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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2화)
1. 선택(2)


그는 더 이상 도망칠 힘이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이어진 길도 있지 않다.
정욱은 최후의 수단으로 옆에 있는 부러진 나무막대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워 들곤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니, 간절히 바랐다.
제발 저곳에 벽이 생겨서 녀석이 들어오지 못하길.
저벅. 저벅.
뒤쪽에서 괴한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바로 뒤쪽이다.
녀석이 바로 뒤에 있다.
정욱은 나무막대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어 괴한과의 거리를 살펴보기 위해 힐끔 뒤쪽을 돌아보았다.
정욱을 노리는 것이 분명한 괴한의 붉은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웬일인지 괴한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한다.
그리고 냄새를 맡는 듯 킁킁거리더니 재빨리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정욱은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멀어지는 괴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녀석이 왜 들어오지 않았지?’
괴한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정욱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라곤 이 오른쪽으로 뚫려 있던 골목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살기를 뿜어 대며 쫓아오던 그놈이 이 골목을 못 보고 지나친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괴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정욱은 밖으로 나와서 유심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벽.
흐릿한 뭔가가 그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
정욱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바깥쪽 골목으로 나가 확인해 보았다.
‘설마 정말로 벽이 생겨 버린 건?’
정욱이 완전히 밖으로 나와서 그가 숨어 있던 길목을 돌아보자 그곳엔 옆으로 이어진 벽과 똑같은 벽이 막아서고 있었다.
‘이럴 수가!’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당연히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모양의 벽이었다.
그가 신기해서 손을 대 보자, 마치 물결이 일듯 일렁거리며 벽의 모습이 흐트러지며 손이 쑤욱 그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곤 그 벽은 얼마 안 있어 점차 흐려지며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환영술……?’
정욱은 이 신비로운 현상에 자신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 그리고 자신이 뛰어온 방향을 되돌아보았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집과는 꽤 먼 방향으로 돌아와 있다.
정욱은 걷기 시작했다. 비 오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걸으며, 차가워진 머리로 이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갑자기 튀어나왔던 괴한은, 역시나 갑자기 정욱의 근처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조금 전의 그 괴한은 도대체 누구고, 왜 자신을 쫓아온 것이고, 그 능력이란 건 무엇이며 문자메시지의 주인공은 누구란 말인가.
정욱은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우우웅! 우우웅!
때마침 핸드폰의 진동이 정욱을 상념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혼돈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도르힘의 세계에서 선택된 능력자입니다. 신들의 내기에 자랑스런 용사로 첫발을 내디디신 것을 환영하며 당신의 능력인 환영술로 수많은 혼돈들과 다른 신들의 능력자들을 무찌르며 강해지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최후의 일인이 되었을 때, 승리의 영광은 당신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서 빨리 당신의 안전한 ‘집’으로 향하세요.’
역시나 알 수 없는 소리로만 가득한 문자메시지였다.
출처를 알 길 없는 메시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기? 싸움? 승리? 신들?
모든 단어들이 생소하였지만 이 문자메시지가 초인적인 누군가로부터 보내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놀란 몸이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자신을 쫓았던 것일까.
‘두렵다.’
그러나 한편 이 알 수 없는 기분이 정욱을 매료시켰다.
환영술이라니. 뭔가 뜨거운 기운이 정욱의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헛것을 본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가 펼쳐 본 전단지의 글씨는 여전히 이리저리 움직여 대고 있었다.
공포스러웠지만, 신기한 현상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며 긴장을 풀지 않고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그 괴한이 다시 눈치를 채고 쫓아오진 않을까. 손이 저리도록 꽉 움켜진 나무막대는 이미 정욱의 손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믿기지 않았지만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다.
마음대로 글씨를 휘갈기는 전단지가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고 인간 같지 않았던 괴한의 섬뜩한 붉은 눈도 기억한다.
정욱은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라고?’
자신이 단순히 미치광이를 본 것이라면 이대로 경찰서에 가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를 쫓아왔던 것은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기괴한 괴물 같았다.
정욱은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 같은 문자메시지의 지시에 따라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

혼자 있는 방 안은 언제나 넓었다.
끝없이 넓어지는 방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는 방 안을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음에도 둥그런 지구에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며칠 전부터 느껴지던 ‘시선’들이 그를 미치게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골목길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붉은 눈의 괴물을 피했던 그날 이후로 알 수 없는 존재가 정욱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단지에 널려 있던 글자들은 그때 이후로 변함이 없지만 알 수 없는 문자메시지는 계속 전달되어 왔다.
모두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듯싶었지만 정욱은 스스로 허무맹랑한 모든 것들을 증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환영을 다룬다.
‘맞습니다. 당신은 임의적으로 부여된 ‘환영’의 능력자입니다. 비슷하거나, 중복된 능력의 개수는 3개입니다. 최선을 다해 능력을 향상시켜 주세요.’
문자메시지는 마치 정욱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날아들었다.
무섭고, 섬뜩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정욱은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의 통화도 단편적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도청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문자메시지는, 모든 것은 ‘신들의 내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세상엔 절대 전능한 7명의 신들이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며, 그들에겐 현실이 곧 의지였고, 의지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동등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능력들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격하시키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신들은 절대 능력자가 7명인 이상, 절대로 일인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묵시적인 그들의 긴장이 터질 듯 팽창되었을 때, 한 명이 흥미로운 제안을 해 왔다.
