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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6화)
2. 능력자들(4)
정욱은 지금 혼돈 한 마리를 처치하고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그것을 잡아 죽이자 뭔가 짜릿한 쾌감이 정욱의 몸을 감싸고 들었다.
결코 나쁘지 않은 쾌감이었다.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은 그 느낌에 정욱은 자신도 모르게 혼돈에게로 달려들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능력자를 경계하라는 메시지의 말이 그의 행동을 자제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켜보건대 그녀의 능력이 꽤나 심상치 않았다.
‘염력술사?’
정욱의 추측이었다.
염력술사.
말 그대로 그녀는 혼돈을 꼼짝 못하게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멀리 떨어져서 오른 손바닥을 쭉 뻗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고 있는 형태로 혼돈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조금씩 떨리며 힘들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앞에 대치한 혼돈은 꼼짝 못하고 있었다.
괴로운 듯 바둥거리는 혼돈은 몸이 쪼그라들었다가 다시 커졌다가 하는 기이한 형태로 일렁이고 있었다.
‘저런 능력이…….’
정욱이 보기에 저것은 대단한 능력이었다.
혼돈이 저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 여성의 능력 때문이라면 자신의 능력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떠한가.
자신은 잠복을 하고 이것처럼 조잡한 환영술로 눈을 속이고 수십의 마구잡이 격투 끝에 겨우 제압을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비록 조금 힘겨워 보이지만 순수한 능력으로 혼돈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 누구야?”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욱의 귓가에 들려왔다.
혼돈과 대치하는 여성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정욱을 등지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를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거기 네 녀석!”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정욱의 귀에 들려왔다.
분명 자신을 겨냥한 목소리였다.
정욱은 흠칫 놀랐다. 역시 그녀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구슬을 가지고 있나?”
‘구슬?’
그녀가 별안간 구슬을 찾고 있다.
구슬이라 하면 정욱 자신이 왼손에 쥐고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정욱은 왼손을 펴 구슬을 확인해 보았다.
붉은색 구슬.
처음에 혼돈을 죽이고 획득했던 구슬 그대로였다.
정욱은 붉은 구슬을 꺼내 들어 보였다.
“빨간…… 구슬…… 이거 말입니까?”
정욱은 밀려오는 어색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등을 지고 있는 상대에게 ‘이거 말입니까?’ 하고 묻다니.
그럼에도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예의 앙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 구슬! 저놈한테, 욱. 던져!”
이제 보니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뻗은 그녀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적이 된 혼돈도 그리 완벽하게 제압당한 듯 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능력이 혼돈을 속박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리 완벽하게 제압된 형태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혼돈은 일렁이는 자신의 몸을 조금씩 추스르며 그녀 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걸요? 도와드릴까요?”
“닥치고 던져!”
‘거참…….’
그녀의 목소리가 정욱을 몰아세웠지만 슬며시 붉은 구슬을 움켜쥐었다.
‘그냥 던지면 되는 건가?’
정욱은 능력자를 앞에 두고 이런 부주의한 행동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러기 이전에 그녀는 사람이었고 붉은 눈의 괴물은 공공의 적이었다.
그녀는 꽤나 힘든 상황인 듯싶었다.
혼돈은 그녀의 속박을 풀어내고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자신이 상대했던 녀석보다 강해 보이는 저 혼돈의 능력을 측정해 보았을 때 그녀를 해치운 후에 바로 자신을 뒤쫓을 역량이 있는 녀석으로 보였다.
정욱의 감각이 느끼는 바, 자신이 싸우게 될 경우 속박이 풀린 혼돈을 상대하는 것보다 지친 그녀를 상대하는 편이 낫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정욱의 능력자에 대한 본능은 여타 능력자들과 달랐다.
서로 공격적인 본능을 품고 있는 능력자들이었지만 정욱은 이상하게도 그런 본능이 거세된 상태였다.
‘그래. 아무래도, 이쪽이 유리하겠어.’
정욱은 그렇게 마음을 갈무리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한 쪽 손엔 야구 배트를 꽉 쥐고 다른 손엔 붉은 구슬을 든 채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정욱은 투구 자세를 취했다.
“어서…… 우윽…… 던져!”
“흐음.”
정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야구 배트를 내려놓은 뒤 정식으로 포즈를 취했다.
구슬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의도대로 붉은 구슬을 적에게 정확히 맞춰 적을 제압해 내지 못한다면 꽤 위험한 상황에 치닫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정욱은 구슬을 쥔 오른손을 머리 뒤로 길게 빼고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강한 스윙과 함께 그것을 던졌다.
“핫!”
정욱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붉은 구슬이 염력에 의해 묶여 있던 혼돈을 향해 날아갔다.
아니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이런.’
힘차게 날아가던 구슬은, 과도한 회전 탓인지 각이 심하게 뒤틀려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혼돈에게 닿지 못하고 땅바닥에 내리꽂히고 말았다.
“……제길.”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며 이가 갈리는 듯했다.
정욱은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민망함이 치밀어 올랐다.
“……미안해요.”
정욱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혼돈에게 맞지 않고 땅바닥에 꽂힌 붉은 구슬은 모래에 깊이 박힌 듯 보이지 않았다.
