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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부모님한테는 네가 잘 말해 줘. 가 봐야 할 곳이 있어.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하자. 면담 대신 참석해 줘서 고마웠다.”
바론은 결국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집을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닫히는 문에 심장이 아프게 울렸다. 도대체 뭐야. 바론은 나에게 거짓말이나 속임수도 많이 썼지만, 결국은 나에게 져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뭔가를 숨기고 쫓기듯 행동하며 급하게 화를 내는 건 평소의 바론이 아니었다.
“이상해졌어.”
내 목소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집 안에 울렸다. 이상해졌다. 키스터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나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고 바론은 이상해졌다. 아니, 실은 내가 이제야 눈치챘을 뿐이지 그 전부터 이상해져 있었던 걸까.
부우우.
소파 구석에 던져 놓고 방치해 두었던 핸드폰이 길게 울었다. 누가 전화한 거지. 나는 받지 않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는 ‘제롬’이라는 익숙한 소꿉친구의 이름이 떠 있었다. 복잡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오랜만에 모이자고 말했다. 나 역시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나는 그와 자주 보던 곳에서 만나기로 한 뒤 전화를 끊었다.

***

뉴욕의 인구는 약 840만 명이다. 육지만 따지면 약 780킬로미터 제곱인 이 땅덩이에 우글우글 인간들이 몰려 있는 것이다. 이민국가인 만큼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별난 사람들도 참 많았다. 그리고, 게이들도 많다.
“네가 키스터를 만났다고?”
내 눈앞에서 메론 소다를 쪽쪽 빨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 녀석도 게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진한 푸른색 머리에 은청색 눈동자를 가진, 항상 무표정한 얼굴의 이 녀석의 이름은 제롬 라이언. 내 소꿉친구 되시겠다.
제롬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훑어봤다.
“조나단, 살아 있냐?”
다행히 키스터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내 생존 여부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그것대로 열 받는데.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내 편을 괜히 달달 볶아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위로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나도 컸다. 나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살아 있어. 사실 요즘 나 악몽도 꾼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이 말이 아니구먼.”
어린애 입맛인 제롬과 다르게 어른의 라이프를 즐기는 나는, 분한 마음에 맥주를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 버리고 비어 버린 맥주잔을 탕 내려놓으며 울부짖었다.
“그래! 그 미친 바론 형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탕, 하는 큰 소리에 펍을 겸하고 있는 카페에 순식간에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 나는 머쓱해하며 술잔을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바에 앉아 있는 덩치들의 번뜩이는 눈빛이 따가웠다. 나는 단숨에 쭈그러들며 테이블 위에 엎어져 거짓 눈물을 흘렸다.
“으흑흑, 제롬.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 형도 진짜 좀 이상해졌다고.”
“일단 정신과에 가 봐.”
제롬이 검지를 치켜들며 나에게 말했다. 뭐라고 이 미친놈아?
“야, 정신과엔 내가 아니라 우리 형이나 키스터 같은 놈들이 가야지.”
“너도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하기 시작하다니.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좀 봐주라. 네 그 사차원 문답에 어울려 줄 정신력 따위 안 남아 있다고. 이미 탈탈 털린 지 오래란 말이다.”
제롬이 이제야 생각난 듯 ‘악몽도 봐 줄지도 모르잖아.’라고 말했지만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위로해 달라고 불렀더니. 매정한 녀석.
제롬은 내 썩은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로베르트가 온다고 했어.”
“그 녀석이? 별일이네. 뭐 준비한다고 바쁘다지 않았나.”
로베르트 엘리엇, 그는 N대의 대학 동기였다. 길을 걸으면 지나가는 이가 한 번쯤은 돌아볼 정도로 미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적 또한 N대 경영학과의 탑으로 우수하기 그지없었다. 소문에는 졸업하자마자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널렸다고 하던데, 그의 성적이나 여러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실적을 보면 그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로베르트 엘리엇은 외형이나 두뇌 모두 완벽했다. 그럼 성격은 어떠냐고? 모든 것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로베르트의 경우에는 다른 것 같았다. 로베르트 엘리엇은 자신이 가진 것들에 한없이 겸손했고,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나갔으며 어려운 이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그는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나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우수한 인재이신 로베르트와 평범한 영문과 학생인 내가 어떤 접점이 있어 이렇게 따로 만나게 되었냐 묻는다면, 내가 해 줄 대답은 접점 같은 것은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딱 하나 접점이 있었다면 내가 파릇파릇한 1학년이었을 때 우연히 그와 내가 같은 카페에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아침을 걸렀던 나는 브런치를 입에 욱여넣고 있었고, 옆 테이블의 로베르트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두꺼운 책을 우아한 손길로 넘기고 있었다.