로딘이라는 신은 창조권을 가지고 내기할 것을 제안해 왔다.
물론 신들 중 창조권을 가지지 않은 신들은 없었고 모두들 자신들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로딘의 제의는 남달랐다.
내기에 이긴 단 한 명의 신에게 나머지 여섯 명의 신들의 창조권을 몰아 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단 한 명의 신 외엔 창조권 권능을 봉인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창조의 능력이 없다면 신의 입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칠치게 될 것이 뻔했지만 누구 하나 겁내는 이는 없었다.
로딘은 모두에게 내기를 설명했다.
내기를 해 봤자 신들 자신들이 직접 하는 내기라면 절대로 결판이 나지 않음을 로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들이 자신 몇의 능력을 임의적으로 자신이 만든 세계의 피조물에게 부여해 그들로 승부를 가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의견은 정말로 획기적이었다.
내기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무대는 신 도르힘이 창조한 4번째 세계였다.
그곳에 사는 ‘인간’들이 자유의지가 충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신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겐 불가능한 ‘예상치 못할’ 경우의 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물론 신들이 능력을 받은 인간들의 승부에 참여를 하지 않는 전제였다.
그렇게, 신들의 내기는 시작되었다.
신들은 각자의 능력을 복사해, 무작위로 선별한 인간들에게 나눠 주었다.
자신의 몸에서 떼어져 나온 능력을 가진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남는다면 그 능력을 전수한 신이 이기는 것이었다.
정욱은 문자메시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럼, 죽으란 이야기인가?’
‘자신의 신을 포기하면 다른 신들의 능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부여된 능력을 잃게 되며, 능력을 잃는 다 해도 혼돈은 끝까지 당신을 쫓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죽으란 이야기네.’
문자메시지가 말하는 혼돈이란, 일주일 전 자신을 추격했던 괴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신들의 내기에서 비롯된 바이러스 같은 존재들.
가공할 신들의 힘이, 세계에 작용하여 나타나게 된 계산되지 않은 존재들, 그들이 혼돈이었다.
그들은 신들의 냄새가 나는 능력자들을 쫓았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이 그것들의 본능적 행동이었다.
정욱은 자신을 둘러싼 시선들이 혼돈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항상 주위에 있었고, 말없이 정욱이 먼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그것들은 정욱의 주위에서 기다릴 것이었다.
군대도 다녀와, 이제 파란만장한 삶을 꿈꾸고 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귀신 잡는 해병에도 다녀와 그가 이런 것들에 무너질 순 없었다.
붉은 눈의 괴물이 들고 있던 살벌한 칼을 떠올리자, 정욱은 이렇게 마냥 대책이 없을 순 없었다.
정욱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상황을 납득할 순 없지만, 자신의 눈으로 붉은 눈의 괴한을 똑똑히 봤고, 자신의 능력이라는 환영술은 지금 당장도 가능했다.
신들의 내기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자신은 특별한 사건에 연루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 이상 떨고만 있을 순 없었다.
문자메시지에 의하면, 능력이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 신들이 친히 부여해 준 것이다.
그는 부엌에서 칼 하나를 뽑아내어, 혁대 춤에 찼다.
안 보이게 잘 끼워진 칼에 허리가 불편했지만, 붉은 눈을 생각한다면 절대 몸에서 떼어 놓을 순 없었다.
그리고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정욱의 집은 반지하라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창문을 통해 올려다보인다.
발걸음은 없지만 불길한 느낌과 그림자들이 어지러이 햇빛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것이 느껴질까?
‘아마, 그렇지 않겠지.’라고 정욱은 생각했다.
이전에는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이 일주일 전 그 일이 있은 후 생긴 것이었다.
정욱의 오감은 그의 위험을 낱낱이 경계하고 있었다.
신들의 내기든 뭐든, 모든 것들이 그에게 와 닿진 않았다.
불 꺼진 방 안에서 정욱은 모든 것들과 끊겨 있었다.
문자메시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문자메시지는 끊임없이 그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배터리를 뽑아 놓아도, 메시지의 전송을 막을 순 없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자와 직접 연결된 듯, 메시지는 그렇게 전송되었던 것이다.
정욱은 무섭고, 답답한 마음에 지쳐 괴상한 번호로 날아드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 보았지만, 정욱의 문자에 대한 답장은 날아들지 않았다.
메시지는 차라리 정욱의 생각과 소통하는 듯 날아들었다.
정욱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결심이 선 것이다.
그는 차근차근 골목에서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그가 환영을 어떻게 끄집어내었던 것일까.
그 기분을 되새겨 보았다.
그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마치 손가락 끝마디를 접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금세 느낌을 되살릴 수 있었다.
능력은 완벽히 정욱의 의지에 녹아들어 있었다.
‘밖에 셋 정도가 있었던가.’
정욱은 빨간 눈이 자신의 집 주위를 배회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두려움.
무엇보다 두려움이 그를 감쌌지만, 웬일인지 그들이 먼저 쳐들어오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