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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4화)
2. 능력자들(2)


오늘 아침에 일어난 정욱은, 평소 때보다 마음가짐이 남달랐다.
언제까지고 집에서만 갇혀 있을 순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 답답한 건 물론이거니와, 더욱 중요한 건 어머니께서 올라오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오실 때 혼돈 녀석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정욱은 담담하게 야구 배트를 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야구하러 나가는 듯한 복장으로 보일 수 있게 약간의 위장도 해 주었다.
저급 레벨의 혼돈들은 시각 정보에만 의존한다고 하니, 환영술의 도움도 기대해 볼 만하였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럴수록 정욱은 야구 배트를 굳게 다잡았다. 그 망할 붉은 눈을 보게 되면 가차 없이 머리통을 부숴 주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웬일인지, 점차 혼돈을 생각하면, 두려움보단, 분노가 앞섰다.
그들을 생각하면 불결하고 기분 나쁜 존재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도 모두 이 능력에서 비롯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저급한 혼돈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나가기 직전의 문자메시지의 응원(?)은 꽤나 힘이 되었다.
‘약한 놈들이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욱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푹 쉬고 난 후에 오는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모든 감각과 몸에선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신들의 내기에 참여하게 된 이후로 정욱은 점차 인간을 뛰어넘은 초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능력의 숙련도와 비례하여서, 어느 정도의 육체적, 정신력 능력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정욱의 발전은 미미한 편이었지만 왕성한 그 또래의 웬만한 남성보단 훨씬 기밀하고 강한 능력치를 갖고 있게 되었다.
끼이익―
녹슨 문이 밀리고, 마찰음을 내었다.
자신이 집에서 나오고 있는 중임에도, 그 소리가 밖의 누군가의 신경을 건드리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욱은 야구 방망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그것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녀석들은 3명이었지만, 뭉쳐 있지는 않았다.
한 명은 홀로, 두 명은 비교적 근접한 거리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욱은 그것들의 짐승 같은 붉은 눈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녀석들에겐, 이성적인 지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본능으로 냄새를 맡고 쫓는 개들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뿐인 듯했다.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그리고 어디에서 온지도 모를 기괴한 무기를 가진 그들에 대한 압박감이 정욱을 감쌌다.
‘후…… 제기랄…….’
잠깐 집에 들어가서 담배나 한 대 더 피고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단호한 결심에 따라 성큼성큼 방향을 틀었다.
물론 홀로 배회하고 있는 녀석 쪽이었다.
정욱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진다 싶으면 속도를 줄일 셈이었다. 그는 조금씩 뛰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혼돈에 정신을 집중했다.
뚜렷하게 혼돈의 움직임이 잡힐 만큼, 그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그것은 지금 그의 붉은 눈을 번뜩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혼돈은 사람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하지만 정욱의 눈엔 보이고, 물리적 형체까지 갖춘. 그런 종류의 존재였다.
그것은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그 안에 기괴한 무기를 쥐고 있었다.
망토 안에는 인간의 몸이 담겨져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뒤틀린 듯한 느낌.
그것들을 떠올릴 때면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정욱의 발걸음이 슬슬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의 존재감이 강해진 것이다.
문득, 정욱은 그것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방향을 틀어, 정욱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의 냄새를 쫓는다고 했었지.’
정욱은 근처에 보이는 골목으로 몸을 틀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사람들이 괜히 휘말려, 다쳐선 안 된다.
사람들이 혼돈을 못 봐도, 혼돈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자신과 싸우게 되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자메시지의 내용을 들어 보았을 때 혼돈은 정욱이 소환해 내는 환영들처럼 평소엔 실체를 가지지 못하다가 능력자들의 근처에 접근하면 점차 실체를 가지게 되어 물리적, 정신적 공격이 가능케 된다고 하였다.
그의 냄새를 맡은 혼돈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정욱이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냥 돌아갈까.’
안 될 말이었다.
지금 거리로 짐작해 보건대, 이미 돌아가도 늦다.
죽어라 달린다 해도, 결국엔 따라잡혀 환영술로 몸을 가리는 수준의 방어벽밖에 펼치지 못할 것이다.
그것조차 녀석이 눈치챈다면 그냥 죽는 목숨이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거 방법은 하나.
녀석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다.
문자메시지의 정보를 살펴 보건대 이 녀석 정도 등급의 혼돈은 조금 운동 신경이 좋은 보통 인간 정도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잘만 하면, 때려눕힐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정욱은 어설프긴 해도, 녀석을 혼란시킬 수 있는 환영술을 연마해 두었지 않았던가.
녀석이 다가올수록, 공포심이 이는 한편, 밑도 끝도 없는 분노와, 용기가 알 수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야구 방망이를 쥔 정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녀석과의 거리가 두 블록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정욱은 혼돈의 기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주변의 벽을 살폈다.
‘일단 숨어서, 뒤를 노리는 거다.’
