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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5화)
2. 능력자들(3)
느릿한 듯 유연한 움직임으로 정욱을 향해 스르륵 다가왔던 것이다.
정욱은 깜짝 놀라 일단 뒤로 피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느린 접근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어 다시 돌격해 들어가진 못하였다.
일단 녀석이 든 칼이 눈에 아른거리는 이상 섣불리 들어갔다간 끝난다.
녀석의 칼 쓰는 솜씨가 어떤지 모르는 판국에 뛰어 들어가서 찔린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정욱은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정욱의 뒤로 칼 두 개가 조용히 떠올랐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칼끝은 혼돈을 향해 있었다.
환영을 소환해 낸 것이었다.
두 개를 한꺼번에 소환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상태라면 될 것 같아서 시도해 보았는데 역시나였다.
환영의 움직임도 생각보다 더 정교하게 조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한 개를 던져 본 후에…….’
정욱이 마음을 먹자마자 왼쪽에 둥실 떠 있던 칼이 혼돈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가오던 혼돈은 당황한 듯한 기세로 재빨리 자신의 무기를 휘둘러 칼을 쳐 내었다.
그러자 칼은 녀석의 무기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빠르고 정확한 솜씨였다.
“그르르르.”
비웃는 것 같은 녀석의 숨소리가 들렸다.
정욱의 머릿속에 어느 정도 계획이 잡혀 가 있었다.
꽤나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정욱의 눈에 확실히 감지되는 정도의 속도였다.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해볼 만하겠다. 가 보자!’
정욱의 오른쪽 편에 떠 있던 칼이 빠른 속도로 녀석에게 날아들었고 녀석은 그것도 정확한 솜씨로 쳐 내었다.
그 순간을 정욱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도용 칼을 손에 꽉 쥔 채 혼돈의 눈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날아오는 칼을 쳐 낸 후에 들렸던 칼이 급히 내려와 정욱의 공격을 막았다.
녀석은 왼쪽으로 몸을 틀어 거리를 조절했다.
그런데 왼쪽으로 틀던 혼돈의 몸놀림이 약간 불안정했다.
삐긋거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정욱은 재빨리 뒤로 돌아 등 뒤의 넝마를 베어 갔다.
혼돈 또한 급히 몸을 틀었지만, 왠지 왼쪽의 몸놀림이 부자연스러웠다.
‘오호라, 이 녀석.’
아까 야구 배트의 데미지가 역시 대단했던 것이었다.
녀석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 때마다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정욱은 빠르게 치고 빠졌다.
때로 혼돈의 칼이 정욱의 목을 겨냥하고 날아들었지만 반사적으로 피해 내었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그의 생존을 위해, 전투를 위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정욱은 때때로 다양한 방향으로 칼을 날려 녀석의 시선을 빼앗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조금씩 넝마를 찔러 대자 녀석의 썩은 살점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움직임의 반경이 적은 것도 아까 야구 배트 공격의 데미지 때문인 것 같았다.
우선 정욱의 스피드가 혼돈보다 위였다.
이렇게 민첩하고 정확하게 몸이 따라 움직여 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슬슬 정욱의 체력도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녀석…… 눈을 찔러 줘야 하려나?’
이렇게 소심한 공격으로는 녀석에게 데미지를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야구 배트같이 강하고 긴 둔기류가 아니라면 한 방에 찔러 없앨 필살의 공격이 필요했다.
정욱은 녀석의 붉은 눈같이 생긴 부위를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보니 휑하게 뚫린 3개의 구멍 중 가운데 부분에 심장이 펌프질하는 것처럼 붉은색의 구체가 붉은 빛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저게 급소 같잖아.’
정욱은 짧은 시간에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생각한 즉시 짧은 도약과 함께 몸을 날려 혼돈의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때 정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뒤로 슬쩍 물러섰던 혼돈이 끔찍한 무기로 기다렸다는 듯 달려 들어오던 그의 배를 후벼 판 것이었다.
눈 깜빡할 찰나의 빠른 공격이었다.
엉거주춤하게 굳은 정욱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윽.”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내며, 정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혼돈은 승리를 직감한 듯 길게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찔러 들어가는 혼돈의 몸이 가볍다.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심한 사이 혼돈의 뒤통수를 뚫고 다과용 칼끝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혼돈의 무지막지한 무기에 찔린 듯했던 정욱의 몸이 펑 하고 사라졌다.
“잡았다!!!”
그동안 조용히 싸웠던 정욱이 승리를 확신한 듯 고함 쳤다.
정욱은 빠른 순간에 자신의 환영과 자신을 바꿔치기해서 뒤로 돌아갔던 것이다.
완벽한 타이밍과 완벽한 몸놀림으로 인해 가능했던 응용 공격이었다.
정욱은 자신의 환영으로 하여금 성공적인 연기를 펼친 것에 크게 만족하였다.
찔러 넣은 칼은 완벽하게 붉은 구체를 관통했다. 그러자 붉은 빛이 반짝 빛나더니 점등 되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장 녀석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
정욱은 다시 골목을 헤매고 있다.
아까 느꼈던 나머지 둘의 혼돈이 존재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혼돈의 공격력을 대충 예상해 보았을 때 정면으로 둘 이상의 혼돈과 상대한다면 지금으로선 승산이 없다.
왠지 모르게 피어나오는 분노는 정욱의 몸을 이끌었지만 사실 혼돈과 싸우러 가는 것은 아니다.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두 명의 혼돈과 대치중이었다.
혼돈과는 분명 다른 느낌의 기운.
