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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주머니에서는 편의점 영수증 등 쓸데없는 것만 나왔다. 이 사람이. 평소에는 지갑에 현금 꽉꽉 채워서 다니더니. 환자를 물리적으로 해할 수는 없으니 지갑이라도 털자는 고상한 계획이 형체를 잃고 파스스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이건 뭐야.”
외투를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으려다 외투의 속주머니에 손을 가져간 나는 딱딱하게 느껴지는 물건의 감촉에 목소리를 올렸다. 속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보고 그러면 그렇지, 하고 혀를 찼다.
“쳇, 또 수첩이잖아. 기자 아니랄까 봐.”
검은색 수첩은 꽤나 험하게 다뤄졌는지, 아니면 땅바닥에 오랫동안 방치되기라도 했는지 군데군데 헤진 자국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낡고 헤진 검은색 수첩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순간 눈앞을 지나간 끔찍한 이미지들에 나는 수첩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으악!! 이, 이게 뭐야!”
등 뒤에 소름이 쫙 돋았다. 거기에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설마 키스터가 죽인 희생자들의 사진일까.
……뉴스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키스터는 희생자의 온몸을 난도질하고 머리에 깃발처럼 도끼를 꽂는 엽기적인 살인 방법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듣는 것과 보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내 손이 작게 떨렸다. 순간적으로 본 것이었지만 아직도 그 이미지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수첩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바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스트레스의 원인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거나 조사하고 다니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위험한 중동에 취재를 가질 않나. 참 내 형이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끔찍한 것을 목격해서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거칠어진 숨을 정돈하며 오늘 바론을 추궁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포나 고어 같은 장르는 아예 학을 떼는 사람이다. 끔찍한 것을 일부러 보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했고, 작년부터는 더 심해졌는지 어쩌다 끔찍한 것을 보기라도 하면 악몽을 꿨다.
아마 오늘도 저 수첩을 본 죄로 악몽을 꾸게 될 것 같다.
바론을 족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낮부터 쌓여 왔던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메마른 세수를 했다. 끔찍한 가해자를 마주한 뒤 그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을 보는 것은 결코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키스터가 내 이름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신경을 콕콕 찔렀다. 외우듯이 내 이름을 계속 중얼거리던 그는 분명 나를 무언가로 정의하려고 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키스터는 N교도소에 수감되어 평생 나오지 못할 거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병실의 문에 손을 가져갔다. 안정만 취하면 된다고 하니 굳이 바론 옆에 누군가가 있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손에 닿는 병실 문의 감촉이 유난히 시리게 차가워서, 나는 도망치듯이 병실을 나섰다.
잊고 있던 공포가 슬며시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프릴.”
키스터는 어두운 감방 안에 누워 눈을 깜박였다. 흉악범의 감방에는 창문이 없어 방 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교대 시간인지 밖에는 간수의 기척도 없었다. 입술이 메말라 오는 것을 느낀 키스터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요사스러운 선홍색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빛났다.
“에이프릴.”
키스터는 누운 채로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찾았다. 혼자 갇혀 있는 독방에서는 나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적어도 교도소 안에서 그는 나름 모범수였다. 간수의 귀를 물어뜯거나, 자신을 견제하던 죄수 하나를 불구로 만든 것 외에는.
침대 매트리스의 갈라진 틈을 헤집자, 조그맣지만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이 나왔다. 키스터는 다시 계속 되뇌어 왔던 그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조그만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조나단, 에이프릴.”
그는 평소와 다르게 유달리 흥분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말할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길고 하얀 손가락을 들어 차가운 벽에 조나단 에이프릴의 이름을 새기듯이 써 내려갔다. 그에게 있어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2. 악몽

슬로터 키스터를 만나고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키스터가 나를 무엇으로 규정했는지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부모님은 출장이 잦았으며, 하나뿐인 형인 바론 역시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이렇게 집에 혼자 있는 것은 나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커튼이 쳐져 회색빛 그림자가 곳곳에 진 조용한 집 안에 TV 소리만이 허무하게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 생각의 벽에 막혀 귀에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으.”
