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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7화)
3. 신들의 내기(1)


정욱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벤치에 기대어 앉혔다.
힘이 풀어진 그녀의 몸은 무거웠다.
이렇게 무겁다는 것은 근육이 다 풀려 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걷기조차 힘든 몸일 터.
“저기, 정말 병원엔 안 가 봐도 괜찮을까요?”
정욱은 조심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냉소적인 첫인상이 조금씩 지워졌다.
그녀는 키가 178 정도 되는 정욱에 비해 5센치 정도밖에 작지 않은, 여자로선 큰 키였지만 이렇게 벤치에 기대어 잔뜩 웅크리고 있으니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그녀가 입은 가죽재킷도 특유의 터프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가까이서 보아도 역시나 대단한 미인이었다.
나이는 정욱보다 많아 보였지만 오뚝한 코에 커다란 눈, 약간 구릿빛의 피부에 동양적인 두툼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정욱의 걱정스런 권유에 그녀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병원 따위 안 가도 된다는 거. 쿨럭, 알잖아?”
그녀는 과한 능력의 사용으로 잠시 기력이 쇠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정욱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뭔가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입장에선 정욱은 특별한 존재인 ‘블랜더’였으니까.
정욱이 능력자로서 미미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는지라 자신의 믿음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보다 경력이 많은 능력자였다면 정욱의 본래 능력을 파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욱이 처음에 느꼈던 존재감처럼 능력을 얻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능력자였다.
그녀는 자신 나름대로의 정보를 종합해서 이런 오해를 품게 된 것이었다.
정욱은 한사코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그녀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음…… 여자란 존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
이런 미인을 앞에 두고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인은 지금 다쳐 있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정욱은 생각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욱의 부축을 받으려 하기는커녕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정욱이 처음으로 만난 능력자였다.
정욱이 말했다.
“아까 전에, 녀석을 잡고 있던 그 능력,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맞지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정욱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여유 있게 자신의 정체를 파악해 낸 후 살해하려 하는 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내기의 자체가 신들의 내기판. 인간들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라면 그럴 뿐이다.
그녀는 정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제 날 죽일 거니?”
“에…… 예?”
정욱은 화들짝 놀랐다. 죽인다니. 누가 누굴?
‘아, 나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겠구나.’
정욱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호의가 그녀에게 부담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녀는 부상 중이고 확인은 못했지만 같은 계열의 능력자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뭔가 이질적이고 아까 느꼈듯이 붉은 기운.
적대적 아우라가 그녀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긴장감을 정욱은 떠올려보았다.
‘그래, 틀림없이 날 경계할 수밖에 없을 거야. 부상까지 당했으니 날 의심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정욱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떼었다.
“아니, 저기 저는.”
“넌 라힌델의 능력자, 난 바르사르를 섬기는 능력자. 넌 날 죽이려 접근한 거겠지…… 네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기운을 감추고 날 속였는진 모르겠지만…… 쿨럭.”
그녀의 눈빛이 경멸적으로 바뀌었다.
정욱은 당황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를 죽인다니!
물론, 신들의 내기판의 규칙이라 해도 정욱은 일주일 전 능력을 받아 이제 막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다룰 줄 아는 정도의 능력자였다.
게다가 자신은 혼돈이 자신의 주변에 해를 끼치게 하는 것이 싫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현재로선 신들의 내기는 그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정욱이 경계하는 것은 혼돈들뿐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지금 정욱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다.
이 내기판이 얼마나 잔혹할진 몰라도, 후에 정욱이 어떻게 변할진 몰라도 지금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미인이지 않은가.
지금은 그녀를 달랠 필요가 있었다.
“아니, 저기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전 당신을 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게. 불안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침착하게 정욱은 그녀의 눈을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바로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던 정욱이 이런 표정으로 말해 오다니.
정욱은 말을 계속 이었다.
“저기 그 위험에 빠지신 것 같아서. 아까 그놈들이 꽤 위험한 놈들이잖아요? 다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지나칠 순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람을 죽인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녀는 정욱의 말에 의아해했다.
‘뭐야 이 녀석. 뻔히 능력을 두 개 가지고 있는 주제에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안 된다고? 거짓말쟁이인가?’
그녀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 뒤에 있던 나무 잎사귀들이 푸드득 하며 떨어졌다.
그리고 엄청난 존재감이 땅에서 솟은 듯 엄습해 왔다.
바로 그들의 뒤에서 뭔가가 나타난 것이다.
“여어―.”
여린 남성의 목소리였다.
정욱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마주하기 전 헤맬 때 느꼈던 존재감과는 확연히 다른 크기의 느낌이었다.
엄청난 존재감.
갑자기 나타난 남성은 185는 되어 보이는 큰 키에 깔끔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남방을 걷어붙인 그의 팔뚝은 잔근육이 뚜렷하게 박혀 있어서 단단한 인상을 풍겼다.
미남형이지만 뭔가 눈매가 살짝 올라가 있어 호감형의 외모는 아니었다.
그런 그 사내의 주위로 거대한 기운이 풍겨져 나와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그의 존재감이었다.
정욱과 그녀가 갑자기 등장한 사내에게 눈을 돌리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입을 떼었다.
“이제야 찾았군.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야?”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한 물음을 던지고 사내는 정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욱의 뒤에 몸을 슬쩍 움츠리고 있는 그녀에게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지. 저 엄청난 존재감. 기운으로 봐선 날 부축해 줬던 남자와 같은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 위험해.’
그녀는 정욱의 태도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하고 있는 차였다.
그가 아무리 블랜더라고 하나 정말 자신을 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왜 사람을 죽인 적 없다는 거짓말을 했는진 몰라도 정욱의 표정에서 왠지 살기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초록색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상황을 조용히 살폈다.
정욱이 사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저 말입니까? 누구신지?”
정욱은 남자의 위압감과 오묘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지만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의 보디가드라고 해 두지. 당분간일 테지만 말이야.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구나, 오랜만에 라힌델의 새로운 능력자를 보게 되는군.”
사내는 방긋 웃었다. 초승달 같은 눈주름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정욱의 뒤에 있던 그녀가 초록색 구슬을 손에 꼭 쥐고 소리쳤다.
“샤크튬!”
그리고 그녀의 몸은 순간 일렁거리는 것 같더니 픽 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탈출했다.
정욱과 새로 나타난 엄청난 사내가 서로 아이컨텍 하는 그 순간 과감한 도주를 가행했던 것이다.
“어라? 저런 걸 가지고 있었어?”
사내는 의외라는 듯 정욱의 뒤쪽으로 시선을 두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욱도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런 일이. 그냥 사라져 버린 거야?’
“풋내기라서 천천히 처리하려고 놔뒀더니 저런 구슬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꽤 폼 좀 잡는 놈이 뒤를 봐주고 있나 보군. 건드리면 골치 아플 뻔했어.”
그녀가 사용한 구슬은 초록 구슬이었다.
초록 구슬은 능력자가 원하는 모든 곳으로 공간 이동을 가능케 하는 구슬이었다.
붉은 구슬과 같이 혼돈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능력자들의 비밀 조합인 ‘카챤터스’에서 제작해 거래하고 있는 일회성 ‘아티팩트’였다.
기본적으로 카챤터스에 출입할 수 있는 능력자는 어느 정도 높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능력자다,
그렇기에 초록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능력자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사내는 다시 정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꼬마야, 전생에 네 업보가 무엇인진 모르겠다만, 이 저주받을 내기판에 발을 들이게 된 걸 환영한다.”

