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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
그림자 세계 1권(1화)
0. 알림말(프롤로그)(1)
0. 신은 이 세상에 질려 버렸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일곱의 신들은 스스로의 힘에 모순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창조권을 걸고 ‘내기’를 시작했다.
알림말
1.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도르힘(*4번째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무작위로 선택받은 인간입니다.
2. 당신은 더욱 넓은 세상을 볼 것입니다. 신들의 의지에 의해, 우연이나 운이 항상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3. 신과 심판관의 모든 지시, 또는 참고사항은 당신이 가진 가장 편리한 메모장에 나타나게 됩니다.
4. 당신은 당신의 몸을 지킬 신비한 능력을 신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5. 당신은 다른 능력자로부터 능력을 뺏을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방법들이 허용됩니다.
6. 당신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7. 당신이 믿던 신을 포기하고 다른 신을 믿게 된다면 그 신은 당신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전에 가졌던 능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8. 당신은 당신에게 능력을 준 신에게 창조권을 쥐어 주기 위해 혼란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합니다.
9. 당신 이외의 수많은 선택자들과 혼돈으로부터 나온 수많은 괴물들이 당신을 방해할 것입니다.
10. 이것은 신들의 내기입니다. 피조물인 당신은 거부할 수 없으며 당신의 신이 승리한다면 새로운 창조신이 만든 세상에서 무한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11. 당신이 이 메시지를 다 읽은 순간 이미 혼돈은 당신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항상 긴장하십시오.
12. 당신의 능력은 메시지를 전한 메모장 뒷면에 추후 통보됩니다.
13. 당신의 죽음은 신에게 아주 작은 부분의 실패만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14. 당신은 혼자입니다.
1. 선택(1)
하늘이 왠지 우중충한 날이다.
널찍한 운동장에 뛰어노는 아이들 하나 없다. 비가 오려나, 구름마저 검회색 색깔로 그의 마음을 짓누른다.
이럴 때면 하늘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싶어서 으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꼬나물고 구름 한 덩어리를 만들어다 위를 향해 쏘아 준다.
요즘은 되는 일이 하나 없다.
군대만 다녀오면 모든 것이 다 차근차근 해결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막상 다녀와 보니 별거 없다.
김정욱이란 이름 앞엔 언제나 백날 백수, 별 볼일 없는 휴학생이란 타이틀만 주렁주렁 달려 있을 뿐이다.
그는 오늘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쥐포 하나를 사다 들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올라와 앉았다.
정욱은 문득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쪼글쪼글하게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꾸깃한 종이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서 잘 펴 놓자 앞면에 구릿빛 피부의 보기 좋은 몸매의 여인 사진이 그를 유혹한다.
이 정도로 좋은 그림은 구하기 쉽지 않은데 주머니에 잘 넣어 두길 잘했지 싶었다.
‘기분 안 좋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봐야지.’
정욱은 그림을 한번 힐끗 보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손에 든 쥐포를 입으로 사정없이 뜯어 우적우적 씹어 삼키곤 정욱은, 슬슬 내려갈 준비를 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둑해지는 것을 보아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빨리 내려가야겠다.’
바지를 털고 주머니에 그림을 꽂아 넣어 두려는 순간 손가락에 짜릿한 스파크가 올라 그는 깜짝 놀라서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전기?’
그는 찌릿한 기분이 맴도는 손가락을 쥐었다 펴 보며 땅에 떨어진 그림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런데 그림이 이상하다.
툴툴 털어 보고 눈을 비벼 봐도 뭔가 이상했다.
그림에 나왔던 아리따운 여인의 형체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그것도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끔하게 말이다.
게다가 그림을 뒤로 돌려 보니 좀 전엔 없던 붉은 글씨가 보인다.
(알림말)
1. 당신은 도르힘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무작위로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이상한 글씨다. 분명히 방금 전까진 없던 글귀라 정욱은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글자가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스스로 한 문장을 완성한 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그다음 문장을 보여 주었다.
