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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병원에서 겨우 눈을 뜬 나는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핼쑥해진 바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쥐어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치듯 중동으로 취재를 떠났다.
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때는 실수였지. 항상 그렇게 덜렁거리는 건 아니라고.”
“그래. 그런 걸로 해 줄게. 어쨌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는 거다.”
제롬이 져 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그때 내 실수로 가족과 제롬에게 걱정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었기 때문에 더 뭐라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고 후 하도 없었던 일처럼 쉬쉬했던지라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텐데도, 로베르트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의 앞에 놓인 진한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볼 뿐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런 은근한 배려심이 좋다니까. 나는 이제 괜찮다는 듯이 로베르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행동에 로베르트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뭔가 민망한 마음에 나는 얼굴을 돌렸다.
우리는 자잘한 일상 얘기 몇 가지를 나눴다. 그 뒤의 이야기는 학교 얘기가 주를 이뤘는데, 특이하게도 로베르트는 이번에 ‘범죄심리학 개론’ 교양을 듣기로 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보이는, 바른생활 로베르트가 범죄자의 심리에 관심이 있다니. 조금 의아해 이유를 묻자 로베르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조금 관심이 생겨서.”
“그러냐. 네가 범죄심리학이라니 의외네.”
“그러지 말고 조나단도 같이 들을래?”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나도? 제롬이 앞에서 ‘잘됐네. 그거 듣고 키스터의 심리를 한번 알아보면 되겠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권위 있는 범죄심리학 박사이신 로벤 박사님도 알아내기 힘든 걸 내가 교양수업만 듣고 어떻게 알아내냐. 속으로 빈정거리다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럴까.”
“어? 웬일?”
“로베르트랑 같이 듣는 거면 들을 만하지.”
그야 완벽정리 시험예측노트가 내 손에 떨어지잖아. 저번에도 로베르트와 같이 교양을 들어 본 적이 있는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제롬이 그런 내 속마음을 알아채고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를 노트셔틀로 사용하다니 역시 우리 조나단은 달라.”
“뭐가. 난 노트 얘기 꺼낸 적 없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정말이라고. 로베르트가 그냥 알아서 빌려주는 거란 말이야. 로베르트는 내 본심 같은 건 신경 쓰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왠지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이제 식은 아메리카노 잔을 내려다보며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길고 흰 손가락이 컵 표면을 따라 내려가다 살짝 멈췄다.
로베르트의 얼굴이 살짝 홍조를 띠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로베르트가 약간 열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오버하지 부담스럽게.
“그럼 같이 듣는 거다?”
“어, 어. 일단 신청은 해 볼게. 수강인원이 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로베르트가 살짝 웃었다.
“그 교수님, 내가 신세지고 있는 분과 아는 사이시거든. 인원이 다 차면 추가 신청서를 내면 돼. 거절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냐. 잘됐네.”
역시 엄친아 로베르트. 인맥도 쩔어 주는구나.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스펙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가 왠지 여고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범죄심리학 교양은 점심시간 전에 있으니까 끝나고 같이 밥 먹자. 그리고 노트는 당연히 빌려줄게. 조나단이 시험을 잘 봤으면 하니까. 이번에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어.”
뭔가 말려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리고 로베르트 왜 이렇게 기뻐하는 거지? 뭔가…… 뭔가…… 그래!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로베르트, 혹시 예전에 친구가 없었던 건가?
너무 완벽한 나머지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건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줄 알았는데, 눈앞의 로베르트도 뭔가 그런 유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 생긴 친구인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려고 하는 걸까.
나는 혼자 납득하고 멋대로 정의한 ‘친구가 없는 로베르트’의 등을 토닥이며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같이 밥도 먹고, 노트도 서로 빌려 보고 그러자. 재밌겠네.”
그 말에 로베르트가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조금 찔렸다. 왠지 순진한 애를 등쳐 먹는 못된 아저씨가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번에는 얼결에 노트 받았긴 한데, 이번에는 제대로 답례해 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저번에 받은 것까지 쳐서 밥 사 줄게.”
그 말에 로베르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이번에도 받고 입 싹 닦을 줄 알았나? 나 그렇게 몰상식한 놈으로 보였던 건가.
