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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주위에 진동하는 피 냄새에 말보로 경감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시체는 조사를 위해 검시관에게로 보낸 상태였는데도 거리는 지난밤에 일어난 끔찍한 비극의 향기를 쉽게 흩어 버리지 않았다. ‘슬로터 키스터 따위의 모방범이라니. 세상도 참 말세군요.’라고 옆에서 밀러 수사관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말보로 경감은 날카로운 눈으로 살해 현장인 골목을 살펴보며 한 걸음 내딛었다. 반쯤 세워지다 만 벽돌에는 물감으로 칠한 듯이 피가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아마도 도끼로 머리를 찍을 때 튄 피인 것으로 보였다. 그 사이에 자신을 드러내듯이 날카로운 글씨체로 글자가 적혀 있다.
I AM BACK
벽에 적힌 글씨는 얼핏 보면 젊은이들이 자주 하곤 하는 그래피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된 재료는 분명히 인간의 피였다. 말보로 경감이 코를 틀어막았다.
“이거 참 고약하구만.”
밀러가 따라와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세운 뒤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종이를 위로 넘기며 말했다. 그의 눈에 과거의 키스터 사건의 개요가 일목요연하게 잡혔다.
“살해 방법이 그 슬로터 키스터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다고 합니다.”
“키스터는 지금?”
“N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러니 간밤에 슬로터 키스터가 교도소를 나와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갈 수 있었을 리 없죠. 다른 인물입니다.”
말보로 경감이 흐음, 하고 턱에 검지를 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습관처럼 품 안의 시가를 꺼내려 했지만, 현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왠지 입이 말라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키스터에 대해서 많이 조사한 인물. 즉 광팬이, 키스터가 잡히니까 모방범이 되어 날뛰기 시작했다는 거겠군.”
“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건 순전히 제 추측인데, 망상장애를 가진 인물일 지도 모릅니다.”
“망상장애?”
말보로 경감이 뜻밖의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밀러의 안경이 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 이런 유명 살인마가 알려지면 가끔 뒤에 망상장애를 가진 모방범이 나타나곤 합니다. 유명한 살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거죠. 키스터가 잡히고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지 않자, 자신을 키스터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남긴 건가.”
말보로 경감이 다시 ‘I AM BACK’이 쓰인 벽을 바라보았다. 흉흉하게 갈겨쓴 그 글씨에는 어떠한 원한이나 집념마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것은 슬로터 키스터를 계속 조사해 왔던, 전 프로파일러인 범죄심리학자 로벤 박사에게 들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는 범죄심리 전문은 아니니까요. 모방범일 가능성이 밝혀진 즉시 수사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 놓았습니다.”
말보로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수사할 때마다 짓곤 했던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지. 하지만 프로파일링도 참고는 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저 확률일 뿐, 제일 정확하게 범인을 밝혀 주는 건 많은 정황 증거들과 과학적인 단서들이지. 오오, 이쪽에서 중요한 단서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데.”
말보로 경감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발걸음을 빨리했다. 서류를 살피며 경감에게 구두로 중요 단서들을 간추려 전하려던 밀러가 영문도 모르고 말보로 경감을 따라갔다. 말보로 경감은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쓰레기통 쪽으로 갔다.
푸른 모자를 쓴 수사관이 쓰레기통 안에서 무언가를 건져 냈는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보고 있었다. 말보로 경감이 푸른 모자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첩이군.”
“엇! 아 경감님이시군요. 네 오래된 수첩인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그건…… 키스터의 예전 희생자들의 사진이구만. 아주 적나라하군.”
수많은 사건에 단련된 말보로 경감이 사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머리에 도끼가 박힌 사진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찍혀 있었다. 사진의 구도에서는 희생자들의 처참한 몰골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지배욕이 느껴졌다.
“이런 건 아무나 얻어서 수첩에 붙이고 다닐 수 있는 사진은 아니지.”
뒤따라 다가온 밀러 역시 푸른 모자를 쓴 수사관의 다른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쓸 만한 단서를 잡았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감식반에 바로 넘겨야겠습니다.”
푸른 모자의 수사관이 자신의 양어깨에서 케르베로스처럼 목을 내민 경감과 밀러 수사관의 존재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들어 둘을 떨쳐 내려 했다.