나는 신음을 흘리며 무의미하게 자리에서 뒤척였다. 어둡고 조용한 집이 이렇게 낯선 장소로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림자 속에 악마가 숨어 있다고 믿었고, 조금 커서는 다른 이들처럼 악마 같은 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랬을 텐데, 나는 아직도 어두운 집구석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렇다고 밖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이렇게 집에서 겁먹은 동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슬로터 키스터와의 면담에 동행했던 그날부터 나는 이렇게 알 수 없는 공포에 짓눌리곤 했다. 바론이 가지고 있던 낡은 수첩, 그 수첩에서 본 이미지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 사진들이 ‘조나단 에이프릴.’ 하고 내 이름을 중얼거리던 키스터의 모습과 합쳐지더니 하나의 끔찍한 상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머리에 도끼가 꽂혀 있는 조나단. 금발이 피로 물들어 있고, 열린 동공에는 세상의 절망이 가득 담겨 있고, 푸른색 눈동자는 죽은 물고기처럼 메말라 회색이 되어 있다. 도움을 청하듯 뻗은 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상상들에 나는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매일 밤 같은 내용으로 되풀이되는 악몽을 꿨다.
슬금슬금 타고 올라오는 상념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는 TV에 시선을 주었다. TV 브라운관에 비치고 있는 것은 내가 즐겨 보던 서바이벌 프로였다. 그들은 늪지대 입구에 돋아난 길게 자란 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초록빛 복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얼굴에 진흙을 묻히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에 악어가 있습니다. 악어는 자신의 영역에 유독 민감하죠. 지금은 우리를 살피고만 있으니 조용히 이곳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메라는 물속에 몸체 대부분을 숨기고 눈만 내놓은 악어를 잠시 비췄다. 악어의 눈이 그들을 경계하듯 번뜩였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손짓만으로 카메라 크루에게 조용히 물러나자고 지시했다. 그들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 자리에서 떠났다. 늪지대가 멀어지자, 이제야 안도한 듯 남자가 딱딱한 표정을 약간 풀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더 다가갔으면 악어가 우리를 공격했을 겁니다. 맹수들이 모든 사냥감을 발견하는 즉시 바로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상대를 파악하고, 공격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죠. 그래서 운이 좋으면 이렇게 맹수들을 피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늪지대를 벗어나 나무가 듬성듬성 돋아난 평지에 다다랐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굶주려 있었거나, 우리가 영역을 무단 침범해 그들을 자극했다면 싸움은 피해 갈 수 없었을 겁니다.”
남자는 나무 끝을 날카롭게 만들어 제작한 나무창을 들어 보이며 덤덤하지만 비정하게도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 중 어떤 존재는 사라져야만 할 싸움 말입니다.”
순간 공기가 날카롭게 굳었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이 서바이벌 프로의 주역인 저 사람을 좋아했었고, 평소라면 역시 수많은 오지에서 살아남아 온 강한 사람답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악어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난 연상하고 말았던 것이다. 창살 사이로 번뜩이던 선홍색 눈동자를.
그게 누군지는 이제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으아아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TV를 끈 뒤 소파에서 발광하듯 다리를 굴렀다. 겁을 먹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거야, 조나단 에이프릴! 키스터는 N교도소 안에서 지금 늦은 점심을 얌전히 처먹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안전하단 말이다. 안전해. 안전하다고.
누구도 여기에는 마음대로 침입할 수 없을 것이다. 좀. 제발. 이상한 망상에 빠지지 말자. 보이스카우트 대장으로서 아이들을 이끌던 과거의 조나단은 분명 용감했었다고. 나는 괜찮아. 그리고 누가 이곳에 침입해 나를 해하려 한다면…… 서바이벌 프로에 나오는 저 남자처럼 나도 나무창이라도 들고 싸움에 응해 주지 뭐!
씩씩대던 나는 굳게 결의를 다지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누구든 와라! 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띵동.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시 소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야, 뭐야 누구야! 아까까지 베고 있던 쿠션을 구세주라도 되는 듯이 껴안은 나는 놀라서 크게 열린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집에 정적이 흘렀다. 갔…나? 택배원인가? 택배 온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나는 슬며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쿠션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띵동.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내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아, 아직 안 갔어. 내가 꼭 열어 줘야 하는 건가. 맞다, 지금 집에 나뿐이지. 난 떼고 싶지 않은 발걸음을 천천히 문 쪽으로 옮겼다. 탕탕탕. 문 밖에 있는 사람은 어지간히도 성질이 급한지 초인종으로 안 되자 문까지 두드려 댔다.