이런 저급한 혼돈은, 아무리 신의 냄새를 쫓는다 해도, 일단 시각적인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굉장히 혼란스러워한다고 한다.
전의 경험을 보건대 비슷한 모양의 벽을 하나 만들어서 그 뒤에 숨어 있으면 녀석은 보지 못하고 기습 공격을 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이었다.
정욱은 벽을 빠르게 살핀 후 코너를 돌아 그쪽에 똑같은 벽을 이어 붙였다.
녀석이 이리로 지나가게 되면 정욱은 그의 옆을 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벽은 시각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게 소환되었다.
맨 처음, 골목에서 능력을 받은 후 소환했던 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벽의 환영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욱의 정신력으론 최소 5분 정도는 유지시킬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 녀석은 지금 코너를 돌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정욱은 혼돈의 기분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격렬히 펌프질을 했다. 야구 배트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덜덜 떨렸다.
녀석의 발걸음 소리는 무겁고도 스산했다. 마치 낙엽을 끌고 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체 모를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기 시작했다.
도저히 사람에게 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녀석 특유의 냄새였다.
점점 혼돈의 발걸음 소리가 커지고, 이제 정욱의 시야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옆모습이 보였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분명 냄새를 맡아 쫓아왔을 것인데, 그 냄새의 주인공이 없다.
녀석은 계속해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그러자 정욱의 시야로 그의 옆모습이 완벽하게 들어왔다.
이제 보니 아예 얼굴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붉은 눈이라 여겼던 것은 눈 주위에 뚫린 커다란 구멍 3개였다.
그 안에서 붉은 에너지원 같은 것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햇빛마저 걷어 낼 또렷한 붉은 빛이었다.
사신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렇게나 둘러친 넝마 는 녀석의 몸을 대부분 가리고 있었다.
간혹 드러난 부위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 같은 살점이 너덜하게 붙어 있었다.
그 살점마저,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녀석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정욱은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능력에 조금 익숙해진 후에 생긴 현상이었다.
혼돈의 기운을 느끼면, 인간적인 공포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분노는 곧 용기로 화해, 정욱은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지금이야!!’
정욱은 과감하게, 야구 배트를 들어 녀석의 옆통수를 내리쳤다.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벽을 뚫고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정욱은 타격감으로 미루어 볼 때, 녀석의 방어력이 형편없음을 깨달았다.
묵직하게 들어간 타격이 정욱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정욱은 멈추지 않고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으…… 으아아아!! 죽어!!”
대한 건아의 방망이 무두질이었다.
2년 2개월간의 삽질로 다져진 괴력의 무두질. 또한 망치질, 도끼질로 단련된 강력한 내려찍기가 혼돈의 몸을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조…… 좋았어. 조금만 더!”
정신없이 내려찍느라 빗나간 타격이 꽤 있었지만, 못해도 7방은 제대로 들어간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제대로 서는 것은 불가능할 법한 데미지를 녀석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때, 정욱의 야구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헉.”
배트를 놓친 것이었다.
야구 배트는 너무도 허무하게, 정욱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따강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착지.
그 소리는 거의 넘어질 듯 처맞고 있던 혼돈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그르르륵…….”
인간이 아닌 소리가 정욱의 귓가에 들렸다.
야구 배트를 놓치다니.
정욱은 팔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혼돈과 정욱의 공격 거리는 비슷해졌다.
혼돈은 몸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관건은 이제 녀석이 얼마만큼 데미지를 입었느냐이다.
정욱의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신을 차린 혼돈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예사 몸놀림이 아니었다.
관절로 연결된 것이 아닌 듯한 유연한 몸짓이었다. 그리고 손에는 예전에 보았던 그 섬뜩하게 생긴 칼이 쥐어져 있었다.
공기조차 베어 버릴 듯 아주 가늘었고 거친 쇳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절대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무기였다.
‘저런 것에 한번 찔리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정욱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녀석은 정욱의 움직임을 재 보는 듯 잠시 멈춰 있었다.
정욱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능력을 받은 이후로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벼운 느낌이 들었지만 녀석의 움직임과 비교하면 조금 아쉬운 기분이었다.
야구 배트는 혼돈의 뒤에 바로 떨어져 있었다.
저것을 줍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정욱은 미련 없이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 들었다.
잘 갈린 다도용 칼이었다.
정욱은 칼을 제대로 고쳐 쥐었다.
이것마저도 놓치면 안 된다.
정욱이 살펴보았을 때 녀석은 분명히 데미지를 안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이었지만 그것은 녀석이 가진 특별한 신체 조건 때문인 듯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움직임은 어딘가 어색했다.
넝마 사이로 삐져나온 녀석의 무기만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끝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람처럼, 목을 치면 될려나. 아니면 저 커다란 붉은 눈?’
정욱은 가만히 상대의 약점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듯 침착하고, 전투에 충실한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놀라운 집중력이 발휘되고 있었고 평소보다 몸이 훨씬 가볍다.
무언가를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될 기분조차 들었다.
무엇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고 있었다.
그때 녀석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