2. 당신은 모든 것을 의심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는 너무도 신기하여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그것을 쥐고 글자가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운동경기의 규칙처럼 뭔가를 경고하려는 내용이었다.
13. 당신의 죽음은 신에게 아주 작은 부분의 실패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14. 당신은 혼자입니다.
경고. 이 메시지를 다 읽은 순간 혼돈은 당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끝.
참으로 진귀했다. 글자들이 뱀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문장을 만들고 사라지며 마법을 부린다.
그는 무슨 장치가 있나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끝’이라고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힌 글자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채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 그림은 평범한 전단지 같은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어떤 특수한 장치가 여기에 사용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글씨체를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신기해할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욱은 키득이며 주머니에 그것을 깊이 쑤셔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기 전에, 어서 집에 가 이것을 좀 더 살펴볼 요량이었다.
‘응?!’
그런데 정욱의 등 뒤에서 별안간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히 아무도 없는 줄로만 알았던 텅 빈 운동장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어서 알 수 없는 공포가 그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인기척이 느껴졌던 등 뒤엔 아무도 없었다.
알 수 없는 한기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걷던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놈의 하늘은 왜 이리도 금세 어두워지는지 이제는 빗방울까지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빗방울이 신발에 밟혀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가 분명히 정욱 이외에 또 다른 발자국 소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점점 더 속도를 높였고 결국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들리는 또 다른 발자국의 소리도 처벅처벅 소리를 내며 따라 뛰기 시작한다.
‘제기랄.’
분명히, 자신을 쫓고 있다.
어느새 하늘에선 성난 비가 세차게 내린다.
정욱의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굵직한 빗줄기를 모두 내 몰아 치듯 마구마구 달려오고 있다.
달리는 그의 숨이 가빠진다.
정욱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해진 골목길 저 끝에서 무섭도록 빗물을 차 대며 달려오는 인형(人形)이 보인다.
‘도대체 누군데 나를 쫓아오는 거지?’
정체불명인의 고개가 슬쩍 들리는 순간 멀리서 새빨간 안광이 정욱의 눈에 비췄다.
짐승의 눈.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소름 돋은 눈.
당장이라도 붉은 눈이 정욱의 앞에 나타나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정욱은 서서히 다리가 풀려 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짜내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발목부터 물이 차오르듯 점점 더 다리가 무거워진다. 그러곤 얼마 안 있어 옆의 쓰레기 더미 뒤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어찌 된 일인지 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그를 쫓던 괴한은 그의 움직임이 멈췄음을 감지한 듯 달리기를 멈추곤 저벅저벅 걸어온다.
다시 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옆의 검정색 쓰레기 봉지만을 더욱 껴안은 채 제발 녀석이 쓰레기 더미와 자신을 혼동하길 바랐다.
저벅저벅…….
정욱은 힐끔 녀석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한 손에 들린 시퍼런 칼.
이 세상에서 저렇게 생긴 칼을 구할 수가 있었던가.
오직 살인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칼인 듯 날카로운 날에 뾰족한 끝. 그리고 칼등엔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한 톱날들이 불규칙적으로 엮어져 있다.
우우웅!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키자 별안간 정욱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심하게 진동하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급하게 핸드폰을 주워 들다가 스치듯 본 한 문장.
‘살고 싶니?’
이 네 글자가 머릿속을 꽉 메운 것을 느끼며 그는 다시 내달렸다.
괴한은 정욱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흠칫 놀란 듯 다시 칼을 숨기고 빠른 걸음으로 쫓기 시작한다.
다리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정욱에게 괴한의 추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정욱의 손에 꽉 쥐어진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린다.
‘1분 후면 당신에게 능력이 부여됩니다.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틀어 도망치세요.’
‘이건 도대체…… 능력이라니?’
정욱은 문득 여인의 형체가 그려진, 주머니 속의 작은 전단지를 생각해 냈다.
그 뒤에 지렁이처럼 쓰였던 글씨들. 그리고 내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들의 세계. 도르힘? 능력. 혼돈.
정욱은 문자메시지의 내용대로 오른쪽에 뚫린 골목을 발견하곤 몸을 휙 틀어 들어갔다.