잠시 반성하는데 로베르트가 테이블 위에 무방비하게 놓여 있던 내 손을 멋대로 잡아끌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을 덮어 잠시 당황한 나는 마치 유혹하듯이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무방비하게 마주해야 했다. 로베르트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기대할게.”
당황한 나는 손을 뺄 생각도 못하고 제롬을 쳐다보았다. 이거 뭐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좀 무서운데. 제롬은 세상 이치를 다 아는 현자처럼, 가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좀 도와 달라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제롬 님이 내 부름에 응답하듯이 입을 열었다.
“참고로 난 안 낄 거야. 잘해 봐.”
뭘 잘해 보는데??? 나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교묘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는 로베르트와 제롬 때문에 그 ‘잘해 봐’의 의미를 파헤칠 수 없었다. 그런데 로베르트가 내가 ‘처음 생긴 친구’라서 잘해 주는 것 맞나? 그런 것치고 자기 얘기는 잘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로베르트를 흘긋 바라보던 나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겠다는 듯이 로베르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렸다.
“응? 왜 그래 조나단.”
“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로베르트에 대해서 뭘 알고 있더라? 이름, 나이. 그리고 학과. 또 요즘 어떤 활동 때문에 바쁘다는 것. 학교 내에서 공식적인 엄친아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내가 알고 있는 사항을 늘어놓아 봐도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는 얼마 없었다. 신입생부터 거의 3년 이상을 함께 해 왔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로 적은 정보들이었다.
우리…… 친구는 맞나?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로베르트가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 왔다. 아니, 친구가 아니면 뭐겠어. 나는 솟아오른 억측을 마음 한구석에 묻어 두고 제롬과 로베르트에게 미소를 보냈다. 모르는 건 나중에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그냥 단순히 쑥스러운 거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라 감추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학기가 시작되면 보자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들은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 같은지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집에 가면서 조금 우쭐해져 코밑을 슥 훑었다. 걱정받아서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기쁜 건 기쁜 거다. 내가 인복 하나는 있다니까.

3. 모방범

집에 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둠을 품고 있는 집 안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몽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후…….”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창문 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옅은 회색빛의 커튼이 작게 나부끼며 싸늘한 바람을 방 안에 들여놓았다.
역시 악몽을 꾸고 말았다.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신음했다. 그냥 좀 부끄러워도 로베르트나 제롬에게 도움을 청할 걸 그랬다.
탁자에 놓인 핸드폰이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알아 달라는 듯 작게 빛을 냈다. 나는 아직도 잠에 젖어 축축 늘어지는 손을 억지로 핸드폰에 가져가려다 도로 힘을 뺐다. 새벽에 연락해서 그들에게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메마른 손에는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나는 어떤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실랑이가 벌어졌고, 나는 큰 충격을 머리에 받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는 항상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키스터의 목소리로 바뀌어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진득하게 귀에 달라붙어 왔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가 나의…….’
그 목소리는 계속 찾아 왔던 것을 찾은 듯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것이 기분 나쁘고 무서웠다. 설마 예지몽인 걸까. 머리에 받은 충격은 도끼로 찍어 내린 충격인 걸까. 아니야. 키스터가 여기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어. 나는 불길함에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교도소의 탁하고 퀴퀴한 냄새라든가, 나를 바라보던 선홍색 눈동자라든가. ‘에이프릴, 에이프릴. 조나단 에이프릴…….’ 끝없이 중얼거리던 키스터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아직도 내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감싸 쥐려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득 창문가에 시선이 갔다. 회색빛 커튼이 살랑거리고 있다. 달빛을 받은 그것은 은색과도 비슷한 회색으로 보였다. 마치 키스터의 머리색 같은, 그런 색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잠금쇠를 내려 창문을 잠갔다.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어느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회색 커튼을 끈으로 동여맸다.
내가 왜 이렇게 공포에 떨고 있는지는 나도 몰랐다. 바론에게도 실은 그렇게까지 화를 낼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거칠어졌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어째서지? 교도소에 있었을 때는 무서웠지만 이렇게 정신을 주체 못할 정도로 두렵지는 않았다.
