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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1권(8화)
3. 신들의 내기(2)


아직 정욱에겐 낯설지만 그에겐 당연한 작업일 수도 있었을 테니.
“아니 뭐…… 가능하다긴보단 여자 분이 다치셨으니까.”
“그래? 그거 이상하네. 난 보자마자 죽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거든.”
순간 정욱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
하연이 그런 정욱의 표정을 읽고선 곧바로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야. 나도 능력이 생기고 한참 후에 깨달은 건데, 우리 능력자들은 상대 능력자들을 만나게 되면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오르지. 그게 바로 이 신들의 내기의 룰이니까.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의 본능마저도 어느 정도 컨트롤 해 두었다는 거야. 아마 그 여자도 다치지만 않았으면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너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었을걸? 음, 너같이 능력을 처음 접한 사람이 상대 능력자를 보고 덤벼들기는커녕 도움을 베풀 수 있기는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게 신기하다는 거야. 절제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넌 아직 그런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껴 보지 못한 건지.”
정욱은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혼돈을 상대할 때 느껴졌던 알 수 없던 분노였다.
하연은 혼돈에게 무작정 덤벼들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분노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는커녕, 한눈에 반할 뻔하지 않았는가.
하연은 계속 말했다.
“아무튼 내가 널 먼저 찾았으니까 넌 이제 나와 같은 길을 걸어 줬으면 해.”
“같은 길이라니요?”
“음.”
하연은 다 태운 담배를 발로 짓이겨 끄고 정욱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음, 그러니까 말하자면 라힌델의 예언자 편에 서자는 거야.”
하연의 말에 의하면 신들의 내기는 아주 냉정한 것이어서 같은 신을 섬기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단 한 명만이 최후에 살아남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도 규칙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각각 신의 가호를 받고 능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예언자를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똑같이 구원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바보처럼 예언자에게만 묶여 있기엔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구원이 불확실한 것을 감안한다면 예언자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잃는 것이 많았다.
차라리 각 신들의 예언자로부터 떨어져 나간 능력자들은 각자 최후의 일인으로 남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하연은 예언자 편에 붙어 있는 능력자들 중에 한 명이었다.
예언자는 능력자들이 그를 저버렸을지라도 같은 신의 능력자들에게 좋은 정보와 간접적 도움 등을 줄 수가 있다.
하지만 정작 예언자 자신을 저버린 이들에게 그런 도움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하연은 예언자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능력자들을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최후의 일인만이 내기에서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아니 나뿐만 아니라 예언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고 있지. 다수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예언자가 그렇게 말했거든. 그는 특별한 존재야. 신과 연결된 존재지.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있는 거야.”
하연은 차분하게 정욱에게 설명했다.
앞으로 정욱의 결정에 따라 정욱은 능력자로서 두 가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연을 따라 예언자의 편에 서는 것과, 홀로 독립하는 것.
하지만 정욱은 좀처럼 실감이 나질 않았다.
구원 따위 안 받으면 어떻고 그냥 이렇게 살면 어떻겠는가.
정욱 자신은 능력자들에 대한 눈곱만큼의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하연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런 정욱의 생각을 읽었는지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강요는 안 할 테니, 선택을 네 몫이야. 우리와 함께 다른 능력자들을 모아 다수의 구원을 노리느냐. 아니면 혼자 살아가느냐. 그렇게 된다면 우린 언젠가 적으로 만나겠지. 이 두 가지 선택을 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신들의 내기에 속한 이상 신들은 어떻게든 너를 싸움에 말려들게 할 테니까. 유감스럽지만 이제 인간적인 생활이란 건 물 건너갔어. 살인, 죽음이란 단어와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당분간은 너희 집, 그러니까 결계 안에 있는 게 좋을 거야. 이미 네 위치는 아까 그 여자 때문에 노출되었으니까.”
하연은 정욱에게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담배 하나를 손에 꼬나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

소연은 말끔히 샤워를 하고 소파에 몸을 기대어 쉬고 있는 중이었다.
낮에 있었던 상황을 돌이켜 보면 끔찍했다.
‘그 정도 능력의 블랜더를 만나다니.’
소연은 자신만의 노트를 꺼내어 찬찬히 훑어보았다.
혹시 기록해 두고 잊어버린 정보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수많은 능력자의 특성과 이름이 노트에 적혀 있었지만 정작 낮에 소연이 보았던 능력자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블랜더는 그렇다 쳐도 그 뒤에 나타난 사내가 더 가관이었다.
엄청난 기운이 그 사내의 주변에서 아우성 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짙은 살의를 느꼈다.
만약 그 사내가 자신에게 초록 구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사내는 일단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기운을 기억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연은 얼른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찍었다. 이윽고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급한 일이 생겼어. 얼른 우리 집으로 와 줘.”
소연은 유일한 아군인 박철웅에게 호출했다.
소연과 철웅은 모두 바르사르의 능력자였다. 그리고 둘의 뜻이 맞아 예언자의 눈을 피해서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철웅은 소연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소연과는 달리 경력 있는 능력자였던 철웅은 가공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둘이 예언자의 무리를 빠져나와 사냥한 능력자의 수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정당한 일대일의 싸움이 아니었던 터라 능력은 빼앗지 못하였지만 그 정도의 경험으로도 소연은 이 ‘신들의 내기’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강한 천성의 소유자였다.
빠르게 현실을 직시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눈앞에 피가 튀는 전투가 벌어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제는 담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이토록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만난 그자들의 기운을 가늠해 본다면 아무리 철웅이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철웅이 집에 도착하는 즉시 카챤터스에 연락할 결심을 하였다.
현재로선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듯싶었던 것이다.