***

나뭇잎이 다시 한 번 우수수 떨어졌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라이터 불이 담배 끝에 옮겨 붙는다.
사내는 정욱의 옆에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연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뱉은 후에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발견을 못했다는 거군. 역시 예언자 녀석이 너네 집에다 손을 써 둔 모양이야.”
정욱은 벤치에 기대어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 가끔 말을 할 때만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담배 연기가 하늘로 뭉개지며 정욱의 코끝에서도 아른거렸다.
그는 정욱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담배 피워?”
“아, 예.”
정욱은 그에게서 담배 한 개비를 받아 들고는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나 라이터를 켜기도 전에 정욱의 담배 끝에서 연기가 솔솔 흘렀다.
불이 붙은 것이다.
“어떻게?”
정욱은 짐짓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쥐고는 정욱의 담배를 겨냥한 채 씨익 웃고 있었다.
그리고 총탄구를 후― 부는 시늉을 하더니 손을 내려 접었다.
“훗, 놀랄 것 없잖아. 너도 좋은 걸 가졌을 텐데 뭘.”
‘능력을 말하는 건가?’
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 연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쪽 예언자 녀석이 너희 집에 결계를 쳐 놓은 모양이야. 혼돈들과 능력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결계요?”
“안전한 거지.”
예언자는 그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가 있다.
정욱이 집에 쳐 놓았다는 결계도 그 예였다.
어쩌면 정욱에게 날아오는 문자메시지의 근원도 예언자의 능력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예언자는 자기 쪽 능력자가 생기자마자 그를 관리할 수 있는 ‘오버시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 그럼 그것 때문에.’
‘결계라는 것 때문에 혼돈들이 자신의 집 주위에서 얼쩡거렸을 뿐 덤벼 오지는 않았다는 던가?’ 하고 정욱은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선 신의 냄새를 맡고 가까이선 시각 정보를 읽는 혼돈들이 정욱을 찾지 못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그 안에 있으면 당분간 안전하겠군. 그런데 이름이 뭐였지?”
“정욱. 김정욱이라고 합니다.”
“난 천하연이라고 한다. 이래 봬도 나이 서른이야. 반말하는 데 불만 없지?”
“아, 예. 편하게 하세요.”
마치 동네 불량한 형을 만난 기분이다.
그는 정욱을 대함에 거침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을 편하게 하고 왠지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정욱은 먼저 말을 걸진 않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방금 만난 사이임에도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익숙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연이 다시 말했다.
“편하게 정욱이라고 부를게. 그런데 아까 전에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가만히 내버려 뒀어?”
“그 여자 분이요? 아, 조금 다치셔서 봐주고 있었어요.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지만.”
“그래? 그게 가능해?”
‘가능하냐니?’
정욱은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천하연이 다른 신의 능력자를 놓친 것에 대한 질책을 하려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