“저, 저기 좀 떨어져 주시죠. 감식반에는 제가 바로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눈을 빛내는 말보로 경감의 어깨는 럭비선수처럼 굳건했고, 무언가를 발견한 밀러 역시 사냥감을 잡은 거미처럼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검은색의 낡은 수첩은 제일 뒷장까지 넘어가 있었다.
“기다려 보게. 여기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 있군.”
말보로 경감이 진지한 눈빛으로 맨 뒷장을 쳐다보았다. 낡은 검은색 수첩의 맨 뒷장에는, 마치 끔찍한 것이라도 적혀 있었던 듯 다른 검은색 펜이 무작위로 원래 적혀 있던 것 위에 그어져 있었다. 밀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지워진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애썼다.
“두 음절인 것 같습니다. 수첩 주인의 이름일까요?”
“그건 알아봐야 하겠지.”
수사관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사에 열성적이신 건 좋습니다만, 제가 감식반에 이 수첩을 넘겨야 궁금해하시는 내용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좀 떨어져요.”
둘은 망설임 없이 수사관을 놓아주었다. 말보로 경감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밀러 역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부탁하네.”
“부탁드리죠.”
수사관은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현장에 부는 12월의 추운 바람에는 아직도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남겨진 말보로 경감이 옷깃을 여미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모방범이라는 거 말이야.”
“네, 말씀하십시오.”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고 잡혔다는 자부심을 가진 오리지널 놈에게는, 모방범이 나타났다는 게 어떻게 느껴질까?”
밀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결론을 도출했다.
“완벽한 작품을 망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말보로 경감이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밀러가 안경을 치켜들며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네, 그러니까 매우 빡칠 거다 이 말입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너무나도 사실적인 것으로 보아, 헤진 검은 수첩은 키스터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수첩이 어떻게 모방범 사건의 현장에서 발견된 걸까. 내키지 않았지만 형사진은 키스터에게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4. 이변의 시작
간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조그만 불이 밝혀진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흉악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아직 기상종이 울리기 전의 이른 아침이기에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이 건네주는 것을 받기 위해 깨어 있을 것이다.
간수는 손 안에 말아 쥔 신문을 몇 번이나 고쳐 쥐었다. 항상 하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망설임이 그의 가슴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다. 정말 이것을 전해 주어야만 할까.
간수장은 ‘급보가 뜨기 전 신문이라도 가져다주면 되지 않느냐.’라며 초조한 표정의 그에게 태평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오늘의 소동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내일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생선 썩은 냄새는 단순히 보자기를 위에 덮어 놓는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제발, 요즘 유난히 얌전하게 구는 키스터가 이 신문을 보고 난동을 부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이렇게 신문배달부처럼 아침마다 신문을 전달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키스터는 간수 하나의 귀를 물어뜯고, 죄수 하나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 마치 그런 일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큰 키와 달리 어려 보이는 얼굴로 차근차근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키스터는 정말로 겉보기에는 믿을 만해 보였지만 그를 믿는 간수나 간수장은 없었다.
키스터는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자들에게 대신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아침마다 자신에게 신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협박을 했다.
신문을 보여 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폭력 사건 이후로 독방에 격리되었기 때문에 간수가 직접 가져다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감방의 문은 튼튼했고 키스터는 맨손으로 문을 뜯을 정도로 괴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방범이라니. 키스터는 경찰, 범죄심리학자, FBI의 끈질긴 심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행은 이미 ‘완벽’해서 덧붙일 말이 없다며 묵비권을 행사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키스터의 방에 유일하게 뚫린 작은 구멍에 신문을 던지듯이 흘려 넣은 간수는 그가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떴다.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신문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습기가 어린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키스터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선홍색 눈동자가 잠시 이채를 띠었다가 언제나와 다름없는 회색빛 천장을 발견하고는 빛을 잃었다.
꿈속의 마지막 멜로디가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키스터는 작게 허밍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침묵 속에 갇혔네
한때는 아침도 있었지만
지금은 끝없는 밤이 계속될 뿐
내가 답을 찾아낼게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야
너에게 약속할게
내가 죽는 날까지
그는 눈을 감았다. 교도소 밖에 있었을 때 그의 직업은 배우였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붙잡혔기 때문에 마지막 연극은 결국 하지 못했다. 다 자신이 원해 벌인 일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조금 아쉬웠다.
