 두는 것이 좋았다.
내 감이 맞다면, 바론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글쎄요. 항상 무모한 짓만 해 대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 아닐까요? 바론도 일단 인간이니까.”
“조나단, 형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어머니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평소 행실의 문제죠. 오늘도 바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어머니도 아마 까무러칠걸요.”
어머니 역시 바론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분하지만 이렇게 내가 속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었고, 어머니는 형제의 싸움은 자신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안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어머니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론 때문에 일부러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잠시 나왔던 건지, 어머니는 외투를 챙기며 이제 다시 회사에 돌아가 봐야겠다고 했다. 문을 나서기 전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당부했다.
“그래도 바론을 잘 챙겨 주렴. 책임감이 강해서 지지 않아도 될 짐도 덮어쓰는 아이다.”
“저에게는 책임감 같은 거 느끼지 않는 모양이던데요.”
어머니는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웃었다.
“동생이잖니.”
그리고 병실 문이 닫혔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의 소음이 먼 곳에서 들리는 가운데, 바론이 얌전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까는 분명 태평하게 잠이나 잔다고 생각했지만, 조용한 병실에서 숨만 쉬고 있는 바론의 모습은 뭔가 평소의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라고, 망할 형.”
나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이 담긴 내 목소리가 병실 안을 작게 훑었다 사라졌다. 병실에 아주 잠시간 따뜻한 가족애가 담긴 공기가 맴돌았다.
좋아. 형이란 작자에 대한 걱정은 이제 끝. 나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구석에 곱게 개켜져 있던 바론의 외투를 집어 들었다. 뭐 좋은 거라도 들어 있으려나. 나는 검은 외투의 주머니를 이리저리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