저 성질머리. 왠지 누군지 알 것 같다.
“조~나~단~! 형 왔다~!”
역시 문을 넘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에 대고 소리치고 있는지 목소리가 조용한 집 안을 왕왕 울렸다. 그렇게 소리치는 거 근처 이웃에 민폐라고. 문을 열자 병원에서 잘 쉬었는지 때깔 좋아 보이는 얼굴의 바론이 보였다. 얼굴에서 기름 떨어지겠다. 도대체 건강식뿐인 병원에서 뭘 처먹은 거야.
바론은 바로 퇴원해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인지 병원에서 일주일이나 미적거렸다. 아버지를 닮아 곱슬기가 있는 붉은색 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이 푸른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 동생. 면담은 잘 갔다 왔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론에게 보디블로를 먹였다. 얼굴로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바론 따위에게 겁을 먹어서 소리까지 지르다니. 집 안에 누가 없었기에 망정이지만, 어쨌든 부끄럽다고. 이건 다 바론 때문이야.
보디블로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바론이 몸을 숙이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크윽, 조…나단. 나 지금 퇴원한 환자인데.”
“뭐 어쩌라고.”
나는 도도한 왕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론이 버림받은 남편처럼 울먹였다.
“차가워졌어! 나의 조나단은 이렇지 않았다고. 병아리같이 귀여웠던 우리 조나단을 돌려줘!”
“한 방 더 맞을래?”
그 말에 거짓 통곡 소리를 내던 바론이 얌전해졌다. 바론이 더 이상 헛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자기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그를 흘겨보다가 정말로 아팠는지 어느새 창백해진 바론의 얼굴을 보고 그만 집에 들여보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면담은 어땠어?”
거실 테이블의 내 나쵸를 멋대로 집어먹으며 바론이 말했다. 순진하게도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를 댕그랗게 뜬 그가 날 보고 있다. 아니, 근데 우리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 추천서는?”
“엉?”
“내 추천서. W지 현역 기자님이 써 주시는 내 추천서는? 언제 써 줄 거야.”
“아아, 그거? 조만간 써 줄게. 걱정하지 마 조나단.”
내 말에 바론이 하하하 웃으며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먹으니까 이거 되게 맛있다.’라고 말하면서 나쵸를 더 가져가 아자작 아자작 씹어 먹었다.
“…….”
댁은 양심의 가책이란 걸 안 느끼시나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며 멍청하게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다음 순간 광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오오온!!!”
“응?”
“어떻게 아직도 거짓말을 해? W지 때려 쳤다며!! 그만뒀다며 이 사람아!”
다시 나쵸에 손을 가져가려던 바론이 잠시 멈칫했다. ‘들켰다’는 눈빛을 한 바론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누가 그래?”
“로벤 형이! 형 W지 때려치웠다고 그러던데!”
바론이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눈빛이 어렸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듯 입을 떼어 말했다.
“아…하하. 로벤이 말한 거야? 응, 나 회사 그만뒀어.”
나는 화를 내며 ‘그럼 내 추천서는?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라고 물으려다 바론의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바론은 입을 일자로 다물고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느꼈는데, 바론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의 바론은 중동에 취재를 가기로 결정할 때에도, 전 세계를 돌고 온다고 말할 때에도 가족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지 뒤에서 몰래 행동하고 있다. 그것도 나에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대신 면담을 보낼 정도로, 필사적으로.
나는 어제 Y병원으로 가는 택시에서 보았던 로벤의 진지하게 굳어진 얼굴을 기억해 냈다. ‘흉악범과의 면담’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될 연구와 취재. 로벤과 바론은 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바론에게 물었다.
“왜 그만뒀는데?”
바론이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당황했는지 표정을 수습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묘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바론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비장감마저 엿보였다.
“조사해야만 할 게 있어.”