그는 숨을 죽이고 몸을 벽 뒤에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숨으면 녀석이 날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낸 걸까. 마치 날 지켜보듯이.’
우우웅!
다시금 핸드폰이 진동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에게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지령을 받은 종이를 꺼내 능력을 확인하세요.’
발신자 표시가 제한된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참 알 수 없었다.
‘지령을 받은 종이? 혹시 그 전단지를 말하는 건가?’
정욱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전단지를 꺼내 들었다.
‘끝’이라고 붉게 적혀 있던 글자가 다시 이리저리 움직이며 새로운 글자들을 만들어 갔다.
환영을 만들어 내는 능력
사용법 : 당신이 만들어 내고 싶은 이미지를 상상한다. 집중한다. 만들어 낸다. 단, 초급 능력자가 만들어 낸 환영은 눈속임일 뿐 건드리거나 형체를 가지지 못한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우웅!
‘환영술! 당신의 능력입니다. 능력을 사용하여 혼돈을 물리치세요. 행운을 빕니다!’
‘능력을 사용하라고? 게다가 환영술이라니. 이건 대체?’
누군가가 자신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욱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귓가에는 정욱을 찾는 괴한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아…… 내가 숨은 곳을 가려 줄 벽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욱은 스스로를 가려 줄 벽. 그것이 필요했다.
저기 뒤편으로 난 길목만 가릴 수 있다면 괴한은 정욱을 보지 못하고 갈 것이 분명했다.
우우웅!
‘당신의 능력은 당신의 정신력이 따르는 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하세요. 머릿속에서 사물을 구체화하세요.’
문자메시지는 정욱의 생각을 읽는 듯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는 어느새 이 문자메시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번호도 표시되지 않는 미스터리한 메시지였다.
저벅저벅하는 괴한의 발소리가 커질수록 정욱의 심장도 터질듯이 쿵쾅거렸다.
그림자 세계 1권(1화)
0. 알림말(프롤로그)(1)
0. 신은 이 세상에 질려 버렸다. 동등한 능력을 가진 일곱의 신들은 스스로의 힘에 모순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창조권을 걸고 ‘내기’를 시작했다.
알림말
1.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도르힘(*4번째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무작위로 선택받은 인간입니다.
2. 당신은 더욱 넓은 세상을 볼 것입니다. 신들의 의지에 의해, 우연이나 운이 항상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3. 신과 심판관의 모든 지시, 또는 참고사항은 당신이 가진 가장 편리한 메모장에 나타나게 됩니다.
4. 당신은 당신의 몸을 지킬 신비한 능력을 신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5. 당신은 다른 능력자로부터 능력을 뺏을 수 있으며, 그것은 모든 방법들이 허용됩니다.
6. 당신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7. 당신이 믿던 신을 포기하고 다른 신을 믿게 된다면 그 신은 당신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전에 가졌던 능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8. 당신은 당신에게 능력을 준 신에게 창조권을 쥐어 주기 위해 혼란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합니다.
9. 당신 이외의 수많은 선택자들과 혼돈으로부터 나온 수많은 괴물들이 당신을 방해할 것입니다.
10. 이것은 신들의 내기입니다. 피조물인 당신은 거부할 수 없으며 당신의 신이 승리한다면 새로운 창조신이 만든 세상에서 무한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11. 당신이 이 메시지를 다 읽은 순간 이미 혼돈은 당신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항상 긴장하십시오.
12. 당신의 능력은 메시지를 전한 메모장 뒷면에 추후 통보됩니다.
13. 당신의 죽음은 신에게 아주 작은 부분의 실패만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14. 당신은 혼자입니다.
1. 선택(1)
하늘이 왠지 우중충한 날이다.
널찍한 운동장에 뛰어노는 아이들 하나 없다. 비가 오려나, 구름마저 검회색 색깔로 그의 마음을 짓누른다.
이럴 때면 하늘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가 싶어서 으레 담배 한 개비를 입에 꼬나물고 구름 한 덩어리를 만들어다 위를 향해 쏘아 준다.