항상 엑스트라나 조연만 맡았었는데 붙잡히기 전 그는 결국 노력을 인정받았는지, 이미지에 딱 들어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주연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가 맡았던 역할은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박사였다.
그래도 결국 주연은 맡게 되지 않았나. 키스터는 침묵 속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연극의 주연은 못했지만 흉악범죄 기사의 주연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키스터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교도소는 방한이 잘 되지 않는다. 찬 공기가 시리게 피부 속으로 침투해 왔다.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최근 로벤 박사가 끈질기게 면담 요청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초반에만 몇 번 장난스럽게 응한 뒤 그것을 지속적으로 무시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으니까.
다만, 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결 좋은 금발과, 겁먹은 듯한 푸른색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는 등을 벽에 딱 붙이고 이쪽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조나단 에이프릴.
키스터는 그 이름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이미—몇 가지 도구가 더 필요하지만—탈출할 수 있는 수단도 마련해 두었다. 아직 나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계획은 붙잡힌 것으로 완성되었다. 탈출로를 찾아 놓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보험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가만히 숨을 죽이자 간수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들은 죄수들에게 경고하듯이 딱딱한 부츠를 신고 다녔다. 죄수를 관리하는 권위를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계속 돌아다니거나 서 있어야 하는 순찰조에게는 안된 일이다 싶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독방 안으로 신문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
빠르게 간수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키스터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신문을 잡아챘다. 그리고 조금 구겨져 있는 신문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펴 헤드라인을 읽고 기사의 타이틀을 읽어 나갔다.
‘급보?’
키스터의 눈이 기사 타이틀을 따라 움직이다 한 곳에 멈췄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시리게 빛나는 눈동자가 냉정하게 기사를 읽었다.
/슬로터 키스터의 모방 살인사건 발생 : I AM BACK
키스터의 모방범이 나타났다. 그는 OO스트릿에서 공장에 다니는 46세 사이먼 마치를 도끼로 머리를 내리찍어 끔찍하게 살해한 뒤 현장에 메시지를 남겼다. ‘I AM BACK’이라는 그 메시지는 마치 슬로터 키스터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자아냈다…….(기울기)/
급보라서 그런지 많은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모방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 자체로도 충분했다. 키스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키스터는 마디가 큰 손가락을 꺾으며 신문을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벽 쪽으로 신문을 던졌다. 쾅! 단지 던졌을 뿐인데도 신문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키스터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답지 않게 손가락이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것은 그의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몸을 떨었다. 증오와 분노, 후회의 감정들이 심장을 긁고 지나갔다. 그는 참을 수 없어 다시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탕! 하는 소리가 감방을 진동시켰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일그러진 눈가와 번들대는 선홍색 눈동자가 보였다.
죄수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만든 감방은 방음에 상당히 취약했다. 큰 소리가 울리자 주위 죄수들이 웅성대거나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자. 진정해. 진정해. 키스터는 입술을 짓씹었다. 짓씹고 또 짓씹었다. 아픔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입술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견딜 수 없자 그는 주먹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지금 참지 못해서 방이 이동되거나 자유가 더 제한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간수가 일찍 떠나 준 것에 감사했다.
“일단은…….”
살짝 심호흡을 한 키스터가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어느새 평온하게 펴져 있었다. 손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 낸 키스터는 그것을 차분히 내려다보다 혀로 피를 핥았다. 할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더 붉게 물들었다.
키스터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가락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손바닥에 닿자 아픔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손톱이 파고들었던 손바닥에는 분명 피멍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의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키스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입술이 붉게 빛났다.
“여기서 나간다.”
잠시 조용히 있자 기상 벨이 울렸다. 웅성거리던 주위의 죄수들은 이제 간수들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았는지 욕지거리를 멈췄다. 키스터는 말없이 자신의 독방 문을 살짝 똑똑 두드렸다. 철문이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자 반대편 방에서 비슷한 신호가 되돌아왔다.
준비해 놓았던 보험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키스터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건너편 방 쪽을 쳐다보았다. 반대편 독방에 처박힌 남자는 지난번 키스터가 폭행한 그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거역하지 못한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 것이다.