나는 방금까지 그에게 화가 났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정인지 불길한 예감인지 모를 마음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는 바론의 책상에서 신경안정제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로 뭘 하고 있는 거야, 형. 나는 추궁하듯이 바론에게 물었다.
“슬로터 키스터를 조사한다고 회사까지 그만두는 건 이상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로벤 형이랑 뭘 하려는 거야?”
“음, 조나단. 추천서는 내가 W지 동료에게 부탁해서 써 줄 테니까. 일단 내 기자 노트부터 줄래?”
바론이 슬쩍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눈꼬리를 휘며 짓는 그 상냥한 웃음은 그가 날 속이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넘어가려 할 때 항상 짓던 거짓 웃음이었다. 난 더 이상 바론의 거짓말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왜 키스터에 그렇게 집착해?”
바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의 숨기는 기색은 어디 가고 그는 언제나의 총명한 푸른색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그가 강조하던 ‘기자로서의 사명감’을 운운할 때 항상 보였던 눈이었다. 바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미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이잖아? 당연히 조사해 보고 싶지. 로벤과 나는 이 사건을 조사함으로써 한 단계 도약할 거야. 그는 범죄심리학자로서, 그리고 나는 기자로서. W지는 좋은 직장이지만, 그런 직장은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잡을 수 있어. 거짓말한 건…… 미안하다. 내가 추천서는 동료에게 부탁해서라도 책임지고 써 줄게.”
그의 말은 얼핏 들어 보면 아귀가 맞았다. 하지만 난 직감적으로 느꼈다. 바론은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바론이 기세를 잡았는지 검지를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기자는 항상 거짓 없는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지.”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왜 그것을 조사해야만 하며, 왜 그렇게 바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결국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조금 실망했고, 이제 와서 바보 같지만 서운함을 느꼈으며, 걱정에 잠시 사그라들었던 화가 다시 났다.
바론은 이제 자신의 기자 수첩을 달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 방으로 쿵쿵거리며 돌아간 뒤에 기자 수첩을 찾아 손에 쥐었다. 그래, 이게 그렇게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라지. 바보 형. 나는 그의 손에 내치듯이 수첩을 쥐여 준 뒤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동생을 대신 흉악범과 만나게 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외투에 있던 검은색 수첩은 뭐야? 희생자 사진은 왜 가지고 다니는데?”
기자 수첩을 갈무리하던 바론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너였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혹시 너…… 수첩 안도 봤어?”
뭐야, 중요한 물건이었나? 그땐 놀라서 수첩 다시 되돌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나왔는데. 바론의 지갑을 털려고 했던 부분은 좀 찔리는 부분이었지만 나는 어깨를 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바론이 먼저 거짓말을 했는걸. 심지어 그는 지금도 뭔가를 숨기려 하고 있다.
“그래, 봤다! 형이 거짓말하고 날 거기로 보냈잖아. 화가 나서 외투 집어 들었는데 그게 있었어. 그래서 내가 그거 보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요즘 계속 악몽 꾼다고. 말하려 하는데 바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그 기세가 흉흉해서 나는 목을 움츠렸다. 바론이 내 어깨를 으스러질 듯이 부여잡았다. 그리고 내 눈을 보며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이 절박함을 담고 흔들렸다.
“어디까지?”
“뭐?! 아파! 뭐 하는 거야!!”
“어디까지 봤는데!!”
바론이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어깨가 아팠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거센 악력으로 쥐어뜯듯이 어깨를 잡고 있는 바론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거세게 떨쳐 냈다.
“그냥 안에 있는 사진 봤다고!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됐어?! 갑자기 왜 이래!!”
내쳐진 바론이 씨근대는 날 보고는 후회하는 표정을 했다. 죄책감 어린 눈으로 바닥을 훑던 바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럼 마지막 장은 못 본 거네?”
“앞에 있는 사진만 보고 놀라서 떨어뜨렸어. 나 그런 거 못 보잖아. 진짜 왜 이래. 형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바론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훑었다. 피곤한 얼굴로 ‘그게 조나단이었다니.’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급한 손길로 옆에 두었던 외투를 챙겨 들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선고하듯이 말했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디 가? 이제 퇴원한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