교도소의 일이 아니라면, 내 공포는 희생자들의 적나라한 시체 사진을 봤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까. 난 원래 끔찍한 건 못 보니까. 흉악범을 만나고 나서 어렴풋하게 있던 공포가 밀려나와,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상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나는 공기 중에 저릿하게 머물러 있는 공포를 쫓아내듯 크게 심호흡을 하며 되뇌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바빠지면 괜찮아질 거야. 괜히 집에만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거라고. 키스터 놈은 감옥에 있고. 나는 안전해. 나는 안전해. 내 이름도 벌써 잊어버렸을 거야.
나는 침대로 돌아가 이불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안전해. 나는 죽지 않아. 나는 절대로 그날처럼. 그 꿈에서처럼 죽지 않을 거야.
하지만 찾아온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잠이 들었을 때 다시 악몽을 꾸었기 때문에 결국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아침에 형식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거울을 보니 눈가가 거뭇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덮어 버릴 것 같은, 무정한 흰 눈이.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 자기를 포기한 나는 비척대며 좀비처럼 거실로 나섰다. 역시 큰 집 안에는 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한동안 일 때문에 집에 잘 못 들어가겠다고 문자로 선언하듯이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로베르트 녀석이나 데려올걸.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썼다.
닫아 놓았던 거실의 커튼을 크게 여니 역시 눈에 파묻힌 거리의 전경이 보였다. 쏟아지는 햇빛에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맑게 세상을 보여 주고 있는 창문에 내 얼굴이 살짝 비쳤다. 역시 얼굴이 말이 아니다.
정말 제롬 말대로 정신과라도 가 봐야 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쉬며 적당한 아침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악몽 때문에 정신력을 소모해서 그런지 배가 고팠다.
귀찮음이 패시브 스킬로 장착되어 있는 대학생은, 거창한 요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극악 퀼리티의 토스트에 비하면 사람이 먹을 만한 토스트를 만든 나는 계란 프라이와 잼, 베이컨을 사이에 끼워 맛좋은 아침을 만들어 냈다.
테이블 위에 토스트를 올려 두고 우유를 따른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TV를 켰다. 뉴욕의 겨울은 상당히 춥다. 나는 오늘은 결코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느긋하게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던 나는 심각한 여자 아나운서의 얼굴에 잠깐 입을 멈추었다. 그녀가 착잡함과 진지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평화로운 아침의 공기를 부숴 버릴 만한 소식을 전했다.

[속보입니다. 지난밤, 뉴욕 시내의 OO스트릿에서 K 공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46세의 사이먼 마치가 살해당했습니다. 경찰 당국은 이에 대해서 철저히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누가 살해당했나 보네. 아침부터 무섭게시리. 나는 어깨를 떨며 우유를 마셨다. 찬 우유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따뜻한 집 안인데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침 햇살이 거실로 따스하게 날아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지난밤의 악몽의 여파가 큰 것 같았다.
우유 데우고 와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방으로 향하기 위해 등을 돌리는데, 뒤에서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어떠한 선고처럼 귀에 박혔다.
/[또한 경찰 당국은 이번 살인 사건의 수사대를 조직한 까닭이, 시신의 두부에 손도끼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특이한 살인 방법은 현재 N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슬로터 키스터가 서른세 명의 피해자를 살해할 때 사용하던 살해 방법입니다. 이에 당국은 이를 슬로터 키스터의 ‘모방범’으로 규정하고 뉴욕 시내의 혼란을 막기 위해 수사에 빠르게 착수한 것으로 보입니다.](기울기)/
“모방범……?”
나는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못 박았다. 우유를 데워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뇌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자 아나운서가 말을 이었다.
[살해 현장의 벽에서는 피해자의 피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 ‘I AM BACK’이라는 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유명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신질환 중 하나를 가진 자의 범행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난 입을 떡 벌렸다. 다리가 살짝 떨렸다. 아니야. 저 사람은 키스터가 아니야. 키스터는 교도소 안에 있잖아.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네가 겁먹을 필요 따위는 없어, 조나단. 나는 억지로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우유, 데워야지.