‘혹시 N대 학생?’이라고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로베르트였다. 샌드위치를 입 안에 쑤셔 넣고 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옆에 다가와 말을 걸자 샌드위치를 잘못 삼키고 말았고, 커헉, 쿨럭, 크엑 같은 첫인상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기침을 내뱉었다.
‘아아, 미안. 놀라게 했나 보네.’
허리를 굽히고 기침하며 손으로 테이블을 더듬어 물을 찾는 나에게 그는 물 잔과 냅킨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멀끔하다 못해 미친 외모에 나는 다시 사레가 들릴 뻔했지만 간신히 그의 얼굴에 물을 토하는 꼴은 면했다.
그 뒤로부터 로베르트 엘리엇은 나에게 접근해 왔다. 그의 접근은 이상하리만치 뻔뻔스러웠으며 집요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부담되지 않게 구는 데다가 같이 어울리는 데 전혀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샌가 로베르트는 제롬과 나의 새로운 친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뭐 준비한다고 한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내가 툴툴대자 제롬이 빨대를 쪽쪽 빨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놀자고 해도 나오지도 않고.”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아까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제롬의 뇌에는 이야기의 맥락과 맥락을 연결해 주는 나사가 부족한 것 같았다. 우리는 그것을 흔한 말로 나사 빠졌다고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야, 아까 말했잖아. 내가 키스터 만났……!”
답답함에 내가 다시 테이블을-덩치들의 눈치를 봐서 이번에는 살살 쳤다-치며 말했을 때였다.
“키스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뒤로 넘기니 밑에서 봐도 잘생긴 로베르트의 얼굴이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에 빠져 버릴 것같이 깊은 검은색 눈, 그리고 검은색의 단정한 코트를 입은, 검은색 일색인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었다.
“무슨 얘기야?”
나는 로베르트에게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싶었다. 로베르트는 착한 녀석이고,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만큼 노력가에다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거기에 내 걱정의 짐을 얹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로베르트는 이상하게 집요하단 말이야. 내가 무서워서 악몽을 꾼다고 하면 옆에 꼭 붙어서 자장가라도 불러 줄 것 같은 집요함이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역시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제롬은 아까 나에게서 들었던 ‘내가 일주일 전에 키스터를 만났으며 현재 악몽을 꾸고 있다’는 말을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로베르트에게 옮겨 버렸다. 참고로 제롬은 역사학과로 사차원인 주제에 기억력의 왕이다.
이 도움 안 되는 녀석……! 나는 울음을 삼켰다. 로베르트는 조용하게 제롬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로베르트와의 관계에서 이상하게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녀석은 무슨 생각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랬구나. 스펙터클한 일주일이었네.”
로베르트가 턱을 괸 채로 내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곱게 접힌 눈 뒤편으로 ‘그런데도 나에게 한마디도 안 했구나’라는 본심이 비쳤다. 로베르트는 가끔 사춘기 여학생처럼 시시콜콜 나의 일상생활을 알고 싶어 했다.
“아니, 너한테만 지금 말한 거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제롬에게도 오늘 말했어.”
난 왜 변명 따위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내 말에 로베르트는 ‘흐응, 그래?’라며 대수롭지 않게 내 말을 넘겼다. 하지만 아까부터 흉흉하던 기세는 눈에 띄게 사그라졌다.
“그래서, 악몽을 꾼다고?”
로베르트가 역시 그 부분을 물고 늘어져 왔다. 나는 하하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악몽의 내용은 기괴했기 때문에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악몽이지. 조금 무서웠나 봐. 다른 범죄자도 아니고 무려 그 슬로터 키스터니까.”
“음……. 확실히 그럴 만해.”
