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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3화)
1. 선택(3)
그들은 조용히 그를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정욱은 밖에 나가는 순간, 그것들의 표적이 될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한 번은 경찰서에 전화를 걸까도 생각했지만, 곧 그만 두었다.
배터리를 뽑아 둔 핸드폰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으며, 가끔씩 무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환영이 그의 옆에서 펑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현실인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벨트에 칼을 차고 야구 방망이를 야무지게 쥐고서 뛰쳐나가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러기엔 그들의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욱이 느끼는 바, 그들은 마치 예리함과 동시에 투박한 송곳과도 같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막을 새도 없이 찔러 들어올 것 같은 압박감이 그의 감각에 걸렸다.
‘당신을 지켜 줄 능력은 신 라힌델로부터 받은 환영의 능력입니다.’
메시지의 내용처럼 정욱은 그에 맞서려면 자신의 불가사의하고 때론 재밌을 법하기도 한 능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환영술.
정욱은 책상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환영술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물체를 복사하는 것이지 않을까?’
정욱은 옆에 놓인 연필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느낌이 가는 대로 상상한다.
골목길에서의 그 느낌처럼 그의 의지대로 간절하게 연필이 둘로 나뉘는 장면을 상상한다.
연필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눈은 충혈되어 갔다.
그리고 이내, 포기.
‘갑자기 왜 안 되는 거야?’
꼭 하려면 안 된다고 정욱은 투덜댄다.
연필을 집어 던져 보았다가, 이내 다시 집어 든다.
‘다시 해 보자.’
분명, 능력은 자신의 손가락마냥 자연스럽게 운용되었던 느낌이었다.
손가락을 구부리는 데 그렇게 악을 쓰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집중해서.
그때 연필이 슬쩍 일렁거렸다.
정욱의 온몸에 찌릿한 느낌이 들며 연필 주위에 아지랑이처럼 헛것이 일렁거렸다.
‘어, 됐다. 이 느낌이었어.’
그러나 약간 집중이 흐트러지자 이내 아지랑이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머리에 돌이 꽉 찬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적인 피곤이 대단했다.
피곤이 누적되면 집중을 이어 나가기 힘들다. 하지만 정욱은 흥미를 느꼈다.
‘이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기만 하면 뭔가 해볼 만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욱은 연필을 다시 쥐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자연스럽게 연필이 그대로 옆으로 복사되는 것을 상상했다.
눈동자는 손에 쥔 연필에 머물렀다가 그가 환영체를 생성하고 싶은 곳으로 옮겨 갔다.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예의 그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정욱의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연필 본연의 모습을 닮은 환영체가 그의 의지대로 떠올라 데구르르르 책상에 굴렀다.
“어!”
정욱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머리는 좀 더 무거워졌지만, 성취감은 그것마저도 후련하게 했다.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정욱이 만들어 낸 연필의 환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환영은 정욱이 손을 대려 하자 일렁이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모습이 어설펐다.
그것은 정욱의 머릿속에 인식된 연필의 모습이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거…… 해볼 만하겠어.’
정욱은 금세 흥미를 느꼈다.
지금껏 인생을 살며, 새로운 멋진 도구를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아주 멋진 신의 선물이었다.
그는 그것을 충분히 연구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군대에 다녀와 친구들 연락도 거의 끊긴 마당에, 찾아올 사람도 없다.
‘처박혀서 연습이나 해 봐야겠군.’
그리고 정욱은 다시 연필을 쥐었다.
환영술은 시도하면 할수록 심오하고, 신비했다.
연필을 구현화해서 오래 머물도록 하는 반복 훈련이 계속되었지만, 정욱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완전히 그것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위엔 ‘그것’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그를 먼저 해하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안 이상, 무서워할 건 없었다.
몇 날 며칠이고, 이 환영술을 익숙케 하는 것이 정욱의 목표였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환영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집중력은 정욱에게 있어선, 근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수백 번의 반복 훈련을 통해, 점차 연필이 환영으로 남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그래 봤자 아직 1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정욱이 급박한 상황,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 땐 어떨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위기 상황을 맞게 되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곤 하기 때문이다.
정욱은 다시 한 번 연필을 들었다.
벌써 하루가 지나고 동이 틀 무렵이 되었다. 새로 접해 보는 능력이 정신에 팔려, 피곤한 줄도 몰랐다.
어머니의 전화가 올 때를 제외하곤, 모두 이 능력 개발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눈동자를 움직이자, 연필은 자연스럽게 일렁이더니, 본체에서 복사되어 옆으로 나온다.
무수한 반복 훈련 덕에, 연필은 좀 더 현실 같은, 아니 거의 진짜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허공에서 만들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아니, 구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정욱이 만들어 낸 환영은 질량이나 실체 같은 것이 없다.
그저 환영. 손만 대면 사라지는 그런 물방울 같은 종류였다.
‘초심자의 환영술은 실체를 가지지 못합니다.’라는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좀 더 개발하면 실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가.
정욱은 만들어 낸 연필을 노려보았다.
연필은 그의 눈짓대로 번쩍이며, 여기저기서 복사되어 갔다.
허공에서 잠깐 복사되었던 연필은, 한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다가 뚝하고 떨어지며 사라졌다.
‘아직, 시간이 너무 짧아.’
이렇게 한 번씩 연필을 소환해 내고 나면, 힘이 쫙 빠져 드러눕고 싶어진다.
그만큼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있었다.
‘으. 머리야.’
정욱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이리저리 눌러 주물렀다. 머리가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자, 그는 반복적으로 연필을 다시 주워 들었다.
다시 연필을 복제해 내려는 찰나, 벨트 안에 꽂힌 칼이 눈에 들어왔다.