키스터는 어지럽게 뻗쳐 있던 회색 머리를 정돈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곧이어 등장할 간수에게 지어 보일 순진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이 연기가 통할까?’ 따위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연기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간수는 다행히 키스터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소와 같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둔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방범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이미 주위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키스터는 직감했다. 어떻게 행동하든 며칠 사이에 분명히 자신의 자유는 더 제한될 것이고, 감시도 심해질 것이다.
그는 무언가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연기로 설득하고 싶어도 그가 접촉하는 사람의 수는 너무나도 적었다. 소문은 소문을 몰고 오기 마련이었고, 죄수라는 입장은 무언가를 변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다행히 오후쯤 때맞춰 경찰의 부름이 있었다. 증거물에 관해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완벽한 자신의 범행에 구정물을 튀기는 일이라며 칼같이 수사협조를 거절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키스터는 귀를 후비며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간수에게 말했다.
“안 해.”
“뭐라고?”
“내가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수사협조를 해. 그 귀찮은 걸.”
심문방의 공기 팬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환기가 잘 안 되는지 공기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간수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키스터가 답답하다는 듯이 잠시 침묵하다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응하는 게 너에게도 좋을 거다.”
“왜, 창문도 없는 지하 독방에서 이번엔 또 어디로 옮기게? 아님 굶기기라도 하게?”
내가 천하의 죽일 놈인 건 맞지만, 인권단체에서 또 들고 일어날걸. 키스터가 이죽댔다. 실제로 인권단체가 그 키스터가 밥을 못 먹는 일 같은 걸로 들고 일어나진 않을 거라는 것을 간수도 키스터도 알고 있었지만 간수의 체념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간수가 한숨을 쉬었다.
“……끝까지 협조를 안 할 생각인가.”
주위에 진동하는 피 냄새에 말보로 경감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시체는 조사를 위해 검시관에게로 보낸 상태였는데도 거리는 지난밤에 일어난 끔찍한 비극의 향기를 쉽게 흩어 버리지 않았다. ‘슬로터 키스터 따위의 모방범이라니. 세상도 참 말세군요.’라고 옆에서 밀러 수사관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말보로 경감은 날카로운 눈으로 살해 현장인 골목을 살펴보며 한 걸음 내딛었다. 반쯤 세워지다 만 벽돌에는 물감으로 칠한 듯이 피가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아마도 도끼로 머리를 찍을 때 튄 피인 것으로 보였다. 그 사이에 자신을 드러내듯이 날카로운 글씨체로 글자가 적혀 있다.
I AM BACK
벽에 적힌 글씨는 얼핏 보면 젊은이들이 자주 하곤 하는 그래피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된 재료는 분명히 인간의 피였다. 말보로 경감이 코를 틀어막았다.
“이거 참 고약하구만.”
밀러가 따라와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세운 뒤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종이를 위로 넘기며 말했다. 그의 눈에 과거의 키스터 사건의 개요가 일목요연하게 잡혔다.
“살해 방법이 그 슬로터 키스터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다고 합니다.”
“키스터는 지금?”
“N교도소에 있습니다. 그러니 간밤에 슬로터 키스터가 교도소를 나와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갈 수 있었을 리 없죠. 다른 인물입니다.”
말보로 경감이 흐음, 하고 턱에 검지를 대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습관처럼 품 안의 시가를 꺼내려 했지만, 현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왠지 입이 말라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키스터에 대해서 많이 조사한 인물. 즉 광팬이, 키스터가 잡히니까 모방범이 되어 날뛰기 시작했다는 거겠군.”
“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건 순전히 제 추측인데, 망상장애를 가진 인물일 지도 모릅니다.”
“망상장애?”
말보로 경감이 뜻밖의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밀러의 안경이 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 이런 유명 살인마가 알려지면 가끔 뒤에 망상장애를 가진 모방범이 나타나곤 합니다. 유명한 살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거죠. 키스터가 잡히고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지 않자, 자신을 키스터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돌아왔다’는 메시지를 남긴 건가.”