요즘은 되는 일이 하나 없다.
군대만 다녀오면 모든 것이 다 차근차근 해결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막상 다녀와 보니 별거 없다.
김정욱이란 이름 앞엔 언제나 백날 백수, 별 볼일 없는 휴학생이란 타이틀만 주렁주렁 달려 있을 뿐이다.
그는 오늘도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쥐포 하나를 사다 들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올라와 앉았다.
정욱은 문득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쪼글쪼글하게 구겨진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꾸깃한 종이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서 잘 펴 놓자 앞면에 구릿빛 피부의 보기 좋은 몸매의 여인 사진이 그를 유혹한다.
이 정도로 좋은 그림은 구하기 쉽지 않은데 주머니에 잘 넣어 두길 잘했지 싶었다.
‘기분 안 좋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봐야지.’
정욱은 그림을 한번 힐끗 보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손에 든 쥐포를 입으로 사정없이 뜯어 우적우적 씹어 삼키곤 정욱은, 슬슬 내려갈 준비를 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둑해지는 것을 보아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빨리 내려가야겠다.’
바지를 털고 주머니에 그림을 꽂아 넣어 두려는 순간 손가락에 짜릿한 스파크가 올라 그는 깜짝 놀라서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전기?’
그는 찌릿한 기분이 맴도는 손가락을 쥐었다 펴 보며 땅에 떨어진 그림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런데 그림이 이상하다.
툴툴 털어 보고 눈을 비벼 봐도 뭔가 이상했다.
그림에 나왔던 아리따운 여인의 형체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그것도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끔하게 말이다.
게다가 그림을 뒤로 돌려 보니 좀 전엔 없던 붉은 글씨가 보인다.
(알림말)
1. 당신은 도르힘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무작위로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이상한 글씨다. 분명히 방금 전까진 없던 글귀라 정욱은 그것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글자가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스스로 한 문장을 완성한 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그다음 문장을 보여 주었다.
2. 당신은 모든 것을 의심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는 너무도 신기하여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그것을 쥐고 글자가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마치 운동경기의 규칙처럼 뭔가를 경고하려는 내용이었다.
13. 당신의 죽음은 신에게 아주 작은 부분의 실패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14. 당신은 혼자입니다.
경고. 이 메시지를 다 읽은 순간 혼돈은 당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끝.
참으로 진귀했다. 글자들이 뱀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문장을 만들고 사라지며 마법을 부린다.
그는 무슨 장치가 있나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끝’이라고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힌 글자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채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이 그림은 평범한 전단지 같은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어떤 특수한 장치가 여기에 사용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글씨체를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신기해할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욱은 키득이며 주머니에 그것을 깊이 쑤셔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기 전에, 어서 집에 가 이것을 좀 더 살펴볼 요량이었다.
‘응?!’
그런데 정욱의 등 뒤에서 별안간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히 아무도 없는 줄로만 알았던 텅 빈 운동장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어서 알 수 없는 공포가 그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인기척이 느껴졌던 등 뒤엔 아무도 없었다.
알 수 없는 한기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걷던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놈의 하늘은 왜 이리도 금세 어두워지는지 이제는 빗방울까지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빗방울이 신발에 밟혀 차박차박 발걸음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가 분명히 정욱 이외에 또 다른 발자국 소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점점 더 속도를 높였고 결국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들리는 또 다른 발자국의 소리도 처벅처벅 소리를 내며 따라 뛰기 시작한다.
‘제기랄.’
분명히, 자신을 쫓고 있다.
어느새 하늘에선 성난 비가 세차게 내린다.
정욱의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굵직한 빗줄기를 모두 내 몰아 치듯 마구마구 달려오고 있다.
달리는 그의 숨이 가빠진다.
정욱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해진 골목길 저 끝에서 무섭도록 빗물을 차 대며 달려오는 인형(人形)이 보인다.
‘도대체 누군데 나를 쫓아오는 거지?’
정체불명인의 고개가 슬쩍 들리는 순간 멀리서 새빨간 안광이 정욱의 눈에 비췄다.