‘칼?’
다른 것들을 복제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벨트에 꽂힌 칼을 빼냈다.
잘 갈린 다과용 칼이었다.
다과용 칼은 작고 날렵하게 생겨서 만약 이것으로 다른 이를 공격한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욱은 다과용 칼에 정신을 집중했다.
물결처럼 칼이 형상이 일렁거리더니 정욱의 눈동자에 따라 칼 하나가 복제된다.
역시 연필보다 칼의 복제는 좀 더 흥미로웠다.
형태만 다를 뿐, 칼이 허공에 떠 있는 압박감은 정말 듬직했다.
정욱은 집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것에서 응용되는 뭔가를 해내야 했다.
‘길이를 늘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욱은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해 정신으로써 복제된 칼을 교묘히 조작해 내기 시작했다.
복제된 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결국, 일렁이던 칼은 정욱의 의지대로 단번에 쑤욱 하고 늘어났다.
그리고 뚝 하며 줄어들어 퐁 하며 사라졌다.
성공이었다.
복제된 상태에서 환영의 변이를 성공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 생각한다면 응용할 수 있는 것은 무수했다.
정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에게 압도감을 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환영술로 복제해 크기를 늘려 보거나 줄여 보았다.
모두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2. 능력자들(1)
정욱의 창문으로 아침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순식간에 새벽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정욱은 부스스 머리를 들었다. 책상에 엎어진 채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리는 무거웠지만, 연습의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정욱은 연필을 쥐지 않은 채, 연필의 환영을 떠올려 보았다.
어렵지 않게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서 연필이 나타났다.
연필이나 칼 등과 같이 수백 번 반복 연습을 한 것은 쉽게 구현화 할 수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환영술의 관건은 물체의 특성을 얼마만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실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복제뿐 아니라 정욱의 상상 속의 것도 구체적인 형상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면, 구현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골목길에서의 벽처럼 말이다.
‘아.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었군. 그게 환영술인 거야.’
환영술은 당하는 자를 홀리는 술법이었다.
따라서 시전자가 현실성 있는 물건들을 복제하든 뭘 하든 당하는 자를 완벽히 속이려면, ‘구체화’가 중요한 것이었다.
정욱은 이제 연필과 칼을 보지 않고도 구현화가 가능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정욱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럼……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구현 가능하겠구나. 핵심은 구체화야…….’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것치고는 또렷하게 빛나는 정욱의 눈앞에서, 연필 한 자루가 왔다 갔다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환영술에 푹 빠져 버려, 집에서 수행(?)을 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정욱은 그의 감각이 예전보다 좀 더 예민해져 있음을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혼돈 녀석들을 감지해 내는 감각이 눈에 띄게 민감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집중해 보면 녀석들의 거북한 숨소리, 불결한 붉은 눈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럴수록 정욱은 자신의 능력에 빠져 들어갔다.
일주일간의 성과는 대단했다.
우선, 정욱은 점차 환영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간다는 데 재미를 붙여 갔다.
복제의 개념에서 시작한 환영술은 이제, 점차 응용력이 높아져 갔다.
자신의 기억 속에 저장된 사물들을 웬만큼 재현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연필이나, 칼, 망치 같은 것들은 눈에 보지 않고도 5분가량 환영을 떠올리게 할 수 있었다.
아직, 실체를 갖게 되진 않았지만(물론 얼마만큼, 어떻게 수련해야 실체를 갖춘 환영을 소환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주위에 떠돌아다니는 것들은 정욱이 보았을 때도 섬뜩했다.
그리고 또 하나, 정욱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머릿속에서 끝없이 구체화를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약 5분 정도, 정욱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을 옆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분신이 정체가 시전자 자신이다 보니, 환영술을 쓰는 데도 거부감이 없었고, 보다 자연스러운 시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직은 환영의 미세한 움직임을 조종하거나 하는 수준의 응용 단계는 수련이 덜 되어 있었다.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될 것도 같건만, 환영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것은 심하게 뭉개지며 사라져 버리곤 했다.
여하튼, 현재로선 정욱의 환영술은 ‘눈속임’ 그 이상, 그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막상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맨 처음 전단지에 적혀진 규칙 같은 조항들로 추론해 본 결과, 혼돈과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할 다른 신들의 능력자는 얼마만큼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 다양한 능력들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도 가늠치 못했다.
신의 속성 중 아무것들이나 배분받았다면 그중에 정말 말도 안 될 능력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욱 자신은 일주일도 안 돼서 능력을 이만큼이나 발전시켰는데, 자신보다 훨씬 더 전에 능력을 받게 된 자들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눈앞의 혼돈들도 경계했지만 정욱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능력자들의 대한 정보도 얻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정보를 주는 문자메시지로부터 말이다.
또 최근에 얻은 수확이라면, 문자메시지와의 소통이 가능할 것도 같다는 가능성이다.
처음에 직감한 대로, 메시지는 정욱 자신이 의문을 품는 것에 대한 답변과 근접하게 정보를 알렸다.
때론 반응이 없거나, 전혀 다른 내용을 보내 주기도 했지만, 이미 이런 방법으로 메시지에게 얻은 정보가 상당하다.
우선,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혼돈들은 아주 약한 레벨의 존재들로서, 멀리부터 능력자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지만 막상 시야 앞에 능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전혀 감지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이 능력자로 선정되자마자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혼돈들은 뭉치는 습성이 있어서, 신의 냄새를 풍기는 능력자가 나타나면 서로의 미스터리한 신호 체계를 통해 그곳을 주변에 있는 혼돈들에게 전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혼돈을 만났을 땐 최대한 빨리 처치하거나, 그 장소를 얼른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