말보로 경감이 다시 ‘I AM BACK’이 쓰인 벽을 바라보았다. 흉흉하게 갈겨쓴 그 글씨에는 어떠한 원한이나 집념마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것은 슬로터 키스터를 계속 조사해 왔던, 전 프로파일러인 범죄심리학자 로벤 박사에게 들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희는 범죄심리 전문은 아니니까요. 모방범일 가능성이 밝혀진 즉시 수사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 놓았습니다.”
말보로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수사할 때마다 짓곤 했던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지. 하지만 프로파일링도 참고는 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저 확률일 뿐, 제일 정확하게 범인을 밝혀 주는 건 많은 정황 증거들과 과학적인 단서들이지. 오오, 이쪽에서 중요한 단서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데.”
말보로 경감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발걸음을 빨리했다. 서류를 살피며 경감에게 구두로 중요 단서들을 간추려 전하려던 밀러가 영문도 모르고 말보로 경감을 따라갔다. 말보로 경감은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람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쓰레기통 쪽으로 갔다.
푸른 모자를 쓴 수사관이 쓰레기통 안에서 무언가를 건져 냈는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펼쳐 보고 있었다. 말보로 경감이 푸른 모자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수첩이군.”
“엇! 아 경감님이시군요. 네 오래된 수첩인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그건…… 키스터의 예전 희생자들의 사진이구만. 아주 적나라하군.”
수많은 사건에 단련된 말보로 경감이 사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머리에 도끼가 박힌 사진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찍혀 있었다. 사진의 구도에서는 희생자들의 처참한 몰골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지배욕이 느껴졌다.
“이런 건 아무나 얻어서 수첩에 붙이고 다닐 수 있는 사진은 아니지.”
뒤따라 다가온 밀러 역시 푸른 모자를 쓴 수사관의 다른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쓸 만한 단서를 잡았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감식반에 바로 넘겨야겠습니다.”
푸른 모자의 수사관이 자신의 양어깨에서 케르베로스처럼 목을 내민 경감과 밀러 수사관의 존재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들어 둘을 떨쳐 내려 했다.
“저, 저기 좀 떨어져 주시죠. 감식반에는 제가 바로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눈을 빛내는 말보로 경감의 어깨는 럭비선수처럼 굳건했고, 무언가를 발견한 밀러 역시 사냥감을 잡은 거미처럼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검은색의 낡은 수첩은 제일 뒷장까지 넘어가 있었다.
“기다려 보게. 여기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 있군.”
말보로 경감이 진지한 눈빛으로 맨 뒷장을 쳐다보았다. 낡은 검은색 수첩의 맨 뒷장에는, 마치 끔찍한 것이라도 적혀 있었던 듯 다른 검은색 펜이 무작위로 원래 적혀 있던 것 위에 그어져 있었다. 밀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지워진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애썼다.
“두 음절인 것 같습니다. 수첩 주인의 이름일까요?”
“그건 알아봐야 하겠지.”
수사관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사에 열성적이신 건 좋습니다만, 제가 감식반에 이 수첩을 넘겨야 궁금해하시는 내용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좀 떨어져요.”
둘은 망설임 없이 수사관을 놓아주었다. 말보로 경감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밀러 역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부탁하네.”
“부탁드리죠.”
수사관은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현장에 부는 12월의 추운 바람에는 아직도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남겨진 말보로 경감이 옷깃을 여미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모방범이라는 거 말이야.”
“네, 말씀하십시오.”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고 잡혔다는 자부심을 가진 오리지널 놈에게는, 모방범이 나타났다는 게 어떻게 느껴질까?”
밀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결론을 도출했다.
“완벽한 작품을 망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말보로 경감이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밀러가 안경을 치켜들며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네, 그러니까 매우 빡칠 거다 이 말입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너무나도 사실적인 것으로 보아, 헤진 검은 수첩은 키스터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수첩이 어떻게 모방범 사건의 현장에서 발견된 걸까. 내키지 않았지만 형사진은 키스터에게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4. 이변의 시작
간수는 긴장한 표정으로 조그만 불이 밝혀진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흉악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뚜벅 뚜벅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아직 기상종이 울리기 전의 이른 아침이기에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이 건네주는 것을 받기 위해 깨어 있을 것이다.