“우……윽.”
갑자기 그녀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미세하게 들려오는 신음 소리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오른손이 이제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에 반응하듯 혼돈은 점차 안정적으로 모습을 갖추고 한 발자국씩 크게 그녀와 정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정욱은 아무리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을 지라도 여자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땅바닥에 놓아 둔 자신의 야구 배트를 움켜쥐었다.
정욱의 등 뒤에 다과용 칼 두 자루가 둥둥 떴다.
혼돈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릴 요량이었다.
마침내 혼돈을 붙잡고 있던 그녀의 능력이 완전히 풀렸다.
그와 동시에 혼돈은 붉은 눈을 반짝이며 그들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피하세요!”
정욱은 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정욱의 칼이 혼돈에게로 날아들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녀석은 가볍게 쳐 냈다.
그러자 아무런 무게 없이 눈속임에 불과했던 다과용 칼은 스르륵 사라졌다.
일단은 혼돈의 시선을 끌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혼돈이 정욱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쓰러졌던 그녀도 정욱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칼을 날렸어?”
땅바닥에 쓰러져 정욱이 날린 칼을 보았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비록 막혔지만 칼이 정욱의 의지대로 혼돈에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치 정욱의 지배하에 있는 듯 또 하나의 칼이 그의 뒤에 둥실 떠 있다.
‘저 녀석도 염력을 다루는 자인가?’
정욱의 예상대로 그녀는 염력을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정욱이 염력을 다룰 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놀랄 것은 없었다.
같은 능력을 가진 자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으니까.
놀라운 것은 만약 칼을 날린 정욱의 능력이 염력술이라면 그것은 그녀 자신보다 훨씬 앞선 단계까지 능력을 개발했다는 말이 된다.
그녀는 기본적인 염력을 이용해 사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압박시키는 수준밖에 전개하지 못한다.
그런데 정욱은 자유자재로 두 개의 사물을 동시에 조종하는 단계였고 또 능력자 스스로는 야구 배트를 들고선 다른 공격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 골목 멀리서 덜떨어진 초급 능력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염력술의 고수였다니.
그녀는 예상치 못했다.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욱이 이렇듯 염력술의 고수라면 지친 그녀의 목숨을 취하고 능력을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주의를 자책했다.
한편 정욱은 쓰러진 그녀가 자신을 놀란 듯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왠지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이제 보니 그녀는 미인이었다.
쓰러진 그녀의 검고 긴 생머리 사이로 아름다운 눈망울이 정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지금껏 본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달콤했던 찰나의 순간은 빠르게 다가오는 혼돈에 의해 무참히 깨졌다.
정욱은 급하게 나머지 칼을 혼돈의 옆면으로 날렸다.
그리고 혼돈이 옆면으로 날아오는 칼을 쳐 내려 몸을 살짝 틀었을 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혼돈의 발밑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캬아약―!
혼돈은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우욱!”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욱은 재빨리 팔을 올려 날아오는 파편들을 막았다.
그녀 또한 몸을 틀어 얼굴을 보호했다.
희뿌연 모래가 그들 주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혼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욱은 의아해하며 혼돈이 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혼돈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그냥 폭발과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한편, 그녀는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염력을 이용한 폭파술이라니!’
그녀가 보기에 정욱의 칼이 혼돈과 충돌하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고 혼돈을 소멸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정욱은 두 개 이상의 능력을 가진 능력자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폭파술과 염력술을 동시에 가진 능력자가 있었다니!’
상대의 능력을 빼앗는 것은 이 내기의 보편적 룰이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사리는 것이 우선이기에 능력자들은 다수가 한 명을 척살하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서로 능력을 걸고 싸우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다수가 공격해 한 명 척살에 성공하게 되면 능력은 얻을 수 없다.
게다가 자신이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능력과 잘 어울리는 능력을 빼앗을 확률은 극히 드물다.
두 개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블랜더’라고 부르는데 현재 블랜더들 중에 쓸 만한 능력들의 조합을 가진 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나머지 블랜더들은, 예를 들자면 땅을 빨리 파는 능력과 볼펜의 잉크를 무제한으로 하는 능력의 조합이라거나 독한 방귀를 뿜는 능력과 투시를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의 조합 등. 별로 관련성이 없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적은 확률의 완벽한 능력 두 개를 가진 ‘블랜더’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다니!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욱 자신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혼돈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혼돈이 사라진 그 위엔, 붉은 구슬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혼돈이 확실히 죽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된 거지……?”
사실은 이러했다.
아까 전에 정욱이 던진 붉은 구슬이 원인이었다.
붉은 구슬은 삼키지 않고 적을 향해 던지면 무작위적인 공격성 능력을 발동시킨다.
그런데 정욱이 잘못 던져서 불발탄인 줄 알았던 그것이 폭파술의 한 갈래인 ‘지뢰’의 공격을 띈 채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던 혼돈이 칼을 내치려 몸을 움직이자 그 지뢰를 밟게 되었고 산화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욱은 멍한 표정으로 혼돈이 사라진 자리를, 그리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정욱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