4. 카챤터스(1)


소연은 수많은 인파들을 헤치고 서울의 어느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에는 190센치는 족히 되어 보일 거한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철웅이었다.
덩치도 큰데다가 검은 정장까지 입고 있어서 철웅의 인상은 더 험악해 보였다.
남자답게 각진 턱에 수염이 무성한 덩치 큰 사내를 보고 사람들은 길을 비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연과 철웅은 카챤터스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오른쪽으로 꺾어.”
철웅이 뒤에서 소연에게 방향을 일러 주었다.
소연은 주머니에서 철웅이 구해 줬던 초록색 구슬을 꺼내 들었다.
오른쪽으로 몸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자 웬 허름한 카페가 보인다.
불이 꺼져 있고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폐쇄된 카페였다.
소연은 언제부터 걸려 있었는지 모를 Closed라는 팻말 앞에 섰다. 철웅은 소연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슬쩍 신호를 보냈다.
“샤크툼.”
소연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은 팟―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나타난 곳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카페’였다.
아까 밖에서 보았을 카페였다.
Closed라는 팻말이 철통같이 걸려 있었지만 초록 구슬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렇듯 엄청난 실내와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카챤터스였다.
철웅은 이제 자신이 앞서서 나가며 말했다.
“이제 내 뒤 따라와. 사람들 눈 쳐다보지 말고.”
항상 카챤터스에 들어서면 철웅이 소연에게 하는 말이었다.
절대 사람들과 엮일 만한 행동은 하지 말 것.
카챤터스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능력자들의 능력은 봉쇄된다.
능력자들이 혹여라도 서로의 신경을 건드려 다툼에 휘말리게 되면 카챤터스를 벗어나서 언제라도 자신이 사냥감으로 지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챤터스 안에서는 안전하다.
카챤터스가 신의 성지에 지어 놓은 카페라고 불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카챤터스는 모든 능력자들의 중립 장소다.
분명히 신이 개입했을 장소라고 생각되어지는 이 카챤터스에서 능력자들은 은밀한 정보와 아티팩트를 거래하기도 한다.
카챤터스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능력의 구슬과 아티팩트는 품질이 괜찮았다.
어느 정도의 명성이 있어야만 카챤터스의 상인들이 거래를 해 준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곳은 완벽한 능력자들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능력자들이 이 카챤터스에 있었지만 그들은 멍청하게 이곳에서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
카챤터스의 마스터는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진 아무도 몰랐지만 그가 구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은 유명했다.
그는 능력자들의 힘의 조율과, 그들이 좀 더 정보적으로 싸울 수 있고 효과적으로 내기를 이끌고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항간에는 그가 신의 신체 능력을 부여받은 최강의 능력자들인 ‘쥬히뎀’ 중 하나라는 말도 있었다.
철웅은 소연을 이끌고 맥델런을 찾아 사람들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철웅은 과감하게 사람들을 이리저리 옆으로 밀쳐 내며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카챤터스에서 당당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능력자들은 철웅이 걷자 조금씩 길을 비켜 주는 등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선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다.
철웅의 입지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윽고 낡은 갈색 문이 철웅 앞에 나타났다.
맥델런의 방이었다.
맥델런은 카챤터스의 정보상인이었다. 그는 능력자들에 관한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카챤터스에서 오랫동안 정보상인인 동시에 모든 상인들에게 지휘를 내려 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철웅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머리숱이 없는 흑인이 철웅을 바라보았다.
아프리카 사람인 맥델런은 철웅에게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비록 영어를 모르는 철웅과 소연이었지만 맥델런의 옆에 있던 그의 조수가 파랑색 구슬을 튕겨 주자 모든 언어가 의미적으로 전달되어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철웅. 웬일인가?”
“소연이 자네한테 의뢰할 것이 있다더군.”
철웅의 뒤에 있던 소연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당당한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에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최근에 만난 능력자들로부터 내 기운을 지우고 싶다. 나에 대한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대가는?”
맥델런은 망설임 없이 대가를 불렀다.
원래 같으면 소연 정도의 능력자 따윈 카챤터스에 출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초록 구슬을 구매하지 못한다.
더욱이 상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철웅이 앞으로 나서서 몇 개의 구슬이 든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노란색 구슬들이었다.
강력한 혼돈을 죽인 뒤 나타나는 노란 구슬은 카챤터스의 상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았다.
그것으로 아티팩트를 만들고 구슬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