짐승의 눈.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소름 돋은 눈.
당장이라도 붉은 눈이 정욱의 앞에 나타나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정욱은 서서히 다리가 풀려 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짜내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발목부터 물이 차오르듯 점점 더 다리가 무거워진다. 그러곤 얼마 안 있어 옆의 쓰레기 더미 뒤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어찌 된 일인지 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그를 쫓던 괴한은 그의 움직임이 멈췄음을 감지한 듯 달리기를 멈추곤 저벅저벅 걸어온다.
다시 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옆의 검정색 쓰레기 봉지만을 더욱 껴안은 채 제발 녀석이 쓰레기 더미와 자신을 혼동하길 바랐다.
저벅저벅…….
정욱은 힐끔 녀석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한 손에 들린 시퍼런 칼.
이 세상에서 저렇게 생긴 칼을 구할 수가 있었던가.
오직 살인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칼인 듯 날카로운 날에 뾰족한 끝. 그리고 칼등엔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한 톱날들이 불규칙적으로 엮어져 있다.
우우웅!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키자 별안간 정욱의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심하게 진동하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급하게 핸드폰을 주워 들다가 스치듯 본 한 문장.
‘살고 싶니?’
이 네 글자가 머릿속을 꽉 메운 것을 느끼며 그는 다시 내달렸다.
괴한은 정욱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흠칫 놀란 듯 다시 칼을 숨기고 빠른 걸음으로 쫓기 시작한다.
다리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정욱에게 괴한의 추격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정욱의 손에 꽉 쥐어진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린다.
‘1분 후면 당신에게 능력이 부여됩니다.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틀어 도망치세요.’
‘이건 도대체…… 능력이라니?’
정욱은 문득 여인의 형체가 그려진, 주머니 속의 작은 전단지를 생각해 냈다.
그 뒤에 지렁이처럼 쓰였던 글씨들. 그리고 내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들의 세계. 도르힘? 능력. 혼돈.
정욱은 문자메시지의 내용대로 오른쪽에 뚫린 골목을 발견하곤 몸을 휙 틀어 들어갔다.
그는 숨을 죽이고 몸을 벽 뒤에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숨으면 녀석이 날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낸 걸까. 마치 날 지켜보듯이.’
우우웅!
다시금 핸드폰이 진동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에게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지령을 받은 종이를 꺼내 능력을 확인하세요.’
발신자 표시가 제한된 문자메시지의 내용은 참 알 수 없었다.
‘지령을 받은 종이? 혹시 그 전단지를 말하는 건가?’
정욱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전단지를 꺼내 들었다.
‘끝’이라고 붉게 적혀 있던 글자가 다시 이리저리 움직이며 새로운 글자들을 만들어 갔다.
환영을 만들어 내는 능력
사용법 : 당신이 만들어 내고 싶은 이미지를 상상한다. 집중한다. 만들어 낸다. 단, 초급 능력자가 만들어 낸 환영은 눈속임일 뿐 건드리거나 형체를 가지지 못한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우웅!
‘환영술! 당신의 능력입니다. 능력을 사용하여 혼돈을 물리치세요. 행운을 빕니다!’
‘능력을 사용하라고? 게다가 환영술이라니. 이건 대체?’
누군가가 자신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욱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귓가에는 정욱을 찾는 괴한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아…… 내가 숨은 곳을 가려 줄 벽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욱은 스스로를 가려 줄 벽. 그것이 필요했다.
저기 뒤편으로 난 길목만 가릴 수 있다면 괴한은 정욱을 보지 못하고 갈 것이 분명했다.
우우웅!
‘당신의 능력은 당신의 정신력이 따르는 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정신을 집중하세요. 머릿속에서 사물을 구체화하세요.’
문자메시지는 정욱의 생각을 읽는 듯 계속해서 날아왔다.
그는 어느새 이 문자메시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번호도 표시되지 않는 미스터리한 메시지였다.
저벅저벅하는 괴한의 발소리가 커질수록 정욱의 심장도 터질듯이 쿵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