간수는 손 안에 말아 쥔 신문을 몇 번이나 고쳐 쥐었다. 항상 하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망설임이 그의 가슴을 술렁이게 하고 있었다. 정말 이것을 전해 주어야만 할까.
간수장은 ‘급보가 뜨기 전 신문이라도 가져다주면 되지 않느냐.’라며 초조한 표정의 그에게 태평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오늘의 소동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내일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생선 썩은 냄새는 단순히 보자기를 위에 덮어 놓는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제발, 요즘 유난히 얌전하게 구는 키스터가 이 신문을 보고 난동을 부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이렇게 신문배달부처럼 아침마다 신문을 전달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키스터는 간수 하나의 귀를 물어뜯고, 죄수 하나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 마치 그런 일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으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큰 키와 달리 어려 보이는 얼굴로 차근차근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키스터는 정말로 겉보기에는 믿을 만해 보였지만 그를 믿는 간수나 간수장은 없었다.
키스터는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자들에게 대신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아침마다 자신에게 신문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협박을 했다.
신문을 보여 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폭력 사건 이후로 독방에 격리되었기 때문에 간수가 직접 가져다줘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감방의 문은 튼튼했고 키스터는 맨손으로 문을 뜯을 정도로 괴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방범이라니. 키스터는 경찰, 범죄심리학자, FBI의 끈질긴 심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행은 이미 ‘완벽’해서 덧붙일 말이 없다며 묵비권을 행사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키스터의 방에 유일하게 뚫린 작은 구멍에 신문을 던지듯이 흘려 넣은 간수는 그가 누군가에게 시비를 걸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떴다.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신문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습기가 어린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키스터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선홍색 눈동자가 잠시 이채를 띠었다가 언제나와 다름없는 회색빛 천장을 발견하고는 빛을 잃었다.
꿈속의 마지막 멜로디가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키스터는 작게 허밍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침묵 속에 갇혔네
한때는 아침도 있었지만
지금은 끝없는 밤이 계속될 뿐
내가 답을 찾아낼게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야
너에게 약속할게
내가 죽는 날까지
그는 눈을 감았다. 교도소 밖에 있었을 때 그의 직업은 배우였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붙잡혔기 때문에 마지막 연극은 결국 하지 못했다. 다 자신이 원해 벌인 일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조금 아쉬웠다.
항상 엑스트라나 조연만 맡았었는데 붙잡히기 전 그는 결국 노력을 인정받았는지, 이미지에 딱 들어맞았는지 모르겠지만, 주연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가 맡았던 역할은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박사였다.
그래도 결국 주연은 맡게 되지 않았나. 키스터는 침묵 속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연극의 주연은 못했지만 흉악범죄 기사의 주연은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키스터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교도소는 방한이 잘 되지 않는다. 찬 공기가 시리게 피부 속으로 침투해 왔다.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최근 로벤 박사가 끈질기게 면담 요청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초반에만 몇 번 장난스럽게 응한 뒤 그것을 지속적으로 무시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고, 대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계획은 완벽했으니까.
다만, 그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결 좋은 금발과, 겁먹은 듯한 푸른색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는 등을 벽에 딱 붙이고 이쪽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조나단 에이프릴.
키스터는 그 이름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는 이미—몇 가지 도구가 더 필요하지만—탈출할 수 있는 수단도 마련해 두었다. 아직 나갈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계획은 붙잡힌 것으로 완성되었다. 탈출로를 찾아 놓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보험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가만히 숨을 죽이자 간수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들은 죄수들에게 경고하듯이 딱딱한 부츠를 신고 다녔다. 죄수를 관리하는 권위를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계속 돌아다니거나 서 있어야 하는 순찰조에게는 안된 일이다 싶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독방 안으로 신문 하나가 밀려 들어왔다.
빠르게 간수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키스터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켜 신문을 잡아챘다. 그리고 조금 구겨져 있는 신문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펴 헤드라인을 읽고 기사의 타이틀을 읽어 나갔다.
‘급보?’
키스터의 눈이 기사 타이틀을 따라 움직이다 한 곳에 멈췄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시리게 빛나는 눈동자가 냉정하게 기사를 읽었다.