혼돈이 검정색의 느낌이라면 이는 붉은색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 검은색과 붉은색의 기운이 지금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정욱은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예상이 맞다면 붉은색의 기운은 자신과도 같은 능력자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능력자라면 무조건 피하라고 했었는데…….’
문자메시지에 의하면 현재로선 최대한 능력자를 경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둘 이상의 혼돈과 망설임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능력자라면 자신보다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자신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능력자를 경계하라는 이유는 두 가지다.
다른 신들의 능력자를 죽여 없애는 것이 이 신들의 내기의 근본적인 규칙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의 능력을 갈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자들의 싸움에서 상대 능력자가 죽는다면 그를 죽인 사람은 일정 확률로 그자의 능력을 빼앗아 올 수 있다.
비록 적은 확률이지만 만약 상대를 죽여 능력을 한 가지 더 얻게 된다면 그 힘은 대단해지는 것이다.
정욱으로서는 자신의 능력인 환영술이 그리 대단한 능력이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이조차 탐내는 이들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능력들이 탐난다고 해서 무작정 능력자들이 서로의 능력을 노리고 덤벼드는 것은 아니다.
신들의 내기판은 생각보다 치밀해서 무작정 싸움을 벌이면 후에 개죽음을 당할 수 있다.
설명하자면 서로 다른 신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 싸우는 것이 신들의 내기 규칙이다.
그 규칙이 적용되자마자 능력자들은 서로 싸우기에 적합하게끔 신체가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자들이 아무 계산도 없이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면 같은 신을 섬기는 자들의 귀에 위치 정보가 흘러 들어가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위치 정보는 어떻게 퍼지게 되는가 하면, 신들이 내기에서 존재하는 것은 혼돈과 능력자 두 부류만이 아니다.
신은 자신들의 능력을 나눠 줄 때 특별한 하나의 능력을 특별한 자에게 심어 두었다.
그것은 바로 ‘예언자’라는 부류이다.
같은 신에게 능력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일종의 ‘팀’이라고 부른다면 그 예언자는 그 팀의 보스,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정신의 일부분을 신에게 지배당한다.
그렇다고 능력이 강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역할은 같은 편의 능력자들이 상대편의 능력자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냥할 수 있도록 범세계적인 정보를 캐내고 전략을 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예언자들은 자신의 팀원들의 정보를 다스 릴 수 있다.
언제 어떤 자들이 추가되고 어떤 자들이 살해당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말 그대로 ‘오버시어’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메시지가 알려 준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정욱은 자신이 지금 접근해도 그 능력자가 곧바로 덤벼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능력을 100%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이지 못한다면 예언자에게 위치를 들켜 팀 전체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
그리고 재수 없을 경우 강한 능력자에게 즉각 척살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욱이 느끼는 바로 상대는 그렇게 대단한 기운을 뿜고 있진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 기분이 상대의 강함을 판단하는 척도가 맞다면 그는 자신처럼 갓 능력을 받은 초심자라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는 정욱의 손엔 야구 배트가 단단히 쥐어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엔 붉은 구슬이 하나 쥐어 있었다.
혼돈을 죽이고 나서 얻은 구슬이다.
혼돈은 머리가 꿰뚫리자마자 한 줌의 재로 화했는데, 사라지면서 이런 구슬을 남겼다.
‘혼돈의 구슬입니다. 붉은색에서 부터 황금색까지 존재합니다. 삼켜도 좋고, 던져도 좋습니다. 던진다면 무작위적으로 공격성 능력이 발동하게 될 것입니다. 삼킨다면 능력의 개발이 좀 더 용이해질 것입니다.’
문자메시지는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지만 정욱은 손에 구슬을 쥐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능력을 향상시켜 준다는 구슬이라지만 자신의 몸에 삼키는 것은 아무래도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능력을 용이하게 만들지 먼저 알아보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그는 구슬을 고스란히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욱은 그렇게 점점 그들과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 혼돈의 기운이 하나 사라졌다.
‘하나의 기운이 사라졌어? 벌써 해치운 건가?’
정욱은 속으로 내심 놀랐다.
그들이 서로 대치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정욱 자신도 혼돈을 제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그는 변칙적인 기습의 효과가 컸었다.
그리고 그가 상대한 혼돈은 하나.
그것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는 차이가 컸다.
‘야구 배트 같은 걸 들고 있으려나?’
정욱은 자신의 야구 배트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정욱에게 있어선 굉장한 무기였다.
길이도 적당하고 데미지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사람이 아닌 혼돈을 맘껏 내리칠 수 있으니 그것은 엄청난 흉기였다.
이윽고 정욱은 그들과의 조우를 몇 발자국 안 남겨 두고 있었다.
한 마리와 혼돈의 기운은 계속해서 살아 있었는데 왠지 첫 번째로 사라졌던 혼돈보다 더 오래 버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운이 좀 더 짙은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짙어지는 혼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골목 저편 인적이 없는 놀이터 부근에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여자네.’
정욱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여자치곤 훤칠한 키에 늘씬한 스키니진이 다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긴 생머리에 가죽 장갑을 낀 그녀는 금방이라도 오토바이를 끌고 달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정욱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태만 봐서는 잘 빠진 각선미가 부각되어 남성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대치한 혼돈의 모습은 자신이 상대했던 녀석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정갈하게 짙은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덩치가 조금 더 커 보였다.
‘위험한 녀석이려나?’
정욱은 홀로 혼돈에게 맞서고 있는 그녀를 보고 얼른 거들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돈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위태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