로베르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따위는 대서양에 던져 버린 제롬이 메론 소다의 얼음을 까드득 깨부수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하지 않았어? 역시 정신과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 이 녀석……! 좀 도와줘라! 무표정하게 ‘정신과 가 봐.’라고 지껄이는 무심한 네놈과는 달리 로베르트는 진짜 걱정하고 도와주려고 한단 말이야! 나는 로베르트 몰래 제롬에게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해 보였지만 제롬은 역시 내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친다.
로베르트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떤 게 진실이야? 하는 그 눈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착한 친구에게 더 이상 걱정 끼치기 싫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나는 테이블 위에 늘어지며 실토했다.
“……실은 나름 심각하긴 해. 악몽을 거의 맨날 꾸니까. 똑같은 내용에 질려서 안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무서운 건 변하지 않더라고. 오히려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야.”
“그렇구나. 혹시 꿈을 꾸는 날과 안 꾸는 날의 차이는 있어?”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언제 꿈을 안 꾸었더라. 거의 맨날 악몽이 일상화되어 있어서 안 꾼 날이 언제였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잘 생각해 봐. 거기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 악몽을 안 꾸고 일어난 날 아침에 아버지가 아침을 만들어 줬던 기억이 났다. 부모님이 나름 엘리트고 일에 파묻혀 사는 타입이라 집에 잘 붙어 있지 않는 우리 집에서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날 만든 토스트가 그냥 토스트에 몇 가지 야채와 베이컨을 얹어 조리했을 뿐인데도 느끼하고 텁텁한, 최악의 맛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악몽을 안 꾼 날에 아버지가 집에 있었던 것 같아.”
“평소에는?”
“혼자지. 부모님은 출장이 잦고, 형은 원래 집에 잘 안 들어오거든. 이번에도 퇴원 기간 일부러 늘려서 병원에 붙어 있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갔어.”
“너네 형도 참 징하다. 역시 방랑벽은 고쳐지질 않나 봐.”
바론 형, 얼굴은 참 멀끔하던데. 제롬이 손을 들어 메론 소다를 다시 주문하며 끔찍한 소리를 했다. 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제롬이 덤덤하게 말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너네 형한테 관심 없어.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내 취향으로 잘생긴 건 아냐.”
제롬이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였다. 제롬의 남자 취향에 대해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바론이 제롬 취향으로 잘생기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그래. 그건 참 다행이구나.”
나는 생각을 좀 해 보았다. 나에게 온갖 장난과 속임수를 일상적으로 써 대며 형이란 이유로 날 셔틀 취급하는 바론 형과, 사차원에 내 말은 들어 처먹지도 않는 제롬이 커플이 되어 호호거리며 우리 집에 앉아 있는 그림은 상상만으로도 무시무시했다. 설마 이제 이걸로 악몽 꾸는 건 아니겠지.
“얘들아, 우리 꿈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조나단이 그 키스터를 만나고 악몽을 꾼다잖아. 로베르트가 도덕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화제를 다시 돌렸다. 아…… 이래서 말하기 싫었어. 로베르트의 눈은 기필코 해결책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또 악몽을 안 꾼 날 없어? 좀 더 표본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나는 실험체가 아닌데요.
친구를 도와주는 상냥한 마음을 배반할 수 없었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잘 생각이 안 나.”
“정신과.”
“너는 좀 닥치고 있어.”
나는 닥치라는 의미로 새로 테이블에 도착한 메론 소다의 빨대를 억지로 제롬에게 물려 주었다. 로베르트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 같아 나는 좀 부끄러워졌다. 뭐, 어때. 우리는 원래 애같이 논다고.
“그럼 단서는 하나네.”
“엉?”
로베르트가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항하지도 않고 빨대를 순순히 물고 메론 소다를 빨아들이던 제롬과, 그런 제롬에게 기겁하며 손을 떼던 내가 동시에 로베르트를 돌아보았다.
로베르트가 전형적인 우등생이 발표하는 톤으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누군가가 같이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아. 안심감이라고 해야 하나. 무서운 것이 나오는 악몽을 꾸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적어도 조나단에게는. 로베르트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 빠른 시간에 그런 결론을 도출하다니, 역시 로베르트. 나랑 제롬은 쓸데없는 말만 지껄였는데. 우리는 ‘오.’ 하며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가 말하니까 더 맞는 말처럼 들렸다.