/슬로터 키스터의 모방 살인사건 발생 : I AM BACK
키스터의 모방범이 나타났다. 그는 OO스트릿에서 공장에 다니는 46세 사이먼 마치를 도끼로 머리를 내리찍어 끔찍하게 살해한 뒤 현장에 메시지를 남겼다. ‘I AM BACK’이라는 그 메시지는 마치 슬로터 키스터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자아냈다…….(기울기)/
급보라서 그런지 많은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모방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그 사실 자체로도 충분했다. 키스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키스터는 마디가 큰 손가락을 꺾으며 신문을 우그러뜨렸다. 그리고 벽 쪽으로 신문을 던졌다. 쾅! 단지 던졌을 뿐인데도 신문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키스터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답지 않게 손가락이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것은 그의 손가락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몸을 떨었다. 증오와 분노, 후회의 감정들이 심장을 긁고 지나갔다. 그는 참을 수 없어 다시 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탕! 하는 소리가 감방을 진동시켰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일그러진 눈가와 번들대는 선홍색 눈동자가 보였다.
죄수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만든 감방은 방음에 상당히 취약했다. 큰 소리가 울리자 주위 죄수들이 웅성대거나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하자. 진정해. 진정해. 키스터는 입술을 짓씹었다. 짓씹고 또 짓씹었다. 아픔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입술을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견딜 수 없자 그는 주먹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다. 지금 참지 못해서 방이 이동되거나 자유가 더 제한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간수가 일찍 떠나 준 것에 감사했다.
“일단은…….”
살짝 심호흡을 한 키스터가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은 어느새 평온하게 펴져 있었다. 손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 낸 키스터는 그것을 차분히 내려다보다 혀로 피를 핥았다. 할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더 붉게 물들었다.
키스터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폈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가락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손바닥에 닿자 아픔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손톱이 파고들었던 손바닥에는 분명 피멍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지금의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키스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입술이 붉게 빛났다.
“여기서 나간다.”
잠시 조용히 있자 기상 벨이 울렸다. 웅성거리던 주위의 죄수들은 이제 간수들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았는지 욕지거리를 멈췄다. 키스터는 말없이 자신의 독방 문을 살짝 똑똑 두드렸다. 철문이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자 반대편 방에서 비슷한 신호가 되돌아왔다.
준비해 놓았던 보험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키스터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건너편 방 쪽을 쳐다보았다. 반대편 독방에 처박힌 남자는 지난번 키스터가 폭행한 그 남자였다. 그는 자신을 거역하지 못한다. 분명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 것이다.
키스터는 어지럽게 뻗쳐 있던 회색 머리를 정돈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곧이어 등장할 간수에게 지어 보일 순진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이 연기가 통할까?’ 따위의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연기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간수는 다행히 키스터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소와 같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둔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방범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이미 주위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키스터는 직감했다. 어떻게 행동하든 며칠 사이에 분명히 자신의 자유는 더 제한될 것이고, 감시도 심해질 것이다.
그는 무언가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연기로 설득하고 싶어도 그가 접촉하는 사람의 수는 너무나도 적었다. 소문은 소문을 몰고 오기 마련이었고, 죄수라는 입장은 무언가를 변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다행히 오후쯤 때맞춰 경찰의 부름이 있었다. 증거물에 관해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완벽한 자신의 범행에 구정물을 튀기는 일이라며 칼같이 수사협조를 거절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키스터는 귀를 후비며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간수에게 말했다.
“안 해.”
“뭐라고?”
“내가 무슨 광명을 보겠다고 수사협조를 해. 그 귀찮은 걸.”
심문방의 공기 팬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환기가 잘 안 되는지 공기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간수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키스터가 답답하다는 듯이 잠시 침묵하다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응하는 게 너에게도 좋을 거다.”
“왜, 창문도 없는 지하 독방에서 이번엔 또 어디로 옮기게? 아님 굶기기라도 하게?”
내가 천하의 죽일 놈인 건 맞지만, 인권단체에서 또 들고 일어날걸. 키스터가 이죽댔다. 실제로 인권단체가 그 키스터가 밥을 못 먹는 일 같은 걸로 들고 일어나진 않을 거라는 것을 간수도 키스터도 알고 있었지만 간수의 체념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간수가 한숨을 쉬었다.
“……끝까지 협조를 안 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