전자레인지에 우유가 든 컵을 놓는 손이 무거웠다. 왠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힘이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공기가 무거워서 숨을 쉬기가 힘들다.
TV에서 나를 괴롭히는 ‘슬로터 키스터’에 대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공포 때문에 계속 슬로터 키스터에 대해 말하는 TV를 끌 수가 없었다. 마치 그에 대해 말해 주는 TV를 끈다면 바로 어디선가 슬로터 키스터가 튀어나올 것처럼, 그렇게 나는 잠시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띵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움직였다. 전날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 우유가 다 데워졌는지 삐삐거리는 전자레인지를 무시하며 나는 자동인형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나는 귀를 열어 둔 채 그 모든 보도를 들었다.
[현장 수사 결과, 슬로터 키스터의 모방범은 피해자와 몸싸움을 벌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OO스트릿은 현재 개발 구역으로 무분별하게 쌓아 놓은 흙더미들이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흙더미가 무너진 흔적과 바닥이 긁힌 흔적 등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흔적이 광범위한 탓에 경찰은 구역 통제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문을 여니, 어제와 같이 바론이 서 있었다. 나는 두 번이나 나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해 화낼 기력도 없어 무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바론은 매우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문가에 기대 있던 그가 힘이 빠졌는지 앞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론을 안듯이 받아 들고 말았다.
바론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깊게 숨을 쉬었다. 그에게서는 항상 나던 향수 냄새가 아닌 축축한 진흙 내음이 났다. 밖에서 얼마나 돌아다닌 거야. 바론이 내 체온을 느끼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안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나단, 형 왔다.”
“의외로 일찍 돌아왔네.”
한 일주일간은 더 밖에서 돌아다닐 줄 알았더니. 그렇게 말하자 바론이 킥킥 웃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내 품에서 벗어나 문을 꼭 닫아 잠갔다. 그리고 어쩐지 비틀대는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눈을 끔벅였다. 왠지 아까와는 다르다. 집 안은 여전히 햇살이 들어와 밝았지만, 나는 왠지 이제야 주위의 공기가 색을 되찾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안심감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뇌리 한구석에서 재생되었다. 그래, 난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는 건가. 악몽을 꾸기나 하고. 애가 따로 없네.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어제 어디 갔던 거야?”
나는 방으로 향하는 바론을 따라가며 그에게 물었다. 바론은 내 대답에는 답하지 않은 채 나중에 얘기하자는 듯이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일단 잠이나 자고 얘기하자. 형은 힘들다.”
“뭐가 그렇게 힘드셔? 일도 때려치운 사람이.”
“그냥 사는 게 힘들다. 동생아, 좀 이따 보자. 어디 나가지 말고 있으렴.”
바론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바론은 키스터의 모방범이 어제 살인을 저질렀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키스터를 조사하는 그에게는 흥미가 당길 만한 정보일 텐데.
그사이 TV에서는 키스터의 모방범 사건에 묻혔지만 원래는 꽤 중요했을 다른 정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론도 돌아왔고, 키스터 모방범에 대한 뉴스도 지나갔다. 콩콩 뛰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거실로 돌아가려 하는데, 더럽혀진 바닥에 무심코 시선이 갔다.
“어? 이게 뭐야.”
나는 놀라서 소리를 높였다. 바론의 신발에 흙이 묻어 있었던 모양인지, 현관에서 바론의 방까지 더러운 흙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깔끔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님이 발견하면 경을 칠 일이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묻혀 오는 거야.”
나중에 청소해야겠네.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순간 오싹해졌다. 뒷목이 싸늘했다. 닫힌 바론의 방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스터의 모방범은 이번 피해자를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해 여기저기에 저항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고 했다. 재개발구역이라서 흙더미가 쌓여 있던 OO스트릿. 그리고 현장에 이리저리 파헤쳐지고 흩어진 흙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흙 발자국. 그 모든 것이 나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어제 새벽부터 아마 눈이 왔을 거다. 눈을 일부러 파헤쳐 그 밑의 부드러운 흙에 발을 파묻지 않는 이상 신발에 흙이 이렇게 많이 묻기는 힘들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바론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아연했다. 나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바론의 방문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