곁에 누가 있으면 된다고?
내 얼굴이 환해졌다. 생각보다 그 악몽은 내 일상을 잠식하고 있어서,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는 잘 생각해 줬다는 듯이 로베르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얼마나 편한 해결책……. 오, 이런.”
우리 집 부모님은 일 특성상 출장이 잦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딘가로 가 버린 형 역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여자 친구도 없는 솔로인 나는 집에 홀로 있어야 했다.
난 그 사정을 제롬과 로베르트에게 설명했다. 현재 애인이 있으시다는 제롬이 내가 솔로라서 불러들일 애인이 없다는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죽고 싶냐? 넌 어차피 금방 깨지잖아.”
제롬은 사람을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편이었다. 저번에도 2주 사귀다 깨졌으면서.
“그래도 없는 거랑 있는 거랑은 다르지.”
제길. 이길 수가 없다. 이게 없는 자의 서러움인가. 나는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테이블 만은 나를 받아 줄 거야. 다시 테이블에 엎어지려는 나를 로베르트가 제지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평소보다 유난히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어?”
“내가 조나단이 잘 때 곁에 있어 주면, 악몽 안 꿀 수도 있잖아.”
“아?”
“일단 뭐든 한 번 실험해 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얘는 또 왜 이러실까요. 부담되게시리. 내 얼굴에 순식간에 땀방울이 맺혔다.
“아, 아냐. 됐어.”
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남자가 악몽 꾸는 게 무서우니까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이상하잖아. 제롬이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괜히 눈앞의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로베르트의 눈치를 보았다. 은근히 끈질긴 녀석이니 한 번 더 권유해 올까? 너무 단칼에 거절해서 혹시 상처라도 받았을까? 이런 완벽한 도련님 같은 녀석은 거절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로베르트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응,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했어.”
로베르트가 턱을 괴며 웃음기가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혹시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옆에 있어 줄게.”
“어? 어, 그래.”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제롬은 옆에 있어 주겠다는 둥의 부끄러운 대사가 테이블 위에서 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메론 소다를 빨아 먹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왠지 신경에 거슬렸다.
“넌 뭐 없냐?”
“나?”
제롬이 잠시 ‘음…….’ 하고 생각하다 그제야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반짝 떴다.
“엘리자베스 빌려줄까. 아니다. 그냥 줄게.”
“엘리자베스가 뭔데?”
설마 이놈……. 나는 세상 최악의 쓰레기를 바라보듯 제롬을 보았다. 설마 엘리자베스가 이번 애인 이름은 아니겠지? 보통 여자 이름이지만, 남자라고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못 가질 이유는 없는 거잖아. 제롬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 애인한테 받은 대빵 큰 곰돌이 인형.”
“거절한다.”
“거절은…….”
“다시 한 번 거절한다.”
나는 이번 애인이 엘리자베스를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며, 좀 맡아 달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징징대는 제롬을 밀어냈다. 당연한 거 아냐? 전 애인이 준 걸 누가 맘에 들어 해.
버리라고 했더니 제롬은 그래도 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툴툴댔다. 하지만 얼굴이 은근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버리면 전 애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제롬의 전 애인은 마피아인지 갱단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의 어둠에 한 발 걸치고 있는 분이셨다.
“어쨌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도 연락해라. 넌 은근히 불행을 몰고 다니는 녀석이니까.”
“그거 욕이냐?”
“걱정된다는 소리야. 재작년 여름에 절벽에서 떨어졌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나랑 바론 형이 얼마나 기겁했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재작년 여름, 우리 가족과 제롬은 같이 여름 캠프를 갔었다. 그때는 바론이 중동에 취재를 가기 전, W지에서 활발하게 경력을 쌓아 가고 있을 때였다. 바론은 어딘가 사람 적은 캠핑하기 좋은 장소를 알아냈다며 우리에게 캠프를 제안했고, 나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놀러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한가하게 동네에서 볕이나 쬐며 광합성 중이던 제롬을 가족 캠프에 동참시켰다.
그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아니, 작은 사고가 아니라 난 거의 죽을 뻔했다. 머리를 다쳐서 그런지 사고 당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높지 않은 작은 절벽에서 떨어졌다. 아마 발을 헛디딘 것 같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그게 바론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